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깊은 계단
강석경 지음 / 창비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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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강석경이 중편 '숲속의 방'을 발표한 것은 1985년이고 내가 그 작품을 읽은 것은 그 이듬해쯤일 듯하다. 그 때, 나는 3년차 햇병아리 교사로서 한 여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한 달에 한 번씩 경주에 나가 오랜 탐색 끝에 사오는 한 꾸러미의 책 속에 초록색 표지의 '숲속의 방'도 끼어 있었을 것이다. '어느 운동권 여학생의 방황과 자살'을 다룬 소설이라는 기억만이 흐릿하게 남아 있는데, 당시의 내 느낌은 '배부른 중산층의 관념놀이 아닌가'라는 것이었다. 깜깜했던 80년대 전반기에 학교를 다녔던지라 운동권의 정서 따위에 무지했던 탓도 있지만, 중산층 출신이라고 지레 단정해 버린 강석경에 대한 선입견도 작용했지 않았나 싶다.


지은이의 네 번째 장편인 "내 안의 깊은 계단"을 읽은 것은 1999년이다. 작가에 대한 특별한 기호나 믿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신문의 신간 안내를 읽고 '회가 동해서'였다. 작품의 소설적 완성도와는 무관하게 작가의 삶에 대한 원숙한 해석이 통째로 맘에 들었고, 인터넷 서점 알라딘의 마이리스트에 '만나고 싶은 작가들'로 그녀를 등재했다. 전적으로 취향의 문제이긴 하지만, 나는 신경숙의 소설을 읽지 않는다. 같은 이유로 나는 공선옥과 하성란을 좋아한다. 나는 그녀들의 작품 속에 튼실하게 자리한 인간과 삶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작가와 공유한다고 믿고 있다.


강석경에 대한 알라딘 마이리스트(my list)의 코멘트는 대충 다음과 같은 것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게 이런 거'라고 넌지시 알려주는 작가. "숲 속의 방"으로 떠오를 때만 해도 내게, 그녀는 새로운 작가의 한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내 안의 깊은 계단'을 읽고나서야 나는 그녀가 훌륭한 작가라는 데 동의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는 본질적 의미에서 '사랑과 섹스'를 제대로 이해하는 작가이다."




 80년대 내내 나는 40대와 50대의 세계관을 경멸하고 더러는 증오했다. 그들이 가진 삶의 경륜과 슬기보다는 우유부단한 태도와 애매한 절충적 입장 따위만이 눈에 보였고, 그들이 개혁과 진보의 걸림돌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무언가에 홀린 듯이 살았던 세월을 지나 40대의 마지막 고비를 넘으면서 나이가 수구(守舊)의 징표가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이 가능한 깊고 그윽한 시선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작가 강석경은 우리 나이로 올에 쉰다섯 살이다. "내 안의 깊은 계단"을 읽으면서 나는 그녀가 바라보는 삶에 대한 눈높이와 내 그것이 겹치는 부분을 바라보기 시작했으며, 삶이란 여주인공 이진이 말한 '누구나 가슴속에 저만이 딛고 내려가는 깊은 계단'을 거쳐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교직(交織)되는 것임을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작가는 아마 오래 경주에 살고 있는 듯하다. 그녀는 작가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소설의 모든 것은 전적으로 경주라는 환상적인 고도가 준 영감에 힘입어 씌어진 것 같다. 둔덕처럼 이지러져 자연의 부분이 된 천오백년의 고분 곁을 지나다니며 나는 자연스럽게 생사(生死)의 순환 질서를 체득하게 되었다. 우리의 가슴속엔 남 모르는 깊은 계단이 있고, 삶의 껍질을 벗고 그 계단으로 내려간다면 본질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네 인물의 이야기다. 늘 선의와 인간에 대한 이해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 젊은 고고학자 강주, 그리고 그의 아름다운 연인인 바이올리니스트 이진, 그리고 욕망을 좇으면서도 그 공허 앞에 무너지는 남자, 강주의 사촌인 연극연출가 강희, 그리고 그의 여동생, 첩의 딸이라는 존재의 한계를 뛰어넘으려 몸부림치는 소정이 그들이다.


