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준히 취재를 계속한 가즈키는 다부치의 전처가 동북 지방에 있다는 것을 알아내게 되었다.

 

체포되면서 가정은 붕괴되었고, 전처는 두 살짜리 아들을 두고 집을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어디로 가도 언론에 쫓기다 지친 나머지 숙식을 제공하는 술집에서 일하다가 이제는 유흥업소로까지 전락해 버렸다고 했다. 가즈키는 동북 지방의 유흥업소를 샅샅이 뒤져서 결국 그녀를 찾아내었다.

 

그렇게 취재에 몰두하다 보니 두 달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미안, 감기에 걸려서 못 갈 것 같아. 다들 내 몫까지 재밌게 보내.]

 

점심 모임이 있는 날 아침, 가즈키는 휴대폰으로 전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자 잠시 후, [정말? 많이 안 좋니?], [어머, 못 온다니 아쉽다.], [어서 회복하길.], [그래, 푹 쉬어.] 등의 회신이 왔다.

 

이제 됐다.

 

가즈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침대 위에서 기지개를 켰다.

 

평일인데도 학교를 안 가도 되는 날처럼 묘한 쾌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일 때문에 미뤄 두었던 빨래를 하고 청소기를 돌렸다. 내친 김에 욕조에 낀 묵은 때와 곰팡이까지 제거해 가며 청소를 하고 있는데 벨이 울렸다.

 

가즈키는 인터넷으로 주문했던 자료가 왔나, 하는 생각에 고무장갑을 벗고 서둘러 뛰어가서 응답 버튼을 눌렀다.

 

 

[미안해. 혹시 자는데 깨운 거 아니야?]

 

노리코의 목소리였다. 응답기 너머의 목소리가 합성 음성처럼 들렸다. 가즈키는 목덜미에서 돋기 시작한 소름이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된 거야? 점심 모임에 안 갔어?”

 

[친구가 감기로 앓아누워 있는데 속 편하게 점심을 먹고 있을 수는 없잖아. 그래서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다음 주에 만나기로 약속을 연기했어.]

 

다음 주…….

 

결국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 건가? 이럴 줄 알았으면 오늘 억지로라도 나갈걸 그랬어.

 

가즈키는 갑자기 몸이 납덩이가 된 것 같은 중압감을 느꼈다.

 

[죽을 좀 끓여 줄게. 재료는 내가 사 왔어.]

 

그녀는 할 수 없이 굳은 얼굴로 공동 현관의 잠금 해제 버튼을 눌렀다. 가즈키가 가장 만나고 싶지 않았던 노리코는 안으로 들어오더니 바로 부엌으로 향했다.

 

내 영역에 노리코가 있어. 숨 막히게 불편해. 정의의 사이보그 레이더에 내 생활 공간이 스캔당해 버릴 것 같아.

 

죽이 끓는 동안 키친 카운터를 닦고 있던 노리코가 뭔가 발견한 듯 말했다.

 

! 이 볼펜, 가에데 출판사의 로고가 있네.”

 

? , 그거. 맞아.”

 

솔직히 가즈키는 무슨 펜을 쓰고 있는지 따위는 의식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집에서 일을 할 때는 오로지 노트북밖에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 지급받은 비품이라는 거지?”

 

그럴지도 모르겠네. 일일이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말이야.”

 

하지만, 퇴사한 이후에도 가지고 있으면 업무상 횡령이잖아.”

 

? 겨우 볼펜 하나인데?”

 

회사의 자산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 이것이 현금이었다면 어때? 아무리 10엔이라도 가지고 나오면 안 되는 거 아니야? 그리고 이 메모장도 그래.”

 

노리코가 카운터 위에 있던 메모장을 집어 들더니 가즈키에게 들이댔다.

 

일에 사용되는 것 같지만 아래쪽에는 개인적인 장 볼 거리가 적혀 있어.”

 

가즈키는 성큼성큼 다가가서 노리코가 들고 있던 메모장을 낚아챘다. 용지 위쪽에는 취재한 내용들이 갈겨쓴 글씨로 메모되어 있었다. 그리고 같은 페이지 아래쪽 여백에 배추, 구강 청결제, 치약 등등의 단어들이 적혀 있었다.

 

그래서, 이게 어쨌다는 거야?”

 

회사의 경비로 이 메모장을 구입한 거라면 사적으로 이용하면 안 되잖아.”

 

알았어, 알았다고! 그럼 쓴 만큼 정확하게 장부를 조정할게. 이 메모장의 대금에서 이 여백만큼이 1엔이 될지 2엔이 될지 모르지만 빼서 청구하면 되잖아! 볼펜도 반납할 거야. 됐지?!”

 

 

 

가즈키는 메모장을 카운터 위에 내던졌다. 노리코의 눈은 아무런 감정도 없는 카메라 렌즈처럼 가즈키를 향했다.

 

왜 화를 내는 거지? 내가 뭐 틀리게 말한 거라도 있어?”

 

……없어.”

 

가즈키는 틀린 것이 없어서 더 화가 난 것이다.

 

, 죽이 다 됐다. 달걀 풀어서 넣어도 되겠지?”

 

노리코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주방에서 능숙한 솜씨로 죽을 끓였다.

 

, 어서 먹어.”

 

식탁 위에 갓 끓인 죽이 담긴 작은 뚝배기가 놓였다. 거칠게 의자를 끌어다 앉은 가즈키는 수저를 들었다. 먹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맛있는 냄새가 감돌면서 굶주려 있던 위장을 자극했다. 한입 떠먹었더니 익숙하고 부드러운 맛이 혀끝에서 퍼졌다.

 

……맛있어.”

 

그래? 그거 다행이다.”

 

노리코는 이번엔 슈퍼마켓 봉투에서 야채와 닭고기를 꺼내 리드미컬하게 칼질을 했다.

 

닭고기 수프라든가,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거 대충 만들어 놓고 갈게.”

 

노리코가 요리를 하고 있는 사이, 가즈키는 그녀가 만들어 준 죽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전업 주부인 노리코는 어린아이를 키우느라 바쁘고 피곤할 것이다. 그런데 친구가 아프다는 말에 전철을 갈아타고 와 주었다. 슈퍼마켓은 역에서 가즈키의 아파트와는 반대 방향에 있었다. 일부러 거기까지 가서 장을 본 다음에 무거운 짐을 들고 와서 죽을 끓여 준 것이다.

 

그동안 노리코가 한 말과 행동은 백퍼센트 옳았어. 그것을 불쾌하게 느낀 건 아무래도 내가 잘못한 것이기 때문에 생긴 분함에서 기인한 걸까.

 

전화벨 소리에 가즈키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핸드폰이 아니라 집에 있는 전화가 울린 것이다. 가즈키는 죽을 입에 머금은 채 일어나 전화기가 놓여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하지만 전화기의 번호 표시 화면에 공중전화라는 표시가 점멸하는 것을 보고 수화기를 들지 않고 자동 응답기로 넘어가기를 기다렸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년! 너 같은 년은 죽어 버려!”

 

음성 변조기를 사용해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놀란 노리코가 요리 중인 손을 멈췄다.

 

빨리 뒈져 버려! 안 그러면 언젠가 죽여 버릴 거야!”

 

상대는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남기더니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지금 이거 뭐야? 협박 전화?”

 

노리코가 눈썹을 찌푸리며 인상을 썼다.

 

, 신경 쓰지 마. 가끔씩 저런 전화가 걸려 와. 책을 낼 때마다 적이 늘어나서 말이야.”

 

누구한테 온 거야?”

