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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노리코가 다부치 씨의 전처에 대해 알고 있지?

 

전과 때문이기도 하지만 현재 유흥업소에서 일하고 있어서 가즈키는 그녀에 대해서는 책에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것이 협조해 주는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그게, 그게 어쨌다는 건데?”

 

가즈키는 당당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당시 두 살짜리 아들이 있었다고 들었어. 다부치 씨가 매일같이 비난을 받자 시호 씨는 노이로제에 시달리게 되었고, 결국 이혼 신고를 한 다음 아들을 남기고 자취를 감추었지. 다부치 씨가 복역 중일 때는 다부치 씨의 부모님이 그의 아들을 돌보았고, 출소한 뒤에는 다부치 씨와 함께 살고 있고…….”

 

노리코는 빼곡하게 적어 놓은 메모를 읽었다.

 

대단한 취재력이야. 노리코야말로 저널리스트가 적성에 맞는 거 아닐까?”

 

에이~, 설마.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는 돈의 내용을 참고해서 취재원을 돌아본 것뿐이야. 가즈키와는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라고 했더니 다들 자세하게 얘기해 주더라.”

 

노리코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아 참, 그래서…… 다부치 씨는 출소 이후 누구에게도 거처를 밝히지 않고 살고 있었지. 하지만 전처인 시호 씨는 친권을 찾는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변호사에게 의뢰해 다부치 씨의 호적과 주민등록표를 조사할 수 있었다고 하더군.”

 

가즈키는 자신의 얼굴이 굳어 있는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거기까지 알아낼 수 있는 거지?

 

그렇다고 해도, 위법은 아니잖아. 제대로 절차를 밟았으니까 말이야.”

 

가즈키는 끝까지 강하게 밀어붙였다. 자신은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다고 자신했다.

 

보통의 경우라면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시호 씨는 성매매 유흥업소에서 일하면서 각성제 사용 전과까지 있어. 친권을 되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가즈키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 그녀는 친권을 되찾는 소송을 걸 수 있다는 것조차 몰랐는데, 가즈키가 귀띔을 해 주면서 유도를 했겠지. 그리고 줄곧 아들을 두고 온 것을 후회하고 있던 시호 씨는 그 미끼를 덥석 물었을 테고 말이야.”

 

노리코가 노트에서 얼굴을 쑥 들어올렸다. 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가 마치 노리코의 몸에서 나는 기계의 소음처럼 느껴졌다. 가즈키는 그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시호 씨의 상태로는 아무리 소송을 걸어도 친권이 돌아갈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워. 가즈키가 그것을 모를 리가 없잖아. 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를 부추겼어. ,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미끼로 가즈키의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 시호 씨를 이용한 거야.”

 

노리코의 메마른 목소리가 거실 안에 울려 퍼졌다.

 

어떻게 그런 것을…….”

 

시호 씨 본인에게 들었어. 가즈키가 아드님을 되찾을 수 있다고 했다고.”

 

물론 조금 억지스러운 방법이었을 수는 있어. 하지만 위법은 아니잖아.”

 

노리코의 시선이 다시 노트로 돌아갔다.

 

시호 씨가 의뢰한 변호사 미키 유타카 씨. 이 사람, 가즈키가 대학 시절부터 아는 사이였지? 책에 있는 감사의 말에 법률 감수도 받았다고 되어 있던데.”

 

그런데, 그게 뭐?”

 

시호 씨는 변호사 비용으로 20만 엔을 지불했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가즈키와 미키 변호사가 공모해서 돈을 얻기 위해 승산이 없는 재판을 부추긴 것이 돼. 개인 재산을 침해한 것이라면 사기죄가 성립될 가능성이 있어.”

 

거침없는 노리코의 말에 가즈키는 마치 차가운 얼음 덩어리를 집어삼킨 느낌이 들었다.

 

누가 겨우 20만 엔 때문에 그런 일을 해. 미키는 내 저널리스트 정신을 응원해 주고 싶어서 협조했을 뿐인데. 그는 전혀 잘못한 게 없어. 나 때문에 미키가 피해를 입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돼.

 

맞아. 네 말대로 나는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시호 씨에게 친권 회복 신청을 권했어. 하지만 미키 씨는 관계없어. 그는 그런 나의 속셈 같은 건 모르고 일을 처리해 준 것뿐이야.”

 

그래? 그러면 미키 변호사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노리코는 붉은색 펜으로 노트에 무언가를 적었다.

 

그렇다면, 가즈키는 다부치 씨가 있을 곳을 찾아낼 목적으로 시호 씨에게 무리한 소송을 권유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거야?”

 

노리코가 가즈키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물었다. 그 시선은 가즈키의 머리에서 발끝까지 스캔하는 전자 음의 환청이 들릴 정도로 차가웠다.

 

, 그게…….”

 

더 악랄한 방법으로 정보를 얻는 기자와 언론인들도 많다. 그 가운데 그녀의 방식은 점잖은 편에 속했다. 가즈키는 그렇게 말해 주고 싶었지만, 단념했다. “다른 사람도 하는 짓이니까 괜찮다는 거야?”라며 따지고 들 것이 불을 보듯 빤하기 때문이었다.

 

노트와 펜을 가방에 넣고 있는 노리코에게 가즈키는 서둘러 덧붙였다.

 

나는 반성하고 있어. 시호 씨에게는 정말 잘못했다고 생각해.”

 

그래? 그럼 그 말도 시호 씨에게 전해 줄게.”

 

전한다고? 시호 씨에게? 그게 무슨 말이야?”

 

친권 소송, 아직 계류 중이래.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는 돈이 출판되고 다부치 씨가 무죄라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그 영향으로 시호 씨가 아들을 되찾을 가능성은 더 줄어들었지. 그래서 시호 씨, 충격 받았대. 가즈키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래서 네가 불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소송을 하도록 부추긴 것 때문에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고 고소할 거래.”

 

? 뭐라고?

 

 

바로 그때, 번쩍이는 천둥 번개의 섬광이 방 안을 구석구석까지 비추더니, 어딘가 가까운 곳에서 굉음이 울렸다. 그 빛은 노리코의 무표정한 얼굴과 매끄러운 피부를 하얗게 비추었다.

 

다케시타 요이치 상의 사무국에도 알려야 할 텐데, 오늘은 아무도 없겠구나.”

 

노리코는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말을 이었다.

 

주말이 끝나고 평일에 전화해 봐야겠어.”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서 이 책을 썼는지는 노리코도 알고 있잖아.”

 

심혈을 기울였다고 해서, 잘못을 저질러도 괜찮다는 것은 아니잖아.”

 

부패한 정치인의 정치 생명을 종결시켰단 말이야. 그런 남자가 총리의 자리에 앉게 되는 것을 막았다고.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니?”

 

의미 있는 일을 위해서 작은 악행은 해도 된다는 거야?”