강주를 사랑하면서도 연극 연출을 통해 자기 욕망을 실현해 가는 아웃사이더 강희에게 흔들리는 이진, 결혼을 앞두고 교통사고로 숨진 강주가 남긴 아이를 잉태한 채 강희의 청혼을 받아들여 결혼하지만, 서로의 아집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고통스러운 결혼생활을 계속한다. 그녀는 스스로를 '방향 감각을 상실한 돌고래처럼 강을 거슬러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돌아갈 수 없는 강.


'고통 때문에 스스로 죽여 버린 태양을 가슴에 묻은 여자' 소정은 자신의 존재 조건에 번민하며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다가 이혼하고 호주로 이민하는데, 중국 여행 중 일본인 청년 히로를 만나 새롭게 사랑을 이해하게 되면서, 그가 '내 고통을 보상하기 위해 신이 보낸 선물'이라고 독백한다. 그녀는 유일하게 자신의 정원[소정(少庭)]에 놀 수 있는 사람, 강주의 죽음을 '사랑의 부재를 믿는 내게 한 인간을 보내고 안식의 길을 떠났다'고 이해한다.


삶이 갖는 복잡다기한 얼굴과 그 행로들을 담담하게 그려나가면서 작가는 이진의 입을 통해 저마다의 가슴에 깊숙이 숨겨진 '계단'을 이야기한다. "누구의 가슴 속에나 저만이 딛고 내려가는 깊은 계단이 있어. 인간은 다 고독해. 고독해서 불안정하고 격정에도 휩싸이는 거야. 부나비처럼."


신변을 정리한 소정은 마지막으로 경주를 찾고, 계림에서 강주에게서 받은 편지 두 통을 불살라 개울에 흘려보낸다. '가거라, 우리는 긴 강을 흐르는 물이니…….' 경주에 온 히로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그녀는 말없이 전화를 끊는다. 그리고 그녀는 생각한다. '모든 것을 잃고 떠나지만 단 하나의 그리움은 부적처럼 가슴에 간직하고 싶었다.'


'삶의 껍질을 벗고 그 계단으로 내려간다면 본질을 만날 수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러나 그 계단을 찾는 일은 쉽지 않으며, 그 어두운 심연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성찰적 태도가 필요할 터이다. 적어도 거기 이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시간의 숙성'이고, 삶이란 '더러 필연이 아니라 필연을 넘어선 우연의 비대칭적 조합'이란 사실의 깨달음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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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군화 - 한울사회문학시리즈 1
잭 런던 지음, 차미례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198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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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잭 런던의 작품을 처음 만난 건 초등학교 때인 듯하다. 그가 쓴 여러 편의 알래스카를 무대로 한 동물소설 중의 하나였던 "황야의 부르짖음"을 통해서였는데, 이 작품은 주인공 개가 알래스카로 팔려가 썰매를 끌게 되면서, 거기서 약육강식의 세계와 비정한 인간의 혹사를 겪게 되고, 주인이 죽은 뒤 자기 내부의 야성의 부르짖음에 따라 결국은 북극의 이리떼에게 돌아간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작가 따위를 의식하고 읽은 책은 아니었다. 아이들은 문학 작품이 개인의 생산물이라는 점을 잘 의식하지 못하니 말이다. 강철군화를 읽고나서야 그 시절에 읽었던 얘기가 그의 작품이라는 걸 소급해 이해한 것이다.

  

사회과학 전문의 도서출판 '한울'에서 강철군화의 초판이 나온 게 1989년 7월인데, 내가 갖고 있는 책은 90년에 12월에 간행된 5쇄다. 결국 내가 이 책을 읽은 것은 91년도쯤인 셈이다. 책의 정가는 3,800원. 15년쯤 지난 책표지의 코팅이 군데군데 벗겨지고 있는데, 아마 나 말고 이 책을 읽은 이는 대여섯 명은 좋이 될 듯하다. 내게 읽을 만한 책 추천을 부탁한 동료 교사들과 제자들, 그리고 해직 시절 같은 지역에서 알고 지냈던 금속 노동자도 이 책을 읽었다.


사생아로 태어나, 사회 밑바닥의 비참한 삶은 온몸으로 견뎌내고 잘 팔리는 작가가 되어 엄청난 부를 얻었지만, 삶과 이데올로기 사이의 심화된 자기 모순과 번민 속에서 죽어간 작가, 잭 런던을 대영백과사전은 '생존을 위한 본능적이고 처절한 투쟁을 낭만적으로 묘사한 작가', '돈을 벌기 위해서 쓴 낭만소설과 사회주의자로서 이념을 위해 쓴 사회주의 소설로 날카롭게 양분되는 작품 세계를 가진 작가', '미국에서보다 외국에서 더 유명하며 스스로 계급투쟁에 관심을 갖지 않게 된 말년에도 가장 위대한 사회주의 작가로 영원히 추앙을 받은 작가'로 소개하고 있다.


