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불행한 일이 있을 때면 누군가의 묘지를 방문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거기에는 한 다발의 시든 꽃이 놓여 있고 누군지 모를 타인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에는 이끼도 드문드문 끼어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묘지 앞에 서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허망하고 허무한 것인지를 생각해보라. 그러고 나면 자기 앞에 놓인 불행이 얼마나 작은 것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아무리 화려한 삶을 살았더라도 죽음 이후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사실에 작은 안도를 느끼며 한순간의 불행에 일희일비 하지 말자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것이다. 현재의 불행을 상대화시켜 볼 수 있는 객관적인 시선을 갖추기에 누군가의 죽음만큼 좋은 본보기는 없다. 사람은 그처럼 일단은 자기 본위로 생각하는 이기적인 존재인 모양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죽음은 그 반대의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가령 매년 만우절마다 화제에 오르는, 진정 거짓말과 같았던 장국영의 죽음이 그렇다. 벌써 11년 전의 일인데도 그의 죽음이 여전히 아프게 기억되는 까닭은 그것이 삶의 허무함을 극대화시켜 보여주기 때문은 아닐까. 마냥 행복할 것만 같았던 스타배우의 허망한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에야 밝혀지는 그의 불행한 사생활은 그가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을 ‘안타깝게도’ 사람들로 하여금 납득하게 만들었다. 그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해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 죽음이 너무나 안타까워 이해하고 싶지 않은 모순된 심정이 사람들을 괴롭혔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반응을 아주 가까운 사람이 죽었을 때나 경험하는 것이라면 장국영은 죽음을 통해 대중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선 셈이다.

 

그런데 이번 만우절에는 ‘죽음’ 대신 하나의 ‘시신’이 화제에 올랐다. 한강의 다리 아래에서 영화를 찍던 할리우드 촬영팀이 신변을 비관해 자살한 것으로 추정되는 한 청년의 시체를 발견한 것이다. 물론 하루가 멀다 하고 스펙터클 블록버스터 영화급의 대형사건들이 터지는 대한민국에서 이 사건은 그렇게 호들갑을 떨 만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 정말 그럴까? 아무리 그래도 누군가의 죽음을 지진과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이어 외국 촬영팀이 ‘다이내믹 코리아’에서 겪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치부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촬영팀이 낯선 타국에서 겪었을 ‘멘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죽음을 선택하기까지 겪어야 했을 고통에 대한 아무런 언급 없이 ‘세상에 이런 일이’쯤으로 넘기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어떤 시선에서 사건을 보는지에 따라 그 의미는 이렇게나 달라질 수 있다. 오래된 무덤을 마주하고 자신의 삶을 하나의 대상으로 객관화시키는가 하면, 타인의 죽음을 자신의 것과 동일시해 우울함에 빠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청년의 죽음은 어떤 시선에서 조망되고 있는가. 이 사건은 청년 자살률이 높아져만 가는 대한민국의 일상에서 벌어질 수 있는 흔한 해프닝에 불과한 것인가? 오히려 누군가의 죽음을 한갓 해프닝으로 치부해버리고 마는 우리의 정신 상황이야말로 ‘멘붕’할 만한 것은 아닐지. 청년의 죽음은 우리의 삶을 객관화시키기에는 너무도 가까운 것이지만 동일시를 이끌어내기에는 너무도 알려져 있지 않다. 이것이 우리 모두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면 그 죽음은 조금 더 존중받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들 각자의 삶도 좀더 존중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2014.4.6. 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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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남자친구를 앞에 두고 다그치는 여자처럼, 네가 도대체 뭘 잘못한 건지는 아느냐고 따지고 싶을 때가 있다. 카드사를 비롯해 KT의 개인정보 유출 사태에 대한 기업과 정부 측의 대응만 해도 그렇다. 연이은 개인정보유출 사태에서 알 수 있듯, ‘개인정보’는 더 이상 ‘개인’의 정보가 아니게 되었다. 절대로 추가 유출은 없을 것이라던 금융당국의 발표도 거짓으로 드러났다. 자기보다 자기 개인정보가 더 많이 해외여행을 한 것 같다는 자조에, 이제 6원까지 떨어진 개인정보의 가치가 1원으로까지 떨어지면 아마 해킹이 없어질 것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들린다. 이미 다 털린 개인정보라도 ‘개인’이 알아서 관리해야 할 형편이다.