 

악행이라니, 그렇게 불릴 정도로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노리코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런 생각 자체가 잘못된 거야. 그게 문제라고. 그런 사람이 저널리스트라고 불릴 자격이 있을까?”

 

가즈키는 피가 거꾸로 솟았다.

 

어째서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일까. 아무것도 모르면서. 노리코는 이런 식으로 나를 규탄하는 것이 도대체 뭐가 좋은 걸까.

 

가즈키는 그때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협박 전화의 범인을 찾아 준 것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었음을. 노리코는 단순히 범인을 찾아서 벌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가즈키는 과거에 노리코의 정의때문에 인생을 망치게 된 사람들을 떠올렸다.

 

결국 나도 그 사람들 중 하나가 되는 것일까. 선악으로만 세상을 판단하고 사람의 기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노리코는 역시 마음이라는 것이 없는 차가운 사이보그였어. 사무국에 이 사실이 알려지면 당연히 후보 자격은 박탈당할 거야. 그런 재수 없는 작품에 상을 줄 리가 없잖아. 업계에도 소문이 날 거고, 앞으로 일도 하기 힘들어지겠지. 내가 기획한 책을 내 줄 출판사가 있기는 할까. 아니, 그전에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는 돈을 출간해 준 가에데 출판사가 곤란해질 거야.

 

가즈키는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환한 표정을 짓던 편집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

겨우겨우 큰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노리코는 자료를 전부 캐리어 백에 다시 넣은 다음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음 주는 시작부터 바쁘겠네. 시호 씨에게 보고하고, 사무국에도 연락하고……. 가즈키도 준비하고 있는 게 좋을 거야.”

 

노리코, 생각을 바꾸면 안 되겠니?”

 

그건 안 돼. 이것은 부정을 바로잡기 위한 거야. 정의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거니까.”

 

노리코는 스스로가 자랑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힘주어 말했다. 그리고 씩씩한 발걸음으로 현관으로 가더니 레인 코트를 걸쳐 입었다. 가즈키는 멍하니 서서 그런 노리코를 보고 있었다.

 

그럼, 내일 점심 모임에서 보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환한 표정을 지으며, 노리코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갔다.

 

또다시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창밖을 보고 있던 가즈키는 앉아 있던 소파로 돌아갔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연보라색 초대장을 커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후, 소파 위에 다리를 올리고 무릎을 감싸면서 몸을 둥그렇게 만들어 웅크렸다.

 

그날 밤에도, 노리코가 떠난 다음에 이렇게 무릎을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점심 모임에 가고 싶지 않아, 두 번 다시 노리코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하며 분통함에 눈물을 흘렸다.

 

이대로 두면 작가로서의 내 인생은 끝나고 말 거야. 어떻게 든 노리코를 설득해야 해. 점심 모임이 끝나면 다시 한 번 얘기해 보자.

 

그렇게 결심한 가즈키는 다음 날 점심 모임 장소로 향했다.

 

그리고…….

 

가즈키는 초대장의 발신인의 이름을 다시 한 번 천천히 내려다보았다.

 

그날, 나는 노리코를 죽였어.

 

눈이 부실 정도의 섬광이 번쩍이더니, 천둥소리가 가즈키의 귀청을 찢을 듯이 울렸다.

 

 

 

~ 연재 끝 ~

 

* 이후이 이야기는 아래의 표지 그림을 클릭하여 단행본에서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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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실 정도로 눈앞이 새하얗게 빛났다. 가즈키는 움찔 놀라면서 손에 들고 있던 초대장을 떨어뜨렸다. 창밖은 어느새 회색빛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강한 바람에 나무가 흔들렸고, 세차게 내리는 비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베란다에 부딪치고 있었다. 우르릉 쾅, 하고 지축을 울리는 천둥소리에 이어, 좌악좌악하며 하늘을 찢는 듯한 빗소리가 들렸다.

 

가즈키는 천천히 일어나서 베란다 쪽 창문을 잠갔다. 베란다 바깥쪽에는 폭풍우에 흔들리는 거리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랬다.

 

5년 전.

 

노리코가 마지막으로 이 집에 왔던 날.

 

그날도 이렇게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었다.

 

가즈키와 노리코와의 관계는, 그녀가 각고 끝에 출간하게 된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는 돈불법 정치 자금 사건의 진실이 우수 논픽션 작품에 수여되는 타케시타 요이치 논픽션 상의 후보에 오르게 된 것을 계기로 완전히 일그러지게 되었다.

 

가즈키는 힘들게 찾아낸 전처를 통해서 겨우 다부치 본인과 접촉하는 데 성공했고, 집요한 설득 끝에 진실주범은 야마모토라는 사실을 밝혀 낼 수 있었다. 비록 공소 시효가 지나서 법적으로 죄를 추궁할 수는 없었지만, 야마모토의 범법 행위를 파헤친 가즈키의 책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국민들의 비난이 쇄도했고, 차기 총리로 거론되었던 그는 실각되면서 정치 생명까지 잃게 되었다.

 

타케시타 요이치 논픽션 상은 신문사가 주최하고 있으며, 후원으로 방송사와 영화사까지 참여하고 있다. 지금까지 수상작은 대부분 TV 드라마 또는 영화로 만들어졌고, 저자는 시사평론가로서 각종 매체에서 활약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수상 경력은 앞으로 내게 될 책 출간의 발판이 되기도 하며, 선인세의 비율을 조정할 수 있는 협상 자격도 주어지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큰 이점은 취재 상대가 신뢰해 준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대형 출판사의 명함이 있었지만, 독립한 다음부터는 취재 대상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이면서 솔직하게 말해 주지 않는 것은 물론, 만나는 것조차 거절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수상을 하게 되면, 그동안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았던 문들이 열리게 될 것이다. 포기하고 있었던 거물급 인사에게 접근할 기회가 생길 수도 있었다.

 

수상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은 가즈키는 그야말로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2년 동안 이 사건을 뒤쫓으며 고생했던 게 드디어 인정받게 된 것이다. 그녀는 즉시 가족에게 전화해 이 기쁜 소식을 전했으며 유미코, 리호, 레이카, 노리코에게도 일제히 메일을 보냈다.

 

가장 먼저 노리코로부터 답장이 왔다. ‘우선은 축하해.’라고만 쓰여 있었다. 가즈키는 우선은이라는 말이 거슬리긴 했지만, 이어지는 축하 전화와 메일 덕분에 그에 대한 의문은 곧 머릿속 한구석으로 밀려나 버렸다.

 

노리코가 그렇게 말한 것에 대한 의문이 풀린 것은 그로부터 1주일 정도 지난 후였다.

 

그전에, [지금 찾아가도 괜찮아?] 하고 노리코로부터 전화가 왔었는데, 가즈키는 해야 할 일이 좀 밀려 있어서 만날 수 있는 날짜를 다시 잡아 보자.”고 답했다.

