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준히 취재를 계속한 가즈키는 다부치의 전처가 동북 지방에 있다는 것을 알아내게 되었다.

 

체포되면서 가정은 붕괴되었고, 전처는 두 살짜리 아들을 두고 집을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어디로 가도 언론에 쫓기다 지친 나머지 숙식을 제공하는 술집에서 일하다가 이제는 유흥업소로까지 전락해 버렸다고 했다. 가즈키는 동북 지방의 유흥업소를 샅샅이 뒤져서 결국 그녀를 찾아내었다.

 

그렇게 취재에 몰두하다 보니 두 달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미안, 감기에 걸려서 못 갈 것 같아. 다들 내 몫까지 재밌게 보내.]

 

점심 모임이 있는 날 아침, 가즈키는 휴대폰으로 전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자 잠시 후, [정말? 많이 안 좋니?], [어머, 못 온다니 아쉽다.], [어서 회복하길.], [그래, 푹 쉬어.] 등의 회신이 왔다.

 

이제 됐다.

 

가즈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침대 위에서 기지개를 켰다.

 

평일인데도 학교를 안 가도 되는 날처럼 묘한 쾌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일 때문에 미뤄 두었던 빨래를 하고 청소기를 돌렸다. 내친 김에 욕조에 낀 묵은 때와 곰팡이까지 제거해 가며 청소를 하고 있는데 벨이 울렸다.

 

가즈키는 인터넷으로 주문했던 자료가 왔나, 하는 생각에 고무장갑을 벗고 서둘러 뛰어가서 응답 버튼을 눌렀다.

 

 

[미안해. 혹시 자는데 깨운 거 아니야?]

 

노리코의 목소리였다. 응답기 너머의 목소리가 합성 음성처럼 들렸다. 가즈키는 목덜미에서 돋기 시작한 소름이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된 거야? 점심 모임에 안 갔어?”

 

[친구가 감기로 앓아누워 있는데 속 편하게 점심을 먹고 있을 수는 없잖아. 그래서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다음 주에 만나기로 약속을 연기했어.]

 

다음 주…….

 

결국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 건가? 이럴 줄 알았으면 오늘 억지로라도 나갈걸 그랬어.

 

가즈키는 갑자기 몸이 납덩이가 된 것 같은 중압감을 느꼈다.

 

[죽을 좀 끓여 줄게. 재료는 내가 사 왔어.]

 

그녀는 할 수 없이 굳은 얼굴로 공동 현관의 잠금 해제 버튼을 눌렀다. 가즈키가 가장 만나고 싶지 않았던 노리코는 안으로 들어오더니 바로 부엌으로 향했다.

 

내 영역에 노리코가 있어. 숨 막히게 불편해. 정의의 사이보그 레이더에 내 생활 공간이 스캔당해 버릴 것 같아.

 

죽이 끓는 동안 키친 카운터를 닦고 있던 노리코가 뭔가 발견한 듯 말했다.

 

! 이 볼펜, 가에데 출판사의 로고가 있네.”

 

? , 그거. 맞아.”

 

솔직히 가즈키는 무슨 펜을 쓰고 있는지 따위는 의식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집에서 일을 할 때는 오로지 노트북밖에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 지급받은 비품이라는 거지?”

 

그럴지도 모르겠네. 일일이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말이야.”

 

하지만, 퇴사한 이후에도 가지고 있으면 업무상 횡령이잖아.”

 

? 겨우 볼펜 하나인데?”

 

회사의 자산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 이것이 현금이었다면 어때? 아무리 10엔이라도 가지고 나오면 안 되는 거 아니야? 그리고 이 메모장도 그래.”

 

노리코가 카운터 위에 있던 메모장을 집어 들더니 가즈키에게 들이댔다.

 

일에 사용되는 것 같지만 아래쪽에는 개인적인 장 볼 거리가 적혀 있어.”

 

가즈키는 성큼성큼 다가가서 노리코가 들고 있던 메모장을 낚아챘다. 용지 위쪽에는 취재한 내용들이 갈겨쓴 글씨로 메모되어 있었다. 그리고 같은 페이지 아래쪽 여백에 배추, 구강 청결제, 치약 등등의 단어들이 적혀 있었다.

