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저널리즘 : 동아시아의 문화지정학 아이아 총서 3
마루카와 데쓰시 지음, 백지운.윤여일 옮김 / 그린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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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에서 하는 세미나 준비차 읽게 된 책이었는데 여러 모로 유익했다. 리저널리즘은 '지역주의'라고 번역할 수 있는 단어인데, 번역으로 인해 오히려 잘못된 인식을 갖게 될 것을 우려하여 원래 발음을 살려서 번역한 것 같다.

 

1부의 제목이 <방법으로서의 '리저널리즘'>인 데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를 말한 다케우치 요시미의 관점에 주목한다. 일제 말기 문학을 연구하면서 다케우치 요시미에 대한 책을 읽은 적이 있었음에도 이 책을 통해 그 관점이 보다 명확하게 이해되는 느낌이었다.

 

이 책은 1장에서는 유럽 근대의 확장 과정과 관련해서 지역주의적인 관점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데, 밤에 잠이 안 와서 별 생각 없이 책을 펼쳐서 읽다가 '우어~'하고 자세를 고치고 다시 읽기 시작했다. 저자가 책을 서술하는 방식 자체가 (일본 연구서의 특징일 수도 있지만) 연구서답지 않게 필요한 부분만을 간략히 설명하고 넘어가는 식인데, 그러한 몇 문장의 언급들 가운데 반짝반짝 통찰력이 빛나는 것들이 많아서 주의를 기울이면서 정독하게 된다.

 

<지중해>에 주목함으로써 '나름' 지역성에 주목하고자 했지만 결국 기독교 세력 대 이슬람 세력이라는 구분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브로델로부터, 유럽 중심의 '세계사'를 상대화하려고 한 이집트 출신의 경제학자 사미르 아민, 그리고 무엇보다 재미있었던 칼 슈미트에 대한 언급. 전쟁사가 군사기술사에서 전제되는 매끄러운 발전성 연속성을 불편해 했던 슈미트를 알튀세르와 연결시키면서 <발전적 연속성으로 측정할 수 없는 유동성으로서, 단기 중기 장기라는 시간의 파동을 수직으로 가로지르는 우연적인 '힘'의 계기>를 파악해야 한다는 지적에서 감탄이 나왔다.

 

<다시 말해, 알튀세르가 비판하고자 했던 것은 세계의 중심을 경유하는 인식경로를 벗어나서는 자신을 해석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그런 세계/인식/구조이다. 스스로에 의해 스스로를 아는 것, 그것은 세계의 중심으로부터 인용되거나 그 본질의 정의를 거치지 않고서는 결코 실행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비판이다.>(39)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동아시아의 현대사를 둘러싼 '냉전'이라는 전후 세계질서의 문제성이 아닐까 한다. 냉전체제의 문제성이 아시아 식민지배 과정에서 만들어진 일본의 왜곡된 아시아인식의 문제로까지 이어져 있음을 지적하면서, 2장과 3장에서 일본과 아시아의 관계가 어떻게 요동쳐 왔는지에 대해 분석하게 된다. 역사주의의 덫에 빠져 역사를 상대화하는 데 실패하기가 얼마나 쉬우며, 또한 그로 인해 왜곡된 민족의식에 사로잡혀 동아시아를 비롯한 국제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왔던 것을 생각하면 이 책에서의 관점은 더 소중하게 생각된다.

 

역사에서 '만약'은 금물이라고 해도 알튀세르가 말한 <측정할 수 없는 유동성>을 생각하며 역사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과거에 이뤄내지 못했던 가능성을 발견하려는 것, 한편으로 그러지 못했다는 점을 반성하면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책임을 다하려는 태도의 윤리성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겠다. 역사를 자기 합리화의 기제로 이용하려는 자들과는 달리, 그러지 않을 수 있었음을 지속적으로 말하는 작업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실감한다.

 

이런 점에서 다케우치 요시미와 함께 저자가 긍정하는 내셔널리즘이란, <우리 안의 당사자성을 불러내는 실천>(118)이라고 할만한 것으로, <주체로서의 책임을 지는 자세>이다. 45년 8월 15일을 '굴욕'으로 기억했던 다케우치 요시미는 일본이 <동서냉전의 서쪽 진영에서 미국 극동정책(군사, 경제, 정치)의 모범생으로 착실히> 사는 전후의 현실을 비판한다. 이와 같은 지점에서 나 역시 '45년 8월 15일'의 의미를 묻게 된다. 45년의 '해방'이 한반도에서 과연 '해방적'이었다고만 말할 수 있는가. 이것이 또 다른 종속의 시작이자 혼란의 기점으로 볼 수 있다고 할 때 '해방'의 의미는 되물어져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3부의 3장 <한국전쟁으로 돌아가라>는 한국 전쟁을 국공내전의 자장 안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면서 중국과 북한의 핵 전략이 한국전쟁 당시 중국의 전쟁 참여와 관련된 것임을 밝힌다. 이러한 맥락을 살펴보면 단순히 '핵 반대'라는 구호가 현실에서 당위로만 되풀이될 뿐 현실에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들이 이해가 된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동아시아에서 핵의 근절은 한국전쟁의 종전, 즉 동아시아에서 한국전쟁의 전후처리를 완결하는 순간에 이루어질 것>(191)이라고 판단한다. 저자가 이 글을 쓴 2006년으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다시금 북한 핵 문제가 부각되고 있는 상황에서 곱씹어볼만한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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