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용주 - 그와 박정희의 시대
안경환 지음 / 까치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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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파리만국평화회의에 조선 대표로 참석한 김규식이 프랑스어를 몰라 조선의 국가 이익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한 황용주(1918-2001). 그는 하나뿐인 딸 이름도 '란서'라 지었다.

부산일보 편집국장 겸 사장을 지내면서 놀라운 필력으로 부산일보 발행부수를 획기적으로 끌어올렸다.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30만원 월금 받을 때 황용주는 50만원을 받고 스카우트 되었다. ...(경쟁지인 국제신보의 편집국장이 이병주였다. 이병주 역시 불문과 출신.)

3.15 부정선거 이후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김주열 군의 시산을 최초로 사진 보도함으로써 사실상 4.19를 이끌어낸 장본인이기도 한 황용주. 청룡영화상보다 2년 빨리 부일영화상을 제정할 정도로 문화, 예술면에서도 탁월한 감각을 보여준 그는 부산의 문화적 독자성을 끌어올리는데도 기여했다.

황용주는 박정희와 대구사범 입학동기였지만 좌익 독서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졸업을 못하고 2학년 때 퇴학 조치되었다. 그 때 독서회 회장이 조좌호. 그 후 조좌호는 도쿄제국대학 사학과로, 황용주는 와세다대학 불문과로 진학하고...조좌호는 중국사학자로서 훗날 성균관대 총장을 지내고...(대학 시절 조좌호 교수의 <동양사 대관>으로 중국사 읽던 기억이 새록새록...)

5.16 이후 박정희와 무시로 독대를 할 수 있는 황용주를 경계한 박정희 측근 소장 세력에 의해 필화 사건에 얽혀 감옥 행. 감옥에서 나온 후 경제적으로도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신산한 노년을 지냈다. 황용주의 인생은 40 전후에 절정을 달리다 그 후론 계속해서 내리막길이다.

딸 '란서'는 이대에서 식품공학을 전공한 후 이름처럼 '불란서'로 유학. 유학한지 몇 년 후 프랑스 남자에게 청혼을 받았고 아버지에게 결혼을 허락 받았다. 란서는 아들 둘을 낳았다.

그런데 10여년이 지난 후 갑자기 아버지를 찾아왔다. "그이와 성격 차이로로 살 수 없어요. 이혼할래요..." 대학 2학년때 아빠와 아래 사진을 찍었다. 딸바보 필이 팍팍 난다. 황용주가 죽은 후 란서는 어머니를 파리로 모셔가 함께 살고 있다. 어머니 나이는 올해 92세.

저자는 노무현 정부 시절 인권위원장을 지낸 안경환 교수다. 진보 학자가 우익 인사의 전기를 썼다. 황용주, 안경환 두 사람 모두 경남 밀양 출신이다. 둘 사이에도 기묘한 인연이 얽혀있다. 궁금하면 일독하시라!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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