 

그러다가 일곱 번째 점심 모임의 바로 전날, 가을에 찾아온 태풍 때문에 비가 억수로 내리는 날인데도 불구하고 노리코가 일부러 집에 오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가즈키는 노리코가 미리 축하해 주고 싶어서 그러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흔쾌히 승낙했다.

 

오늘은 다음 책 기획을 구상하는 일밖에 없으니 언제라도 괜찮아. , 선물로 받은 와인이 이 있는데 괜찮다면 같이 마시자.”

 

그렇구나. 일단 그건 도착해서 생각해 볼게.”

 

전화를 끊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보니, 통화할 때 노리코의 목소리가 딱딱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후보에 오른 것 때문에 들떠 있던 가즈키는 노리코의 말투가 원래 그렇지 뭐, 하며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부랴부랴 어질러진 거실을 치우기 시작했다.

 

 

 

한 시간 정도 지나자 노리코가 찾아왔다. 흠뻑 젖은 레인 코트를 입은 노리코의 발밑에는 캐리어 백이 두 개 놓여 있었다.

 

어머, 도대체 뭘 가져온 거니? 후보에 오른 것뿐인데……, 수상하지 못하면 위로 파티라도 해야 할 거 같아.”

 

칠면조 바비큐라도 가져온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의 가방 크기에, 가즈키의 목소리는 저도 모르게 들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로스트비프일지도 몰라. 아마 오르되브르와 치즈도 들어 있겠지, 하고 가즈키는 생각했다.

 

, 혹시 차게 보관해야 하는 거야? 우리 집 냉장고에 들어가려나.”

 

레인 코트를 벗어서 현관 벽에 걸고 있는 노리코 옆에서 가즈키는 비에 젖은 캐리어 가방을 수건으로 닦았다. 그리고 그것을 방 안으로 옮기려고 들어 올렸는데, 생각보다 무거워서 내려놓을 때는 쿵 소리가 났다. 그것은 칠면조와 로스트비프 정도의 무게가 아니었다. 눈으로 본 크기에 비해 결코 평범하지 않은 중량감이 느껴졌다.

 

잠깐, 이거 뭐가 들어 있는 거야?”

 

설마 트로피나 상패 같은 것은 아니겠지, 하고 가즈키는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의아한 표정으로 노리코를 거실로 들어오라고 한 그녀는 가까스로 들어 올린 캐리어 가방을 러그 위까지 옮겨 놓았다.

 

그럼 와인 한잔할까? 치즈도 잘라 놨는데 먹어 볼래? 다 먹고 나서 차 한 잔 괜찮지?”

 

냉장고를 열어서 확인하고 있는 가즈키의 등 뒤에서 노리코의 짧은 대답이 들려왔다.

 

난 아무거나 상관없으니, 알아서 해.”

 

가즈키가 뒤를 돌아보니 소파에 걸터앉은 노리코가 작은 물통을 꺼내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왔지? 축하하러 온 게 아닌가?

 

가즈키는 그때서야 겨우, 노리코에게서 조금도 축하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축하하러 온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가즈키는 노리코의 발밑에서 이상한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는 커다란 두 개의 가방으로 시선을 옮겼다.

 

저 가방들은 도대체 뭘 넣은 거지?

 

은근슬쩍 기분 나쁜 예감이 가슴속 깊이 스며들었다.

 

가즈키는 일단 자신의 잔에만 와인을 따른 다음 노리코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조금 전까지 축하해 줄 것이라고 들떠 있던 스스로를 원망하며.

 

불길한 예감을 진정시켜 보자는 생각에 와인을 홀짝거리는 가즈키의 눈앞에서 노리코가 가방의 파스너를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꺼내어 하나둘씩 커피 테이블 위에 쌓아 놓은 것은 가즈키가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는 돈에서 사용한 참고 자료들이었다.

 

그 책의 참고 문헌은 권말에 열거되어 있었다. 그 수는 30권 이상이었는데 사전같이 두꺼운 서적도 있었다. 노리코는 그런 책들을 차례차례로 가방에서 꺼내고 있었다.

 

이 책들을 전부 가져왔다는 말이야? 도대체 무엇 때문에…….

 

노리코……, 어째서 이 책들을 다…….”

 

가즈키가 제대로 올바른 절차를 밟고 집필했는지 확인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래서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는 돈이 출간된 다음부터 조금씩 참고 문헌들과 대조하고 있었는데, 논픽션 상의 후보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서 검증을 끝냈지.”

 

할 말을 잃은 가즈키가 멍한 표정을 짓는 사이, 가방에서 자료를 다 꺼낸 노리코는 노트를 몇 권 꺼내더니 그중에 하나를 펼쳤다. 노트에는 전 페이지에 걸쳐 무언가 잔뜩 적혀 있었다.

 

먼저 제1, 1페이지에서 5페이지에 걸친 사건의 개요는 참고 문헌에 있는 불법 정치 자금 사건을 참고한 거잖아.”

 

, 그렇다고 봐야지. ……그래서?”

 

그리고 6페이지에서 12페이지까지는…….”

 

노리코는 이런 식으로 장황하게 자료와 본문 확인 작업을 해 나갔다. 이 정도로 세세한 확인 작업은 담당 편집자도 좀처럼 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즈키는 그다지 걱정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저작에 관해 절대적인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도용도 하지 않았으며, 특정의 누군가를 상처 입힐 수 있는 무책임한 억측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노리코의 정의 레이더에 걸릴 걱정은 없었다. 직성이 풀릴 때까지 실컷 확인해도 상관없었다. 다만, 모든 자료를 읽고 본문과 대조하고 그 출처를 이 방대한 자료 속에서 찾아내는, 가히 초인적이라고 할 만한 노리코의 노력은 역시 사이보그를 떠올리게 하여 등골이 오싹해졌다.

 

가즈키는 와인을 마시면서 적당히 대답했다. 솔직히 어느 부분에 어느 문헌을 참고했는지는 아무리 저자라고 해도 전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 한 줄의 글에 많은 문헌들을 참고한 결과가 압축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치즈와 함께 크래커를 먹으면서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다 보니 알딸딸하게 취기가 올랐다.

 

노리코의 확인 작업은 다섯 시간이 지나자 겨우 마지막 페이지까지 끝낼 수 있었다. 밤은 완전히 깊었고 점점 더 거세진 빗방울이 유리창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참고 문헌의 이용은 제대로 된 것 같군.”

 

노리코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어.”

 

가즈키는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그녀를 치하했다.

 

아직 끝난 게 아니야. 그 외에도 확인할 게 있거든.”

 

노리코는 다른 노트를 펼쳤다.

 

다부치 씨를 만나게 된 부분에서 말인데, 어떻게 접촉할 수 있었지?”

 

그거야 뭐…… 발품을 팔았지.”