1908년 발표된 강철군화는 '사회주의 노동운동가로서의 통찰력과 문학적 뚝심의 백미(번역자 차미례)'로 평가되는데, 대체로 이데올로기를 다루고 있는 소설이 빠지기 쉬운 '소설적 완성도의 결핍'으로부터 자유로운 작품이다. 이른바 자본주의의 부패로부터 해방된 27세기 통일된 사회주의 시대인 '인류형제애 시대(Brotherhood of Man)'의 세계국가 아디스의 문헌학자가 쓴 서문의 형식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20세기, '강철군화'라고 불리는 과두지배체제가 노동대중의 얼굴을 짓밟았던 시대의 혁명가 어니스트 에버하드의 상류계급 출신 아내, 애비스 에버하드가 기록해 둔 원고가 사회민주주의의 최종적 승리가 이루어진 이후 700여년 만에 웨이크 로빈 산장의 해묵은 참나무 심장 속에서 발견되었다는 문헌학자의 보고를 서문으로 이 '애버하드 원고'는 독자들의 '피를 끓게 하면서' 그 드라마틱한 속살을 펼쳐낸다.

 

 애비스의 관점에서 기술되고 있는 소설 초반부에서 '말굽편자 대장장이 출신의 사회학자'인 주인공 어니스트는 그의 해박한 사회주의 이론과 철학으로 이 상류계급의 우아한 숙녀와 그녀의 아버지인 버클리 대학의 물리학자, 그리고 모어하우스 주교의 세계관을 뒤흔들어 버린다.   


어니스트는 주교를 향해, 남부의 면사공장에서 어린 아이들을 혹사하고 있는 상황을 가리키면서 "그 공장의 배당금은 그 애들의 피에서 지급된다."며 주교는 "그 배당금으로 배가 부른 미끈한 수혜자들을 향해 듣기 좋은 상투적인 설교를 늘어놓고 있는 것"이라고 일갈하고 애비스에게도 "당신이 입고 있는 그 드레스가 피로 얼룩져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결국 애비스는 어니스트의 애정의 포로가 되고, 사랑을 실천하려 한 주교는 교회에 의해 정신병원에 갇히고 만다.


소설은 사회주의 혁명과정(시카고 코뮨)을 실감나게 그려내면서 그 과정에서 결국은 대규모의 살육으로 끝나는, 그들 이상의 패배를 고통스럽게 기술하고 있다. 그것은 결국 혁명이 실패하게 되면 지배계급은, 즉 강철군화는 '노동대중의 얼굴 위를 짓밟고 다닐 것'이라는 점을 현실을 통해 증명해 버린 것이다.




잭 런던이 이름한 '강철군화'는 자본주의 정치권력의 한 형태로 이해할 수 있겠는데, 이는 1922년 무솔리니의 파시즘으로 현실화되었다. 그는 지배계급이 과도한 잉여이윤으로 노동자 계급의 일부를 매수하여 우리 안에 가두어 놓은 다음, 나머지 노동계급을 지배하는 주역의 구실을 하는 '노동귀족'의 출현도 예언하였다. 1937년 트로츠키는 강철군화 소련판이 출간되었을 때, "그 당시의 단 한 명의 맑시스트 혁명가도 자본과 노동귀족 사이의 불길한 야합의 가능성을 그처럼 완벽하게 예견한 사람은 없었다."고까지 단언했다. 한 작가의 역사적 통찰력이 한 시대를 넘어 미래까지를 꿰뚫어 본 것이다.


10년도 전의, 까마득한 옛 시절의 소설 한 편을 새삼스럽게 기억하는 것은 한갓진 회고는 아니다. 강철군화 이후 100년이 가까워오지만 어니스트의 지적처럼 "두 사람이 똑같은 것에서 자기들이 얻을 수 있는 전부를 얻으려고 들 때, 거기에는 이해의 대립이 존재한다. 그것이 노동과 자본 간의 이해의 대립"이라는 명제는 변하지 않았다. 신자유주의의 발호 아래 비정규직의 비율이 전체 노동자의 60%를 넘고, 부모 없이 외조부모에게 맡겨진 아홉 살짜리 아이가 혼자서 사냥개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고, 그 주검이 이튿날에야 발견되는 이 야만의 사회, 2005년의 절망 앞에서 부끄러움 없이는 책을 덮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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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01 09: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낮달 2005-12-01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남세스러워라. 제가 국어를 가르치는 사람인데... 곧 서재로 한번 찾아가 뵙지요.
 