 

그나마 이러한 사과는 말뿐이기는 하더라도 양반에 속한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의 증거조작 논란에 대해 국정원은 며칠 전 기습적으로 한밤중에 사과문을 발표했다. ‘우리도 속았다,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는 전형적인 ‘꼬리 자르기식’ 꼼수 사과였다. 갑작스런 사과에 사람들이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아니나 다를까 국정원은 업무처리 과정의 미숙함에 대한 사과였을 뿐 위조에 대한 사과는 아니었음을 다시금 강조했다. 하지만 여전히 미심쩍기는 마찬가지다. ‘국가 최고의 정보기관’이 한낱 민간인에게 속았다는 갑작스런 고백을 ‘자랑스런’ 대한민국 국민으로서(함 모씨의 주장대로라면 병역의무를 치르지 않은 3/4짜리 국민이지만) 어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물론 진실이 밝혀진 이후의 사과라고 더 나은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다. 군 사망 사고의 유가족 어머니에게 성관계를 요구하는 문자를 발송한 군 조사관의 패륜적 행동에 대해, 국방부는 처음에는 사실이 아니라며 공식적으로 부정했다. 이후 드러난 증거들로 사실이 밝혀지고 나서야 국방부는 말을 바꾸어 유감을 표명했다. 하지만 이 사과문에도 유가족 어머니가 제기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군 사망 사고에 대한 민관합동의 외부조사-에 대한 언급은 차치하고라도, 자신들의 뻔뻔한 거짓말에 대해서조차 일언반구가 없었다. 이렇게 헛다리짚은 사과, 앞뒤 구분 없는 사과를 ‘영혼 없는 사과’라 부른다.

 

심각한 이야기를 벗어난 곳에서도 ‘사과’와 관련한 어떤 대응이 눈길을 끈다. 빗발치는 비난 속에 사과가 아닌 ‘입장’을 밝힌 패기 있는 언론사 ‘디스패치’가 그 주인공이다. 김연아의 열애설을 보도한 디스패치는 명백한 사생활 침해와 자신들의 파파라치 행동을 당당하게 ‘알 권리’라 주장한다. 그들은 열애설을 보도한 날 공교롭게도 국정원 협력자의 자살시도가 있었다는 점 때문에 오해가 있는 것 같다며, 관련 기사를 링크하는 친절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자신들의 기사가 정치적 문제와 관계없다는 항변이기도 하겠지만 이쯤 되면 사과도, 입장표명도 아닌 ‘스포츠 연애 기사나 보는 사람들’을 향한 야유에 가깝다.

 

