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이란 시간 속에 담긴 변화와 그 의미는 어떤 것일까. 꼭 10년 전(1998년)에 나는 한 시골고등학교의 3학년 담임을 맡았다. 인연이 닿아서였겠지만, 1학년 때에 이어 두 번째로 나는 그 아이들을 만났다. 이미 서로를 알 만큼은 아는 사이여서 우리는 아주 편안하게 한 해를 함께했다.

이듬해 2월 아이들이 졸업할 때, 10년 후쯤에 꼭 한번 만나자며 우리는 헤어졌다. 그리고 이태쯤은 아이들과 내왕을 했다. 5월 스승의 날이 되면 아이들은 추렴하여 나를 안동의 삼겹살집으로 초청해 주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사내아이들이 입영을 시작하면서 연락이 뜸해지더니 4, 5년 전부터는 아예 연락이 끊어졌다.

이 아이들의 안부가 궁금해진 건 지난 5월 스승의 날에 작년과 올해의 아이들로부터 겹으로 축하를 받고 나서였다.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아이들과 ‘10년 후 운운’하는 이야기를 나눈 걸 떠올린 것이다. 무엇보다 그해 말에 오토바이 사고로 머리를 다쳤던 아이의 안부가 몹시 궁금했다.

묵은 학생 요람을 꺼내놓고 몇 차롄가의 통화 끝에 이미 결혼한 여자아이와 연락이 닿았다. 모두들 안부가 궁금하다고 전했더니, 여러 군데서 걸려온 아이들의 전화를 받았다. 하나같이 그새 10년이 되었냐고 반문하면서 지난 시절을 추억했다. 흐르는 세월은 매정하고 삶은 고단한 법이다. 아이들은 제각기 꾸려온 시간 속에서 10년 전을 따뜻하게 떠올려 주었다.

여학생 중 여럿은 결혼해 어머니가 되었고, 모두들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염려했던 아이는 많이 회복된 것을 확인하면서 걱정을 덜었다. 문경 쪽에 혼자 살고 있는 그 녀석에게 다녀오려고 했는데, 연락이 닿지 않아서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두어 달이 지났다.

지지난 주, 이미 정년 퇴임하신 옛 은사를 뵈러 가는 길에 나는 1, 3학년 계속 반장을 맡았던 아이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16일 안동 인근의 펜션에서 동기들 모임을 갖기로 했단다. 말하자면 그게 10년 전 우리가 어정쩡하게 나눈 약속의 만남인 셈이었다.

글쎄, 몇 명이나 모일는지, 각각 어떻게 변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인지가 자못 궁금해서 나는 며칠 전부터 설레었던 것 같다. 당일 오후 6시께 아이들 2학년 때 담임이었던 후배 교사와 함께 약속 장소에 나갔다. 미리 와 있던 예닐곱 명의 아이들과 만났을 때의 반가움을 어떻게 다 표현하겠는가.






밤 열 시가 넘을 때까지 아이들은 계속해 왔고, 펜션의 야외에서 삼겹살과 갈비에 소주를 곁들인 성찬은 자정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모인 아이들은 나중에 꼽아보니 남녀 각각 9명씩 모두 열여덟 명이었다. 서울서 내려오다가 차편이 없어서 대전에서 되돌아 간 아이, 오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고 전화를 걸어온 아이들이 또 대여섯이었다.

사내아이들은 소주를 거의 물 들이켜듯 했는데 나는 아이들이 건네는 술잔을 사양하거나 한 방울씩 꺾어서 마시느라 무진 애를 썼다. 여럿이 모이다 보니 곳곳에서 얘기꽃이 만발했다. 아이들의 이야길 이리저리 듣다 보니 기실 내밀한 얘기를 깊이 나누지는 못했다.

스물아홉 살. 한창 일을 하거나 사회 진출을 모색하는 시기다. 공학 계열의 학교를 나와 기계관련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들, 대학원을 다니는 친구, 간호사, 구미와 안동, 대구와 서울에서 각각 직장 생활을 하는 아이들, 아이 둘을 기르는 주부, 미용실을 열고 있는 아이, 내년도 결혼을 준비하고 있는 친구, 8개월 된 아이를 데리고 남편과 함께 온 쌍둥이 중 큰아이…….