 

알았으면 이미 붙잡았겠지. 경찰에 피해 신고도 했었고 범인의 정체를 몰라도 고소는 할 수 있지만, 공중전화로 한 거라 잡아내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하더라고. , 확실히 기분은 나쁘지만 그렇다고 여태껏 특별한 피해가 있었던 적도 없어서…….”

 

여태껏이라니……. 이런 지 얼마나 된 거야?”

 

얼마나 됐더라. ……, 2년 정도 될까.”

 

그렇게 오래됐어? 공중전화는 착신 거부 설정해 두는 게 어때?”

 

그렇게는 할 수 없어. 공중전화로 정보를 제공해 주는 사람도 있거든. 물론 처음엔 무서웠지.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 짓도 못 하는 약한 인간일수록 비겁하게 전화로만 저런다는 것을 알게 됐어. 그래서 이제는 그냥 담담해.”

 

그런데 어떻게 가즈키의 집 전화번호를 알고 있는 거야?”

 

명함에도 있고, 조금만 조사해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어쩔 수 없어. 잊혀진 사건 시리즈때문에 이름도 얼굴도 팔려서 유명세를 좀 치르는 거지 뭐.”

 

가즈키는 그렇게 애써 웃어넘기곤 자리로 돌아가서 죽을 다시 먹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면 가즈키는 여전히 이런 전화가 올 때마다 기분이 별로 안 좋았다. 그래서 더 이상 죽의 맛을 느낄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협박 전화 정도로 겁먹으면 남성 저널리스트에게 밀리고 만다는 생각 때문에 버텨 왔다. 어느 정도의 짓궂은 언행이나 위험을 각오하지 않으면 여자 혼자서 프리 저널리스트 같은 일은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 오늘 자고 갈게.”

 

요리를 만들고 있던 노리코가 문득 그렇게 말하자 가즈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

 

자고 갈게. 또 협박 전화가 올지도 모르잖아.”

 

노리코가 내 집에서 자고 간다고? 말도 안 돼.

 

아냐, 그래도…….”

 

괜찮아. 딸은 남편한테 맡기면 되거든.”

 

네 사정 같은 건 상관없어. 내가 싫단 말이야.

 

혼자 있지 않으면 일에 집중이 안 되거든. 그래서 고맙지만…….”

 

솔직히 화내면서 내쫓고 싶었지만, 가즈키는 어른답게 꾹 참으며 정중히 거절했다. 하지만 노리코는 자꾸 눈치 없는 소리를 했다.

 

혼자 떠안으려고 하지 않는 게 좋아. 필요하면 내가 일주일 정도 있어 줄 수도 있어.”

 

노리코와 일주일을 지낸다고?

 

가즈키는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찔해졌다.

 

자신의 행동이 모두 옳다는 노리코의 생각, 그리고 자기가 뭘 하든 기뻐할 거라는 태도에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자 가즈키는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혼자 있고 싶다고! 네가 자고 가는 거 싫단 말이야!”

 

일단 한번 터지자 말이 거침없이 나왔다.

 

너와 함께 있고 싶지 않단 말이야. 오늘 점심 약속도 나가기 싫어서 꾀병을 부렸어. 계속 참을 수 없었다고. 딴 사람 약점 찾아내서 잘난 척하며 지적이나 하고 말이야.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오늘도 자기 마음대로 남의 집에 쳐들어오고. 너의 그런 부분을 고등학교 때부터 싫어했어. 다 필요 없으니까, ! 어서 가 버려!”

 

가즈키는 요리하고 있던 노리코의 손에서 조리 도구를 뺏어 내려놓고 핸드백을 들려 현관 밖으로 내쫓은 다음, 도어록을 잠그고 도어체인까지 걸어 버렸다.

 

결국 말해 버렸어. 아무리 싫어하는 인간이라도 이렇게 찾아왔는데 면전에 대고 퍼부은 거, 잘한 짓인지 모르겠네. 그래도 언젠가는 해야 할 말이었어. 후회하지 않아.

 

가즈키는 살짝 흥분한 상태로 어깨를 들썩이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슬쩍 도어스코프로 밖을 내다보니 이미 노리코는 가 버리고 없었다.

 

이제는 점심 모임에 안 가도 되겠지? 다시는 노리코의 얼굴을 보지 않고 살 수 있겠네. 그래, 지금은 사이좋은 친구들 그룹이 필요한 고교 시절이 아니야. 그러니 무리해서 참석할 필요도 없어. 아아, 진작 말해 버릴걸 그랬어.

 

가즈키는 콧노래를 부르며 핸드폰에서 노리코의 번호를 착신 거부로 설정했다.

 

 

~ 8회에 계속 ~


*출간 전 연재는 총 10회까지 진행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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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사회학부에서 공부를 하면서 가즈키는 저널리즘에 눈을 뜨게 되었다.

 

옛날부터 신문을 읽거나 보도 방송을 보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우연히 선택한 수업인 저널리즘론에 재미를 느끼면서 저널리스트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교수님이나 선배들이 권해 준 문헌들을 섭렵했고, 세미나의 과제로 취재한 기사를 정리해서 발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졸업반이 되자 취업을 위해 도쿄의 모든 대형 출판사에 입사 지원을 했다.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정치인 비리, 대기업의 비리,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쓰게 된 사건 등을 언론의 입장에서 철저하게 검증하고 이것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그런 뜨거운 열정으로 면접에 임한 결과, 가즈키는 가장 유력했던 가에데 출판사에 입사할 수 있었다.

 

가에데 출판사는 문예는 물론 저널리즘으로도 인정받고 있는 대형 출판사다. 가즈키는 입사 후 3년 동안 주간지의 정치부에 소속되어 나가타쵸를 취재하기 위해 열심히 다녔다. 그 후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논픽션 서적부에서 새로운 기획에 참여하게 되었다.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이자, 주간지에서 일하는 보람은 있었지만 시간과 정성을 들여서 오랫동안 읽히는 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가즈키는 곧바로 과거의 유명 사건을 새롭게 검증하는 기획을 세우게 되었다.

 

몇 명의 우수한 작가들과 팀을 이뤄서 치바현 유아 연쇄 유괴 살인 사건, 10년 만의 진실엘리트 여자 회사원 살인 사건, 누명은 이렇게 밝혀졌다등을 편집하고 간행했다. 새로운 증인이나 목격자를 찾아내고 증언을 모아 다른 관점에서 사건을 재조명하는 가즈키의 기획은 잊혀졌던 사건 시리즈라는 타이틀로 사람들에게 화제가 되면서 TV 드라마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녀는 그렇게 업계에서 히트 메이커로 인정받으면서 활발하게 활동했고, 그러다 보니 순식간에 8년의 세월이 지나게 되었다.

 

가즈키에게는 꼭 직접 다루고 싶었던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유전 개발권 이익 획득을 위한 불법 정치 자금 사건이었다. 동남아시아에서의 유전 개발권 이익 획득을 위해 한 석유 회사 회장이 당시의 국교상인 야마모토 마모루에게 불법으로 정치 자금을 제공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정계가 떠들썩했었다. 야마모토는 비서가 자기 마음대로 한 짓이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며 발뺌을 했고 증거도 부족했기 때문에 검찰은 그를 입건하지 못했다.

 

게다가 벌써 10년 전의 사건이라 이미 공소 시효도 지나 있었다. 하지만 가즈키는 이 사건을 다시 검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야마모토의 이름이 차기 총리 후보로 거론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이미 불법 정치 자금 사건에 대해서는 잊고 있었다. 아니, 입건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일은 원래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기는커녕 야마모토는 심심치 않게 개그맨이 진행하는 토크쇼에 출연하면서 빠르게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가즈키는 이런 남자가 총리가 되어도 괜찮은 것일까, 지금이야말로 내가 그 사건을 파헤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강하게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기획을 세운 다음, 작가를 따로 찾지 않고 자신의 눈과 발로 취재해서 꼼꼼하게 직접 집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즈키는 찬찬히 이 일에 몰두하고 싶어서 회사에는 사표를 제출했다. 처음에는 붙잡던 상사도 가즈키가 자신의 신념을 말하자 그러면 제대로 한번 해 봐. 우리가 꼭 책을 내 줄 테니까.”라며 응원해 주었다.

