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피아노와 백합의 사막
윤대녕 지음, 조선희 사진 / 봄출판사(봄미디어) / 2002년 2월
평점 :
품절
내가 좋아하는 윤대녕의 단편들 중 <상춘곡>과 함께 개인적으로 첫손가락에 꼽는 것은 <피아노와 백합의 사막>이다. 제목만 들어도 그려지는 그 알 수 없는 풍경. 존재와 진실과 추억을 찾아 실크로드라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멍 속으로 발을 내딛는 주인공의 여로와 마음의 행방을 쫓아 가는 길은 당연히도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까끌거리며 허무한 것이었다.
윤대녕의 작품집에서 이 작품을 읽으며 나는 내내 '사막, 사막'이라고 중얼거렸던 것 같다. 어쩌면 내 일생에서 한번도 가보지 못할 곳, 하지만 늘 동경하게 될 곳. 이번에 조선희 사진을 곁들여(아니 사진에 소설을 곁들여?) 한 권의 책으로 이 작품을 만났다. 신문에서 짧은 기사를 보자마자 사게 된 책. 이미 읽은 작품을 뭐 또다시 읽는다구?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다. 아주 다른 버전으로, 아주 다른 느낌으로 마치 신작인 양 아껴 읽으며 뿌듯했으니까.
포토그래퍼 조선희는 문외한인 내가 이름을 알 정도로 몇몇 잡지 화보와 광고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사진을 보여주었던 사람이다. 뭐라고 그 특징을 꼭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이야기가 있다고 할까, 인물을 찍으면 당장이라도 뭐라 말을 걸어올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사진들 말이다.
이 책에서도 사진들은 사진 그 이상이었던 것 같다. 그냥 적당하게 끼워 맞춘, 이쁘고 보기에 멋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이 작품만을 위한 사진들. 아니 작가와는 또다른 각도에서 <피아노와 백합의 사막>이라는 작품을 써내려간 사진들. 윤대녕만큼 조선희도 사막을, 존재를, 진실을 그리워했나 보다.
무엇보다 이 책은 사진과 텍스트가 따로 놀거나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지배하는 느낌이 없이 그럴싸하게 어울려 있어 몇 배의 효과를 내고 있다. 윤대녕의 사막과 조선희의 사막은 매우 다르면서도 같아 묘한 흥분을 주기도 한다. 주기 없이 찾아오는 편두통처럼.
그래서 난 이 책을 사무실 책꽂이에 두고서 한번은 텍스트만을, 한번은 사진만을, 그리고 다음에는 함께 읽었다. 아니 읽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작가나 포토그래퍼와는 또다르게 나만의 <피아노와 백합의 사막>을 써봐야지, 내 마음으로, 내 마음에, 이렇게 다짐하고 있다.
'사막 끝에서 누가 손을 들어 나를 부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때, 그리고 '무모하게도 열심히 달려가'지만 '사막의 한가운데'에서 '역시 사막은 비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난 아마 이 책을 다시 펼쳐 보게 될 것이다. 부디 그런 시간이 너무 잦지 않기를 바라지만.
좀 다른 이야기지만 윤대녕의 작품들은, 그 문학적인 평가와는 별개로, 대체로 영상 세대들에게 잘 맞는, 감각적인 언어와 쿨한(?) 사랑 이야기, 적절한 배경이 어우러져 있는데 왜 그의 작품이 영화화되지는 않는 건지 늘 궁금하다.
직접 들리지는 않지만 작가가 적재적소에 배치한 음악들은 또 얼마나 기가 막힌가. 그 자체로 배경음악이 될 수 있을 듯하다. 나는 윤대녕의 작품을 읽으며 빌리 홀리데이를 듣게 되었고 김광석을 새삼 찾았다. 마치 무라카미 하루키를 통해 비틀스나 재즈를 듣게 되는 것처럼. <피아노와 백합의 사막>이 특히 그렇다. 그 제목만으로 그려지는 영상과 들릴 것 같은 음악. 그래서일까. 이 작품이 사진과 함께 새롭게 태어난 것도. 아무튼 반가운 만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