결국 술자리는 새벽까지 이어졌고, 아침 6시까지 밤을 홀딱 새웠다. 모두들 그제야 쓰러져 잤는데 10시 반께 일어나니 아이들 반은 이미 돌아가고 없다. 저마다 사는 게 바쁜 것이다. 몇몇은 일을 나가고 몇몇은 볼일이 바쁜 모양이었다.

아침을 먹고 나서 인근 부용대와 병산서원을 돌아보기로 했다. 외지에서 온 손이 있으면 늘 밟는 여정이다. 아이들의 승용차 두 대에 9명이 나누어 탔다. 부용대 아래 겸암정사 마루에 앉아 쉬다가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아래 사진이 그거다. 사적 공간인 블로그긴 하지만 내가 자신을 드러내는 걸 꺼리는 것은 어쩐지 난데에 벌거벗고 서는 기분이 들어서다. 아이들 속의 내 모습이 생뚱맞아 보이진 않은지 모르겠다.









병산서원 만대루에서 우리는 오래 머물며 쉬었다. 잠깐 비가 한 줄기 지나간 뒤였는데, 누각 위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였다. 우리는 이런저런 삶 주변의 이야기를 가볍게 나누었다. 그리고 만대루 난간에 기댄 아이들의 모습과 그들의 풋풋한 미소를 여러 장 렌즈에 담았다.

복직하고 이태째, 몸과 마음의 부조화와 돌아온 교단에 대한 부적응으로 힘들었던 시기였다. 1996년, 변화가 필요하다고 믿었던 나는 내신을 냈고 새로 전입한 학교에서 1학년 담임으로 아이들을 만났다. 면 단위의 시골, 성적이 썩 좋거나 집안이 넉넉한 아이들은 인근 시군으로 진학하고 그도 저도 아닌 아이들 마흔다섯 명이 올망졸망 기다리는 교실이었다.

일찌감치 ‘매’를 놓았지만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얘들을 체벌하지 않겠다고 거듭 다짐했다.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여학생 셋이 말썽을 부려 학생과에서 벌을 받고 내게 왔다. 나는 나직하게 ‘왜 그랬냐’고 물었고 아이들은 ‘죄송’을 거듭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잘 하겠다’거나 ‘다시는 실수하지 않겠다’는 형식의 약속을 강요하지 않았고, ‘모두가 스스로의 선택’에 달렸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1년, 때때로 나는 고함을 지르고 호되게 꾸중을 하긴 했지만 아무도 내게 매를 맞지 않았다. 아, 있다. 3학년 2학기 때였던가. 사내아이  대여섯 명이 염치도 없이 교실 앞에서 담배를 피우다 내게 걸렸다. 나는 녀석들을 엎어놓고 들고 다니던 교편으로 엉덩이를 서너 대씩 불이 나게 갈겨 주었다. 금도를 지키라 했지? 아이들은 죄가 되어 머릴 들지 못했다.

순박하고 정이 깊은 아이들이었다. 나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믿었고 아이들도 말없이 그걸 증명해 주었다. 씩 멋쩍은 미소를 깨물면서 뒤통수를 긁적이는 아이들, 쳐다보기만 해도 서로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고 말하면 허풍일까.

여름방학에 사내아이 둘과 함께 인근 소백산으로 1박 2일의 산행을 했던 기억도 빼놓을 수 없다. 앞서 이야기한 오토바이 사고로 다친 아이가 그 산행을 같이 했다. 아주 밝고 유쾌한 아이였는데 녀석은 이번 모임에  오지 않았다. 한 녀석은 이번 모임에 와서 그 때 그 산행이 마지막 등산이었다면서 12년 전을 함께 이야기했다.

아이들은 돌아가며 모둠별로 일기를 썼고, 학년말에 우리는 문집을 한 권씩 나누어 가졌다. <열일곱 살의 비망록>은 1996년 마흔한 살짜리 교사와 열일곱의 소년소녀들이 함께 가꾸어 낸 사계의 기록이었다. 수업을 마치고도 시외버스 편으로 받게 될 문집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더벅머리 소년들의 모습도 잊을 수 없다.

