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의 이해
JAMES M.O'TOOLE 지음, 이승억 옮김 / 진리탐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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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학이라는 학문은 한국에서 아직 낯선 분야이다. 심지어 공공부문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기록학을 단순히 서류를 편하게 정리하는 방법으로정도만 여기고 있다. 하지만 기록학은 인류가 남긴 기록이라는 유산의 효율적인 보존 관리를 통해 역사라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중요한 학문이다. 하지만 이런 기록학에 대해서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책을 찾기는 힘들다. 기록학의 고전에 해당하는 쉴렌버그의 '현대기록학개론' 이 번역되어 있기는 하지만 개설서라기 보다는 전문 기록관리인을 위한 이론적 지침서의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록의 역사, 기록을 하는 이유, 기록관리의 역사 등의 제문제를 폭넓게 다루고 있는 SAA 기록학 기초시리즈의 하나인 이 책은 기록에 대해 알고자 하는 사람이나 기록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학생에게 아주 유용한 입문서의 역할을 한다. 

책은 기록학의 방법론만을 다루고 있지 않다. 1장 정보의 기록 관리 활용에서는 구술시대부터 시작한 인류의 기록의 역사를 살피고 있다. 구술기록에서 문자기록으로 기록의 형식이 바뀌면서 인간의 '기억'보다 '기록'이 더욱 중요한 법적 증거로 받아들여졌으며 정부조직이 탄생하게 됨에 따라 문서 하나하나의 의미보다 전체 문서의 '문맥'이 중요해졌다고 설명한다. 기술적인 변화에 따른 기록의 변화도 주목할만 하다. 종이의 발명은 기록의 양을 비약적으로 중가시켰으며 인쇄는 지식의 대중화를 이끌며 기록의 양상을 바꾸어 버렸다. 

"이러한 모든 발전은 잔지 현상적으로 생산기록의 분량이 늘어났다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기록 그 자체의 성격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수천 장의 사본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유사해 보이는 것들 중 어떤 것이 원본인지 모호해졌지만 의문점은 그러한 것이 문제가 되기나 하는가 하는 점이다." -p.36

여러가지 기록보존 기술의 변화도 기록의 변화를 이끌어냈다. 사진의 발명은 M/F 기술을 가능하게 했지만 기록의 원본성에 의문을 던졌으며 전화의 발명은 기록의 생산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었다. 

저자는 이러한 현대 기록물의 특징으로 너무나 많은 기록의 양, 집합적으로만 의미를 갖는다는 점, 기록의 분권화와 민주화, 기록의 사회적 속성을 갖는다는 점을 들고 이러한 현대 기록물을 다루는 아키비스트는 기록이 "특정한 쓰임새는 변화될 수 있으나 개인적 그리고 사회적 차원의 유용성을 계속유지되는 것이다. 아키비스트가 기록을 조직하고 관리하는 방식은 언제나 이 같은 유용성을 염두에 두고 행해져야 한다" -p.45 고 충고한다.  

2장은 기록관과 기록전문직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현대 기록관리가 탄생한 프랑스의 기록관리 역사, 공공기록관리전통(Public records tradition)과 역사기록관리전통(Historical manuscripts tradition)을 기반으로 한 미국의 기록관리 역사를 서술한다. 역사적, 사회적 맥락이 다른 외국의 기록관리 역사이지만 프랑스는 현대적인 기록학이 탄생한 국가라는 점에서, 미국은 현재 한국 기록관리의 모델이 되고 있는 국가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3장과 4장은 각각 아키비스트의 지식과 가치관, 책임과 의무를 다루고 있다. 저자는 아키비스트는 개인, 조직, 제도에 관한 지식, 기록 그 자체에 관한 지식, 기록 이용에 관한 지식, 기록관리 원칙에 관한 지식을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키비스트의 책임과 의무에서는 기록 생애주기(life cycle)을 토대로 각각의 영역에서 아키비스트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서술하고 있다. 대체적으로 슐렌버그가 주장한 출처주의의 원칙(provenance)과 원질서 존중(Original order)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기록을 지적으로 정리하는 일은 아키비스트 개인의 성향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비록 분명하지는 않지만 컬렉션에 자연적으로 내제해 있는 질서를 발견하거나 재구성함으로써 이루어진다" -p.115