허균 평전 - 시대를 거역한 격정과 파란의 생애
허경진 지음 / 돌베개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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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혁명을 꿈꾸었던 한 로맨티스트의 초상

 

 

 허균을 처음 만난 건 여느 사람이 그러했던 것처럼 '홍길동전'을 배우면서였다. 세상을 '좋은 나라'와 '나쁜 나라', 또는 '우리 편'과 '남의 편'으로 이해하던 초등학교 시절에는 동화 형식으로 읽은 홍길동의 초인적 힘과 종횡무진의 활약상, '활빈도'가 주는 낭만적 매력 따위에 푹 빠지긴 했지만, 지은이에 대한 이해는 전혀 없었던 것 같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최초의 한글 소설'이라는 문학사적 평가를 외기에 바빠서 역시 저자를 의식하기는 쉽지 않았다. 허균(1569-1618)을 우리 중세를 살다 간 한 사람의 걸출한 작가로 이해하게 된 것은 대학에서였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우리 문학을 가르치면서 비로소 홍길동이 적서차별이라는 중세적 세계관과 모순에 맞서 싸우는 저자 자신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허균은 당대 최고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초당 허엽이 아버지, 허성과 허봉, 허초희(난설헌)가 형과 누이이다. 그는 당대의 가장 빵빵한 기득권 세력이었다. 당쟁에 따른 부침을 빼면 그는 비교적 수월하게 벼슬길에 나아갔으며, 타고난 시적 재능 덕분에 품계도 승승장구한 편이었다. 17세에 한성부 초시에 합격한 이래, 26세에 문과 급제, 29세 때 문과 중시에 장원급제하여 예조좌랑이 된 이후 출사와 파직을 거듭하던 그는 마흔한 살에 당상관(형조참의)에 올랐던 것이다. 그가 당대의 서얼들과 각별한 교유를 갖고 적서차별의 계급 모순에 저항해야 할 이유나 동기 따위는 애당초 없었던 셈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16세기말에서 17세기초이다. 그 완고한 중세 봉건사회를 살던, 이 명문거족 출신의 선비는 '홍길동전'을 쓰고, 서얼(庶孼)의 무리와 함께 반역을 꾀하다 처형되었다. 그런 단편적 기록만으로도 그의 생애는 드라마틱하고 매력적이다. 지금까지 읽었던 어떤 책에서도 그가 꾀한 반역과 처형에 관한 세부적 정보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생애는 더 궁금하고 흥미롭다. 허균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한글전용주의자 허경진 교수가 쓴 "허균평전"의 부제는 '시대를 거역한 격정과 파란의 생애'다.


허균의 생애를 연대기적으로 전개해 나가는 형식의 이 책은 그러나, 그의 생애만큼 드라마틱하지는 않다. 그것이 평전(評傳)의 기술(記述)적 특징 탓인지, 빈번하게 인용되는 그의 한시나 저자의 논평 탓인지는 애매하다. 평전의 역사가 짧은 우리의 전통을 감안할 때, 저자의 시선은 비교적 냉정해 보인다. 허균이 '호민론(豪民論)'이나 '유재론(遺才論)' 같은 글을 지어 서얼 차별 철폐를 주장하고 민중 봉기를 경고한, 진보적 세계관을 가진 인물이긴 했지만, 다소간 경박하고 분방했던 인물이었던 듯하다.


그와 막역한 교우를 유지했던 스승, 선배, 벗이 아닌 일반인들의 평가는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 당파를 달리하는 경쟁 관계에 있었던 탓도 없지는 않겠지만, 실록이나 상소, 계 등에서 '성품이 경박하고 품행이 무절제하다.', '요사스럽다'는 평가가 줄을 이은 것은 파당에 따른 폄하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심상치 않다. 그러나 양반들로부터 받은, '미천한 자까지도 자기와 대등한 자처럼 대우했다'는 평가는 지배층에게는 경박한 패륜아로 보였겠지만, 민중들에게는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지도자로 인식되었다는 증거로 이해할 수 있겠다.


