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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리코는 야마나시현에 있는 공립 고등학교에서 알게 된 친구였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가즈키는 중학교 때부터 친했던 유미코와 리호, 레이카 등의 세 친구와 자주 어울렸다. 함께 진학한 남자애들이 갑자기 멋있어 보인다거나 젊은 남자 선생님만 보면 설레는 등, 사춘기의 그녀들에게는 모든 것이 신선하게 느껴질 때였다.

 

그처럼 반 전체가 새로운 학교생활에 들떠 있는 분위기 속에서 혼자 조용히 책을 읽고 있던 아이가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다른 현의 중학교에서 온 다가키 노리코였다.

 

단발머리의 그 아이는 등 뒤에 잣대라도 찔러 넣은 것처럼 항상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있었다. 새로운 환경에서 친구를 만들려 기를 쓰고 있는 아이들과는 달리, 혼자서도 침착하게 학교를 다니는 노리코의 첫인상은 눈에 띄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딘가 늠름하고 깔끔한 느낌이었다.

 

쟤는 맨날 저렇게 혼자서 밥을 먹는 것 같지 않니?”

 

어느 날 평소처럼 넷이 모여 점심 도시락을 먹고 있는데, 유미코가 교실 구석에서 혼자 먹고 있는 노리코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유미코는 자신도 중학교 2학년 때 고베에서 이사 온 전학생이었기 때문에 가즈키와 다른 친구들이 먼저 말을 걸어 주기 전까지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했던 과거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혼자서 외롭게 있는 아이를 보자 그냥 놔둘 수가 없었다. 조금도 고쳐지지 않은 간사이 사투리로 말을 하는 유미코는 항상 밝은 목소리에 상냥하고 온화한 분위기의 여자아이였다.

 

. 혼자서 점심 먹고 나서 도서관에 가는 것 같더라.”

 

계란말이를 오물거리며 먹고 있던 리호가 한마디 덧붙였다. 리호는 침착한 성격에 머리도 좋아서 중학생 때는 학급 위원을 맡기도 했었다. 노리코가 밥 먹고 나서 뭐 하는지까지 알고 있는 것을 보면 개학하고 2주가 지나도록 아직 어떤 그룹에도 속하지 않은 노리코가 신경 쓰인 모양이었다.

 

아아, 아버지가 전근해서 이사 왔다는 아이 맞지? 아직 친구를 사귀지 못했나 봐.”

 

드라마 출연이 결정되면서 다이어트 중인 레이카는 조그마한 샌드위치를 벌써 다 먹고 종이 팩에 든 우유를 마시고 있었다. 아역 스타였던 그녀는 예전에는 TV 드라마나 영화에 곧잘 나왔었다. 하지만 성장기가 되어 출연 섭외가 줄면서 거의 활동 정지 상태가 되었던 중학교 때는 철없는 동급생들에게 한물간 애라는 험담을 듣기도 했다. 그것이 상처가 되었는지 레이카는 험담이나 왕따 같은 것에 민감한 편이었다. 혼혈이 아닐까 착각할 정도로 뚜렷한 생김새에 강인한 인상이었지만 마음은 남보다 훨씬 섬세한 아이였다.

 

가즈키가 가서 말 좀 걸어 보는 게 어때?”

 

리호가 말하자 유미코나 레이카도 동감이라는 듯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운동도 잘하고 몸도 목소리도 큰 편인 가즈키는 이럴 때는 왠지 앞장서야 하는 분위기가 되어 버린다.

 

그래그래, 내가 가 볼게.”

 

가즈키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또 나구나, 하고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사실은 그녀도 혼자 있는 노리코가 신경 쓰이긴 했다.

 

다가키 노리코 맞지?”

 

가즈키가 말을 걸자 식사 중이던 노리코가 고개를 들었다. 하얗고 둥근 얼굴은 특징이 별로 없었다. 일본인답게 쌍꺼풀 없는 눈에 아주 못생기지는 않았지만 미인이라고도 할 수 없는 극히 평균적인 얼굴이었다. 앞머리는 숏뱅에 뒷머리는 귀 아래에서 가지런히 다듬어져 있었다. 교복의 옷맵시는 촌스러운 느낌으로, 새하얀 하이 삭스가 종아리를 완전히 덮고 있었다.

