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의 사회학부에서 공부를 하면서 가즈키는 저널리즘에 눈을 뜨게 되었다.
옛날부터 신문을 읽거나 보도 방송을 보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우연히 선택한 수업인 저널리즘론에 재미를 느끼면서 저널리스트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교수님이나 선배들이 권해 준 문헌들을 섭렵했고, 세미나의 과제로 취재한 기사를 정리해서 발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졸업반이 되자 취업을 위해 도쿄의 모든 대형 출판사에 입사 지원을 했다.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정치인 비리, 대기업의 비리,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쓰게 된 사건 등을 언론의 입장에서 철저하게 검증하고 이것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그런 뜨거운 열정으로 면접에 임한 결과, 가즈키는 가장 유력했던 가에데 출판사에 입사할 수 있었다.
가에데 출판사는 문예는 물론 저널리즘으로도 인정받고 있는 대형 출판사다. 가즈키는 입사 후 3년 동안 주간지의 정치부에 소속되어 나가타쵸를 취재하기 위해 열심히 다녔다. 그 후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논픽션 서적부에서 새로운 기획에 참여하게 되었다.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이자, 주간지에서 일하는 보람은 있었지만 시간과 정성을 들여서 오랫동안 읽히는 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가즈키는 곧바로 과거의 유명 사건을 새롭게 검증하는 기획을 세우게 되었다.
몇 명의 우수한 작가들과 팀을 이뤄서 『치바현 유아 연쇄 유괴 살인 사건, 10년 만의 진실』과 『엘리트 여자 회사원 살인 사건, 누명은 이렇게 밝혀졌다』 등을 편집하고 간행했다. 새로운 증인이나 목격자를 찾아내고 증언을 모아 다른 관점에서 사건을 재조명하는 가즈키의 기획은 ‘잊혀졌던 사건 시리즈’라는 타이틀로 사람들에게 화제가 되면서 TV 드라마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녀는 그렇게 업계에서 히트 메이커로 인정받으면서 활발하게 활동했고, 그러다 보니 순식간에 8년의 세월이 지나게 되었다.
가즈키에게는 꼭 직접 다루고 싶었던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유전 개발권 이익 획득을 위한 불법 정치 자금 사건’이었다. 동남아시아에서의 유전 개발권 이익 획득을 위해 한 석유 회사 회장이 당시의 국교상인 야마모토 마모루에게 불법으로 정치 자금을 제공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정계가 떠들썩했었다. 야마모토는 “비서가 자기 마음대로 한 짓이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며 발뺌을 했고 증거도 부족했기 때문에 검찰은 그를 입건하지 못했다.
게다가 벌써 10년 전의 사건이라 이미 공소 시효도 지나 있었다. 하지만 가즈키는 이 사건을 다시 검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야마모토의 이름이 차기 총리 후보로 거론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이미 불법 정치 자금 사건에 대해서는 잊고 있었다. 아니, 입건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일은 원래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기는커녕 야마모토는 심심치 않게 개그맨이 진행하는 토크쇼에 출연하면서 빠르게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가즈키는 이런 남자가 총리가 되어도 괜찮은 것일까, 지금이야말로 내가 그 사건을 파헤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강하게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기획을 세운 다음, 작가를 따로 찾지 않고 자신의 눈과 발로 취재해서 꼼꼼하게 직접 집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즈키는 찬찬히 이 일에 몰두하고 싶어서 회사에는 사표를 제출했다. 처음에는 붙잡던 상사도 가즈키가 자신의 신념을 말하자 “그러면 제대로 한번 해 봐. 우리가 꼭 책을 내 줄 테니까.”라며 응원해 주었다.
지금까지도 이 사건을 소재로 한 르포르타주는 있었지만 모두 이미 나온 신문 기사의 내용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것에 불과했다. 가즈키는 실행범으로 알려진 야마모토의 전 비서인 다부치의 이야기를 메인으로 구성하고 싶었다. 다부치는 당시 “제가 멋대로 한 짓입니다.”라고 인정해 징역 2년의 판결을 받았고 수수한 것으로 알려진 1억 엔을 추징당했다.
정말로 비서의 단독 범행이었을까. 추징된 1억 엔이 사실은 누구의 손에 넘겨진 것일까. 가즈키는 그곳에 사건의 열쇠가 숨어 있다고 생각했다.
다부치는 이미 출소했지만 주거지를 전혀 알 수 없었다. 가즈키는 매일같이 조사와 인터뷰로 바쁘게 돌아다니면서도 그의 행방을 찾으며 부지런히 원고를 써 나갔다.
그녀가 다가키 노리코와 재회한 것은 그렇게 정신없이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졸업 15주년 기념 동창회를 한다고 연락이 온 것이다.
벌써 15년이나 된 거야?
숨 가쁘게 지내느라 가즈키는 본가 생각은 별로 하지 못했고, 명절 때조차 거의 가 보지 않았다. 부모님 집에서 보내온 왕복 엽서를 소파에 누워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철야 작업으로 지친 머릿속에 그립고 한가로운 야마나시의 풍경이 떠올랐다.