일단 사과나 하고 보자고 막 던져지는 사과문들의 홍수 속에 허탈해 질 즈음, 엉뚱한 곳에서 터진 처절한 사과에 정신이 번쩍 뜨인다. “주인 아주머니께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 세 모녀의 죽음이 그것이다. 그들은 신세 한탄이나 사회에 대한 원망, 분노가 아닌 ‘사과’를 마지막으로 남겼다. 그들의 사과는 지금까지 말한 것과는 정반대의 지점에서 사과의 의미를 벗어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그 어떤 사과에도 분노할 수밖에 없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2014.3.15 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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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아나운서가 열애설을 부인하기 위해 올린 트위터 내용이 화제가 되었다. “나라가 이꼴인데 무슨 연애…”라며 뜬금없이 시국 선언을 한 것이다. 본인은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겠지만 이 말은 화제가 되며 네티즌들의 패러디를 낳았다. 나라가 이꼴인데 무슨 공부냐고 자조하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나라가 이꼴인데 연애하는 자신은 ‘무개념’이냐며 반발하는 이도 있었다. 그렇다면 결론이야 어찌 됐든 ‘나라가 이꼴인데’라는 과격한 전제에는 다들 동의하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나라가 이꼴이어도 연애는 해야지 어쩌겠는가. 연애는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항력적으로 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연애가 나라꼴에 따라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수많은 문학 작품과 영화, 드라마를 통해 증명된 바 있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응답하라 1994」에서도 서사의 중심은 연애이다. 이 드라마는 고등학생들이 주인공으로 나왔던 「응답하라 1997」의 후속작으로, 90년대 중반을 살아갔던 대학생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런데 대학생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고등학생들을 주인공으로 다룰 때는 연애 서사를 중심으로 당시 분위기를 보여주는 디테일한 소품과 굵직한 사건 몇 개를 배치하는 것만으로도 드라마가 꾸려졌다. 하지만 대학생이 주인공이 되자 그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이 드라마에서 배경으로 하고 있는 1994년의 대학생활은 과연 어땠을까? 이 드라마에서 과거 자신들의 모습을 중첩시켜가며 보는 94학번 언저리의 사람들은 대체로 당시를 민주화된 사회라고 자부하면서도 대학생의 사회참여에 대한 최루탄 진압과 임의 체포가 여전히 남아있었던 혼란기로 보는 듯하다. 이 당시 대학생 문화는 학과 학생회를 중심으로 돌아갔고, 여기서 학과 학생회는 당연히 ‘운동권’에 연계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 당선으로 형식적인 민주화가 이뤄진 후 소위 ‘X세대’라 불리게 된 대학생들의 개인주의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과방에는 대중가요와 민중가요가 애매하게 공존했다고 한다. 락카페를 순회하다가도 과방에 들러서는 우루과이라운드로 인한 쌀 개방 문제에 대해 한 마디 듣지 않을 수 없었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당시 대학생 사회의 애매한 혼란이 드라마에서는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그들은 삐삐를 치고 PC통신을 하고 마하쎄븐을 마시고 『슬램덩크』를 읽으며 연애에 몰두할 뿐이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드라마를 왜 다큐로 받아들이느냐는 이들도 있다. 재밌으면 됐지, 드라마에 뭘 더 바라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온갖 소품과 대중가요를 가지고 당시 시대상을 고증하려는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왜 당대 대학 문화에서 결코 없었던 척 할 수 없는 학과/학생회 문화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드라마의 리얼리티는 소품만으로 달성되지 않는다. 1994년도를 응답하게 하려면 무엇보다 그 당시의 ‘현실’이 어떠했는가를 말해야 하는 것이다.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려는 편협한 태도를 통해서 재현되는 것은 무책임일 뿐이다. 레비나스는 응답을 책임의 다른 이름이라고 말한 바 있다. 타인의 호소에 응답(respond)하는 귀를 가진 이들은 ‘책임’, 그러니까 응답가능성(respons-ibility)의 능력과도 무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라가 이꼴이어도 연애는 해야 하듯, 연애는 하더라도 ‘나라가 이꼴’인 데 대한 책임은 같이 져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훗날 당신도 ‘응답하라 2013’을 당당히 외칠 수 있지 않겠는가.

2013.11.24. 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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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는 사자, 독수리, 당나귀 등 무수한 동물들이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사람을 대신해 짐을 지고 묵묵히 사막을 건너는 낙타는 고통을 한없이 감내하는 짐꾼으로 그려진다. 그는 부당한 명령 앞에서도 항의하거나 저항하지 않는, 노예의 도덕을 내면화한 존재이다. 그에게는 주인이 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전부 거는 모험을 할 만한 용기도 의지도 없다. 니체는 이것의 원인으로 “중력의 영”이라는 난쟁이를 든다. 중력의 영은 삶과 대지를 무겁게 만들어 그들을 춤출 수 없고 공중으로 도약할 수 없게 한다. 삶을 하나의 무거운 의무로 받아들이고 주어진 것에 순응하며 더욱 무거운 짐이 실려도 묵묵히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개봉한 영화 「그래비티(Gravity)」는 오히려 중력의 존재감을 역설한다. 영화의 주인공 라이언 스톤은 급작스럽게 딸을 잃고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일종의 방편으로 우주를 택한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관계를 맺을 사람들이 없는 무중력의 공간을 향해 피신한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말한다. “우주가 정말 좋은 건 고요하다는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충돌 사고로 우주 미아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야 그녀는 비로소 자신과 동료를 연결해주는 선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는다. 구조될 희망이 없는 절망 속에 홀로 남겨져 자살을 결심을 할 때 무선기에서 들려온 누군가의 목소리는 우주의 고요를 깨고 그녀에게 관계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에서의 중력을 인간이 감내해야만 하는 현실적인 제약들이라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중력이 없으면 땅에 발을 딛고 살 수 없듯 사회를 유지시키는 현실 질서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니체가 말한 낙타의 삶일 뿐이다. 빚에, 실연에, 실업에, 고독에 짓눌린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니 그저 받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중력의 영의 논리이다. 이들은 불법시위를 무죄라고 판결하면 거리 질서가 흔들리고, 자본주의 경제를 지지하는 중력으로서 시장원리를 규제하면 시장이 무중력 상태로 나아갈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한다. 만일 이런 관점이라면 ‘대국민 사기극’이라고 불리는 4대강 사업도, 민주주의를 파탄 내는 최근 일련의 사태들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묵묵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사회질서는 고정불변한 것으로 인간에게 주어지는 중력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 아닌가.