 

정면으로 노리코를 보고 있으려니 가즈키는 무언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이 애 누구랑 닮았는데. 맞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어.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 혹시 괜찮다면 우리들과 같이 먹을래?”

 

가즈키는 등 뒤에 있는 유미코, 리호, 레이카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그래, 좋아.”

 

노리코는 살짝 미소 짓더니 먹고 있던 도시락 상자를 두 손으로 들고 그들의 자리로 이동했다.

 

우와~ 반찬이 충실하네.”

 

노리코의 도시락을 들여다본 레이카의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 일단 30개 재가 들어가게 식단을 생각하거든.”

 

직접 만드는 거야? 대단하다.”

 

위아래 2단에 꽉 차게 밥과 반찬이 담긴 도시락은 빛깔도 예쁜 데다 고기와 야채의 균형도 좋아서 가정 과목과는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가즈키조차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리 책에 실려도 손색이 없을 만큼 보기도 좋고 모범적인 도시락이었다.

 

그들은 밥을 먹으면서 서로 자기소개도 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노리코의 아버지는 농림수산성에서 근무하는 국가 공무원으로 고치와 야마구치, 도쿄 등을 몇 년마다 옮겨 다녔다고 한다. 그날은 마침 집에 가는 길이 같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어 다섯이 함께 하교했다.

 

그때부터 노리코와 친해진 그들은 그녀가 성실하고 좋은 아이인 것을 알게 되었다. 유미코와 레이카의 끊임없는 아이돌 얘기에 가즈키와 리호는 대놓고 재미없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노리코는 적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들어 줬다. 게다가 가족 여행을 갔다 오면 꼭 네 명에게 줄 선물까지 사 오기도 했으며, 친구들 중 결석을 하는 아이가 있으면 노트 필기까지 대신 해서 전해 주기도 했다.

 

 

 

평소에 노리코가 하는 말과 행동은 전부 빈틈없고 똑 부러진 것이었다. 그것이 유감없이 발휘된 것은 처음으로 노리코를 가즈키의 집에 초대했을 때였다. 가즈키의 방에서 유미코와 리호, 레이카와 노리코는 함께 케이크를 먹으며 수다를 떨고 있었는데, 어느새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만화책이나 잡지가 가지런히 책장에 꽂혀 있고 벗어 놓았던 옷이 잘 개어져 있었다. 함께 얘기도 하고 간식을 먹으면서도 노리코의 손은 바지런히 움직였던 것이다.

 

집에 가기 전에는 다 먹은 케이크 접시와 컵을 씻은 다음 건조대에 있던 컵이나 접시는 닦아서 찬장에 넣고 음식물 쓰레기를 모아서 버려 주기까지 했다.

 

저 애 고등학생 맞니?”

 

그녀의 행동을 본 가즈키의 어머니는 감탄했다.

 

노리코의 주가는 첫 중간시험에서 더욱 상승했다. 노리코가 학년에서 1등을 한 것이다.

 

노리코는 공부도 잘하는구나. 그런 친구하고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사이좋게 지내렴.”

 

부모들은 모두 노리코 같은 친구가 있다는 것에 무척 기뻐했다. 그래서 가즈키의 가족뿐만 아니라 유미코, 리호, 레이카의 가족에게도 노리코는 언제나 환영 받았다.

 

성적도 좋고 머리 모양과 복장도 검소하고 예의도 바르다. 노리코는 부모들에게 이상적인 아이일 수밖에 없었다.

 

, 맞다. ‘규범(規範)’.

다가키 노리코(高規範子)’의 가운데 한자 두 자가 바로 그 글자라는 것을 그때서야 알아차린 가즈키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노리코는 그야말로 모두에게 규범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년에서 상위권 성적을 놓치지 않았던 노리코는 다른 반 애들에게까지 선망의 대상이 되어 가즈키 그룹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수업을 따라가지 못할 때는 도시락을 먹으며 노리코에게 배웠다. 그다지 머리가 좋다고 할 수 없었던 유미코나 연예계 활동으로 툭하면 결석을 했던 레이카도 요점을 잘 정리한 노리코의 지도로 성적이 올랐고, 원래부터 성적이 좋았던 리호나 가즈키도 학기 말에 5등 이내까지 넘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던 중 또 한 번 노리코를 존경하게 된 일이 발생했다.