취재로 정신없이 돌아다니기만 했던 살벌한 날들로부터 하루만 벗어나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오랜만에 가족들 얼굴도 보고 동창회도 한번 참석해 볼까.
그렇게 마음먹은 가즈키는 수년 만에 야마나시로 향했다.
“어머, 이게 얼마만이야! 다들 좋아 보인다.”
15년 만에 친구들과 재회하자 가즈키는 반가운 마음에 흥분해 소리쳤다.
유미코는 약간 포동포동해진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리호는 유학 중에 만난 미국인 남편과 함께 귀국해 사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중견 배우로 활약하고 있는 레이카는 미모에 관록까지 더해진 느낌이었다. 외동딸이었던 노리코는 아버지의 부하 직원인 남자와 맞선을 보고 그를 데릴사위로 맞이했고, 전업 주부가 되어 초등학생이 된 딸을 키우고 있었다. 15년이 지났는데도 노리코는 여전히 단발머리에 화장도 하지 않고, 주름이 약간 생긴 것 외엔 고등학생 때와 거의 같은 이미지였다.
“우리들 벌써 서른네 살인가?”
그녀들은 빠르게 지나간 세월을 한탄하면서도, 다시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기분에 들떠서 먹고 마시며 끊임없이 수다를 떨었다.
각자 근황을 얘기하던 중, 가즈키가 논픽션 책을 쓰고 있다고 하자 다들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어머, 대단하다. 독립했어?”
사업을 하고 있는 리호가 흥미로워하는 표정으로 몸을 내밀며 말했다.
“전에는 가에데 출판사에서 일하지 않았어? 그때도 책을 만들고 있었지?”
“그랬지. 『잊혀진 사건 시리즈』라고 들어 봤어?”
“그럼, 알고말고. 그러고 보니 TV 드라마로도 만들어지지 않았니? 어머, 역할이 있으면 친구인 나한테도 출연 제의를 했어야 하는 거 아냐?”
뾰로통한 표정을 한 레이카의 장난기 섞인 말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가즈키는 옛날부터 뉴스나 신문을 좋아했었지. 대단하다. 책 나오면 읽어 볼게.”
노리코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등학교 친구들 모두로부터 축하의 말을 들은 가즈키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유미코는 하치오지, 리호는 히로오, 노리코는 메구로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뭐야, 다들 도쿄에 살잖아.”
멀리 흩어져 사는 줄 알았는데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니, 조만간 다시 점심 모임을 하자는 얘기로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그럼, 총무는 가즈키가 맡는 게 좋겠다.”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 바로 리호가 정해 버렸다.
“뭐야~, 졸업한 지가 언젠데 이런 건 결국 또 내 몫이야?”
가즈키가 입을 삐죽거리며 농담 투로 말하자 또 웃음이 터졌다. 역시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동창회가 끝나고 도쿄에 돌아온 가즈키는 부랴부랴 점심 모임에 적당한 가게를 찾아 모두에게 메일을 보냈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메일이라는 연락 수단이 있었으면 관계가 끊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메일이라는 통신 수단의 진화에 가즈키는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렇게 동창들과의 점심 모임을 기대하면서 가즈키는 자신의 일에 열중했다. 계속해서 야마모토의 전비서, 다부치의 행방을 쫓았다. 그의 고향인 하치노헤에 수없이 찾아가서, 그 지역 사람들에게 다부치의 어린 시절 이야기나 사람 됨됨이에 대해서 탐문하고 다녔다.
약속된 점심 모임의 전날 밤까지 취재를 했고, 다음 날 아침 일찍 고속버스를 타고 도쿄로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예약해 놓은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가즈키는 너무 바빠서 이빨 닦을 시간도 없었고, 화장도 제대로 못 한 데다가, 머리도 옷도 엉망이었다. 하지만 친구들은 그런 그녀를 웃으며 반갑게 맞이해 주었고, 오랜 친구들과의 자리가 마음이 편해서 그런지, 수면 부족인데도 불구하고 정신없이 수다를 떨다 보니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즐거운 식사 시간이 끝나고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각자 주문했던 메뉴에 따라 낼 돈을 취합한 가즈키는 계산대로 갔다.
“아, 영수증 주세요.”
가즈키는 프리랜서가 되면서부터 외식을 하면 반드시 영수증을 챙겼다. 고정적인 월급이 없는 불안정한 처지라 경비로 처리할 만한 것은 뭐든지 챙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영수증 내가 가져도 돼?”
그녀가 방금 계산대에서 받은 영수증을 한 손에 들고 흔들면서 묻자 유미코와 리호가 동시에 대답했다. “그래그래.”
“고마워.”
가즈키가 영수증을 능숙한 손놀림으로 지갑에 집어넣자 유미코가 농담 섞인 말을 했다. “멋지다. 역시 자영업자는 다르구나.”