이듬해 나는 담임을 맡지 않았지만 아이들이 가는 설악산 수학여행에 동행했다. 마치 내가 저희들의 삼촌이나 맏형님 같은 느낌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아주 무관한 사이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듬해에 내가 다시 아이들을 맡으리라고는 나도 아이들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었다. 부득이한 일이 있었다. 나는 기꺼이 아이들을 맡았고 담임 발표를 하던 날 아이들은 기분 좋게 팔뚝을 흔들어댔다. 그리고 1년, 여학생들은 그들 특유의 다정다감으로, 사내 녀석들은 또 그들만의 두터운 의리와 인정을 내게 유감없이 나누어 주었다.

반드시 순탄한 시간만은 아니었다. 아이들 몇몇이 이른바 삐딱선을 타기도 했고, 그 과정에서 내가 속이 잔뜩 상했던 만큼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마음에 상처를 입었을지도 모른다. 이번 모임에 그 아이들도 왔다. 글쎄, 그래서 그랬는지, 그 애들은 서먹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나름대로 자기 몫의 삶을 열심히 꾸려가고 있었다.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불과 서너 달을 앞두고 사내아이 하나가 온갖 만류를 뿌리치고 학교를 그만둔 것과, 앞서 얘기한, 오토바이 사고로 한 녀석이 크게 다치게 된 일이었다. 나는 이번에 그들을 만날 수 있길 기대했지만, 녀석들은 이번 모임에 나타나지 않아 섭섭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전문대학을 선택해 진학했다. 그리고 10년. 아이들이 졸업하고 난 이태 뒤에 나도 그 학교를 떠났다. 인근 시군의 두 개 학교를 거쳐 나는 현재의 학교로 전입했고, 아이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했고, 연애를 하거나 배우자를 만나고 몇몇은 또 부모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열심히 자신의 삶을 가꾸어 왔다는 점은 아무도 다르지 않았다. 나는 아이들이 보여주는 건강한 삶의 모습에 가슴이 뻐근해졌다.

안동 시내에 들어와 냉면으로 늦은 점심을 때우고 우리는 헤어졌다. 내가 그들로 하여금 10년을 돌아보게 만들었다고, 그래서 고맙다고 아이들은 말했다. 지난 10년의 세월, 때론 회한이 없지 않지만 그 시간이 소박하게 빛나고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아이들의 건강한 마음과 미소 탓일 터이다.

자주 연락드릴게요. 건강하셔야 해요. 그래, 좋은 날을 받으면 꼭 연락해 다오. 우리는 길거리에서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꼬박 밤을 새운 지난밤의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자주 만나자고 인사를 나누긴 했지만, 삶은 만만하지 않다. 마음과 달리 전화 한 통 하기도 쉽지 않고 그러다 보면 몇 해가 쏜살같이 지나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게 뭐 문제겠는가. 우리네 삶을 스쳐간 숱한 봉별(逢別) 속에 아이들은 나이를 먹고 나 역시 늙어갈 것이다. 비록 만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아이들과 함께 내가 동시대인으로서의 연대의 시간 속에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말이다.



<2008.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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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 보낸 원본 사진. 크기를 줄였다.




 
          ▲ 만휴정(晩休亭). 보백당 김계행이 세운 정자다. 안동시 길안면에 있다.


이런 게 '안빈낙도' 아니겠는가?  (2007. 7. 30)
-선비들이 지향한 청빈의 삶, 안동 만휴정을 찾아서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425337




 ▲ <조선사 클리닉>에 실린 내 사진. 'ⓒ 장호철' 표시도 선명(!)하다.


지난 6월 25일이다. 블로그 쪽지함으로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도서출판 추수밭(청림출판의 인문·교양 도서 전문 브랜드라고 한다.)의 편집자로부터였다. <오마이뉴스>에 실린 기사를 보고 하는 연락이라면서 그 출판사에서 내는 책의 본문에 내 기사에 실린 사진을 쓰고 싶다는 전갈이었다.