 

지금까지도 이 사건을 소재로 한 르포르타주는 있었지만 모두 이미 나온 신문 기사의 내용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것에 불과했다. 가즈키는 실행범으로 알려진 야마모토의 전 비서인 다부치의 이야기를 메인으로 구성하고 싶었다. 다부치는 당시 제가 멋대로 한 짓입니다.”라고 인정해 징역 2년의 판결을 받았고 수수한 것으로 알려진 1억 엔을 추징당했다.

 

정말로 비서의 단독 범행이었을까. 추징된 1억 엔이 사실은 누구의 손에 넘겨진 것일까. 가즈키는 그곳에 사건의 열쇠가 숨어 있다고 생각했다.

 

다부치는 이미 출소했지만 주거지를 전혀 알 수 없었다. 가즈키는 매일같이 조사와 인터뷰로 바쁘게 돌아다니면서도 그의 행방을 찾으며 부지런히 원고를 써 나갔다.

 

그녀가 다가키 노리코와 재회한 것은 그렇게 정신없이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졸업 15주년 기념 동창회를 한다고 연락이 온 것이다.

 

벌써 15년이나 된 거야?

 

숨 가쁘게 지내느라 가즈키는 본가 생각은 별로 하지 못했고, 명절 때조차 거의 가 보지 않았다. 부모님 집에서 보내온 왕복 엽서를 소파에 누워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철야 작업으로 지친 머릿속에 그립고 한가로운 야마나시의 풍경이 떠올랐다.

 

취재로 정신없이 돌아다니기만 했던 살벌한 날들로부터 하루만 벗어나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오랜만에 가족들 얼굴도 보고 동창회도 한번 참석해 볼까.

 

그렇게 마음먹은 가즈키는 수년 만에 야마나시로 향했다.

 

어머, 이게 얼마만이야! 다들 좋아 보인다.”

 

15년 만에 친구들과 재회하자 가즈키는 반가운 마음에 흥분해 소리쳤다.

 

유미코는 약간 포동포동해진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리호는 유학 중에 만난 미국인 남편과 함께 귀국해 사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중견 배우로 활약하고 있는 레이카는 미모에 관록까지 더해진 느낌이었다. 외동딸이었던 노리코는 아버지의 부하 직원인 남자와 맞선을 보고 그를 데릴사위로 맞이했고, 전업 주부가 되어 초등학생이 된 딸을 키우고 있었다. 15년이 지났는데도 노리코는 여전히 단발머리에 화장도 하지 않고, 주름이 약간 생긴 것 외엔 고등학생 때와 거의 같은 이미지였다.

 

우리들 벌써 서른네 살인가?”

 

그녀들은 빠르게 지나간 세월을 한탄하면서도, 다시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기분에 들떠서 먹고 마시며 끊임없이 수다를 떨었다.

 

각자 근황을 얘기하던 중, 가즈키가 논픽션 책을 쓰고 있다고 하자 다들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어머, 대단하다. 독립했어?”

 

사업을 하고 있는 리호가 흥미로워하는 표정으로 몸을 내밀며 말했다.

 

전에는 가에데 출판사에서 일하지 않았어? 그때도 책을 만들고 있었지?”

 

그랬지. 잊혀진 사건 시리즈라고 들어 봤어?”

 

그럼, 알고말고. 그러고 보니 TV 드라마로도 만들어지지 않았니? 어머, 역할이 있으면 친구인 나한테도 출연 제의를 했어야 하는 거 아냐?”

 

뾰로통한 표정을 한 레이카의 장난기 섞인 말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가즈키는 옛날부터 뉴스나 신문을 좋아했었지. 대단하다. 책 나오면 읽어 볼게.”

 

노리코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등학교 친구들 모두로부터 축하의 말을 들은 가즈키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유미코는 하치오지, 리호는 히로오, 노리코는 메구로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뭐야, 다들 도쿄에 살잖아.”

 

멀리 흩어져 사는 줄 알았는데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니, 조만간 다시 점심 모임을 하자는 얘기로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그럼, 총무는 가즈키가 맡는 게 좋겠다.”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 바로 리호가 정해 버렸다.

 

뭐야~, 졸업한 지가 언젠데 이런 건 결국 또 내 몫이야?”

 

가즈키가 입을 삐죽거리며 농담 투로 말하자 또 웃음이 터졌다. 역시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동창회가 끝나고 도쿄에 돌아온 가즈키는 부랴부랴 점심 모임에 적당한 가게를 찾아 모두에게 메일을 보냈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메일이라는 연락 수단이 있었으면 관계가 끊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메일이라는 통신 수단의 진화에 가즈키는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렇게 동창들과의 점심 모임을 기대하면서 가즈키는 자신의 일에 열중했다. 계속해서 야마모토의 전비서, 다부치의 행방을 쫓았다. 그의 고향인 하치노헤에 수없이 찾아가서, 그 지역 사람들에게 다부치의 어린 시절 이야기나 사람 됨됨이에 대해서 탐문하고 다녔다.

 

약속된 점심 모임의 전날 밤까지 취재를 했고, 다음 날 아침 일찍 고속버스를 타고 도쿄로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예약해 놓은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가즈키는 너무 바빠서 이빨 닦을 시간도 없었고, 화장도 제대로 못 한 데다가, 머리도 옷도 엉망이었다. 하지만 친구들은 그런 그녀를 웃으며 반갑게 맞이해 주었고, 오랜 친구들과의 자리가 마음이 편해서 그런지, 수면 부족인데도 불구하고 정신없이 수다를 떨다 보니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즐거운 식사 시간이 끝나고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각자 주문했던 메뉴에 따라 낼 돈을 취합한 가즈키는 계산대로 갔다.

 

, 영수증 주세요.”

 

가즈키는 프리랜서가 되면서부터 외식을 하면 반드시 영수증을 챙겼다. 고정적인 월급이 없는 불안정한 처지라 경비로 처리할 만한 것은 뭐든지 챙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영수증 내가 가져도 돼?”

 

그녀가 방금 계산대에서 받은 영수증을 한 손에 들고 흔들면서 묻자 유미코와 리호가 동시에 대답했다. “그래그래.”

 

고마워.”

 

가즈키가 영수증을 능숙한 손놀림으로 지갑에 집어넣자 유미코가 농담 섞인 말을 했다. “멋지다. 역시 자영업자는 다르구나.”

 

어머, 그렇게 대단한 거 아니야. 직장 다닐 때는 출판사에서 취재비가 나왔었지만 이제는 다 자기 부담이라, 호화 여객선에서 돛단배로 갈아탄 기분이야. 이렇게 점심값까지 경비 처리해야 할 정도니까.”

 

가즈키가 진담 반 농담 반으로 그렇게 말하자 노리코가 끼어들었다.

 

그건 탈세잖아.”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일단, 더치페이로 돈을 모아 낸 건데 가즈키가 혼자서 전부 계산한 것이 돼 버리는 게 문제야. 게다가 이건 어디까지나 사적인 모임인데 일 관계 접대비로 처리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거잖아. 그렇게 해서 확정 신고할 때 세금이 줄어들면 탈세가 되는 거야.”

 

노리코는 마치 대본을 읽는 것처럼 거침없이 단숨에 탈세라고 한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어머, 탈세라니, 말도 안 돼.”