'기록의 이해'라는 제목이 말하고 있듯이 이 책은 기록에 대해 쉽게 이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기록학의 세세한 방법론 등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기 힘들다. 하지만 기록학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원칙, 기록학의 역사 등을 두루 다루고 있다. 기록이라는 것은 접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읽어볼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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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유럽산책 한길 히스토리아 9
아베 긴야 지음, 양억관 옮김 / 한길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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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世라는 단어는 경멸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역사에는 古代와 近代가 존재하는데 中世는 그 사이에 낀 별다른 의미를 갖고 있지 않는 시대라는 뜻이다. 하지만 중세는 결코 암흑으로 뒤덮힌 시대가 아니었다. 근대의 중요한 제도, 문화 등은 중세의 연장선에서 만들어진 것이지 어느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중세의 변화를 바라보는 데에는 많은 시각이 존재한다. 이 책의 저자는 여기에 더해 중세인들의 우주관의 변화를 변화의 원동력으로 파악한다. 고대에는 인간의 힘이 미치는 소우주와 인간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대우주라는 두개의 우주가 있다고 인식하였는데 그리스도라는 유일신을 바탕으로 한 기독교가 유럽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면서 하나의 우주관이 확립되었다는 것이다. 중세의 많은 모습들은 이러한 우주관의 변하에 디인한다고 설명하는데 반인반수 등의 괴물은 중세인들이 여전히 두개의 우주관을 고수했다는 점을 드러내는 것이고, 피차별민에 대한 입장변화는 우주의 경계에 선 자들에 대한 인식이 변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설명한다. 

요즘 역사연구에서 주목되고 있는 어린이, 부자와 빈자, 대학 등 미시적인 생활영역에 대해서 풍부한 도판과 함께 해설하고 있어 중세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가 부족한 일반인들도 흥미를 갖고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중세인들의 삶을 들여다봄으로써 중세가 어둠으로 뒤덮힌 세계가 아니라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이 살았던 구체적인 생활공간임을 이해할 수 있다. 어린이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설명하는 장에서는 어린이는 근대 부르주아 가정의 발명이라는 아리에스의 설명을 거부하고 어린이에 대한 관념과 특별한 인식이 중세부터 존재했음을 주장한다. 

저자는 중세유럽인들의 망탈리테를 밝히려는 것을 책의 목적으로 삼고 있다. 두개의 우주가 하나의 우주로 변하는 것은 분명 중세인들의 망탈리테에 많은 변화를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그것만이 중세인들의 삶을 규정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중세유럽의 이해하는데 이 책은 많은 도움을 주고 있지만 이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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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을 다시 만들자
헨리 페트로스키 지음, 최용준 옮김 / 지호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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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학이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거대한 건축물, 바다를 가로지르는 다리 등이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공학자들의 열정, 끈기, 창의성 등이 공학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이 책의 저자도 공학에 있어서의 그러한 면들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모든 위대한 공학적 업적 뒤에는 도저히 가능할것 같아 보이지 않는 것들을 시도하고, 실패하고, 결국에는 이루는 공학자들의 열정이 숨어있다. 공학에 있어서의 진보는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공학이라는 분야를 통상 과학과 함께 말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한다. 과학이 이미 존재하는 세상이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노력하는 것에 비해 공학자는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내려고 애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공학은 과학의 업적을 이용하는 단순한 기술이라는 인식은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저자는 증기기관의 발명이 열역학 이론의 연구를 이끌었듯이 많은 공학은 과학적 기반이 없이도 이루어졌으며 과학은 그것을 보완하고 발전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과학과 공학을 엄밀히 구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과학이 순수한 학문적 열정을 기반으로 하는 학문임에 반해 공학이란 모든 사회적 이해관계가 반영된 결과라는 인식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공학이란 처음부터 사회적 필요성에 의해 시작된다. 고층빌딩은 토지를 좀더 효울적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반영된 결과이며, 거대한 배는 많은 물자를 효율적으로 운반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필요가 만들어낸 결과이다. 공학의 결과물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사회적 이해관계가 반영된다. 초음속 여객기가 상용화되지 못했던 것은 기술적인 결함이 있어서가 아니라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버댐이 건설된 이유도 단순히 기술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실업을 구제하겠다는 정치적인 의도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며 댐의 건설과정, 심지어 댐의 이름을 정하는 과정에서도 많은 정치적 이해관계가 반영되어 있었다. 저자가 이렇게 공학이 사회적인 이해관계를 반영하고, 또 공학적인 업적이 사회를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설명하는 것을 통해 독자는 공학이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우리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하나의 사회적인 요소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는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학적인 논쟁들이 과학자나 공학자들만이 참여할 수 있는 논의가 아니라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인것임을 일깨워주고 있다. 

