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실 정도로 눈앞이 새하얗게 빛났다. 가즈키는 움찔 놀라면서 손에 들고 있던 초대장을 떨어뜨렸다. 창밖은 어느새 회색빛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강한 바람에 나무가 흔들렸고, 세차게 내리는 비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베란다에 부딪치고 있었다. 우르릉 쾅, 하고 지축을 울리는 천둥소리에 이어, 좌악좌악하며 하늘을 찢는 듯한 빗소리가 들렸다.
가즈키는 천천히 일어나서 베란다 쪽 창문을 잠갔다. 베란다 바깥쪽에는 폭풍우에 흔들리는 거리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랬다.
5년 전.
노리코가 마지막으로 이 집에 왔던 날.
그날도 이렇게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었다.
가즈키와 노리코와의 관계는, 그녀가 각고 끝에 출간하게 된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는 돈─불법 정치 자금 사건의 진실』이 우수 논픽션 작품에 수여되는 타케시타 요이치 논픽션 상의 후보에 오르게 된 것을 계기로 완전히 일그러지게 되었다.
가즈키는 힘들게 찾아낸 전처를 통해서 겨우 다부치 본인과 접촉하는 데 성공했고, 집요한 설득 끝에 진실─주범은 야마모토라는 사실─을 밝혀 낼 수 있었다. 비록 공소 시효가 지나서 법적으로 죄를 추궁할 수는 없었지만, 야마모토의 범법 행위를 파헤친 가즈키의 책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국민들의 비난이 쇄도했고, 차기 총리로 거론되었던 그는 실각되면서 정치 생명까지 잃게 되었다.
타케시타 요이치 논픽션 상은 신문사가 주최하고 있으며, 후원으로 방송사와 영화사까지 참여하고 있다. 지금까지 수상작은 대부분 TV 드라마 또는 영화로 만들어졌고, 저자는 시사평론가로서 각종 매체에서 활약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수상 경력은 앞으로 내게 될 책 출간의 발판이 되기도 하며, 선인세의 비율을 조정할 수 있는 협상 자격도 주어지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큰 이점은 취재 상대가 신뢰해 준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대형 출판사의 명함이 있었지만, 독립한 다음부터는 취재 대상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이면서 솔직하게 말해 주지 않는 것은 물론, 만나는 것조차 거절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수상을 하게 되면, 그동안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았던 문들이 열리게 될 것이다. 포기하고 있었던 거물급 인사에게 접근할 기회가 생길 수도 있었다.
수상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은 가즈키는 그야말로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2년 동안 이 사건을 뒤쫓으며 고생했던 게 드디어 인정받게 된 것이다. 그녀는 즉시 가족에게 전화해 이 기쁜 소식을 전했으며 유미코, 리호, 레이카, 노리코에게도 일제히 메일을 보냈다.
가장 먼저 노리코로부터 답장이 왔다. ‘우선은 축하해.’라고만 쓰여 있었다. 가즈키는 ‘우선은’이라는 말이 거슬리긴 했지만, 이어지는 축하 전화와 메일 덕분에 그에 대한 의문은 곧 머릿속 한구석으로 밀려나 버렸다.
노리코가 그렇게 말한 것에 대한 의문이 풀린 것은 그로부터 1주일 정도 지난 후였다.
그전에, [지금 찾아가도 괜찮아?] 하고 노리코로부터 전화가 왔었는데, 가즈키는 “해야 할 일이 좀 밀려 있어서 만날 수 있는 날짜를 다시 잡아 보자.”고 답했다.
그러다가 일곱 번째 점심 모임의 바로 전날, 가을에 찾아온 태풍 때문에 비가 억수로 내리는 날인데도 불구하고 노리코가 일부러 집에 오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가즈키는 노리코가 미리 축하해 주고 싶어서 그러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흔쾌히 승낙했다.