 

그래서, 이게 어쨌다는 거야?”

 

회사의 경비로 이 메모장을 구입한 거라면 사적으로 이용하면 안 되잖아.”

 

알았어, 알았다고! 그럼 쓴 만큼 정확하게 장부를 조정할게. 이 메모장의 대금에서 이 여백만큼이 1엔이 될지 2엔이 될지 모르지만 빼서 청구하면 되잖아! 볼펜도 반납할 거야. 됐지?!”

 

 

 

가즈키는 메모장을 카운터 위에 내던졌다. 노리코의 눈은 아무런 감정도 없는 카메라 렌즈처럼 가즈키를 향했다.

 

왜 화를 내는 거지? 내가 뭐 틀리게 말한 거라도 있어?”

 

……없어.”

 

가즈키는 틀린 것이 없어서 더 화가 난 것이다.

 

, 죽이 다 됐다. 달걀 풀어서 넣어도 되겠지?”

 

노리코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주방에서 능숙한 솜씨로 죽을 끓였다.

 

, 어서 먹어.”

 

식탁 위에 갓 끓인 죽이 담긴 작은 뚝배기가 놓였다. 거칠게 의자를 끌어다 앉은 가즈키는 수저를 들었다. 먹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맛있는 냄새가 감돌면서 굶주려 있던 위장을 자극했다. 한입 떠먹었더니 익숙하고 부드러운 맛이 혀끝에서 퍼졌다.

 

……맛있어.”

 

그래? 그거 다행이다.”

 

노리코는 이번엔 슈퍼마켓 봉투에서 야채와 닭고기를 꺼내 리드미컬하게 칼질을 했다.

 

닭고기 수프라든가,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거 대충 만들어 놓고 갈게.”

 

노리코가 요리를 하고 있는 사이, 가즈키는 그녀가 만들어 준 죽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전업 주부인 노리코는 어린아이를 키우느라 바쁘고 피곤할 것이다. 그런데 친구가 아프다는 말에 전철을 갈아타고 와 주었다. 슈퍼마켓은 역에서 가즈키의 아파트와는 반대 방향에 있었다. 일부러 거기까지 가서 장을 본 다음에 무거운 짐을 들고 와서 죽을 끓여 준 것이다.

 

그동안 노리코가 한 말과 행동은 백퍼센트 옳았어. 그것을 불쾌하게 느낀 건 아무래도 내가 잘못한 것이기 때문에 생긴 분함에서 기인한 걸까.

 

전화벨 소리에 가즈키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핸드폰이 아니라 집에 있는 전화가 울린 것이다. 가즈키는 죽을 입에 머금은 채 일어나 전화기가 놓여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하지만 전화기의 번호 표시 화면에 공중전화라는 표시가 점멸하는 것을 보고 수화기를 들지 않고 자동 응답기로 넘어가기를 기다렸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년! 너 같은 년은 죽어 버려!”

 

음성 변조기를 사용해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놀란 노리코가 요리 중인 손을 멈췄다.

 

빨리 뒈져 버려! 안 그러면 언젠가 죽여 버릴 거야!”

 

상대는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남기더니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지금 이거 뭐야? 협박 전화?”

 

노리코가 눈썹을 찌푸리며 인상을 썼다.

 

, 신경 쓰지 마. 가끔씩 저런 전화가 걸려 와. 책을 낼 때마다 적이 늘어나서 말이야.”

 

누구한테 온 거야?”

 

알았으면 이미 붙잡았겠지. 경찰에 피해 신고도 했었고 범인의 정체를 몰라도 고소는 할 수 있지만, 공중전화로 한 거라 잡아내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하더라고. , 확실히 기분은 나쁘지만 그렇다고 여태껏 특별한 피해가 있었던 적도 없어서…….”

 

여태껏이라니……. 이런 지 얼마나 된 거야?”

 

얼마나 됐더라. ……, 2년 정도 될까.”

 

그렇게 오래됐어? 공중전화는 착신 거부 설정해 두는 게 어때?”

