붉은 손가락 현대문학 가가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의 필력은 대단하다고 혀를 내두르게 된다. 최근 읽은 책 중 3시간이란 최단기간을 기록한 책이 되었다. 새벽 4시, 단숨에 다 읽어버릴까 했지만 마지막 남은 몇페이지의 반전을 아껴두고 싶다는 생각에 힘겹게 눈을 감았다. 아침햇살에 묵직한 눈꺼풀을 올리며 책의 남은 페이지를 마저 읽었다. 그리고 한참을 반전의 뜻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됐다. 그의 책은 그런 묘한 힘이 있다. 마치 블랙홀처럼 대책없이 빨려간다고 할까. 
 

책을 읽는 행위는 내게 책의 표지와 제목에서 받은 첫인상과 짐작, 선입견을 무참히 깨는 것이다. 줄거리는 대충 알고 읽었지만 역시 붉은 손가락이 의미하는 것은 내가 멋대로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달랐다. 물론 사건의 중요한 열쇠가 된다는 건 분명하다. 아무튼 그런 일련의 생각들을 밀쳐두고 마지막장까지 눈을 뗄 수 없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의 수많은 작품 중에 유난히 현대사회 가족의 문제를 사건의 중심에 놓고 진실에 다가가는 이야기들이 좋았다. 조금 뒤틀리고 불안하게 흔들리는 이 시대 가족이 충격적인 사건을 겪으면서, 한순간 전복되버릴 위기에도 유기적으로 얽히고 서로의 진심에 다가가려는 노력은 일말의 희망을 남겨둔다는 면에서 단순 추리소설을 뛰어넘는 드라마적 감동까지 더하기 때문이다.


이 책도 그런 의미에서 요즘 현대사회, 옛날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으로 만들어진 한없이 가벼운 가족이란 울타리가 얼마나 허술한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집안일은 나몰라라 부인에게 떠맡긴 채 겉도는 아빠 아키오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오냐오냐하며 키워온 엄마 야에코, 오래된 학교내 집단따돌림으로 삐딱하게 커버린 중3아들 나오미. 큰 일이 생겼다는 야에코의 전화에 회사에서 급히 달려온 아키오는 집정원에서 7살짜리 여자아이의 시체를 보게 된다. 아들 나오미의 짓이라는 사실에 분노하며 경찰에 알리려는 아키오를 부인 야에코가 막아서고, 절대 아들에게 자수시킬 수 없다는 그녀의 간곡함에 아키오는 사체를 근처 공원에 유기한다. 그 뒤 분명히 자신의 가족에게 피해갈 수 없는 경찰의 압박이 다가올 것임을 아는 아키오는 사람이라면 결코 저질러서는 안 될 계획을 세우게 된다.


나는 아키오의 계획에 간담이 서늘했다. 어떻게 사람이 그런 비도덕적인 만행을 저지를 수 있는가하고 말이다. 아무리 가족을 지키기 위함이라지만 인륜을 저버린 그의 계획에 절대악이란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너무도 평범하고 흔한 중상층 가정의 전형인 아키오의 가족이 그런 험악한 상황에서 괴물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현실적으로 묘하게 설득력을 가지기 때문에 섬뜩하게 다가온다. 가족이란 끈끈한 집단의 이기심이 빚어낸 참극 앞에 내 가족과 주변 가족의 모습은 어떨까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그리고 신문의 사회면을 하루도 빠짐없이 장식하는 우리 시대 가족의 추악한 진실은 가족을 벗어나 사회전체의 문제까지 환기시킨다. 적어도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는 그들의 내면에 일어나고 있는 미세한 균열에 누구보다 가족구성원 서로가 관심을 가져준다면 이같은 불행은 닥쳐오지 않을 것이다. 


묵직한 주제를 떠나 히가시노 게이고의 수많은 책 중 가장 맹활약하는 가가 교이치로 형사의 활약이 돋보인다. 뛰어난 관찰력과 추리, 논리적인 상황판단으로 가가형사는 사건의 전개를 더욱 흥미진진하게 한다. 형사로서 냉철한 이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세심한 배려로 피해자나 가해자를 배려하는 모습은 아, 정말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이구나하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기존의 추리소설에서 봐왔던 권위적인 형사나 독자를 가지고 노는 탐정들에게는 볼 수 없는 인간미가 뚝뚝 떨어지는 가가형사의 진면목을 새삼 발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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