“오늘은 다음 책 기획을 구상하는 일밖에 없으니 언제라도 괜찮아. 참, 선물로 받은 와인이 이 있는데 괜찮다면 같이 마시자.”
“그렇구나. 일단 그건 도착해서 생각해 볼게.”
전화를 끊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보니, 통화할 때 노리코의 목소리가 딱딱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후보에 오른 것 때문에 들떠 있던 가즈키는 노리코의 말투가 원래 그렇지 뭐, 하며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부랴부랴 어질러진 거실을 치우기 시작했다.
한 시간 정도 지나자 노리코가 찾아왔다. 흠뻑 젖은 레인 코트를 입은 노리코의 발밑에는 캐리어 백이 두 개 놓여 있었다.
“어머, 도대체 뭘 가져온 거니? 후보에 오른 것뿐인데……, 수상하지 못하면 위로 파티라도 해야 할 거 같아.”
칠면조 바비큐라도 가져온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의 가방 크기에, 가즈키의 목소리는 저도 모르게 들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로스트비프일지도 몰라. 아마 오르되브르와 치즈도 들어 있겠지, 하고 가즈키는 생각했다.
“아, 혹시 차게 보관해야 하는 거야? 우리 집 냉장고에 들어가려나.”
레인 코트를 벗어서 현관 벽에 걸고 있는 노리코 옆에서 가즈키는 비에 젖은 캐리어 가방을 수건으로 닦았다. 그리고 그것을 방 안으로 옮기려고 들어 올렸는데, 생각보다 무거워서 내려놓을 때는 쿵 소리가 났다. 그것은 칠면조와 로스트비프 정도의 무게가 아니었다. 눈으로 본 크기에 비해 결코 평범하지 않은 중량감이 느껴졌다.
“잠깐, 이거 뭐가 들어 있는 거야?”
설마 트로피나 상패 같은 것은 아니겠지, 하고 가즈키는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의아한 표정으로 노리코를 거실로 들어오라고 한 그녀는 가까스로 들어 올린 캐리어 가방을 러그 위까지 옮겨 놓았다.
“그럼 와인 한잔할까? 치즈도 잘라 놨는데 먹어 볼래? 다 먹고 나서 차 한 잔 괜찮지?”
냉장고를 열어서 확인하고 있는 가즈키의 등 뒤에서 노리코의 짧은 대답이 들려왔다.
“난 아무거나 상관없으니, 알아서 해.”
가즈키가 뒤를 돌아보니 소파에 걸터앉은 노리코가 작은 물통을 꺼내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왔지? 축하하러 온 게 아닌가?
가즈키는 그때서야 겨우, 노리코에게서 조금도 축하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축하하러 온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가즈키는 노리코의 발밑에서 이상한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는 커다란 두 개의 가방으로 시선을 옮겼다.
저 가방들은 도대체 뭘 넣은 거지?
은근슬쩍 기분 나쁜 예감이 가슴속 깊이 스며들었다.
가즈키는 일단 자신의 잔에만 와인을 따른 다음 노리코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조금 전까지 축하해 줄 것이라고 들떠 있던 스스로를 원망하며.
불길한 예감을 진정시켜 보자는 생각에 와인을 홀짝거리는 가즈키의 눈앞에서 노리코가 가방의 파스너를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꺼내어 하나둘씩 커피 테이블 위에 쌓아 놓은 것은 가즈키가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는 돈』에서 사용한 참고 자료들이었다.
그 책의 참고 문헌은 권말에 열거되어 있었다. 그 수는 30권 이상이었는데 사전같이 두꺼운 서적도 있었다. 노리코는 그런 책들을 차례차례로 가방에서 꺼내고 있었다.
이 책들을 전부 가져왔다는 말이야? 도대체 무엇 때문에…….
“노리코……, 어째서 이 책들을 다…….”