 

가즈키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런 건 프리랜서라면 다 하는 건데, 이 영수증을 받아서 생기는 혜택이라고 해 봤자 뻔한데 탈세라니…….

 

그래 맞아, 노리코는 이런 애였지.

 

가즈키가 독립한 지 얼마 안 돼서 몰랐던 거 아냐?”

 

리호가 어색한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한마디 했다.

 

그러게 말이야. 경리는 골치 아픈 일 같아. 회사에 다닐 때 경리부에 있던 동료들 보니까 원형 탈모증까지 생기더라.”

 

유미코도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가세했다.

 

나는 지갑 갖고 다닌 지 꽤 돼서 잊어버렸어.”

 

연예인 레이카가 연기하듯 약간 과장된 동작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익살을 떨었다.

 

덕분에 어색한 분위기가 풀리는 것 같았다. 다들 가즈키가 민망하지 않게 하려고 신경 써 준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잘못한 건 나란 사실은 부정할 수 없어.

 

가즈키는 세무서에서 조사를 당하는 상상을 했다.

 

다들 하는 거니까 괜찮잖아, 금액도 얼마 안 되는데, 라고 생각한 내가 잘못된 거야. 만약 문제가 되면 출판사에도 폐를 끼치게 되잖아.

 

고마워, 노리코. 내가 안일한 생각을 했어. 얘기해 줘서 다행이야. 역시 노리코는 믿음직스럽다니까.”

 

가즈키가 영수증을 구겨서 버리자 노리코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해했으면 됐지 뭐.”

 

그래, 이 표정정의를 실현한 노리코의 이 황홀해하는 미소이었어.

 

노리코는 고등학교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식사를 마친 일행은 찻집으로 자리를 옮겨 차를 마셨다. 그곳에서는 영수증을 아예 받지 않았다.

 

그들은 한참 동안 수다를 떨다가 헤어질 시간이 되어 전철역으로 향했다.

 

가즈키는 자신만 반대 방향 전차를 타야 해서, 승차 후 창밖으로 보이는 친구들에게 밝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차가 출발하고 친구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진공청소기에 빨려 들어간 것처럼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사라졌다.

 

즐거운 시간이었는데 왜 이런 걸까.

 

고등학교 때 느꼈던, 노리코와 함께 있을 때의 피로감이 되살아났다. 소중한 친구인데 왜 이렇게 피곤해지는 걸까.

 

혹시 난 노리코가…….

 

싫은 건가.’ 하는 생각이 떠오르자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친구에게 하기 어려운 말인데도 제대로 지적해 줬을 뿐이잖아. 저렇게 좋은 친구인데, 게다가 틀린 것은 내 쪽이잖아.

 

가즈키는 그렇게 스스로를 타이르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묘한 불쾌감은 다음 날 아침이 되어도 지워지지 않았다. 가슴속에 시커먼 타르 같은 것이 척 달라붙어서 온몸을 오염시키면서 몸 밖으로까지 배어 나오는 느낌이었다.

 

샤워를 하고 나온 그녀는 커피를 마시면서 억지로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컴퓨터 앞에 앉아 일에 집중하려고 해도 여전히 노리코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가즈키는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 그대로 깊이 들이마신 다음 크게 내뿜었다.

 

가즈키는 벽에 걸린 달력을 봤다. 전날 헤어질 때, 두 달에 한 번 정도 모이자는 리호의 말에 전원이 찬성했다.

 

노리코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건 역시 나뿐인가. 두 달이면 아직 한참 남았는데, 그런데…….

 

싫어. 참을 수 없을 만큼 싫어.

 

고등학교 때 느꼈던 위화감과 불쾌감이 어제의 일로 인해 생생하게 다시 떠올랐다.

 

노리코, 만나기 싫어!”

 

가즈키는 콘크리트 벽이 울릴 정도로 크게 소리쳤다. 자신의 집이라 신경 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노리코는 정말 싫어, 싫다고!”

 

아무리 올바른 인간이라고 해도 싫은 걸 싫다고 하는 게 뭐가 나빠.

 

자신의 기분을 그대로 받아들이자 가즈키는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다음 점심 모임은 나가지 말자.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가즈키는 느긋하게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 7회에 계속 ~


*출간 전 연재는 총 10회까지 진행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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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키가 노리코가 이상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그 해 가을 축제 때 발생했다.

 

축제는 중학교 때와는 달리 규모도 컸고 본격적으로 갖추어진 먹거리 부스, 댄스 퍼포먼스, 밴드의 라이브 공연 등으로 가즈키의 그룹도 한창 들떠 있었다.

 

마지막 날, 캠프파이어로 축제는 마무리되었지만 학생들은 여전히 흥분이 가시지 않은 모습이었다. 다들 축제의 여운이 남아 들뜬 상태로 서로 장난치면서 정리와 청소를 시작했다. 뒷정리 중에도 학교 안팎에서 학생들이 재잘거리는 소리와 활기가 넘쳐흘렀다.

 

가즈키와 노리코는 일반 쓰레기를 정리하는 일을 맡았었다. 당시는 아직 재활용이라는 개념이 없어서 타는 것타지 않는 것두 종류로만 나누었다. 그리고 다이옥신의 심각성이 문제되기 전에는 학교에 쓰레기 소각장이 있었다. 가즈키와 노리코는 풀장 옆에 있는 소각장으로 골판지 상자에 가득 담은 쓰레기를 손수레에 실어서 날랐다.

 

학교 건물 밖의 구석에는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외등 한 개만 서 있어서 음침한 분위기였다.

 

빨리 끝내고 가자.”

 

가즈키는 기분 나쁜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재촉했다.

 

무심코 어두운 주위를 둘러보는데, 어둠 속에 반딧불이 같은 것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그 정체가 궁금해진 가즈키는 눈에 힘을 주며 자세히 쳐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몇 명인가 학생복을 입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담뱃불이었다.

 

노리코도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소각로의 문을 열어 둔 상태로 손을 멈춘 채 바라보고 있었다.

 

2학년, 아니면 3학년일까.

 

불량한 분위기도 아닌 것 같고 담배를 피우는 것도 익숙하지 않은지 가끔씩 콜록거리며 기침을 했다. 축제 분위기에 젖어 해방감도 느끼고 싶고 허세도 부려 보고 싶어서 잠깐 일탈적인 행동을 해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안됐지만 잘못 걸렸어, 라고 가즈키는 마음속으로 그들에게 말했다. 노리코가 봤으니까 즉시 선생님을 부르러 가겠지, 하고 생각하는데 등 뒤에서 호통 소리가 들렸다. “거기서 뭐 하는 거야! 이 녀석들!”

 

아차! 걸렸다, 하며 남학생들이 황급히 담배를 밟아 끄고 있을 때 나타난 것은 체육 담당인 야자와 선생님이었다.

 

다음 해에 정년퇴직을 앞둔 그는 머리도 눈썹도 새하얀 할아버지 선생님이었지만 유도의 고수로 매년마다 전국 대회에 출전하고 있었다. 엄하지만 따뜻해서 학교에 안 오는 학생이 있으면 끈질기게 집까지 찾아가 상담해 주는 등 부모님들에게 신뢰가 두터운 사람이었다.

 

야자와 선생님은 달아나는 남학생의 목덜미를 낚아채서 그 자리에 무릎을 꿇렸다. 우락부락한 야자와 선생님으로부터 언제 주먹이 날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들은 쩔쩔매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외로 야자와 선생님은 놀라울 정도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담배, 한번 피워 보고 싶었지? 어떤 느낌인지 궁금했을 테고. 선생님도 너희들 나이 때 그랬단다.”