저자는 공학에 대한 중요한 논점들을 상기시키고 있지만 재미있는 사례들을 통해 독자가 지루해 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 물론 공학적인 면에서 일반인의 이해가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저자의 의도를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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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시대의 일상사 - 순응, 저항, 인종주의, 개마고원신서 33
데틀레프 포이케르트 지음, 김학이 옮김 / 개마고원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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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대해 공부한다고 하면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던 위인의 일생 또는 그들이 만들어 놓았다고통용되는 ‘역사적 사건’에 대해 연구하고 공부하는 것이 떠오르지 않는가. 실제로 우리가 배웠던 역사에서 주인공은 언제나 그런 ‘사건’이었다. 하지만 조금만 돌이켜 생각해보자. 역사는 그런 것들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위인들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기 위해서는 수많은 민중들의 삶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사실 위인들의 사건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도 그것이 이름 모를 민중들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그동안 역사의 무대에 올라서지 못했던 사람들의 삶이다. 이러한 경향을 역사학에서는 ‘일상사 연구’라고 부른다. 포이케르트의 이 책은 나치즘 체제와 관련된 독일 민중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연구하고 있다.

저자는 나치 시대 일상사 연구의 장점에 대해 나치의 테러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밝힐 수 있으며, 또한 저항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 졌는지, 지지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제3제국의 갈등이 어떤 식으로 확산되었는지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더해 일상사를 연구함으로써 나치를 경험하지 못한 1945년 이후의 세대에게 상심과 그에 따르는 민주적 참여를 유도해 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와 더불어 새로운 역사학 방법론을 제시하고 그것의 장점을 피력한다는 면에서도 커다란 의의를 갖는다.

나치의 제3제국을 바라보는 가장 전형적인 시각은 근대의 단절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나치가, 근대의 병폐를 해결한다는 슬로건, 선동에 있어서 ‘피와 흙’으로의 복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순수한 아리아인에 대한 찬양 등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기본적으로 이것이 근대는 민주주의, 자유,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한 풍요 등을 가져오는 역사의 진보라는 환상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비판한다. 결국 나치는 그런 요소들을 결핍하고 있었기 때문에 근대의 단절이라는 것인데, 미셸 푸코의 논의를 빌려 근대를 인간을 순응시키고 억압하는 구조를 가진 폭력적이고 규율적인 사회로 제규정한다면 나치는 바로 근대의 병리를 가장 전형적으로 드러낸 사회일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정의를 사용한다면 우리가 그동안 갖고 있었던 나치 정책과 그에 대한 독일 민중의 반응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 볼 수 있게 된다.

먼저 나치당의 가장 큰 지지기반이었던 중간계급의 지지를 설명한다. 그들은 나치가 선전했던 민족공동체의 건설이라는 초계급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강령에 대해서도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나치를 지지했던 근본적인 원인은 나치가 바로 중간계급이 느끼는 사회적 불안감을 해소시켜 준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나치는 실제로 중간계급의 요구대로 일자리를 창출하고, 산업을 부흥시켰으며 자본이 못마땅하게 여겼던 노동조합을 파괴했다. 그 방법과 수단은 지극히 근대적인 것이었다. 중간계급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혼란을 나치가 해결해주었다고 생각했으며, 제3제국 시절 경제지표를 보면 실제로도 경제가 발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나치는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를 자리매김하고 싶어 했던 많은 중간계급에게 당의 간부직 등을 나누어 주었다. 이러한 나치의 정책에 대해 중간계급은 좌파에 대한 테러, 유태인 학살 등을 묵인해주었고 지지하기도 하였다. 물질적 풍요를 향한 중간계급의 욕망은 나치체제의 가장 강력한 지지기반이었다.