“어머, 그렇게 대단한 거 아니야. 직장 다닐 때는 출판사에서 취재비가 나왔었지만 이제는 다 자기 부담이라, 호화 여객선에서 돛단배로 갈아탄 기분이야. 이렇게 점심값까지 경비 처리해야 할 정도니까.”
가즈키가 진담 반 농담 반으로 그렇게 말하자 노리코가 끼어들었다.
“그건 탈세잖아.”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일단, 더치페이로 돈을 모아 낸 건데 가즈키가 혼자서 전부 계산한 것이 돼 버리는 게 문제야. 게다가 이건 어디까지나 사적인 모임인데 일 관계 접대비로 처리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거잖아. 그렇게 해서 확정 신고할 때 세금이 줄어들면 탈세가 되는 거야.”
노리코는 마치 대본을 읽는 것처럼 거침없이 단숨에 탈세라고 한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어머, 탈세라니, 말도 안 돼.”
가즈키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런 건 프리랜서라면 다 하는 건데, 이 영수증을 받아서 생기는 혜택이라고 해 봤자 뻔한데 탈세라니…….
그래 맞아, 노리코는 이런 애였지.
“가즈키가 독립한 지 얼마 안 돼서 몰랐던 거 아냐?”
리호가 어색한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한마디 했다.
“그러게 말이야. 경리는 골치 아픈 일 같아. 회사에 다닐 때 경리부에 있던 동료들 보니까 원형 탈모증까지 생기더라.”
유미코도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가세했다.
“나는 지갑 갖고 다닌 지 꽤 돼서 잊어버렸어.”
연예인 레이카가 연기하듯 약간 과장된 동작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익살을 떨었다.
덕분에 어색한 분위기가 풀리는 것 같았다. 다들 가즈키가 민망하지 않게 하려고 신경 써 준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잘못한 건 나란 사실은 부정할 수 없어.
가즈키는 세무서에서 조사를 당하는 상상을 했다.
다들 하는 거니까 괜찮잖아, 금액도 얼마 안 되는데, 라고 생각한 내가 잘못된 거야. 만약 문제가 되면 출판사에도 폐를 끼치게 되잖아.
“고마워, 노리코. 내가 안일한 생각을 했어. 얘기해 줘서 다행이야. 역시 노리코는 믿음직스럽다니까.”
가즈키가 영수증을 구겨서 버리자 노리코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해했으면 됐지 뭐.”
그래, 이 표정─정의를 실현한 노리코의 이 황홀해하는 미소─이었어.
노리코는 고등학교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식사를 마친 일행은 찻집으로 자리를 옮겨 차를 마셨다. 그곳에서는 영수증을 아예 받지 않았다.
그들은 한참 동안 수다를 떨다가 헤어질 시간이 되어 전철역으로 향했다.
가즈키는 자신만 반대 방향 전차를 타야 해서, 승차 후 창밖으로 보이는 친구들에게 밝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차가 출발하고 친구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진공청소기에 빨려 들어간 것처럼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사라졌다.
즐거운 시간이었는데 왜 이런 걸까.
고등학교 때 느꼈던, 노리코와 함께 있을 때의 피로감이 되살아났다. 소중한 친구인데 왜 이렇게 피곤해지는 걸까.
혹시 난 노리코가…….
‘싫은 건가.’ 하는 생각이 떠오르자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친구에게 하기 어려운 말인데도 제대로 지적해 줬을 뿐이잖아. 저렇게 좋은 친구인데, 게다가 틀린 것은 내 쪽이잖아.
가즈키는 그렇게 스스로를 타이르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묘한 불쾌감은 다음 날 아침이 되어도 지워지지 않았다. 가슴속에 시커먼 타르 같은 것이 척 달라붙어서 온몸을 오염시키면서 몸 밖으로까지 배어 나오는 느낌이었다.
샤워를 하고 나온 그녀는 커피를 마시면서 억지로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컴퓨터 앞에 앉아 일에 집중하려고 해도 여전히 노리코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가즈키는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 그대로 깊이 들이마신 다음 크게 내뿜었다.
가즈키는 벽에 걸린 달력을 봤다. 전날 헤어질 때, 두 달에 한 번 정도 모이자는 리호의 말에 전원이 찬성했다.
노리코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건 역시 나뿐인가. 두 달이면 아직 한참 남았는데, 그런데…….
싫어. 참을 수 없을 만큼 싫어.
고등학교 때 느꼈던 위화감과 불쾌감이 어제의 일로 인해 생생하게 다시 떠올랐다.
“노리코, 만나기 싫어!”
가즈키는 콘크리트 벽이 울릴 정도로 크게 소리쳤다. 자신의 집이라 신경 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노리코는 정말 싫어, 싫다고!”
아무리 올바른 인간이라고 해도 싫은 걸 싫다고 하는 게 뭐가 나빠.
자신의 기분을 그대로 받아들이자 가즈키는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다음 점심 모임은 나가지 말자.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가즈키는 느긋하게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