저자는 허균을 혁명가로 보고 있지만, 나는 그를 혁명적 낭만주의자쯤으로 이해하고 싶다. 빈번한 서얼과의 교유, 홍길동전과 호민론·유재론 등의 저술에 드러난 세계관과 민중관, 시대를 앞서간 정치적·외교적 감각 등이 필경은 중세 조선 사회를 혁명 직전의 상황으로 만들어 가긴 했지만, 남은 자료만으로 그가 꿈꾸던 세상의 모습을 짐작하는 것은 쉽지 않고, 오히려 출사와 파직을 거듭하면서 펴지 못했던 경륜을 펼치기 위해 정권에 도전했다는 혐의가 짙어 보인다.


혁명을 전후한 저간의 정황들을 일별해 보면, 마치 그는 권모술수에 능한 노회한 정치가처럼 보인다. 그는 자기 딸을 세자의 후궁으로 들이려 했는가 하면, 이이첨 등의 권신의 무리와 정치적 동사를 서슴지 않았고, 도성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유언비어를 퍼뜨리기도 하였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내용만으로는 실패한 거사의 내용도 뚜렷하지 않으며, 거사 이후를 그린 정치·사회적 전망도 모호하다.


그러나 거사가 실패로 돌아간 이후의 동지들의 모습이나, 동조자들의 행동은 혁명의 진정성을 환기시키면서 묘한 감동을 연출한다. 주모자로 체포되어 압슬형을 당하면서도 자백을 거부한 이들, 허균이 하옥되자 심문을 제대로 못하도록 돌을 던져 국청의 문짝을 깨뜨리거나 형졸들의 머리를 깨뜨리고, 하급 아전과 종들, 그리고 무사들 수십 명이 의금부 감옥 앞에 시위를 벌이는 모습 등은 당대의 모순을 고스란히 짐질 수밖에 없었던 민중들의 좌절과 절망을 아프게 보여주는 것이다.


허균은 심문에 끝내 승복하지 않아서 마지막 판결문인 결안(結案)조차 만들지 못한 상태에서 저잣거리에서 목이 떨어졌고, 그의 머리는 시장 바닥에 전시되었다. 막대 셋을 밧줄로 매고 '역적 허균'이라는 팻말을 달아 그 막대 가운데에 목을 매달았다. 그는 역적으로 죽었기에 연좌적몰(連坐籍沒)의 법을 시행했으며 집은 헐려서 연못이 되었다. 그를 따르던 민중들은 장사 지내기 위해 그의 머리를 가져가려다가 이를 말리는 수직(守直) 군사와 충돌하기도 했다 한다.


허균은 자신의 글이 당할 운명을 저어했음인지, 잡혀 들어가기 전날 밤, 7년 전 유배지에서 스스로 엮은 자신의 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초본을 외손자의 집으로 보냈다. 그러나 그가 역적으로 죽어 그의 글까지도 죽어야 했다. 남은 글들도 감추어졌다. 그러나 400여 년이 흐른 오늘, 그의 이름은 뒷날, 그를 비난해 마지않았던 또 한 사람의 이단자, 연암 박지원과 함께 뭇 사람들에게, 시대를 앞서 간 인물로, 혹은 한 시대의 풍운아로 오래 기려지고 있다.