 

어느 날 아침, 가즈키는 여느 때처럼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고 있었다. 직장인들과 학생들로 북적거리는 만원 버스 안에서 손잡이를 잡고 서 있는데, 엉덩이 쪽에서 뭔가 스멀스멀하는 것이 느껴졌다.

 

가즈키는 몸을 틀어 피했지만, 또다시 무언가가 엉덩이를 스쳤다.

 

그것은 아무리 둔감한 가즈키라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치한이었다.

 

단발머리에 덩치가 큰 가즈키는 그때까지 한 번도 치한을 만난 적이 없었다. 얌전한 인상의 유미코가 또 당했어.” 하고 울먹이며 학교에 왔을 때, “왜 치한이라고 소리치지 않았어!”라고 화를 냈던 그녀였다.

 

나였으면 바로 남자의 손을 붙잡아 비튼 다음 여기 치한 있어요!’ 하고 사람들 보라고 소리쳤을 거야.”라며 호언장담했던 가즈키였지만 정작 자신이 그 입장이 되자 몸이 경직되어 움직일 수 없었다. 성추행을 당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부끄러워서,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깊은 죄책감에 빠져 버린 것이다. 그 상태에서 소리 지르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가즈키는 자신 또는 상대방이 내릴 때까지 참고 버텨 보자는 생각을 했다.

 

오로지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사람들이 꽉 차게 타고 있어서 거리를 두기 힘든 상태에서, 아무리 몸을 피해 봐도 남자는 집요하게 손을 뻗어 왔다. 아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하는 생각이 들며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때였다.

 

번쩍하고 플래시 불빛이 터졌다.

 

차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갑작스러운 섬광에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윽고 가즈키의 엉덩이에 닿았던 손이 떨어졌다. 가즈키가 돌아보니 일회용 카메라를 한 손에 든 노리코가 다른 손으로 중년 남자의 팔을 잡고 번쩍 들어 올리고 있었다.

 

기사님, 치한을 잡았으니까 다음 정류장에서 내려 주세요.”

 

 

~ 3회에 계속 ~


*출간 전 연재는 총 10회까지 진행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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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봉투는 우편함에 있던 다른 우편물들과 함께 배달되어 있었다.

 

그것은 봉투라는 단순한 단어가 아닌, 젠체하며 영어로 엔빌로프(envelope)’라고 해야 할 것 같은 이국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연보라색의 종이에는 펄의 광택이 있었고, 두껍고 단단한 종이로 만들어져서 고급스러웠다. 크기는 양형 1호로 업체의 인사장이나 초대장 등으로 사용되는 크기였다.

 

결혼식 청첩장인가?

 

아파트 공동 현관에 있는 우편함에 잔뜩 쌓여 있던 광고 우편물이나 전단지들을 꺼내 비우던 이마무라 가즈키는 이 봉투의 정체가 과연 무엇일까 궁금했다.

 

잠시 후 그녀는 양손에 우편물을 가득 든 채 여행 가방을 밀면서 로비를 가로질러 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맨 꼭대기 층인 8층의 버튼을 누른 후, 도착할 때까지 출장 간 사이에 쌓여 있던 우편물을 대충 확인해 보았다. 왜 이렇게 무겁나 했더니 백화점이나 통신 판매 업체의 카탈로그가 상당히 많았다.

 

집을 비운 사이에 우편함에 이런 것들로 가득 차 버리면 곤란한데. 그만 좀 보냈으면.

중원(中元) 이나 연말뿐만 아니라 절분(節分)은 물론이고 밸런타인데이에 할로윈까지, 1년 내내 이렇게 카탈로그가 오는 것은 가즈키가 우수 고객이기 때문이다.

 

논픽션 작가로 활동하게 되면서 그녀는 관련된 출판사와 동료 작가, 사진작가나 일러스트레이터, 취재 협조자에게 줄 선물은 꼭 챙겼다. 아무리 이름이 알려져 있어도 자신은 이 업계에서 음식의 향신료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으며, 중요한 식재료는 그들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려면 여러 사람들의 협조가 필요하다.