 

가즈키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랬다. 이 책이 높은 평가를 받은 가장 큰 부분은 끈질긴 노력 끝에 다부치 본인과 접촉해 새로운 증언을 얻어낸 것이었다.

 

1장에 보면, 갑자기 다부치 씨의 핸드폰으로 가즈키가 전화를 해서 그가 무척 놀랐다고 되어 있지. 다부치 씨의 입을 통해서 진실을 듣고 싶다고 열심히 설득했고, 결국 진실을 들을 수 있었다고.”

 

그래, 그랬었지.”

 

그 얘기는 본인이 스스로 가즈키에게 전화번호를 알려 준 것이 아니라는 말이잖아. 그렇다면 전화번호를 입수한 방법에 위법성이 있었던 거 아니야?”

 

뭐야, 그런 걸 노리코가 걱정하고 있었어?”

 

가즈키는 후훗, 하고 웃었다.

 

물론, 전화 회사의 직원을 매수해서 개인 정보를 입수하는 작가도 있다고 들었어. 하지만 나는 그런 짓은 하지 않았어. 제대로 된 경로를 통했다는 얘기지.”

 

자신 있어 하는 가즈키 앞에서 노리코는 노트를 넘긴 다음, 새로운 메모를 확인했다.

 

제대로 된 경로란, 전처인 오카모토 시호 씨를 말하는 거야?”

 

가즈키는 가슴이 철렁했다.

 

~ 10회에 계속 ~


*출간 전 연재는 총 10회까지 진행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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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것이라는 가즈키의 생각은 3주 후 노리코와의 재회로 무참하게 무너졌다.

 

어느 날 아침, 아파트를 나서는데 그녀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 드디어 찾았다. 아무리 전화해도 연결이 안 돼서 걱정했는데.”

 

이 애는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걸까?

 

가즈키는 아주 진절머리가 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근처의 역을 향해 서둘러 걸었다.

 

가즈키, 메일 확인해 봤어?”

 

노리코가 쫓아가면서 물었다.

 

못 봤어.”

 

노리코의 메일 주소도 스팸 메일로 등록해 두었기 때문에 수신함에서는 제외되어 있었다.

 

협박 전화를 건 사람은 니시무라 야스유키야.”

 

……?”

 

가즈키는 무심코 걸음을 멈추었다.

 

“3년 전, 잊혀진 사건 시리즈에서 미성년자 매춘으로 붙잡혔던 배우에 대해서 쓴 적이 있지? 바로 그 남자야.”

 

가즈키는 자신 있게 얘기하는 노리코를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았다.

 

, 잠깐만, 지금 뭐라고 했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모처럼 다시 연예계에 복귀했는데 과거가 들추어진 것에 화가 나서 그만 협박 전화를 하게 되었다고 하더라.”

 

……. 하지만……, 노리코가 어떻게 그걸…….”

 

협박 전화가 시작된 것이 2년 전이라고 했지? 그래서 그 이전의 잊혀진 사건 시리즈에 나왔던 사람들을 찾아가 봤어. 복역 중인 사람들은 빼고 말이야.”

 

2년 전까지 그녀는 일곱 권을 간행했다. 각 권의 소재가 되었던 일곱 명 중에 사회로 복귀한 사람은 세 명이었다. 아이를 학대하다가 사망에 이르게 한 아나운서, 대마초를 재배했던 여자 아이돌, 그리고 해외에서 상습적으로 미성년자 성매매를 해 왔던 배우.

 

모두 남몰래 복귀해서 개인 사무실을 차렸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어. 그리고 그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이마무라 가즈키에게 협박 전화를 걸지 않았는지 물어봤지. 물론 처음에는 아무도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지만, 목소리 감정을 위해 녹음을 요청했더니 세 사람 중 둘은 더 이상 가즈키의 취재 대상이 되어 해를 입고 싶지 않다면서 허락해 줬어. 그런데 니시무라만 다른 반응을 보이지 뭐야.”

 

니시무리는 얼굴색이 변하면서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고 한다.

 

이건 제대로 고소할 수 있어. 형법 222, 협박죄에 해당되고 가즈키가 정신적으로도 피해를 받았다는 것이 증명되면 204조의 상해죄까지 적용될 가능성도 있어.”

 

노리코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가즈키는 옛날부터 자신의 경우가 되면 완전히 젬병이라니까. 치한 사건 때도 그랬잖아. 의외로 마음이 약해서 자기주장도 잘 못 해. 섬세한 성격이라 그렇겠지? 하긴 뭐, 그래서 사람의 마음에 호소하는 글을 쓸 수 있는 것이겠지만 말이야.”

 

그래, 그 말이 맞을지도 몰라. 다들 거칠고 씩씩한 여자로 알고 있지만, 사실 난 언제나 상처도 쉽게 받고 겁도 많은 편이니까. 그런 나를 노리코는 잘 이해하고 있었던 거야. 하지만…….

 

 

 

가즈키는 솔직하게 바로 고마움을 표시할 수 없었다. 이런 도움까지 받았는데, 도저히 고맙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노리코는 나쁜 애가 아니야. 아니, 항상 옳은 일을 하고 있으니까 착한 사람이 틀림없어. 그런데도 자꾸 마음에 걸리는 것은 아량이 부족하기 때문일까? 지금까지 나를 위해 이 정도까지 해 준 사람이 있었나? 고등학교 때뿐 아니라, 어른이 되어서도 이런 도움을 주는 노리코에게 못되게만 굴고……. 인간으로 문제가 있는 것은 노리코가 아니라 나 자신이 아닌가.

 

노리코……, 고마워.”

 

가즈키가 겨우 입을 열어 감사 표시를 하자 노리코가 미소로 답했다.

 

그럼, 내일 점심 모임에는 나와 주는 거지?”

 

내일?”

 

그래~. 가즈키가 감기로 못 나온다고 해서 연기한다고 했잖아.”

 

벌써 3주가 지났다. 노리코와 엮이고 싶지 않아서, 유미코나 다른 친구들에게 연락이 와도 가즈키는 일 때문에 바빠서 못 나간다고 핑계를 대 왔다. 그런데 그 이후로도 계속 모임을 연기하고 있었던 말인가.

 

그럼, 꼭 나가야지.”

 

가즈키는 어쩔 수 없이 참석 의사를 밝혔다. 여기서 또 거절하면 체면이 구겨지기 때문이었다.

 

그 일이 있은 다음부터 가즈키는 빠지지 않고 점심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아무리 바빠도 자신을 도와준 노리코를 위해서 시간을 할애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세 명도 꼭 참석할 수 있도록 신경 썼다. 모임 날이 되어 유미코가 아이들이 감기에 걸렸다고 연락해 왔을 때는 아픈 아이를 돌봐 주는 도우미까지 섭외해 주기도 했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친구들과의 만남은 처음 1년 동안은 순조로웠다. 하지만…….