▶ 덧붙임 : 애당초 나는 재야 사학자 이이화 선생이 쓴 '허균의 생각'을 읽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때가 늦었던 모양이다. 그 책은 이미 절판되었다. 어디 헌책방이라도 뒤져 선생의 책을 반드시 구해 볼 작정이다. 허균의 누이인 난설헌 평전도 읽으려 한다. 산업화 시대의 이데올로기로서 박정희 정권은 신사임당이라는 여성의 전형이 필요했던 듯하다. 그 신사임당의 반대편에 선, 불운한 시인 허초희의 삶은 그의 동생 허균만큼이나 드라마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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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길이다 - 루쉰 아포리즘
루쉰 지음, 이욱연 엮고 옮김, 이철수 그림 / 예문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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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쉰 아포리즘 '희망은 길이다'는 루쉰 연구자 이욱연 교수가 기왕의 연구를 통해 간직해 왔던 루쉰의 저작들 중에서 밑줄을 쳐 두었던 문장들을 모으고, 판화가 이철수가 판화로 꾸민 책이다. 이철수의 힘찬 판화 글씨체 제목과 모루 위에 올라선 노동자의 모습을 새긴 판화로 구성된, 코팅하지 않은 미색 하드커버 표지는 일종의 설렘과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아포리즘은 '깊은 체험적 진리를 간결하고 압축된 형식으로 나타낸 짧은 글'로 정의된다. 아포리즘 하면 대개 칼릴 지브란의 시, 크라슈나무르티 류의 명상 철학자들의 잠언집을 떠올리기 쉽지만, 루쉰의 이 책은 분명코 달라 보인다. 흔히들 잠언집 따위에서 나타나는 모호하고 불확실한 비유나 예언적 글귀들이 갖는 도그마에서 이 책은 뚜렷이 비켜 서 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이 책에서 일컬어지는 인간이나 그 삶은, 현실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관념적 진리가 아니라, 당대의 현실을 굳건히 디디고 선 한 근대 지식인의 통렬한 현실 비판과 봉건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이행기에서 흔들리고 있는 중국 인민들의 땀과 체취를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먼저 그는 삶과 사랑, 희망을 말한다. 그는 '희망'이란 '길'과 같고, 인간의 노력과 투쟁을 통해 열린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것은 한 시대에 한정되는 진리가 아니라, 인간의 삶이 있는 한 영원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절망에 대한 저항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 세상에 분투 없이 열리는 길은 없다.

- 길은 이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있다.

- 절망하지만 반항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희망으로 인해 전투를 벌이는 사람보다 훨씬

  용감하고 비장하다고 본다.


한편으로 그는 사랑을, 희생과 세대의 순환, 기억과 망각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죽은 자가 산 자의 마음속에 묻히지 않을 때 그는 참으로 죽고 만다.'는 촌철살인의 인식은 학대받던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되어 다시 며느리를 학대하는 '망각의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 한 송이 꽃을 위해서라면 풀이 되어 썩어도 좋다.

- 사랑은 늘 새로워야 하고, 커 나가야 하고, 새롭게 창조해야 한다.

- 무릇 늙고 낡은 것은 즐겁게 죽는 것이 참으로 좋다고 생각한다.

- 죽은 자가 산 자의 마음속에 묻히지 않을 때 그는 참으로 죽고 만다.

- 사람들은 망각이라는 것이 있기에 자기가 겪은 고통에서 점차 벗어날 수도 있지만,

  망각이라는 것 때문에 왕왕 앞사람들이 범한 오류를 다시 범하게 된다.

 

20세기의 벽두, 근대 중국을 열어간 사상가 루쉰은 여성과 그 해방에 대해서도 말하되, 냉정한 리얼리스트의 품격을 잃지 않는다. 그는 집을 나간 노라(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의 여주인공)에 대해서 그녀가 가지고 나간 것이 빨간 털목도리 하나뿐이라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돈이 있어야 한다고 일갈한다. 아울러 여성 해방이 참정권 투쟁보다 더 힘들다는 점을 꿰뚫어 보고 있다.


- 자유는 물론 돈으로 살 수 없다. 하지만 돈에 팔릴 수는 있다.

- (남녀간에 동등한 힘을 갖기 위해서는 싸워야 하고, 그를 위해서는) 참정권을 요구하는

  것보다 더 격렬한 싸움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 소극적으로 편안하게 사는 데는 자유가 없다. 자유를 가지려면 다소 위험을 겪어야 한다.


동시에 그는 근대 중국이 오랜 봉건체제의 잠에서 깨어나 근대를 지향하는 과정을, 모순과 그 극복이라는 역사 발전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그는 민중의 잠재력과 그 가능성을 신뢰한다.


- 돌이 짓눌러도 불꽃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 무릇 문명의 조짐은 야만에서 싹튼다.

- 문제가 없고 결함이 없고 불평이 없으면, 해결이 없고 개혁이 없고 반항이 없다.

- 민중은 거센 파도와 같다. 막을수록 더욱 거세어진다.