노동자 집단은 나치의 가장 지속적인 박해를 받은 집단이었다고 서술한다. 그들은 다른 계급들과는 달리 나치에 대해 적극적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 독일의 좌파가 오랜 뿌리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치는 근본적으로 노동운동을 불허하는 등의 중간 계급적 성격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동자들은 나치에 대해 조직적인 저항을 계속하지는 못하였고, 시간이 지날수록 나치체제에 적응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나치가 주도했던 산업의 육성, 노동에 대한 찬양 등의 효과로 실질적인 노동자의 임금인상, 복지혜택 등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것을 노동자들은 나치 체제의 긍정적 효과로 이해하였다. 그 결과 제3제국 초기에 존재했던 조직적인 저항은 사라지게 되었고 단지 근무를 태만히 한다거나 비판적인 농담을 주고받는 등의 소극적인 저항행위만을 하게 되었다. 연대는 파괴되었고 개인의 이익이 우선시 되었다. 그것은 나치가 의도했던 바였고, 근대 산업사회의 대 자본이 원하는 바였다.

저자는 나치체제하의 청소년을 통해 나치 체제의 근대적인 성격-근대가 규율화 된 인간의 탄생이라는 억압적 프로젝트를 수행했다는 것과 나름대로 인간의 진보에 기여했다는 주장-과 전통적 성격의 복합성을 가장 잘 분석하고 있다. 또한 청소년들 스스로도 이중적인 행태를 보여주는 집단이라고 말한다. 청소년들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을 규율화하고 군사화 하여 나치에 적합한 인간으로 만들려는 시도에 대해 저항감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가부장적이고 전통적인 가정생활과 학교에 억매여 있었던 그들에게 나치가 제공하는 청소년 활동은 근대적이고 해방적인 성격을 갖는 활동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히틀러청소년 단은 일종의 대항적 권위로 작용 했으며 해방의 동력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특히 소년들의 경우 자신들에게 한정되어 있던 가사나 육아의 의무에서 벗어나 다양한 사회 활동을 가능하게 해주는 역할도 해주었다. 나치의 청소년 정책은 정반대의 방향에서도 영향을 주었다. 나치의 청소년 정책에 반항했던 일군의 청소년 들은 자신들의 사조직을 만들었다. 에델바이스 해적은 주로 자유 시간을 가지며 소일했고 자유를 갈망했다. 그들은 사회적 규범에 대한 반항이라는 자신들의 일탈을 나치라는 체제에 대한 반항으로 연결시켰다, 비록 정교한 정치의식을 갖고 있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규율화 된 인간을 목표로 했던 나치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이었다. 모이텐은 주로 젊은 노동자 집단이 주축이 되었으며 다른 청소년 단체와는 달리 계급의식에 기초한 정치적 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일반적인 노동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나치에 저항하였고 게슈타포는 이를 철저하게 탄압했다. 스윙재즈 단은 다른 청소년 조직과는 다른 특징을 보였다. 그들은 정치적 의식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오히려 지극히 비정치적 이고 문화적인 일탈을 주도하였다. 그들은 일상생활의 영역에서 나치에 도전하였으며 나치는 그것을 철저하게 탄압했다.

저자는 다양한 비 나치적인 청소년 활동에 대해 나치가 강력하게 청소년들의 일상을 규율하려고 하였지만 결코 완전한 규율은 할 수 없었으며, 제3제국이 패전으로 몰락하기 이전에 이미 나치의 공식적인 두 목표가 실패하였다고 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소년들의 근대적인 여가활동의 기반을 닦은 것은 나치즘이었다고 지적하며 나치가 근대의 연속이라는 주장을 강화한다.