 

 

~ 9회에 계속 ~


*출간 전 연재는 총 10회까지 진행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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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히 취재를 계속한 가즈키는 다부치의 전처가 동북 지방에 있다는 것을 알아내게 되었다.

 

체포되면서 가정은 붕괴되었고, 전처는 두 살짜리 아들을 두고 집을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어디로 가도 언론에 쫓기다 지친 나머지 숙식을 제공하는 술집에서 일하다가 이제는 유흥업소로까지 전락해 버렸다고 했다. 가즈키는 동북 지방의 유흥업소를 샅샅이 뒤져서 결국 그녀를 찾아내었다.

 

그렇게 취재에 몰두하다 보니 두 달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미안, 감기에 걸려서 못 갈 것 같아. 다들 내 몫까지 재밌게 보내.]

 

점심 모임이 있는 날 아침, 가즈키는 휴대폰으로 전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자 잠시 후, [정말? 많이 안 좋니?], [어머, 못 온다니 아쉽다.], [어서 회복하길.], [그래, 푹 쉬어.] 등의 회신이 왔다.

 

이제 됐다.

 

가즈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침대 위에서 기지개를 켰다.

 

평일인데도 학교를 안 가도 되는 날처럼 묘한 쾌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일 때문에 미뤄 두었던 빨래를 하고 청소기를 돌렸다. 내친 김에 욕조에 낀 묵은 때와 곰팡이까지 제거해 가며 청소를 하고 있는데 벨이 울렸다.

 

가즈키는 인터넷으로 주문했던 자료가 왔나, 하는 생각에 고무장갑을 벗고 서둘러 뛰어가서 응답 버튼을 눌렀다.

 

 

[미안해. 혹시 자는데 깨운 거 아니야?]

 

노리코의 목소리였다. 응답기 너머의 목소리가 합성 음성처럼 들렸다. 가즈키는 목덜미에서 돋기 시작한 소름이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된 거야? 점심 모임에 안 갔어?”

 

[친구가 감기로 앓아누워 있는데 속 편하게 점심을 먹고 있을 수는 없잖아. 그래서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다음 주에 만나기로 약속을 연기했어.]

 

다음 주…….

 

결국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 건가? 이럴 줄 알았으면 오늘 억지로라도 나갈걸 그랬어.

 

가즈키는 갑자기 몸이 납덩이가 된 것 같은 중압감을 느꼈다.

 

[죽을 좀 끓여 줄게. 재료는 내가 사 왔어.]

 

그녀는 할 수 없이 굳은 얼굴로 공동 현관의 잠금 해제 버튼을 눌렀다. 가즈키가 가장 만나고 싶지 않았던 노리코는 안으로 들어오더니 바로 부엌으로 향했다.

 

내 영역에 노리코가 있어. 숨 막히게 불편해. 정의의 사이보그 레이더에 내 생활 공간이 스캔당해 버릴 것 같아.

 

죽이 끓는 동안 키친 카운터를 닦고 있던 노리코가 뭔가 발견한 듯 말했다.

 

! 이 볼펜, 가에데 출판사의 로고가 있네.”

 

? , 그거. 맞아.”

 

솔직히 가즈키는 무슨 펜을 쓰고 있는지 따위는 의식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집에서 일을 할 때는 오로지 노트북밖에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 지급받은 비품이라는 거지?”

 

그럴지도 모르겠네. 일일이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말이야.”

 

하지만, 퇴사한 이후에도 가지고 있으면 업무상 횡령이잖아.”

 

? 겨우 볼펜 하나인데?”

 

회사의 자산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 이것이 현금이었다면 어때? 아무리 10엔이라도 가지고 나오면 안 되는 거 아니야? 그리고 이 메모장도 그래.”

 

노리코가 카운터 위에 있던 메모장을 집어 들더니 가즈키에게 들이댔다.

 

일에 사용되는 것 같지만 아래쪽에는 개인적인 장 볼 거리가 적혀 있어.”

 

가즈키는 성큼성큼 다가가서 노리코가 들고 있던 메모장을 낚아챘다. 용지 위쪽에는 취재한 내용들이 갈겨쓴 글씨로 메모되어 있었다. 그리고 같은 페이지 아래쪽 여백에 배추, 구강 청결제, 치약 등등의 단어들이 적혀 있었다.

 

그래서, 이게 어쨌다는 거야?”

 

회사의 경비로 이 메모장을 구입한 거라면 사적으로 이용하면 안 되잖아.”

 

알았어, 알았다고! 그럼 쓴 만큼 정확하게 장부를 조정할게. 이 메모장의 대금에서 이 여백만큼이 1엔이 될지 2엔이 될지 모르지만 빼서 청구하면 되잖아! 볼펜도 반납할 거야. 됐지?!”

 

 

 

가즈키는 메모장을 카운터 위에 내던졌다. 노리코의 눈은 아무런 감정도 없는 카메라 렌즈처럼 가즈키를 향했다.

 

왜 화를 내는 거지? 내가 뭐 틀리게 말한 거라도 있어?”

 

……없어.”

 

가즈키는 틀린 것이 없어서 더 화가 난 것이다.

 

, 죽이 다 됐다. 달걀 풀어서 넣어도 되겠지?”

 

노리코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주방에서 능숙한 솜씨로 죽을 끓였다.

 

, 어서 먹어.”

 

식탁 위에 갓 끓인 죽이 담긴 작은 뚝배기가 놓였다. 거칠게 의자를 끌어다 앉은 가즈키는 수저를 들었다. 먹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맛있는 냄새가 감돌면서 굶주려 있던 위장을 자극했다. 한입 떠먹었더니 익숙하고 부드러운 맛이 혀끝에서 퍼졌다.

 

……맛있어.”

 

그래? 그거 다행이다.”

 

노리코는 이번엔 슈퍼마켓 봉투에서 야채와 닭고기를 꺼내 리드미컬하게 칼질을 했다.

 

닭고기 수프라든가,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거 대충 만들어 놓고 갈게.”

 

노리코가 요리를 하고 있는 사이, 가즈키는 그녀가 만들어 준 죽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전업 주부인 노리코는 어린아이를 키우느라 바쁘고 피곤할 것이다. 그런데 친구가 아프다는 말에 전철을 갈아타고 와 주었다. 슈퍼마켓은 역에서 가즈키의 아파트와는 반대 방향에 있었다. 일부러 거기까지 가서 장을 본 다음에 무거운 짐을 들고 와서 죽을 끓여 준 것이다.

 

그동안 노리코가 한 말과 행동은 백퍼센트 옳았어. 그것을 불쾌하게 느낀 건 아무래도 내가 잘못한 것이기 때문에 생긴 분함에서 기인한 걸까.