무엇보다 「그래비티」는 그 너머의 차원을 이야기한다. 라이언 스톤이 우 주에서 역경을 겪는 것은 단지 중력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녀를 힘들게 한 것은 아무런 고통도 없을 것 같은 우주에도 고통은 있다는 사실이었다. 혹은 그 고통을 함께 나눌 누군가가 없다는 절대적 고독의 상황이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해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고통을 당연한 것으로 감내하면서 노예의 삶을 살아서도 안 된다. 어떻게든 삶을 의무로 만드는 중력의 영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창조하면서 살아야 한다. 어쩌면 「그래비티」에서 그러했듯, 자신과 마찬가지로 조난을 당해 헤매고 있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데서 그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도 사람이지만, 사람을 살리는 것도 결국은 사람이다.

 

http://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3268

2013.11.1 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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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특집으로 한 방송사에서 3부작으로 예능 프로그램을 내보냈다. 기획 의도는 나쁘지 않았다. 대한민국 하위 3%의 문제 아이들을 100일간의 프로젝트를 바탕으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일으키겠다는 것. 하지만 1부 방송이 나간 직후부터 비난 여론이 거세게 몰아쳤다. 학교 폭력의 가해자이기도 했던 아이들의 발언이 그대로 전파를 탔기 때문이다. “애들을 땅에다 묻고 그런 적도 있었어요”, “고1때 폭행 전치 8주…그냥 쳤는데 기절해 버렸어요”와 같이 자극적인 문구들이 아이들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제작자들은 이런 과격한 멘트를 통해 후반부에 변화된 아이들의 모습이 더 큰 감동을 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예능 감각’에는 학교 폭력의 피해자들이 여전히 시달리고 있을 고통에 대한 이해와 아직 청소년인 가해자 학생들의 인권에 대한 배려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이 노렸던 ‘감동’은 그렇게 역풍을 맞았다.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입장에서 문제적인 사건을 다루는 것이 얼마나 엽기적인 결과물을 낳을 수 있는지는 역사에 적용해보면 알 수 있다. 이를 보여주는 것이 「액트 오브 킬링」(2012)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이 영화는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졌던 끔찍한 학살 사건을 다룬다. 1965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인도네시아 군부정권은 동남아시아 공산화를 두려워한 당시 서구 국가들의 묵인 하에 100만 명이 넘는 정적을 학살했다. ‘공산주의자’라는 명목 하에 살해당한 이들은 대부분 소작농이나 화교, 지식인, 반정부 인사들이었다. 하지만 학살자들은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국민적 영웅’으로 대접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이 때문에 학살 사건을 영화화하고자 했던 시도는 생존한 학살자들의 방해로 번번이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영화감독 오펜하이머는 학살에 가담했던 사람들에게 당시를 재현한 영화를 그들을 주연으로 해서 찍겠다고 설득한 후, 그 과정을 메이킹 다큐멘터리로 찍는다. 그렇게 가해자의 시선에서 촬영된 영화에는 학살자들이 공영방송에 나와 ‘공산주의자들을 빠르고 인도적으로 죽일 수 있는 방법을 고안했다’며 칭송을 받는 장면이나, 천 명을 죽인 학살자가 희생자들이 자신들을 천국으로 보내주어 고맙다며 그에게 상을 주는 장면을 촬영한 뮤지컬 판타지가 나오기도 한다. 영화에 나오는 학살자 중 한 명은 말한다. “‘전쟁 범죄’는 승자에 의해 정의된다. 나는 승자다. 그래서 나는 나의 정의를 만들 수 있다”라고. 하지만 그 ‘승자’에 의해 정의된 역사는 인간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를 증명할 뿐이었다.

물론 학살자 중에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자신의 결백을 주장함으로써 죄의식을 가지기 시작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인물도 있다.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해 가해자들이 스스로의 죄를 인식하게 되는 과정을 담은 ‘몰카 형식의 심리치료 역할극’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가해자가 반성을 했는지의 여부가 아니다. 그보다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것은 여전히 가해자의 권력 아래 있는 피해자들이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낼 수조차 없는 현실을 계속해서 상기시킴으로써 윤리성을 확보한다는 점이다. 그러고 보면,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과격한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까?”라는 과제를 실은 어떤 한국사 교과서의 문제 역시 ‘이념’이나 ‘팩트’의 차원만은 아닐 것이다. 가해자의 입장을 이해해보라고 요구하는 이 ‘예능감’ 충만한 교과서에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윤리조차 부재한 것이 아닌가.

2013.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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