나치가 저질렀던 가장 대표적인 만행으로 기억되는 유태인 등에 대한 홀로코스트도 우리의 상식과는 다르게 근대의 병리를 드러내는 사건이라고 설명한다. 나치는 모든 인간을 규범화하고 분류하기 위한 평가기준을 제공했다. 유태인은 ‘최종적 해결’의 대상이었고, 자신들의 행위가 유럽의 인종주의적 해결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모든 인종적 문제의 ‘해결’에 있어 과학적이고 근대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그들에게 있어 모든 행동은 정확히 계산되고 예측 가능한 합리적인 행위였다. 인종을 구분하는 것은 사회적인 규범의 완성이었다. 모든 인간을 교육 가능, 불가능한 인간으로 분류하여 범주화하였으며 그러한 범주화는 일상생활의 관찰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관찰의 결과는 유전학적기준을 개인에게 과학적으로 적용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사회적 선택의 개념과 연결되었다. 심리학과 인류학 연구의 오랜 전통은 그것을 뒷받침 해주었다. 따라서 그들은 인종정책에 있어서의 “과학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

광범위한 대중의 열광으로 이루어진 나치체제는 일상적인 동원과 이데올로기의 선전으로 유지되는 체제였다. 하지만 이러한 ‘민족공동체’라는 선전은 외관에 불과한 것이기도 했다. 운동, 대중행사와 조직을 통해 체제의 동력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그것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점점 시들어져갔고 그 빈 공간을 나치는 대중적이고 비정치적인 문화로 채웠다. 예술가들은 나치의 요구에 맞는 소비적이고 정치적이지 않은 대중문화를 생산하였다. 대중들은 점점 그러한 소비적인 문화에 길들여져 갔다. 그러한 대중의 모습은 나치가 원했던 정상상태였으며, 근대 산업사회가 요구하는 표준화된 인간이었다. 이것이 저자가 지적하는 나치 근대성의 또 다른 단면이다.『우리안의 히틀러』에서 막스 피카르트는 바로 이렇게 사회적인 맥락을 상실하고 물질적인 문화에 물든 인간의 내면을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가 출현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로 설명하기도 하였다. 물질적인 결과에 집착해 수단의 적절성을 망각해버리고 국가가 제공하는 비 정치화된 오락에 탐닉하는 대중은 바로 나치의 기반이자 결과라고 볼 수 도 있을 것이다.

저자는 나치체제가 드러내는 근대성에 주목해서 제3제국을 분석하고 있지만 나치체제의 본질은 저자도 적시하고 있듯이 전통과 근대, 저항과 순응, 질서와 혼란, 정치와 비정치가 섞인 복합성이었다. 이것은 나치체제를 회색지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정교하게 바라보는 방법이다. 나치는 대중들에게 피와 흙의 복권, ‘죄악’의 아스팔트 정글의 파괴를 약속했지만 공업을 부흥시키기 위해 전통적인 수공업을 무시했다. 나치즘은 그들이 지향하는 목적에서 반동적인 성격을 갖지만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있어서는 근대적인 혁명을 수행하였다. 자신들의 혁명에 방해가 되는 인간은 질서의 유지라는 이름으로 무참하게 테러를 가했다. 유태인, 집시, 동성애자 등은 그렇게 질서의 유지라는 목적으로 학살되었고 독일의 대중은 나치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집에 문을 잠그지 않아도 되었던 시절이라는 기억으로 나치에 대한 소극적인 지지를 표명했다. 일상사가 바로 그동안의 연구와는 다르게 체제가 대중의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주목하고 연구하는 것도 이렇게 모든 사람이 저항 아니면, 순응을 했을 것이라는 이분법적 인식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많은 독일의 대중들은 마음속으로는 강도 높은 노동과 일상적인 나치테러기구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민족적 감성으로 나치의 대외정책과 전쟁에 대해서 지지를 보냈다. 결과적으로 대중은 독일이 패전에 다다를 때까지 단순한 불평불만은 가지고 있었지만 나치가 가져온 사회·경제적 변화에 대해서 신뢰하고 있었다. 특히 히틀러라는 지도자에 대해서는 그 어떤 사회적인 불만도 연결시키지 않고 총통이 알았다면 문제가 없었을 것으로 또는 총통과는 상관없는 것으로 인식하며 총통신화를 만들었다. 그것은 결국 나치라는 체제에 대한 동의를 밑바탕을 형성했다.