루쉰은 봉건체제에서 근대사회로 이행하고 있는 당대 중국 현실을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변화와 개혁, 혁명 앞에서 무감각한 중국의 인민과 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중국인 일반에 대한 그의 불신과 풍자는 민중에 대한 그의 신뢰를 의심하게 만들 정도다. 그는 중국의 현실을 '시간의 정지'로 받아들이기도 하고, 진시황의 우민정책은 2천년이 지나도 효과를 지속하고 있다고까지 풍자한다. 그런 풍자와 비판은 스스로에게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는 스스로를 '노예'로 칭하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을 눈 뜨게 한 것은  '중국의 현실'이라고 그는 고백한다.


- 중국인들은 현실을 직시할 용기가 없으며 기만과 속임수로 갖가지 기묘한 도주로를

  만들고는  스스로 그것이 정도라고 여긴다.

- 중국의 인민들은 늘 자기의 피로 권력자의 손을 씻겨주고 깨끗한 인물로 만들어준다.

- 유감스럽게 중국인은 상대방이 양일 때만 맹수의 얼굴을 하며 상대방이 맹수일 때는

  양의 얼굴을 한다.

- 신해혁명이 이전에 나는 노예였다. 그런데 혁명이 일어나고 얼마 안 되어 노예에게 속아

  그들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 "자본론"은 읽은 적도 없고 손도 대 본 적이 없다. 나를 눈뜨게 한 것은 현실이다.

  그것도 외국의 현실이 아니라 중국의 현실이다.


내가 루쉰을 기억하는 것은 고교를 졸업할 무렵에 읽은  '아Q정전'과 '광인일기'의 작가로서이다. '광인일기'의 내용은 전혀 기억에 남아 있지 않고, '아Q정전'의 경우는 그 해설서의 내용이 명확하게 와 닿지 않았던 기억만 애매하게 남아 있다. 그 시절에는 아마 역사를, 연대기적 기록이 아니라 삶과 현실의 하나로 이해할 능력이 따로 없었던 탓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루쉰은 자신을 문인으로 인식하고 문학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니체가 '피로 쓴 책'을 좋아했다고 하면서도 그는 '문학의 힘'을 이야기한다.


- 핏자국은 물론 글보다 격정적이고 직접적이며 분명하다. 하지만 쉽게 변색되고 지워지기

  쉽다. 문학의 힘이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 문학과 예술은 국민정신이 발하는 불꽃이자 국민정신의 앞길을 밝히는 등불이다.

- 죽일 수 있어야 살릴 수 있고, 증오할 수 있어야 사랑할 수 있으며, 살릴 수 있어야

  사랑할 수 있고, 그래야 문학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자신이 혁명가가 되지 못한 이유를 '혁명가란 명령을 따를 뿐, 왜냐고 물어서는 안 되는데, 자신은 묻고자 했고, 일의 가치를 재 보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술회하고 문학으로 살아가는 일의 고통을 고백하면서도, 자식들이 문인이나 예술가가 되지 않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기는 모순적 태도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것은 어쩌면 그가 끊임없는 회의를 통해 존재를 증명하고자 했던 작가였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 문학으로 살아가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다.

- 아이들은 커서 재능이 없으면 조그만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라. 절대로 실속 없는

  문학자나 미술가가 되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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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12-15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은 커서 재능이 없으면 조그만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라.
절대로 실속 없는 문학자나 미술가가 되지 말 것.

제가 저 말을 좋아합니다.^^

낮달 2005-12-15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렇습니다. 한때는 문학의 길을 원했지만, 그게 기실 속절없는 희망이거나 기다림일 뿐이라는 걸 깨달았었지요. 때로 삶은 문학보다 훨씬 더 쿨(!)하지 않습니까.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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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께스의 작품 세계에서 '고독’은 '사랑의 부재’로 읽힌다. “백년의 고독”의 호세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과 그의 형 호세 아르카디오, 그리고 아마란타에 이르는 주인공들은 모두가 사랑의 부재, 즉 고독을 운명처럼 타고 난 존재로 그려진다. 이러한 그의 소설 속 인물의 특징은 대부분의 작품에서 변주(變奏)되는 듯하다.