 

중원을 지낸 지 얼마 안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10월 초순임에도 불구하고 카탈로그는 벌써 연말 선물을 안내하고 있었다.

 

정신없이 지나가는 계절에 한숨을 내쉬면서, 가즈키는 카탈로그 사이에 끼어 있는 봉투들을 후루룩 넘기며 확인했다. 신용 카드 회사, 출판사, 은행…….

 

문득, 손이 멈췄다. 아까 살짝 보였던 연보라색 봉투의 한쪽 면에는 꽃무늬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받는 사람 이름은 붓이나 볼펜이 아닌 잉크와 펜으로 썼는지 유려한 맛이 느껴졌다. 글자색은 봉투보다 세 단계 정도 진한 보라색이었다.

 

받는 사람의 주소나 이름이 한자로 쓰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르게 외국에서 온 편지 같은 느낌이었다. 누가 보낸 거지 하고 봉투를 뒤집어 보려고 한 순간, 손끝에 무언가가 닿았다. 그것은 봉랍(封蠟)이었다. 봉투를 접착제로 붙이고 봉랍을 녹여 떨어뜨린 다음, 그 위에 인새(印璽) 같은 것을 양각으로 찍은 것이었다.

 

이렇게 멋지게 장식되어 있는 봉투는 청첩장밖에 없겠지.

 

결혼과 인연이 없는 상태로 40대가 되어 버린 가즈키는 난감함에 고개를 저으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이윽고 현관문 앞에 도착한 그녀는 열쇠로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1주일 만이다. 그녀가 사는 곳은 세워진 지 10년 된 2DK의 아파트였다. 도심에서 대중교통으로 40분 정도 걸리며, 제일 가까운 역으로부터 도보로 13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가즈키는 5년 전에 이 집을 샀다. 방의 배치나 채광이 특별히 좋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당시 둘러봤던 집들 중에서 그나마 가장 적당한 곳이었다.

 

신발을 벗어 던지고 가방을 현관에 놓은 채 집 안으로 들어갔다. 갈증이 나서 들고 있던 우편물들을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냉장고를 열어 맥주 캔을 하나 꺼냈다.

 

이 시기의 홋카이도는 이미 추운 계절이었다. 북방 영토 문제에 관한 취재를 하느라 그곳에서 1주일 동안 머물렀던 가즈키는 오래된 민박집에서 매일 밤 난로를 켜고 추위에 떨었었다. 도저히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런 곳에서 맥주를 마시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자리에 선 채로 캔에 입을 대고 꿀꺽꿀꺽 맥주를 마신 가즈키는 ~.” 하고 소리를 냈다. 이거 완전히 아저씨네, 하는 생각이 들면서 쓴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두 번째 맥주 캔을 꺼내 들고 소파에 앉으면서, 더 귀찮아지기 전에 영수증을 정리해 둘까 하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취재비가 선금으로 50만 엔이 지급되었다. 취재에는 여비, 식비, 취재 대상에게 주는 사례비 등의 경비가 소요되지만 대체로 원고를 다 쓴 다음에 정산하면 된다. 가즈키가 이런 특별 대우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5년 전에 권위 있는 다케시타 요이치 논픽션 상을 수상했기 때문이었다.

 

논픽션이란 장르는 이 업계에서 결코 메이저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다케시타 요이치라는 이름은 일반인에게도 알려져 있기 때문에, 그 상의 이름을 명함에 박아 두면 취재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게 사실이었다.

 

이 상을 수상했던 책,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는 돈은 영화로도 제작되어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강연회나 에세이 집필의 의뢰도 잇따랐고, 아주 가끔은 해설자로서 보도 프로그램 등에 나가기도 했다. 이와 같은 수상 경력으로 가즈키의 인생은 크게 바뀌게 되었다.

 

가즈키는 바쁜 삶 때문에 전부터 간신히 가지고 있었던 여자로서의 자존심을 지킬 새가 없어서, 새치 머리를 염색하는 것도 포기했고 화장도 별로 안 하게 되었다. 콘택트렌즈도 귀찮아서 두꺼운 안경을 끼고 지냈으며, 복장도 언제나 편한 티셔츠에 청바지, 그리고 운동화 차림이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키가 컸었고 중학생 때는 육상 선수도 했기 때문에 체격도 탄탄한 편이었다.