 

학생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소각로 앞에 있던 가즈키도 무심코 몸을 쑥 내밀고 귀를 기울였다.

 

스무 살이 돼서 피우는 것이나 열일고여덟 살에 피우는 것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너희들의 몸은 아직 성장하는 중이라 어릴 때부터 담배를 피우면 여러 가지 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단다.”

 

선생님은 온화한 말투로 한 사람 한 사람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병에 걸린다는 말이 아직 젊은 너희들에는 별로 실감이 안 나겠구나. 하지만 분명히 여드름은 늘어날 거야. 키도 안 크고, 입에서 담배 냄새도 지독하게 날 거야. 그러면 여자애들이 싫어할 걸. 그렇게 되면 어떨 것 같아?”

 

야자와 선생님은 난처해하는 남학생들의 표정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인생은 길잖아. 몇 년만 참아 봐. 할 수 있겠지?”

 

야자와 선생님이 양쪽 손바닥을 위로 향해 내밀었다. 그 위에 한 학생이 머뭇거리다가 담뱃갑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나머지 학생들도 차례차례 담뱃갑을 올렸다.

 

좋아좋아. 다들 착한 애들이구나.”

 

야자와 선생님은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넘겨받은 담배를 체육복 주머니에 넣었다.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맡아 둘 테니 어른이 되면 내가 있은 곳으로 찾으러 와라. 그때는 술도 같이 한잔하자. 어때?”

 

그렇게 말하면서 야자와 선생님이 그 큰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자 학생들이 훌쩍거렸다.

 

죄송합니다.”

 

남학생들은 입을 모아 그렇게 말한 후 머리를 숙였다. 무조건 혼내기만 하는 것보다는 훨씬 마음에 강하게 와 닿았을 것이다. 가즈키는 그런 야자와 선생님의 행동을 보고 감탄했다.

 

 

 

가즈키와 노리코는 소각로에 나머지 쓰레기를 던져 넣고 교정으로 돌아갔다. 노리코가 이르기 전에 야자와 선생님이 와서 다행이라고 가즈키는 생각했다.

 

그러나 사건은 생각처럼 순조롭게 마무리되지 않았다. 잠시 후에 경찰이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온 것이다.

 

미성년자가 흡연을 했다는 신고가 들어와서 왔는데요.”

 

정리도 어느 정도 끝나서 이제 막 해산하려는 때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선생님들이나 학생들이 어리둥절해 있는데 노리코가 당당한 태도로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야자와 선생님과 담배를 피우던 학생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경찰에게 이런저런 설명을 하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가즈키는 아연실색했다.

 

장난도 아니고 왜 저렇게까지 하는 거지?

, 그랬구나.”

 

젊은 경찰은 야자와 선생님이나 교장 선생님하고도 얘기를 나눈 후 남학생들에게도 다시 확인하면서 주의를 주었다.

 

선생님 말씀 잘 들었겠지. 또다시 담배 피우다 걸리는 일은 없는 거다?”

 

남학생들이 온순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경찰관은 야자와 선생님과 교장 선생님을 향해 돌아섰다.

 

담배는 선생님이 압수하셨고 본인들도 반성하는 것 같네요. 학교 일은 학교에서 처리하시는 것이 어떠세요? 저희가 하면 경찰에 기록이 남아 버려서 학생들의 장래에 좋지 않을 테니.”

 

마음씨 좋은 경찰은 재치 있는 말투로 이제 절대 안 하기로 한 거다.” 하고 타르기만 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가즈키는 안심했다. 그리고 선생님께 말씀도 안 드리고 갑자기 경찰에 신고해 버린 노리코가 어쩐지 무섭다는 생각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다음 날 더 큰 문제가 되어 있었다.

 

노리코가 현의 지역 교육 위원회에도 다음과 같이 알리고 언론사에도 팩스를 보낸 것이다.

 

○○고등학교에서 교사인 야자와 모토노리가 학생들의 흡연 사실을 숨겨 주었고, 경관인 마츠시타 코지는 그들의 불량 행위를 방치했습니다. , 죄를 저지른 학생을 학교와 경찰이 합심해서 은폐한 것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비열한 행위이므로 저는 이에 대해 단호하게 항의합니다.

○○고등학교 1학년 2반 다가키 노리코

 

신문에도 크게 다루어져서 야자와 선생님은 철저하게 비난받았다. 정직 석 달 처분을 받았지만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이런 솜방망이 처분이 교사를 타락시키고 교육 환경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여론 때문에 결국에 야자와 선생님은 정년을 바로 앞에 두고 사표를 내고 퇴직금도 제대로 못 받게 되었다. 게다가 교사로서 재취업하는 길도 끊겨 버렸다.

 

여론의 압력 때문에 교장과 교감도 현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문제의 남학생들은 정학 처분을 받았고, 그들이 야구부와 농구부에 소속됐었다는 이유로 이들 동아리는 고시엔이나 인터 하이의 출전권을 잃었다. 해당 경찰도 징계를 받았다.

 

노리코.”

 

일이 이 정도로 커진 것을 알게 된 가즈키가 따져 물었다.

 

왜 이렇게 일을 크게 만든 거야? 야자와 선생님이 그 정도로 잘못을 한 건 아니잖아. 퇴직금으로 학교에 안 나오려는 아이들을 위한 보습 학교를 만들려고 하셨는데, 그것도 못 하게 되셨단 말이야. 잘못한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니?”

 

나는 옳은 일을 한 것뿐이야.”

 

노리코는 또 그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너무 융통성이 없다고 할까…….”

 

융통성?”

 

노리코는 진심으로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것이 정의보다 중요한 거야?”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몰라서 가즈키는 말문이 막혔다.

 

어쨌든 나는 옳은 일에만 관심이 있어. 잘못된 것은 그냥 넘길 수 없단 말이야.”

 

그렇게 잘라 말한 노리코는 원래의 무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말에는 억양이 없었고 목소리도 인공 음성 같았다.

 

마치 사이보그 같았다.

 

사이보그는 인간다운 미묘한 감정이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오로지 올바른 것에 대해 프로그램 된 일만 수행한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가 상처를 받든 파멸되든 사이보그는 관심이 없다.

 

노리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언젠가 가즈키는 큰마음 먹고 유미코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냐니?”

 

축제 때 흡연 적발 건이라든가…….”

 

아아, 역시 대단한 아이구나 하고 생각했어.” 유미코는 감탄한 듯 말했다. “그러고 나서 모두 굉장히 성실하고 정직해졌잖아. 난 정말 깜짝 놀랐어. 마치 정의의 히어로 같지 않니?”

 

역시 항상 옳은 건 노리코란 말인가. 노리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내가 잘못된 건가.

 

그 이후로도 가즈키는 노리코에 대한 불만을 속으로 삭여 둘 수밖에 없었다. 괜히 나섰다가 그룹에서 고립되는 것보다는 나았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참으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3년을 지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가즈키는 큐슈의 국립 대학에 진학했다. 유미코와 노리코는 각각 그 지역 단기 대학과 4년제 대학에 들어갔으며, 리호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레이카는 상경해서 본격적인 연예계 활동을 시작했다.

 

그렇게 각자의 길을 떠나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면서 자연스럽게 그룹의 교류는 끊어졌다. 새로운 친구, 동아리 활동 등에 열중하다 보니 규범그 자체였던 이상한 친구에 대해서 가즈키는 한동안 잊고 살았다.

 

 

~ 6회에 계속 ~


*출간 전 연재는 총 10회까지 진행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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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미코가 목소리를 높이며 물었다. “낫칭이 노리코한테 뭔가 안 좋은 짓을 한 거 아니야?”