 

전화벨 소리에 가즈키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핸드폰이 아니라 집에 있는 전화가 울린 것이다. 가즈키는 죽을 입에 머금은 채 일어나 전화기가 놓여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하지만 전화기의 번호 표시 화면에 공중전화라는 표시가 점멸하는 것을 보고 수화기를 들지 않고 자동 응답기로 넘어가기를 기다렸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년! 너 같은 년은 죽어 버려!”

 

음성 변조기를 사용해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놀란 노리코가 요리 중인 손을 멈췄다.

 

빨리 뒈져 버려! 안 그러면 언젠가 죽여 버릴 거야!”

 

상대는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남기더니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지금 이거 뭐야? 협박 전화?”

 

노리코가 눈썹을 찌푸리며 인상을 썼다.

 

, 신경 쓰지 마. 가끔씩 저런 전화가 걸려 와. 책을 낼 때마다 적이 늘어나서 말이야.”

 

누구한테 온 거야?”

 

알았으면 이미 붙잡았겠지. 경찰에 피해 신고도 했었고 범인의 정체를 몰라도 고소는 할 수 있지만, 공중전화로 한 거라 잡아내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하더라고. , 확실히 기분은 나쁘지만 그렇다고 여태껏 특별한 피해가 있었던 적도 없어서…….”

 

여태껏이라니……. 이런 지 얼마나 된 거야?”

 

얼마나 됐더라. ……, 2년 정도 될까.”

 

그렇게 오래됐어? 공중전화는 착신 거부 설정해 두는 게 어때?”

 

그렇게는 할 수 없어. 공중전화로 정보를 제공해 주는 사람도 있거든. 물론 처음엔 무서웠지.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 짓도 못 하는 약한 인간일수록 비겁하게 전화로만 저런다는 것을 알게 됐어. 그래서 이제는 그냥 담담해.”

 

그런데 어떻게 가즈키의 집 전화번호를 알고 있는 거야?”

 

명함에도 있고, 조금만 조사해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어쩔 수 없어. 잊혀진 사건 시리즈때문에 이름도 얼굴도 팔려서 유명세를 좀 치르는 거지 뭐.”

 

가즈키는 그렇게 애써 웃어넘기곤 자리로 돌아가서 죽을 다시 먹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면 가즈키는 여전히 이런 전화가 올 때마다 기분이 별로 안 좋았다. 그래서 더 이상 죽의 맛을 느낄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협박 전화 정도로 겁먹으면 남성 저널리스트에게 밀리고 만다는 생각 때문에 버텨 왔다. 어느 정도의 짓궂은 언행이나 위험을 각오하지 않으면 여자 혼자서 프리 저널리스트 같은 일은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 오늘 자고 갈게.”

 

요리를 만들고 있던 노리코가 문득 그렇게 말하자 가즈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

 

자고 갈게. 또 협박 전화가 올지도 모르잖아.”

 

노리코가 내 집에서 자고 간다고? 말도 안 돼.

 

아냐, 그래도…….”

 

괜찮아. 딸은 남편한테 맡기면 되거든.”

 

네 사정 같은 건 상관없어. 내가 싫단 말이야.

 

혼자 있지 않으면 일에 집중이 안 되거든. 그래서 고맙지만…….”

 

솔직히 화내면서 내쫓고 싶었지만, 가즈키는 어른답게 꾹 참으며 정중히 거절했다. 하지만 노리코는 자꾸 눈치 없는 소리를 했다.

 

혼자 떠안으려고 하지 않는 게 좋아. 필요하면 내가 일주일 정도 있어 줄 수도 있어.”

 

노리코와 일주일을 지낸다고?

 

가즈키는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찔해졌다.

 

자신의 행동이 모두 옳다는 노리코의 생각, 그리고 자기가 뭘 하든 기뻐할 거라는 태도에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자 가즈키는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혼자 있고 싶다고! 네가 자고 가는 거 싫단 말이야!”

 

일단 한번 터지자 말이 거침없이 나왔다.

 

너와 함께 있고 싶지 않단 말이야. 오늘 점심 약속도 나가기 싫어서 꾀병을 부렸어. 계속 참을 수 없었다고. 딴 사람 약점 찾아내서 잘난 척하며 지적이나 하고 말이야.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오늘도 자기 마음대로 남의 집에 쳐들어오고. 너의 그런 부분을 고등학교 때부터 싫어했어. 다 필요 없으니까, ! 어서 가 버려!”

 

가즈키는 요리하고 있던 노리코의 손에서 조리 도구를 뺏어 내려놓고 핸드백을 들려 현관 밖으로 내쫓은 다음, 도어록을 잠그고 도어체인까지 걸어 버렸다.

 

결국 말해 버렸어. 아무리 싫어하는 인간이라도 이렇게 찾아왔는데 면전에 대고 퍼부은 거, 잘한 짓인지 모르겠네. 그래도 언젠가는 해야 할 말이었어. 후회하지 않아.

 

가즈키는 살짝 흥분한 상태로 어깨를 들썩이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슬쩍 도어스코프로 밖을 내다보니 이미 노리코는 가 버리고 없었다.

 

이제는 점심 모임에 안 가도 되겠지? 다시는 노리코의 얼굴을 보지 않고 살 수 있겠네. 그래, 지금은 사이좋은 친구들 그룹이 필요한 고교 시절이 아니야. 그러니 무리해서 참석할 필요도 없어. 아아, 진작 말해 버릴걸 그랬어.

 

가즈키는 콧노래를 부르며 핸드폰에서 노리코의 번호를 착신 거부로 설정했다.

 

 

~ 8회에 계속 ~


*출간 전 연재는 총 10회까지 진행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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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사회학부에서 공부를 하면서 가즈키는 저널리즘에 눈을 뜨게 되었다.

 

옛날부터 신문을 읽거나 보도 방송을 보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우연히 선택한 수업인 저널리즘론에 재미를 느끼면서 저널리스트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교수님이나 선배들이 권해 준 문헌들을 섭렵했고, 세미나의 과제로 취재한 기사를 정리해서 발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졸업반이 되자 취업을 위해 도쿄의 모든 대형 출판사에 입사 지원을 했다.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정치인 비리, 대기업의 비리,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쓰게 된 사건 등을 언론의 입장에서 철저하게 검증하고 이것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그런 뜨거운 열정으로 면접에 임한 결과, 가즈키는 가장 유력했던 가에데 출판사에 입사할 수 있었다.

 

가에데 출판사는 문예는 물론 저널리즘으로도 인정받고 있는 대형 출판사다. 가즈키는 입사 후 3년 동안 주간지의 정치부에 소속되어 나가타쵸를 취재하기 위해 열심히 다녔다. 그 후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논픽션 서적부에서 새로운 기획에 참여하게 되었다.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이자, 주간지에서 일하는 보람은 있었지만 시간과 정성을 들여서 오랫동안 읽히는 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가즈키는 곧바로 과거의 유명 사건을 새롭게 검증하는 기획을 세우게 되었다.

