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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고전 번역을 찾아서 - 우리말로 옮겨진 고전, 무엇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교수신문 엮음 / 생각의나무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지 어언 500여년이 흘렀다. 하지만 정작 한글이 우리 사회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의 식민 지배를 벗어던진 후의 일이다. 그러나 해방된 후에도 일본어를 통해 학문을 배운 1세대 학자들이 우리 학계의 주류를 형성했고, 한글 독서보다 일본어 독서가 더 자유로운 그들에게 외국고전의 한글 번역은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 후 미국 등지에서 서양학문을 익힌 세대가 등장했지만 그들 역시 번역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서양 학자에게 배운 그들은 한국에 와서도 서양 학자들이 하던 방식대로 하면 그만이었다. 예컨대 영미의 학자에게 로크나 홉스는 연구대상이지 번역대상은 아닌 것이다. 따라서 미국인 교수에게 배우고 돌아온 학자는 로크, 홉스에 대한 논문은 써도 번역은 전혀 관심 밖이다.
문제는 서양학문이 서양인에게는 ‘내 것’이지만 우리에게는 ‘남의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서양인들은 ‘남의 것’인 외국학(중국학 등)을 연구할 때 일차적으로 해당 텍스트를 번역하는 것으로 연구의 물꼬를 튼다는 점이다. 실제로 오늘날 미국, 독일 등의 주요 대학 동양학 석, 박사 논문은 절반 이상이 번역으로 채워지고 있다.
비유하자면 그들이 ‘자신들의 대지’에 발을 딛고 ‘모국어의 깃발’을 휘날리는 동안 우리는 ‘주체(identity)’에 대한 하등의 성찰 없이 ‘성조기’를 휘둘러댄 셈이다. ‘기지촌 지식인’이란 이를 두고 말함일 것이다. 이렇게 굳어진 학계의 관행 탓일까. 우리 선조들이 남긴 한적(漢籍) 가운데 아직도 70퍼센트 가량이 번역 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번역을 등한시한 결과 일본과 서양 각국에 비해 우리 모국어의 콘텐츠는 상대적으로 나날이 빈약해지고 있다. 극소수 엘리트를 제외한 대부분 국민이 외국의 고급 지식에서 차단된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우리의 과거로부터도 상당 부분 단절되어 있는 것이다.
황폐한 여건 속에서 『교수신문』이 큰일을 해냈다. ‘고전번역비평’이란 이름으로 주요 고전 번역서에 대한 평가 작업을 기획해 2005년 4월부터 연재했고, 그 1차분을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낸 것이다. 과문의 탓인지 모르나 우리나라 교수 사회가 번역 문제에 이토록 큰 관심을 기울인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이 작업은 21세기 초 한국 문화사에서 대단히 의미 있는 사건으로 기록되리라 전망한다. 물론 제비 한 마리로 봄이 올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책을 출발점 삼아 ‘모국어 콘텐츠에 기여하는 학문’의 전통이 우리 학계에도 조금씩 뿌리내리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