 

, 그럴 수도 있겠다, 하고 가즈키는 생각했다. 일종의 복수였다고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노리코는 여전히 변화 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걔한테 당한 거 아무것도 없어. 아까부터 왜 이상한 질문만 하는 거야?”

 

그게 그렇잖아.”

 

레이카가 결심한 듯 말했다. “같은 반 친구를 배신하는 짓을 한 거잖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대체 모르겠네. 어떻게 수업을 본래 있어야 할 상태로 되돌리려고 한 것보다 복수를 위해 한 짓이라고 해야 이해가 가능하다는 거지? 그건 좀 삐뚤어진 생각 아니야?”

 

노리코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가즈키, 유미코, 리호, 레이카의 얼굴을 둘러봤다. 밥풀이 입가에 붙어 있는 그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본 네 사람은 노리코에게 전혀 악의가 없었음을 겨우 알 수 있었다.

 

생각해 보니 노리코의 말은 옳았다. 수업 중에 쪽지를 쓰거나 돌리는 등 딴짓을 하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다. 그것을 제대로 지적한 노리코를 탓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그래, 맞아. 노리코가 말한 대로야.”

 

가즈키가 그렇게 말하자 리호도 같은 생각이라는 듯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해 보니 모두의 앞에서 잘못을 지적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행동 같아.”

 

유미코의 말에 레이카도 덧붙였다. “역시 노리코는 용기가 있어.”

 

가즈키는 정론에 눈을 뜨게 된 기분이었다.

 

노리코는 학교는 우정을 키우는 장소이고 수업보다는 친구들과의 교류가 소중하다, 고 여겨 왔던 안일한 내 생각을 바로잡을 수 있게 해 주었어. 역시 노리코는 어른 같고 훌륭한 아이야.

 

가즈키는 노리코를 옹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틀림없이 낫칭과 토모코, 그리고 그 애들의 그룹이 노리코를 강하게 비난할 거야. 노리코는 나를 치한으로부터 구해 줬어. 이번에는 내가 노키코를 지켜야 할 차례야. 노리코가 고지식하고 정의감이 너무 강하다 보니 약간 도가 지나쳐서 조금 어긋나 버린 것일 뿐이야.

 

그때 가즈키는 정말 그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쪽지 사건이 조금씩 잊혀 가면서 6월이 되었다. 교복이 원피스형의 하복으로 바뀌자마자 교칙대로 제대로 입고 있는지 확인하는 불시 복장 검사가 있었다.

 

 

 

귀가 전의 롱홈룸 시간에 체육관에 집합해서 남학생은 넥타이나 벨트를 제대로 착용하고 있는지와 바지의 폭이 적절한지 등을 검사했고, 여학생은 매트 위에 무릎을 꿇고 치맛자락이 매트에 닿는지, 그러니까 충분히 무릎을 덮는 길이인지 등을 검사했다.

 

가즈키는 원래 보이시한 스타일에 자신의 다리를 남들에게 보여 주고 싶기는커녕 숨기고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다른 여학생들처럼 치마를 일부러 짧게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입학 전에 잰 치수로 맞춘 하복을 전혀 손대지 않은 채 입고 있었다.

 

주위의 여자애들이 불시 검사에 걸렸다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열심히 스커트 끝을 끌어 내리고 있는 것을 보며 가즈키는 아무런 생각 없이 무릎을 꿇었다.

 

선도 위원인 가미카와 마이코가 가즈키가 있는 줄로 다가왔다. 치맛자락이 확실하게 짧은 여학생에게는 주의를 주며 명부에 체크를 했다.

 

이윽고 가즈키의 차례가 되었다.

 

마이코가 다가서면서 가즈키의 스커트 끝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곤란한 표정으로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제야 가즈키는 자신의 스커트를 내려다보았다.

 

아주 약간이었지만 스커트 끝이 매트에서 떠 있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가즈키는 당황하면서 스커트가 이렇게 짧아진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갑자기 가슴이 커졌다. 그전까지는 A컵이라 고민이었는데, 초등학교 때부터 9년 동안 계속했던 육상을 그만둔 것과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D컵까지 성장했다. 그렇게 가슴이 커지는 바람에 원피스의 스커트 끝부분이 올라가 버린 것이다.

 

이를 어째. 2cm 이상 짧으면 반성문도 써야 하고 부모님에게 연락도 가겠지. 일부러 스커트를 짧게 하려고 한 것도 아닌데…….

 

가즈키가 어떻게 변명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마이코가 말했다.

, 문제없어. 확인했으니 일어나도 돼, 이마무라 가즈키.”

 

마이코는 가즈키와 평소에 같은 그룹으로 지내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일부러 치마를 짧게 한 것이 아님은 눈치채고 있었다. 그리고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라서 그냥 봐주기로 한 것이었다.

 

가즈키가 안도의 숨을 쉬며 일어서려 할 때였다.

 

가즈키의 스커트는 짧은 것 같은데.”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즈키가 돌아보니 뒷줄에 있던 노리코였다.

 

, 글쎄……. 내가 보기에는 괜찮은데.”

 

마이코는 그렇게 대충 넘어가려고 했다.

 

아니, 짧아.” 노리코가 자신의 줄에서 나와 가즈키의 옆에 섰다.

 

가즈키, 다시 무릎 꿇어 봐 줄래?”

 

가즈키는 갑자기 노리코가 태클을 걸며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에 기분이 상했다. 하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엔 상반신을 살짝 앞으로 구부려서 겨우 끝자락이 바닥에 닿도록 했다.

 

이것 봐, 문제없잖아.”

 

마이코가 안심했다는 듯 말했다.

 

가즈키, 등을 펴고 자세를 제대로 해야지.”

 

노리코가 그녀의 등을 쭉 펴게 했다. 가즈키는 굴욕감을 느꼈다. 스커트 끝이 약간 올라갔다. 노리코는 매트 위에 납죽 엎드려서 마이코의 자로 정확하게 매트에서 스커트까지의 높이를 쟀다.

 

그래, 2cm.”

 

노리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노리코, 자 좀 줘 볼래?”

 

노리코로부터 자를 돌려받은 마이코가 다시 재 봤다.

 

에이, 2cm는 안 되네. 그러니까 반성문은 안 써도 돼.”

 

마이코, 자를 매트에 딱 붙이지 않으면 정확히 잴 수 없어. , 이렇게 하면 2cm 맞잖아.”

 

매트 위에 자를 꽂고 노리코가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그때와 같은 미소였다. 정의를 위해 카메라를 가지고 다닌다고 말하면서 지었던 그 미소. 그것은 자랑스러워하는 듯한 느낌은 아니었다. 그것은 무엇엔가 취해 있는 듯한, 황홀한 표정이었다.

 

악감정을 가지고 일부러 몰아세우려는 태도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즈키는 충격을 받았다. 마이코는 눈감아 주려 했다. 그런데 어째서 선도 위원도 아닌 노리코가 끼어들어서 그녀에게 반성문을 쓰게 하며, 그러는 것이 뭐가 재미있다는 말인가. 부모님들에게까지 알려지게 되는데…….

 

도대체 왜 그래?”

 

가즈키는 노리코에게 따졌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내가 일부러 스커트를 짧게 한 것도 아닌데. 우리는 친구잖아.”

 

그 말을 들은 노리코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든가 친구 사이라든가 그런 건 교칙하고 상관없잖아.”

 

그래도…….”

 

가즈키는 그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랬다. 교칙을 정확하게 지키기 위해서라는 노리코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 알았어.”

 

더 이상 따질 수 없었다. 여기서 더 옥신각신하면 눈감아 주려고 했던 마이코에게 폐가 될 것 같았다. 가즈키는 그대로 교칙 위반자의 줄로 이동한 다음 선도 교사에게 주의를 듣고 반성문용 원고지를 세 장 받았다.