 

몇 명의 우수한 작가들과 팀을 이뤄서 치바현 유아 연쇄 유괴 살인 사건, 10년 만의 진실엘리트 여자 회사원 살인 사건, 누명은 이렇게 밝혀졌다등을 편집하고 간행했다. 새로운 증인이나 목격자를 찾아내고 증언을 모아 다른 관점에서 사건을 재조명하는 가즈키의 기획은 잊혀졌던 사건 시리즈라는 타이틀로 사람들에게 화제가 되면서 TV 드라마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녀는 그렇게 업계에서 히트 메이커로 인정받으면서 활발하게 활동했고, 그러다 보니 순식간에 8년의 세월이 지나게 되었다.

 

가즈키에게는 꼭 직접 다루고 싶었던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유전 개발권 이익 획득을 위한 불법 정치 자금 사건이었다. 동남아시아에서의 유전 개발권 이익 획득을 위해 한 석유 회사 회장이 당시의 국교상인 야마모토 마모루에게 불법으로 정치 자금을 제공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정계가 떠들썩했었다. 야마모토는 비서가 자기 마음대로 한 짓이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며 발뺌을 했고 증거도 부족했기 때문에 검찰은 그를 입건하지 못했다.

 

게다가 벌써 10년 전의 사건이라 이미 공소 시효도 지나 있었다. 하지만 가즈키는 이 사건을 다시 검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야마모토의 이름이 차기 총리 후보로 거론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이미 불법 정치 자금 사건에 대해서는 잊고 있었다. 아니, 입건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일은 원래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기는커녕 야마모토는 심심치 않게 개그맨이 진행하는 토크쇼에 출연하면서 빠르게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가즈키는 이런 남자가 총리가 되어도 괜찮은 것일까, 지금이야말로 내가 그 사건을 파헤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강하게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기획을 세운 다음, 작가를 따로 찾지 않고 자신의 눈과 발로 취재해서 꼼꼼하게 직접 집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즈키는 찬찬히 이 일에 몰두하고 싶어서 회사에는 사표를 제출했다. 처음에는 붙잡던 상사도 가즈키가 자신의 신념을 말하자 그러면 제대로 한번 해 봐. 우리가 꼭 책을 내 줄 테니까.”라며 응원해 주었다.

 

지금까지도 이 사건을 소재로 한 르포르타주는 있었지만 모두 이미 나온 신문 기사의 내용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것에 불과했다. 가즈키는 실행범으로 알려진 야마모토의 전 비서인 다부치의 이야기를 메인으로 구성하고 싶었다. 다부치는 당시 제가 멋대로 한 짓입니다.”라고 인정해 징역 2년의 판결을 받았고 수수한 것으로 알려진 1억 엔을 추징당했다.

 

정말로 비서의 단독 범행이었을까. 추징된 1억 엔이 사실은 누구의 손에 넘겨진 것일까. 가즈키는 그곳에 사건의 열쇠가 숨어 있다고 생각했다.

 

다부치는 이미 출소했지만 주거지를 전혀 알 수 없었다. 가즈키는 매일같이 조사와 인터뷰로 바쁘게 돌아다니면서도 그의 행방을 찾으며 부지런히 원고를 써 나갔다.

 

그녀가 다가키 노리코와 재회한 것은 그렇게 정신없이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졸업 15주년 기념 동창회를 한다고 연락이 온 것이다.

 

벌써 15년이나 된 거야?

 

숨 가쁘게 지내느라 가즈키는 본가 생각은 별로 하지 못했고, 명절 때조차 거의 가 보지 않았다. 부모님 집에서 보내온 왕복 엽서를 소파에 누워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철야 작업으로 지친 머릿속에 그립고 한가로운 야마나시의 풍경이 떠올랐다.

 

취재로 정신없이 돌아다니기만 했던 살벌한 날들로부터 하루만 벗어나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오랜만에 가족들 얼굴도 보고 동창회도 한번 참석해 볼까.

 

그렇게 마음먹은 가즈키는 수년 만에 야마나시로 향했다.

 

어머, 이게 얼마만이야! 다들 좋아 보인다.”

 

15년 만에 친구들과 재회하자 가즈키는 반가운 마음에 흥분해 소리쳤다.

 

유미코는 약간 포동포동해진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리호는 유학 중에 만난 미국인 남편과 함께 귀국해 사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중견 배우로 활약하고 있는 레이카는 미모에 관록까지 더해진 느낌이었다. 외동딸이었던 노리코는 아버지의 부하 직원인 남자와 맞선을 보고 그를 데릴사위로 맞이했고, 전업 주부가 되어 초등학생이 된 딸을 키우고 있었다. 15년이 지났는데도 노리코는 여전히 단발머리에 화장도 하지 않고, 주름이 약간 생긴 것 외엔 고등학생 때와 거의 같은 이미지였다.

 

우리들 벌써 서른네 살인가?”

 

그녀들은 빠르게 지나간 세월을 한탄하면서도, 다시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기분에 들떠서 먹고 마시며 끊임없이 수다를 떨었다.

 

각자 근황을 얘기하던 중, 가즈키가 논픽션 책을 쓰고 있다고 하자 다들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어머, 대단하다. 독립했어?”

 

사업을 하고 있는 리호가 흥미로워하는 표정으로 몸을 내밀며 말했다.

 

전에는 가에데 출판사에서 일하지 않았어? 그때도 책을 만들고 있었지?”

 

그랬지. 잊혀진 사건 시리즈라고 들어 봤어?”

 

그럼, 알고말고. 그러고 보니 TV 드라마로도 만들어지지 않았니? 어머, 역할이 있으면 친구인 나한테도 출연 제의를 했어야 하는 거 아냐?”

 

뾰로통한 표정을 한 레이카의 장난기 섞인 말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가즈키는 옛날부터 뉴스나 신문을 좋아했었지. 대단하다. 책 나오면 읽어 볼게.”

 

노리코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등학교 친구들 모두로부터 축하의 말을 들은 가즈키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유미코는 하치오지, 리호는 히로오, 노리코는 메구로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뭐야, 다들 도쿄에 살잖아.”

 

멀리 흩어져 사는 줄 알았는데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니, 조만간 다시 점심 모임을 하자는 얘기로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그럼, 총무는 가즈키가 맡는 게 좋겠다.”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 바로 리호가 정해 버렸다.

 

뭐야~, 졸업한 지가 언젠데 이런 건 결국 또 내 몫이야?”

 

가즈키가 입을 삐죽거리며 농담 투로 말하자 또 웃음이 터졌다. 역시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동창회가 끝나고 도쿄에 돌아온 가즈키는 부랴부랴 점심 모임에 적당한 가게를 찾아 모두에게 메일을 보냈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메일이라는 연락 수단이 있었으면 관계가 끊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메일이라는 통신 수단의 진화에 가즈키는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렇게 동창들과의 점심 모임을 기대하면서 가즈키는 자신의 일에 열중했다. 계속해서 야마모토의 전비서, 다부치의 행방을 쫓았다. 그의 고향인 하치노헤에 수없이 찾아가서, 그 지역 사람들에게 다부치의 어린 시절 이야기나 사람 됨됨이에 대해서 탐문하고 다녔다.