서신에서 그 편집자는 저작권료를 지불하고 사진 원본을 구입하고 싶다고 정중하게 제의해 왔다. 나는 잠깐 혼란스러웠다. 웬 저작권? 그건 워낙 내 삶과 무관한 개념이어서였을까. 나는 그이가 제시한 저작권료가 적정한지 않은지 따위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냥 줄 수도 있는 사진인데, 저작권료까지? 그건 정말 유쾌한 일이 아닌가. 나는 쾌히 승낙하고 사진 원본을 보냈다. 얼마 후 내 계좌로 소액이었지만 예의 ‘저작권료’가 입금되었다. 나는 기분이 썩 좋았다. 드디어 사진 한 장을 팔았다! 


▲ 조선사 클리닉(김종성, 추수밭, 2008)
출판되면 책을 한 부 받을 수 있겠냐고 했더니 기꺼이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 퇴근하니 예의 책이 도착해 있었다. 책 표지에 붙인 메모지에서 편집자는 깨알 같은 글씨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내 사진이 책의 31쪽에 실려 있다고 알려 주었다.

왼쪽이 바로 그 책이다.  '비뚤어진 조선사 상식 바로 세우기'라는 부제가 붙은 책의 제목은 <조선사 클리닉>이다. 저자가 눈에 익은 이름이다 싶었더니 MBC TV에서 방영한 드라마 <이산>이 한참 뜨고 있을 때 <오마이뉴스>에 '사극으로 역사 읽기'라는 연재 기사를 썼던 김종성이란 이다. 결국 내 사진은 <오마이뉴스>를 매파 삼아 <조선사 클리닉>을 만난 셈이다.

위 두 번째 사진이 바로 내 사진이 실린 부분이다. 예의 내 기사가 <오마이뉴스>에 실린 건 지난해 7월말이다. 그 기사에 나는 안동시 길안면의 정자 만휴정(晩休亭) 누마루에 걸린 청백리 보백당 김계행의 유훈을 찍은 사진을 썼고, <조선사 클리닉>은 그 사진을 책에 실은 것이다.

   
  오가무보물(吾家無寶物) 내 집에 보물은 없다.
보물유청백(寶物惟淸白) 보물이 있다면 오직 맑고 깨끗함뿐이다.
 
   


비록 작은 사진이지만 상업적 출판에 앞서 저작권자에게 저작권료를 지불하고 책을 만들겠다고 할 만큼 세상은 변한 것이다. 최근 나는 문학 교과서에 실린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나는 시중에 출판된 책이 사계절 출판사에서 북에 있는 벽초의 손자인 작가 홍석중과 ‘출판권 설정 계약’을 체결하여 간행한 책이라는 점을 소개했다. 이는 분단 역사상 최초로 북한과 정식 저작권 계약을 맺은 작품이라는 것도.

저작권이란 국어사전에 “문학, 예술, 학술에 속하는 창작물에 대하여 저작자나 그 권리 승계인이 행사하는 배타적·독점적 권리”로 정의된다. 이 저작권은 저작자의 생존 기간과 사후 50년간 유지된다고 한다. 나는 벽초 홍명희(1888 ~1968)의 저작권이 2018년까지 지속된다고 아이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사후 50년이 지나면 저작권이 소멸됨으로써 작품은 그 사회와 구성원들의 유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연히 편집자의 눈에 띄어 책에 실리게 된 평범한 사진이고 그게 무슨 저작권과 관련해 다른 의미를 가질 일은 없다. 그러나 뜻밖의 기회로 저작권을 새롭게 이해하게 된 것은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내 이름자를 곁들인 사진이 실린 묵직한 책 한 권을 받아드는 기분도 쏠쏠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2008. 8.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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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과거사 청산 - 숙청과 기억의 역사, 1944-2004
이용우 지음 / 역사비평사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새 정부 들면서 시작된 역사 인식의 퇴행은 예순세돌 광복절을 지나면서 그 절정에 이른 듯하다. 이 대통령은 "언제까지 과거에 얽매여 미래로 가는 길을 늦출 수는 없다(3·1절 기념사)"며 "맨날 사과하라고 요구하지 않겠다"고 일본에 대해 너그러운 모습을 보였지만 이후 전개된 여러 상황들은 별로 '미래지향적 관계'답지 못해 보인다.