“가즈키가 제대로 올바른 절차를 밟고 집필했는지 확인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래서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는 돈』이 출간된 다음부터 조금씩 참고 문헌들과 대조하고 있었는데, 논픽션 상의 후보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서 검증을 끝냈지.”
할 말을 잃은 가즈키가 멍한 표정을 짓는 사이, 가방에서 자료를 다 꺼낸 노리코는 노트를 몇 권 꺼내더니 그중에 하나를 펼쳤다. 노트에는 전 페이지에 걸쳐 무언가 잔뜩 적혀 있었다.
“먼저 제1장, 이 1페이지에서 5페이지에 걸친 사건의 개요는 참고 문헌에 있는 『불법 정치 자금 사건』을 참고한 거잖아.”
“응, 그렇다고 봐야지. ……그래서?”
“그리고 6페이지에서 12페이지까지는…….”
노리코는 이런 식으로 장황하게 자료와 본문 확인 작업을 해 나갔다. 이 정도로 세세한 확인 작업은 담당 편집자도 좀처럼 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즈키는 그다지 걱정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저작에 관해 절대적인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도용도 하지 않았으며, 특정의 누군가를 상처 입힐 수 있는 무책임한 억측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노리코의 ‘정의 레이더’에 걸릴 걱정은 없었다. 직성이 풀릴 때까지 실컷 확인해도 상관없었다. 다만, 모든 자료를 읽고 본문과 대조하고 그 출처를 이 방대한 자료 속에서 찾아내는, 가히 초인적이라고 할 만한 노리코의 노력은 역시 사이보그를 떠올리게 하여 등골이 오싹해졌다.
가즈키는 와인을 마시면서 적당히 대답했다. 솔직히 어느 부분에 어느 문헌을 참고했는지는 아무리 저자라고 해도 전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 한 줄의 글에 많은 문헌들을 참고한 결과가 압축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치즈와 함께 크래커를 먹으면서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다 보니 알딸딸하게 취기가 올랐다.
노리코의 확인 작업은 다섯 시간이 지나자 겨우 마지막 페이지까지 끝낼 수 있었다. 밤은 완전히 깊었고 점점 더 거세진 빗방울이 유리창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참고 문헌의 이용은 제대로 된 것 같군.”
노리코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어.”
가즈키는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그녀를 치하했다.
“아직 끝난 게 아니야. 그 외에도 확인할 게 있거든.”
노리코는 다른 노트를 펼쳤다.
“다부치 씨를 만나게 된 부분에서 말인데, 어떻게 접촉할 수 있었지?”
“그거야 뭐…… 발품을 팔았지.”
가즈키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랬다. 이 책이 높은 평가를 받은 가장 큰 부분은 끈질긴 노력 끝에 다부치 본인과 접촉해 새로운 증언을 얻어낸 것이었다.
“제1장에 보면, 갑자기 다부치 씨의 핸드폰으로 가즈키가 전화를 해서 그가 무척 놀랐다고 되어 있지. 다부치 씨의 입을 통해서 진실을 듣고 싶다고 열심히 설득했고, 결국 진실을 들을 수 있었다고.”
“그래, 그랬었지.”
“그 얘기는 본인이 스스로 가즈키에게 전화번호를 알려 준 것이 아니라는 말이잖아. 그렇다면 전화번호를 입수한 방법에 위법성이 있었던 거 아니야?”
“뭐야, 그런 걸 노리코가 걱정하고 있었어?”
가즈키는 후훗, 하고 웃었다.
“물론, 전화 회사의 직원을 매수해서 개인 정보를 입수하는 작가도 있다고 들었어. 하지만 나는 그런 짓은 하지 않았어. 제대로 된 경로를 통했다는 얘기지.”
자신 있어 하는 가즈키 앞에서 노리코는 노트를 넘긴 다음, 새로운 메모를 확인했다.
“제대로 된 경로란, 전처인 오카모토 시호 씨를 말하는 거야?”
가즈키는 가슴이 철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