 

그렇게는 할 수 없어. 공중전화로 정보를 제공해 주는 사람도 있거든. 물론 처음엔 무서웠지.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 짓도 못 하는 약한 인간일수록 비겁하게 전화로만 저런다는 것을 알게 됐어. 그래서 이제는 그냥 담담해.”

 

그런데 어떻게 가즈키의 집 전화번호를 알고 있는 거야?”

 

명함에도 있고, 조금만 조사해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어쩔 수 없어. 잊혀진 사건 시리즈때문에 이름도 얼굴도 팔려서 유명세를 좀 치르는 거지 뭐.”

 

가즈키는 그렇게 애써 웃어넘기곤 자리로 돌아가서 죽을 다시 먹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면 가즈키는 여전히 이런 전화가 올 때마다 기분이 별로 안 좋았다. 그래서 더 이상 죽의 맛을 느낄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협박 전화 정도로 겁먹으면 남성 저널리스트에게 밀리고 만다는 생각 때문에 버텨 왔다. 어느 정도의 짓궂은 언행이나 위험을 각오하지 않으면 여자 혼자서 프리 저널리스트 같은 일은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 오늘 자고 갈게.”

 

요리를 만들고 있던 노리코가 문득 그렇게 말하자 가즈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

 

자고 갈게. 또 협박 전화가 올지도 모르잖아.”

 

노리코가 내 집에서 자고 간다고? 말도 안 돼.

 

아냐, 그래도…….”

 

괜찮아. 딸은 남편한테 맡기면 되거든.”

 

네 사정 같은 건 상관없어. 내가 싫단 말이야.

 

혼자 있지 않으면 일에 집중이 안 되거든. 그래서 고맙지만…….”

 

솔직히 화내면서 내쫓고 싶었지만, 가즈키는 어른답게 꾹 참으며 정중히 거절했다. 하지만 노리코는 자꾸 눈치 없는 소리를 했다.

 

혼자 떠안으려고 하지 않는 게 좋아. 필요하면 내가 일주일 정도 있어 줄 수도 있어.”

 

노리코와 일주일을 지낸다고?

 

가즈키는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찔해졌다.

 

자신의 행동이 모두 옳다는 노리코의 생각, 그리고 자기가 뭘 하든 기뻐할 거라는 태도에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자 가즈키는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혼자 있고 싶다고! 네가 자고 가는 거 싫단 말이야!”

 

일단 한번 터지자 말이 거침없이 나왔다.

 

너와 함께 있고 싶지 않단 말이야. 오늘 점심 약속도 나가기 싫어서 꾀병을 부렸어. 계속 참을 수 없었다고. 딴 사람 약점 찾아내서 잘난 척하며 지적이나 하고 말이야.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오늘도 자기 마음대로 남의 집에 쳐들어오고. 너의 그런 부분을 고등학교 때부터 싫어했어. 다 필요 없으니까, ! 어서 가 버려!”

 

가즈키는 요리하고 있던 노리코의 손에서 조리 도구를 뺏어 내려놓고 핸드백을 들려 현관 밖으로 내쫓은 다음, 도어록을 잠그고 도어체인까지 걸어 버렸다.

 

결국 말해 버렸어. 아무리 싫어하는 인간이라도 이렇게 찾아왔는데 면전에 대고 퍼부은 거, 잘한 짓인지 모르겠네. 그래도 언젠가는 해야 할 말이었어. 후회하지 않아.

 

가즈키는 살짝 흥분한 상태로 어깨를 들썩이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슬쩍 도어스코프로 밖을 내다보니 이미 노리코는 가 버리고 없었다.

 

이제는 점심 모임에 안 가도 되겠지? 다시는 노리코의 얼굴을 보지 않고 살 수 있겠네. 그래, 지금은 사이좋은 친구들 그룹이 필요한 고교 시절이 아니야. 그러니 무리해서 참석할 필요도 없어. 아아, 진작 말해 버릴걸 그랬어.

 

가즈키는 콧노래를 부르며 핸드폰에서 노리코의 번호를 착신 거부로 설정했다.

 

 

~ 8회에 계속 ~


*출간 전 연재는 총 10회까지 진행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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