 일본의 독도 도발에 대해 강경대응 기조를 유지하고 있지만 적어도 새 정부의 대일 역사인식은 여전하다는 걸 이름만 광복절이지 사실은 '건국절'로 치러진 8·15 행사가 증명해 주었다.

1948년 8월 15일의 정부수립을 '건국'으로 미화하고 싶어하는 뉴라이트와 조중동 등 보수언론의 성화에 못 이기는 척 했지만 정부의 뜻도 기실 그와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과거사 청산'과 관련한 각종 위원회 정비, 예산 삭감, 인력 감축 등으로 과거사 청산에 대한 비우호적 태도를 드러냈다. 민족문제연구소에 의해 오랫동안 추진되어 온 <친일인명사전> 수록인물 발표에 대해 "친일문제는 국민 화합 차원에서 공과를 균형 있게 봐야 한다"며 사실상 '친일파 청산'에 대한 불편함을 드러낸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도 마찬가지다.

올 8월 29일 경술국치일을 맞아 발간하려던 <친일인명사전>의 편찬 일정도 연기되었다. '예상과 달리 이의신청이 다수 접수되고 친일인명사전 발행금지 가처분 소송이 제기되는 등 중대한 사유가 발생함에 따른 것'이라고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는 밝히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60년(건국 60년)을 '성공의 역사' '발전의 역사' '기적의 역사'로 규정하는 대통령의 경축사를 가로지르고 있는 관점은 '건국 신화 만들기'에 바탕한 역사관이라는 것은 별로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물론, 거기에는 일제의 식민지배에 저항한 항일투쟁의 역사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이른바 '잘못 꿰어진 단추'론을 다시 환기할 수밖에 없다. '건국'이 아니라 해방(광복) 63돌을 맞는 오늘까지 이 땅을 덮고 있는 오욕의 역사는 여전히 청산되지 않은 것이다. 그 미청산의 역사는 흔히 프랑스의 나치 부역자 처벌과 비교되면서 그 슬픔과 욕됨을 더하기도 한다.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이용우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벌어진 프랑스의 나치독일 부역자 숙청 문제를 분석한 연구서다. 프랑스사를 전공한 저자 이용우의 수년간에 걸친 자료 수집과 연구로 이루어진 이 책의 부제는 '숙청과 기억의 역사, 1944~2004'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는 실패했던 과거사 청산이 프랑스에선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꼼꼼하게 정리하고 있다.

책의 프롤로그는 "청산해야 할 과거: 암울했던 시절(1940~1944)"이다. 이는 볼 것 없이 독일에 패한 프랑스의 독일강점기, 흔히 '비시 체제기'다. 이 시기는 프랑스 과거 청산의 주 대상이 되는 시기로 대독협력이 지속된 때다.

독일군에게 점령당하지 않은 비시 지역에 성립된 이 정권은 흔히들 얘기하는 '괴뢰' 정권은 아니었다. 국민의회의 투표로 성립한 이 정부의 수반은 1차대전의 영웅 페탱 원수였다. 비시 정권은 4년간 대독 협력이라는 이름의 부역에 참여했다.

의무노동제를 도입하여 65만 프랑스 노동자를 독일의 공장으로 보냈으며, 나치 독일이 '적을 체포·처벌·제거'하는 데 악명 높은 협력을 자행했다. 나치 독일의 적이란 곧 레지스탕스, 공산주의자, 프리메이슨 단원, 유대인 등이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비시 정부 경찰의 협력으로 7만 6천 명이 수용소로 끌려갔고 그 중 3%만이 살아남았다.

준군사 조직인 '프랑스 민병대'는 레지스탕스 운동을 탄압한 데 앞장섰고 부역자들의 대명사였던 파리 '협력주의자'들은 가장 극단적인 협력행위를 벌였다. 이 협력주의자들은 친독정당을 이끈 정치인들과 파시즘을 설파한 문필가와 언론인들로 대별되는데 이 언론인들의 영향력은 정치인들보다 훨씬 컸다.