아흔 살 생일을 앞둔 한 사나이가 있다. 그는 '서글픈 언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익명의 존재인데, 그는 돈을 지불하지 않고 여자와 잠자리를 가진 적이 한 번도 없으며, 그 여인들 때문에 결혼할 시간이 없었던 사람이다. 그는 마르께스의 뭇 주인공들처럼 '결핍된 사랑’의 소유자다. '섹스란 사랑을 얻지 못할 때 가지는 위안에 불과한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으나, 정작 사랑을 직업으로 삼고 있지 않은 몇몇 여자에게는 버려도 좋으니 돈을 받으라고 설득하는 그는, 사랑을 끊임없이 회피하는 이율배반적 존재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사랑의 묘의(妙意)와 그 힘을 믿는 역설적 존재다. 50줄에 들 때까지 무려 514명에 이르는 여자들과 관계를 가진 그는 드러내놓고 동거를 하지도 않았으며, 육체와 영혼의 모험을 발설하거나 그 비밀을 누군가와 공유하지 않은 이유로 '순정한 여자란 세상에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기 때문’이라 고백하는 것이다.


아흔 살 생일을 맞아 선택한 여자를 통해 그는, 드디어 그 사랑의 묘의에 한 발짝 다가가며, '창자까지도 태워버릴 정도로 활활 타오르는 불꽃의 고통’을 경험하고, '단장을 하고 옷을 입고 향수를 뿌리는 것은 누군가를 위해서라는 사실을 사랑이 너무 늦게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라고 느끼게 된다. 이 아흔 살의 사랑을 믿지 않는 사나이를 사랑의 고통 속으로 던져 넣은 것은 열네 살의 숫처녀, ‘델가디나’이다.


단추 다는 일에 시달리다 몸을 파는 일조차 잊고 혼곤한 잠에 빠진 그 소녀를 바라보며 그는 '욕망에 쫓기거나 부끄러움에 방해받지 않고 잠든 여자의 몸을 응시하는 것이 그 무엇과도 비할 바 없는 쾌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한밤을 그렇게 지새운다. 그리고 '여자는 자신의 데뷔를 우습게 여기는 남자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는 뚜쟁이 여인의 힐난에 스스로를 ’무용지물‘로 시인하며, ’마침내 열세 살 때부터 나를 옭죄어 왔던 굴레에서 벗어난 것‘을 깨닫게 된다.


마침내 사랑을 믿지 않고, 사랑을 거부해 왔던 아흔 살의 사나이는 델가디나의 사랑을 확인하고, ‘햇빛이 환하게 비추는 거리로 나선 나는 처음으로 내가 나의 첫 번째 세기의 희미한 수평선에 이르러 있음을 알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건강한 심장으로 백 살을 산 다음, 어느 날이건 행복한 고통 속에서 훌륭한 사랑을 느끼면 죽도록 선고받았던 것이다.’


책의 앞부분에 마치 헌사처럼 설국의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잠자는 미녀의 집’의 일절(“고약한 짓은 하나도 할 수 없습니다.” 여관 여주인이 노인 에구치에게 경고했다. “잠자는 여자의 입에 손가락을 넣어서도 안 되고, 그와 비슷한 어떤 짓도 해서는 안 됩니다.”)이 인용된 것은 마치 사족처럼 보인다.


소설을 읽지는 못했지만, 가와바타의 주인공이 어린 소녀와 동침하는 것은 일종의 회춘을 위한 소녀경식의 양생(養生)으로 보인다. 그러나 마르께스의 주인공은 그런 동양식 양생이 아니라, 그가 열 세 살부터 사랑 대신 추구해 왔던 섹스를 위해서 델가디나를 찾았고, 곤히 잠든 소녀의 땀을 닦아주고, 노래를 속삭이듯 불러주면서 그가 그토록 거부해 왔던 사랑에 빠져 버렸던 것이다.


마르께스의 창녀들과 뚜쟁이 여인들은 슬프지만 인간적이고 따뜻한 이웃들이다. 그들은 가난과 고통 속에서 내던져진 존재로 마르께스의 소설 속에 감초처럼 삽화로 등장한다. 그들은 비록 사랑을 팔고 살지만 ‘진정한 사랑과 사랑하는 경이를 맛보지 않고는 죽지 말라’고 충고하는 순박한 여인들이다.


그들에 대한 따뜻하고 슬픈 추억을 통해서 이제 일흔일곱 살의 노작가는 ‘사랑’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자정을 알리는 거역할 수 없는 종소리’, ‘노인들이 본질적이지 않은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는 사실은 생의 승리’, ‘열두 번의 종소리를 세면서 마지막 열두 방울의 눈물을 흘렸다.’와 같은 익숙함과 낯섧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듯한 개성적이고 독특한 문체와 함께 독자들의 진부한 일상에 밀물처럼 진주해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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