 

약속된 점심 모임의 전날 밤까지 취재를 했고, 다음 날 아침 일찍 고속버스를 타고 도쿄로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예약해 놓은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가즈키는 너무 바빠서 이빨 닦을 시간도 없었고, 화장도 제대로 못 한 데다가, 머리도 옷도 엉망이었다. 하지만 친구들은 그런 그녀를 웃으며 반갑게 맞이해 주었고, 오랜 친구들과의 자리가 마음이 편해서 그런지, 수면 부족인데도 불구하고 정신없이 수다를 떨다 보니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즐거운 식사 시간이 끝나고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각자 주문했던 메뉴에 따라 낼 돈을 취합한 가즈키는 계산대로 갔다.

 

, 영수증 주세요.”

 

가즈키는 프리랜서가 되면서부터 외식을 하면 반드시 영수증을 챙겼다. 고정적인 월급이 없는 불안정한 처지라 경비로 처리할 만한 것은 뭐든지 챙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영수증 내가 가져도 돼?”

 

그녀가 방금 계산대에서 받은 영수증을 한 손에 들고 흔들면서 묻자 유미코와 리호가 동시에 대답했다. “그래그래.”

 

고마워.”

 

가즈키가 영수증을 능숙한 손놀림으로 지갑에 집어넣자 유미코가 농담 섞인 말을 했다. “멋지다. 역시 자영업자는 다르구나.”

 

어머, 그렇게 대단한 거 아니야. 직장 다닐 때는 출판사에서 취재비가 나왔었지만 이제는 다 자기 부담이라, 호화 여객선에서 돛단배로 갈아탄 기분이야. 이렇게 점심값까지 경비 처리해야 할 정도니까.”

 

가즈키가 진담 반 농담 반으로 그렇게 말하자 노리코가 끼어들었다.

 

그건 탈세잖아.”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일단, 더치페이로 돈을 모아 낸 건데 가즈키가 혼자서 전부 계산한 것이 돼 버리는 게 문제야. 게다가 이건 어디까지나 사적인 모임인데 일 관계 접대비로 처리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거잖아. 그렇게 해서 확정 신고할 때 세금이 줄어들면 탈세가 되는 거야.”

 

노리코는 마치 대본을 읽는 것처럼 거침없이 단숨에 탈세라고 한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어머, 탈세라니, 말도 안 돼.”

 

가즈키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런 건 프리랜서라면 다 하는 건데, 이 영수증을 받아서 생기는 혜택이라고 해 봤자 뻔한데 탈세라니…….

 

그래 맞아, 노리코는 이런 애였지.

 

가즈키가 독립한 지 얼마 안 돼서 몰랐던 거 아냐?”

 

리호가 어색한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한마디 했다.

 

그러게 말이야. 경리는 골치 아픈 일 같아. 회사에 다닐 때 경리부에 있던 동료들 보니까 원형 탈모증까지 생기더라.”

 

유미코도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가세했다.

 

나는 지갑 갖고 다닌 지 꽤 돼서 잊어버렸어.”

 

연예인 레이카가 연기하듯 약간 과장된 동작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익살을 떨었다.

 

덕분에 어색한 분위기가 풀리는 것 같았다. 다들 가즈키가 민망하지 않게 하려고 신경 써 준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잘못한 건 나란 사실은 부정할 수 없어.

 

가즈키는 세무서에서 조사를 당하는 상상을 했다.

 

다들 하는 거니까 괜찮잖아, 금액도 얼마 안 되는데, 라고 생각한 내가 잘못된 거야. 만약 문제가 되면 출판사에도 폐를 끼치게 되잖아.

 

고마워, 노리코. 내가 안일한 생각을 했어. 얘기해 줘서 다행이야. 역시 노리코는 믿음직스럽다니까.”

 

가즈키가 영수증을 구겨서 버리자 노리코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해했으면 됐지 뭐.”

 

그래, 이 표정정의를 실현한 노리코의 이 황홀해하는 미소이었어.

 

노리코는 고등학교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식사를 마친 일행은 찻집으로 자리를 옮겨 차를 마셨다. 그곳에서는 영수증을 아예 받지 않았다.

 

그들은 한참 동안 수다를 떨다가 헤어질 시간이 되어 전철역으로 향했다.

 

가즈키는 자신만 반대 방향 전차를 타야 해서, 승차 후 창밖으로 보이는 친구들에게 밝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차가 출발하고 친구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진공청소기에 빨려 들어간 것처럼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사라졌다.

 

즐거운 시간이었는데 왜 이런 걸까.

 

고등학교 때 느꼈던, 노리코와 함께 있을 때의 피로감이 되살아났다. 소중한 친구인데 왜 이렇게 피곤해지는 걸까.

 

혹시 난 노리코가…….

 

싫은 건가.’ 하는 생각이 떠오르자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친구에게 하기 어려운 말인데도 제대로 지적해 줬을 뿐이잖아. 저렇게 좋은 친구인데, 게다가 틀린 것은 내 쪽이잖아.

 

가즈키는 그렇게 스스로를 타이르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묘한 불쾌감은 다음 날 아침이 되어도 지워지지 않았다. 가슴속에 시커먼 타르 같은 것이 척 달라붙어서 온몸을 오염시키면서 몸 밖으로까지 배어 나오는 느낌이었다.

 

샤워를 하고 나온 그녀는 커피를 마시면서 억지로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컴퓨터 앞에 앉아 일에 집중하려고 해도 여전히 노리코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가즈키는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 그대로 깊이 들이마신 다음 크게 내뿜었다.

 

가즈키는 벽에 걸린 달력을 봤다. 전날 헤어질 때, 두 달에 한 번 정도 모이자는 리호의 말에 전원이 찬성했다.

 

노리코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건 역시 나뿐인가. 두 달이면 아직 한참 남았는데, 그런데…….

 

싫어. 참을 수 없을 만큼 싫어.

 

고등학교 때 느꼈던 위화감과 불쾌감이 어제의 일로 인해 생생하게 다시 떠올랐다.

 

노리코, 만나기 싫어!”

 

가즈키는 콘크리트 벽이 울릴 정도로 크게 소리쳤다. 자신의 집이라 신경 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노리코는 정말 싫어, 싫다고!”

 

아무리 올바른 인간이라고 해도 싫은 걸 싫다고 하는 게 뭐가 나빠.

 

자신의 기분을 그대로 받아들이자 가즈키는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다음 점심 모임은 나가지 말자.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가즈키는 느긋하게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 7회에 계속 ~


*출간 전 연재는 총 10회까지 진행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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