 

집에 돌아와 혼자서 교복의 끝자락을 풀어서 더 길게 해 보려 했지만 옷감이 2이상 늘릴 정도의 넓이는 안 되었다. 가즈키의 키는 중학교 1학년 때 168cm가 된 후 3년 동안 더 크지 않았다. 그래서 고등학교 교복을 맞출 때도 딱 맞는 사이즈로 했다. 물론 여전히 키는 그대로였다. 가슴둘레가 늘어나게 되는 건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단을 접어서 실밥이 보이지 않게 바느질해 놓은 끝부분까지 풀어서 늘려 봤지만 역시 약간 부족했다. 그 차이는 겨우 5mm 정도였지만, 노리코는 분명히 또 자로 꼼꼼하게 확인할 것이 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가즈키는 교복을 새로 살 수밖에 없었다. 새 하복을 입은 지 겨우 일주일밖에 안 되었는데, 다시 3만 엔의 지출을 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부모님께 너무 죄송했다.

 

노리코만 그냥 넘어가 줬다면…….

 

가즈키는 너무 분해서 유미코, 리호, 레이카에게 불평을 늘어놓고 싶었다.

 

여자애들 그룹에서 누군가의 험담을 하는 것은 위험한 짓이다. 험담은 그 자체가 배신행위이며, 웬만한 일이 아니라면 결국 험담한 사람이 고립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만은 다들 제 편이 되어 줄 것이라는 자신이 있었다.

 

노리코야말로 배신자니까 이제 노리코와 함께 도시락도 먹지 않을 거야. 교외 학습 팀에서도 제외하겠어.

 

가즈키는 그렇게 결심하고 다음 날 학교에 갔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의외의 상황이 펼쳐졌다. 다른 반의 선도 위원이 친한 친구의 위반을 눈감아 주었다가 큰 문제가 된 것이다. 3학년의 열여덟 개 반 가운데 문제가 된 건 열두 개 반이었다. 그러니까 절반 이상이 부정을 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엄하게 주의를 받고 연대 책임으로 학급 전원이 반성문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가즈키의 반은 해당되지 않았다.

 

노리코 덕분이야.”

 

교장 선생님께 칭찬을 받은 마이코가 싱글벙글하며 말했다. 아침 홈룸에서 담임 선생님도 기쁜 목소리로 자랑스러워하셨다. “우정이란 친구의 부정을 감춰 주는 것이 아니야. 이 반은 그것을 잘 알고 있어.”

 

부정이라니. 내가 무슨 부정을 했단 말이지?

 

가즈키는 입술을 깨물었다.

 

노리코는 역시 대단해.”

 

홈룸이 끝나고 1교시 수업을 위해 과학실로 이동하면서 유미코가 감탄한 듯 말했다.

 

으응, 그래. 정말 대단한 거 같아.”

 

가즈키는 동의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절대로 노리코에 대한 험담은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노리코는 모범적인 아이야.” 레이카도 한마디 덧붙였다.

 

그러게, 노리코가 제대로 지적하지 않았다면 우리도 모두 반성문을 썼겠지. 노리코처럼 싫은 소리도 할 수 있는 아이는 반을 위해서 필요한 존재야.”

 

리호 역시 맞장구를 쳤다.

 

필요한 존재라…….

 

정말 그런 걸까? 노리코는 무조건 옳고 잘못한 건 불만을 품은 사람이란 말인가?

 

가즈키는 그나마 노리코의 험담을 하기 전에 이렇게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털어놨다면 그룹에서 제명되는 건 가즈키 쪽이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된 거 오히려 잘된 일이야.

 

낫칭이나 토모코, 그리고 나. 노리코는 친한 사이든 아니든 관계없이 공평하게 바른 소리를 했어. 그렇게 우정에 휩쓸리지 않고 분별력 있는 행동을 했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야. 역시 노리코는 우리들의 자랑거리였어.

 

그렇게 마음을 고쳐먹은 가즈키는 새로 맞춘 교복의 대금 3만 엔을 내러 교무실로 갔다.

 

교직원실에 들어가니 벽에 붙어 있는 낡은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단발머리에 교복 차림을 한 여학생의 흑백 전신상이었다. 그림 옆에 앞머리의 길이와 머리카락의 색, 스커트의 길이, 양말의 길이와 색 등이 세세하게 적혀 있었다.

 

그것은 모범 학생의 그림이었다. 학생 수첩에도 그 그림의 축소판이 실려 있었다.

 

가즈키는 포스터를 응시하며 생각했다.

 

, 그렇구나. 노리코를 어디서 봤는지 이제 겨우 알겠네. 노리코는 이 모범 학생의 그림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어.

 

 

~ 5회에 계속 ~


*출간 전 연재는 총 10회까지 진행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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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안에 노리코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중년 남자는 황급히 몸을 비틀어 보았지만, 도망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움츠리며 고개를 숙였다. 여성 승객이 많았던 차 안에서 박수와 갈채가 터졌고, 노리코는 치한이 성추행하는 현장을 찍은 카메라와 함께 남자를 경찰에 넘겼다.

 

이 이야기는 금방 학교 안에 퍼졌다. 그녀는 교장으로부터 표창도 받고 경찰로부터 감사장도 받았다. 물론 누구보다도 감사했던 사람은 가즈키였다.

 

정말 고마워.”

 

가즈키는 어머니와 함께 노리코의 집에 방문해 과자가 든 선물 상자를 전하며 감사 인사를 했다.

 

이런 건 받을 수 없습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데요.”

 

노리코는 의연한 태도로 절대 선물 상자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곤란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던 가즈키와 그녀의 어머니에게 성실한 공무원 인상을 가지고 있는 노리코의 아버지가 말했다.

 

아내가, 그러니까 노리코의 엄마가 잘못된 것을 무척 싫어했어요. 언제나 옳은 일을 해야 한다며 엄격하게 훈육을 해 왔습니다. 예전에는 노리코가 반발을 하기도 했죠. 그런데 2년 전에 통금 시간이 넘었는데도 돌아오지 않는 노리코를 찾으러 나간 아내가 차에 치여서 그만…….”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는 불단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영정 사진 속엔 노리코를 똑 빼닮은 단발머리의 중년 여성이 있었다.

 

음주 운전에 의한 사고였지만, 통금 시간을 어긴 자신 때문이라고 후회도 했었겠죠. 그 이후 노리코 역시 잘못된 것을 철저하게 증오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항상 바르지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치한이라는 비열한 범죄 행위를 적발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에 대한 사례를 받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재차 권해 봤지만 노리코가 역시 거절했기 때문에 억지로 선물을 떠넘길 수도 없고 해서 가즈키와 그녀의 어머니는 다시 한 번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선물을 도로 집어넣었다.

 

어쨌든 노리코는 정말 강직한 학생이네. 카메라도 가지고 있었다니 역시 대단해.”

 

가즈키 어머니가 진심을 담아 칭찬했다.

 

당시에는 디지털 카메라가 아직 보급되어 있지 않았다. 물론 핸드폰에 카메라 기능도 없던 시절이니 그런 사진을 찍는다는 것 역시 특별한 일이었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항상 카메라를 몇 개 정도 가지고 다닙니다. 주로 일회용 카메라예요. 치한뿐 아니라 도둑질을 하거나 학대하는 경우에 증거가 중요하니까요. 정의를 위해서 저는 절대 그들이 빠져나가게 두지 않습니다.”

 

언제나 무표정하던 노리코가 그때만은 미소를 보였다. 갑자기 생생한 표정과 함께 뺨이 상기되면서 눈이 반짝였다. 가즈키는 약간 놀라긴 했지만 그만큼 노리코가 정의에 불타고 있다는 생각에 감탄했다.

