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용돌이의 한국정치
그레고리 헨더슨 지음, 박행웅.이종삼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5년 9월
절판


한국은 현재 세계에서 인종문제도 소수민족 문제도 없는 얼마 안 되는 나라 중의 하나이다. 한편으로는 민족적 동질성이 분쟁과 긴장의 원인을 감소시키는 것이 사실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사회혁신의 원동력도 고갈시키는 면이 있다. 한국에는 세계 다른 많은 나라에 있는, 창조력 있고 근대화 감각이 뛰어난 소수민족이 없다. 보호해야 할 소수파가 없다는 것은 권리를 옹호할 기회가 적다는 것이 되며, 혁신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는 자극이 없다는 것이 된다. -63쪽

이런 점에서 유교는 중세유럽의 교회와 유사하지만 교회와 국가의 분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유럽과 다르다. 유럽이나 중동과는 달리 유교사회는 교회(서원)에 독자적인 교권제도가 없었다. 모든 것의 정점은 왕과 그 왕을 통제한 상층 관료였다. ...... 이런 조선의 방식은 중앙정부 이외에 조금이라도 독립성을 가진 도덕적, 종교적 권력이 중앙권력을 견제하는 형태로 존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유럽의 중세사회와는 달랐으며, 이슬람사회나 심지어 고려 불교사회와 비교해도 더욱 엄격한 것이다. -69쪽

그러나 이 유배는 공교롭게도 이 왕조가 사실상 거의 손을 놓앗던 일부 지방 개발의 방편이 되었다. 왕궁에서 멀리 떨어져 개발이 크게 뒤떨어진 지방에 왕가의 피를 이어받은 왕족들과 그 수행원, 여러 계급의 관리, 대학자(大學者)들이 오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진도(珍島)와 같이 외떨어진 지방은 유배된 관리들에게서 그들이 궁중에서 배운 왕실의 문화, 학식, 요리법, 의례 등의 지식을 고스란히 전수 받을 수 있었다. -80쪽

한국은 조선 시대를 앞지를 정도로 수도 중심 사회로 발전했다. 일본 치하에서는 독립적인 경제인이나 중요한 지위에 있는 관리들이 지방의 도시나 항구의 고리에서 기업을 발전시키거나 출세를 할 수 있었지만, 한국 고유의 제도에서는 모든 것의 본거지가 서울이 아니면 안 되었고, 모든 야심가들은 서울에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서울에 있지 않으면 소외감을 느꼈고, 지방에서 산다는 것은 불명예를 의미했다. -316쪽

이와 같이 표면화하지 않은 계층이동이 적어도 1592-98년의 임진왜란 기간 동안 진행되었는데, 당시 족보 등의 기록이 대량을 유실됨으로써 이동의 진행이 용이해진 것이다. 이 유동성은 그 후 3세기에 걸쳐 점차 확대되어 신분제도를 침식했고, ......
정치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규모로, 거의 모든 계급으로부터 중앙권력을 향해 야망에 찬 개인들이 원자(原子)처럼 흩어진 채 제한 없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320-321쪽

파벌주의는 전쟁과 부패로 더욱 만연했다. 전쟁은 경험이 부족한 장교들의 오류를 확대시켰으며, 이를 호도하기 위한 파벌 보스의 보호막이 끊임없이 필요해 부패가 더욱 확산되었다. ......
한 장교는 1946년 트럭 1대분의 담요를 부정으로 처분한 것의 처벌을 피하기 위해 월북했다가 다시 월남했는데, 그의 파벌 보스인 당시 참모총장이 그를 복직시켰다. 또 다른 장교는 적전에서 지프차를 타고 도주한 사실이 있는데도 복직되었다.많은 사람들이 공금 유용, 군용차량의 부적절한 사용 등으로 고발되었으나 보호를 받았다. -496-4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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