 

물론 전에는 남자를 사귄 적도 있었다. 하지만, 취재로 며칠이고 집을 비우거나 밤새 원고를 쓰고 낮에는 소파에 뻗어 있는 생활을 하다 보니 어느새 곁을 떠나 버리고 말았다. 남들처럼 결혼을 동경했던 시기도 있었지만 이제는 거의 포기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맥주를 마시며 테이블 위로 시선을 돌리던 가즈키의 시야에 우편물 더미 사이에 끼어 있는 연보라색 봉투가 들어왔다.

 

  

이렇게 청첩장 같은 것을 받을 때면, 아무리 포기하고 살았지만 마음이 조금은 씁쓸했다. 아직도 내게 여자의 부분이 남아 있기는 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든 가즈키는 자조적인 기분에 살짝 코웃음이 나왔다.

 

그래서인지, 어떤 청첩장이라도 뜯어서 열어 보면 악의가 느껴지고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이것 때문에 주말이나 공휴일은 물론, 연휴도 제대로 쉴 수 없잖아. 돈이 나가는 것도 그렇고……. 그녀에게 청첩장은 그 자체가 독이 포함된 것이었다.

 

두 번째 맥주를 다 마시고 세 번째로 마실 맥주를 냉장고에서 꺼낸 가즈키는 답답했던 청바지를 벗어 던지고 티셔츠 한 장만 걸친 채 테이블 앞에 앉았다. 집게손가락으로 봉투의 가장자리를 스윽 훑었다.

 

이번에 대체 누가 결혼을 한다는 거지? 출판사 사람인가? 아니면 다른 지인일까? 결혼식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하는 걸까?

 

행복을 모두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제까지 참석해서 행복을 나누어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결코 적지 않는 축의금에 남들에게는 전혀 재미없는 그들의 첫 만남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누군가의 주례사나 연설에 감동한 척하다가 여흥에 맞춰 억지웃음을 짜내고, 감회에 젖어 눈물 짓는 신부와 그 어머니가 웨딩드레스나 전통 혼례복을 입은 모습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그들의 할아버지 할머니를 아쉬워하는 게 흔한 레퍼토리라고 할 수 있지.

 

신세를 진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청첩장을 보낸다고 하지만, 정말 신세를 졌다고 생각한다면 부르지 않는 것이 돈도 시간도 허비하지 않게 해 주는 거잖아.

 

노처녀 히스테리로 인상을 쓰고 있던 가즈키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갑자기 천재지변이 일어나서 내가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면, 그때는 보란 듯이 호화스럽게, 행복한 듯 동네방네 자랑하며 결혼 피로연을 해야지, 라고.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인 가즈키는 한 모금 깊이 들이마셨다 천천히 내뱉었다. 테이블 위의 재떨이에는 오래된 담배꽁초가 소복이 쌓여 있었다. 가즈키는 개의치 않고 그 위에 담뱃재를 떨구었다.

 

그녀는 드디어 그 봉투를 우편물 더미에서 꺼내 눈앞에 들고 싸움이라도 걸 것처럼 노려보았다. 꽃 모양의 우표가 붙어 있는 것을 보니 더욱더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하트가 그려진 우표보다 나으려나. 그런데 도대체 누가 보낸 거지?

 

자판을 치기 좋게 항상 짧게 깎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손톱 끝으로 봉투를 집고 딱지치기를 하듯이 힘 있게 뒤집었다. 그리고 발신인의 이름을 본 순간, 그녀는 갑자기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다가키 노리코

 

가즈키는 온몸이 얼어붙었다. 연보라색 봉랍에는 N의 이니셜이 찍혀 있었다.

아니야.

이건 말도 안 돼.

어떻게 노리코가…….

머리에서 핏기가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손이 차가워지면서 호흡이 가빠지고 얕아졌다.

산소가 옅어진 가즈키의 뇌리에 노리코의 얼굴이 떠올랐다.

분명히 제 손으로 죽였던 노리코의 얼굴이.

 

~ 2회에 계속 ~


*출간 전 연재는 총 10회까지 진행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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