 

정말 훌륭한 아이야.”

 

집에 돌아오는 길에 가즈키의 어머니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노리코를 칭찬했다.

 

그렇죠? 정말 존경스러운 친구예요.”

 

노리코는 정말 대단하고 우리의 훌륭한 자랑거리야.

 

가즈키는 그녀와 친구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덩치에 걸맞지 않게 깡충깡충 뛰며 걸었다.

 

가즈키가 그런 노리코가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끼게 된 것은 그로부터 얼마 후였다.

 

SNS나 핸드폰도 없던 그 당시, 대부분의 여자애들은 수업 시간에 쪽지 돌리기를 했다. 선생님 말씀을 듣는 척하면서 연애 상담이나 가족에 대한 푸념, 노래방에 같이 갈 사람 모집 등 쉬는 시간에 해도 되는 얘기들을 쪽지에 적어서 몰래 돌리며 스릴을 느끼는 재미에 열중하게 되었다. 또한, 당시에는 쪽지나 일기를 교환하는 것이 우정을 쌓는 방법 중 하나여서 여학생들에게는 나름 소중한 것이었다.

 

 

 

고등학생이 된 지 두 달이 조금 넘어 첫 중간고사를 치르면서 친구 관계가 한층 긴밀해지게 되었다. 그날도 수업 중에 몇 명이 노트 필기를 하는 척하면서 쓴 쪽지를 귀여운 모양으로 접어서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가즈키도 뒤에서 쪽지가 넘어오면 전달해 주기도 했고 유미코로부터 온 쪽지에 답장을 써서 넘기기도 했다.

 

때마침 수학 시간이라 담당 여자 선생님이 지루한 설명을 하면서 칠판에 공식을 쓰고 있었다.

 

선생님!”

 

수업이 중간 정도 진행되고 있었는데 노리코가 갑자기 손을 번쩍 들고 일어섰다. 우등생인 노리코가 모를 리 없는 수학 공식을 보고 질문을 하다니 이상하네, 라고 생각하던 가즈키는 유미코에게서 온 쪽지의 답장을 쓰고 있었다. 다른 학생들도 노리코의 행동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은 채 몰래 쪽지 쓰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수업 중인데 쪽지가 돌아다닙니다.”

 

?

 

가즈키는 고개를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노리코는 손에 흰색 종이쪽지를 들고 있었다.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시선을 노리코에게 집중했다.

 

, 쪽지?”

 

수학 선생님이 눈썹을 치켜 올리며 물었다. 그러더니 노리코의 자리로 다가가 그녀가 들고 있던 리포트 용지를 네 번 접은 쪽지를 건네받았다.

 

누구지, 수업 시간에 이런 짓 한 사람이?”

 

쪽지를 높이 들고 교실 안의 학생들을 둘러보았지만, 모두들 시치미 떼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가즈키와 유미코, 리호, 레이카는 멍한 표정으로 노리코를 바라보았다.

 

잠깐, 잠깐만……, 왜 그러는 거야, 노리코?

 

선생님.”

 

노리코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어봤자 자백할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건 그렇겠지.”

 

선생님은 쓴웃음을 지으며 반 학생들에게 말했다. “어쨌든 이건 압수야. 누군지 짐작이 가는 사람은 나중에…….”

 

거기까지 말하고 있는데, 노리코가 선생님의 손에서 쪽지를 잽싸게 낚아채 갔다.

 

낫칭, 무라모토는 아직 솔로가 맞는 거 같아. 걔는 여성스러운 아이를 좋아한대. 낫칭, 머리를 길러 보는 게 어때? 오늘, 그 애 동아리 활동이 끝나는 거 같이 기다려 보자! 토모코가 보냄.”

 

노리코가 멋대로 쪽지를 펼쳐 낭독해 버리자 교실 전체가 얼어붙었다.

 

노리코, 너무해!”

 

낫칭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미야하라 나치가 울음을 터뜨리며 교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낫칭, 기다려!”

 

쪽지를 썼던 시라키 토모코가 황급히 그녀의 뒤를 쫓아 나갔다. 리놀륨 바닥의 복도 위를 뛰어가는 실내화 소리가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갔다. 쪽지의 내용에 나온 남학생인 무라모토 히로시는 자기 자리에서 얼굴이 벌겋게 된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노리코는 쪽지를 다시 접으면서 환한 표정으로 말했다.

 

선생님, 수업 시간에 쪽지를 주고받은 것 외에 수업 거부라는 죄도 추가되었습니다. 적절한 처분을 부탁드립니다. 이제 수업을 계속 진행해 주세요.”

 

노리코가 자리에 앉자 분위기에 압도되어 있던 수학 선생님도 평정을 되찾고 헛기침을 했다. 순찰 중이던 다른 선생님과 마주쳤는지, 교실 밖에서 미야하라의 우는 소리와 함께 양호실에 가는 길입니다.”라고 하는 토모코의 목소리가 들렸다.

 

, 그럼 수업을 계속하자.”

 

수학 선생님은 다시 교단으로 돌아가 칠판에 공식을 이어서 썼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노리코의 등 뒤에서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노리코가 뒤돌아보자 모두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에 같은 반 애들이 노리코에게 보내는 차가운 시선이 불편해서 가즈키 그룹은 옥상으로 이동했다. 같이 도시락을 먹고 있었지만 유미코, 리호, 레이카까지도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대로 두면 어색한 분위기 때문에 이들 그룹은 붕괴될 것 같았다. 일단 노리코 본인의 입으로 직접 듣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가즈키는 과감하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도대체 왜 그랬던 거야?”

 

왜라니? 쪽지가 나한테 와서 적절하게 대처한 것뿐인데.”

 

노리코는 밥을 먹으면서 태연스럽게 대답했다.

 

그렇다 해도 꼭 선생님한테 일러바치지 않아도 됐잖아.”

 

일러바치다니, 선생님에게 보고하는 것은 당연 일 아니야? 내가 뭘 잘못한 거지?”

 

그게 그러니까…….”

 

가즈키는 당혹스러웠다.

 

쪽지를 돌리는 건, 누구나 하는 거잖아.”

 

그래? 가즈키도 해? 설마, 유미코하고 너희들도?”

 

노리코가 눈살을 찌푸리자 당황한 네 사람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리는 그런 거 안 해.” “그래, 맞아.” “물론 안 하지.”

 

사실은 모두 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얼버무렸다. 그녀들은 부정하는 자신들이 멋쩍은 듯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쪽지를 모두들 앞에서 읽는 것은 좀 그랬지 않니?”

 

조심스럽게 말하는 리호를 노리코는 의연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잘못을 한 쪽이 나쁜 거 아니야? 게다가 내용을 읽어 보지 않으면 쪽지가 누구 건지 알 수 없잖아.”

 

하지만…… 결국 낫칭을 울리고 말았잖아.”

 

유미코도 머뭇머뭇하다가 한마디 거들었다.

 

울 정도라면 처음부터 그러지 말았어야지.”

 

잘못된 것을 따지자면, 마음대로 편지를 읽은 쪽은 어때? 사생활 침해 아니야?”

 

가즈키의 단호한 말에 리호와 레이카도 그래그래, 하고 맞장구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봉함된 편지가 아니기 때문에 만약 그 둘이 고소를 해도 사생활 침해죄에 해당되지 않아. 게다가 그때는 나에게 전달돼 있었으니까 나는 그것을 읽을 권리가 있었어. 나는 옳은 일을 한 거야.”

 

노리코의 말은 빈틈이 없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더 이상 반박을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 맞다. 혹시…….”

 

 

~ 4회에 계속 ~


*출간 전 연재는 총 10회까지 진행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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