저자는 일상사의 방법으로 나치체제하의 독일 대중을 분석하고 있지만 이 책은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먼저 아직도 한국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근대에 대한 무조건적인 열망을 비판적으로 사유할 수 있게 한다. 자연을 개발하고 물질적으로 풍요하게 되는 것, 근대적 교육을 받는 것은 인간의 진보라는 직선적인 역사관은 저자가 지적하고 있듯이 많은 폭력을 포함하고 있다. 히틀러의 나치는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근대의 긍정적인 성과를 인정하되 근대가 가지는 여러 가지 폐해를 차분히 성찰하는 것이다. 나치가 표면적으로는 근대의 폐해를 전통으로의 회귀를 통해 해결하겠다고 한 것은 과연 우리가 근대가 가지는 모순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도 비판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게 해준다.

피지배 대중의 양상을 저항과 순응이라는 이분법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일상사 연구가 첨예한 대립이 존재했던 시대를 회색지대로 만들어 그 누구의 책임도 물을 수 없게 한다는 비판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어떠한 역사학 방법론도 비판점은 있을 수 있다. 일상사의 방법은 우리가 가지는 역사적 경험에 대한 분석을 좀 더 다양하고 풍요롭게 해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한국 일상사 연구가 발생한 지점이라고 할 수 있는 식민지 연구에 있어서는 피 식민지의 주체성을 읽어내고, 지배자의 정당성과 연결하는 작업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또한 신체적 폭력의 구체적 작동과 폭력으로 인한 지배관계 형성에 관한 연구, 한국의 민족주의 담론에 대한 비판적 연구를 수행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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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제1공화국 - 해방에서 4월 혁명까지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20세기 한국사 1
서중석 지음 / 역사비평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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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말이지만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현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를 수반한다. 따라서 오로지 객관적이고 공정한 시각으로 역사를 서술했다고 하는 것도 사실은 현재의 정치적 맥락에 상당한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이런 시각에서 파악하자면 객관적 서술을 장점으로 내세우는 이 책도 사실은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견지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반드시 부정적인 의미만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분명 저자의 특정한 시각이나 해설이 주를 이루는 책은 아니다.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였고 발간사에 나와 있는 것처럼 해석은 가능한 독자의 몫으로 남겨 놓았다. 이런면에서 보자면 분명히 객관적인 서술이라는 장점을 내세울만 하다. 그렇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한국사회에서 특히 근, 현대사를 말 그대로 객관적으로 서술한다는 것은 상당히 '정치적인'행위일 수 있다. 그동안 한국에서 기득권을 가진 자들은 자신들의 입맞에 맞는 역사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반공이데올로기에 부합하지 않는 공산주의자들의 독립운동이나 한국전쟁에 대한 전향적인 해석을 독재정권은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막으려고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말 그대로 객관적인 서술은 사실은 역사에 대한 가장 주관적인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0권으로 기획된 한국사 시리즈의 첫번재인 이 책은 이승만과 제1공화국을 다루고 있다.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쓴 책인 만큼 특정한 분야를 집중적으로 다루기 보다는 대상이 되는 시대의 정치사, 사회사 등을 두루 다루고 있다. 따라서 독자는 시대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동시에 우리가 잘 모랐던 그 시대의 분위기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승만의 독재정권과 가난만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의외로 진보당의 당수인 조봉암이 국가행정권을 장악한 이승만을 상대로 워협적일 정도의 선거결과를 보였다는 사실은 이 시대 한국정치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4.19혁명에 대한 부분에서는 역사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지만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꾸는 주체인 민중의 힘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다. 책의 말미에 있는 이승만 시대와 박정희 시대의 비교연구는 이승만과 그의 제1공화국의 성격을 더욱 잘 드러나게 해준다.

현대사는 현재와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역사로서 현재를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현대사에 대한 지식은 필수적이다.앞으로 나올 책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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