파리 해방(1944. 8. 25)을 전후한 부역자 처벌은 재판을 통한 사법적 숙청 이전에 약식 처형과 여성 부역자들의 머리를 깎는 삭발식 등의 초법적인 형태로 시작되었다. 이어진 재판을 통한 처벌은 드골 정부의 '명령' 부역자재판소, 공민재판부, 최고재판소 등의 법령·기구에 의해 계속되었다.

사법 숙청은 약 35만 명의 대독협력 혐의자 가운데 12만 명 이상이 재판에 회부되었고, 그중 약 3만8천 명이 유무기의 징역이나 금고형을 받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부역자재판소에서 모두 6천여 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정규 법정 밖에서 약식 처형된 이가 9천 명이었던 데 비해 합법적으로 처형된 사람은 약 1500명이었다. 공민권 박탈형만 선고 받은 이도 약 5만여 명이었다.

숙청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비시 정부의 핵심지도자였던 국가 수반 페탱과 총리 라발에 대한 처리였다. 1차 세계대전의 국민 영웅이었던 페탱은 단 1표차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드골에 의해 종신형으로 감형된 뒤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라발과 민병대 총수였던 다르낭 등은 총살되었다.

가장 극단적인 대독 협력을 벌였던 언론인과 문인에 대해서는 엄정하게 중형이 선고되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문인과 언론인이 첫 번째 숙청 대상으로 오른 것은 불가피한 선택으로 이들은 가장 증오받는 부역자들이었던 것이다. 파리의 한 부역자재판소에서 재판 받은 작가·언론인 32명 중 12인이 사형선고를 받고 그 중 7인이 처형되었다.

어떤 형태의 단죄도 일관되게 진행되기는 어려운 법이다. 대독협력을 이유로 유죄선고를 받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 대부분이 형기의 일부만을 채우고 석방되었고, 1964년이 되자 부역죄로 감옥에 남은 자는 한 명도 없게 되었다. 결국 해방 후의 과거사 청산은 그렇게 막을 내리게 된 셈이었다.

일견 끝난 것으로 보였던 과거사 청산은 그러나 1970년대에 다시 살아난다. 프랑스 경찰이 1만 수천 명의 유대인을 체포하여 동계경륜장 밸디브에 수용한 사건인 '밸디브 사건'을 시작으로 리옹의 도살자로 불린 독일인 바르비 재판, 민병대 간부 투비에 재판 등이 그것이다. 사건에 연루된 이들은 자연사, 또는 종신형을 선고 받고 감옥에서 죽음으로써 1998년에야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은 대미를 장식한다.

그러나 부제에서 드러나듯 이 책은 '숙청'뿐 아니라 그 '기억'의 역사를 함께 다루고 있다. 숙청이 역사적 팩트로서 과거라고 한다면 기억은 그것을 바라보는 인식의 현재다. 모든 피압박 민족의 해방사에서 귀감으로 일컬어지는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이 당대는 물론, 후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곡절을 거치면서 프랑스 사람들에게 일종의 트라우마로 남고 있다는 것을 조심스레 지적한다.

대독협력자 숙청에 대한 프랑스의 여론과 기억은 숙청 시기든 그 이후든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한다. '실망과 불만, 분노와 환멸'이 당시의 반응이었다면 '무관심과 침묵, 일부의 극단적 기억'이 오늘날의 주된 반응이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숙청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데 장애가 되면서 앞서 언급한 '트라우마'로 남은 것이다.

프랑스 과거사 청산이 남긴 후유증? 우리에게는 '사치'일 뿐

 좋든 싫든 프랑스의 사례는 우리의 일제 식민지배 시기의 역사 청산과 비겨질 수밖에 없다. 지은이는 한국과 프랑스가 처한 역사적 차이를 주목한다. 한국이 일본에 의해 명백한 '식민지'로 지배되었던 반면 프랑스는 독일이 원하는 우호적 중립국으로 남아 있었으며, 일제는 36년간 우리를 지배했지만,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한 기간은 4년에 불과했다. 점령 기간은 협력자의 수, 협력의 정도, 동화와 순응의 정도를 규정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의 독립운동세력과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세력의 차이도 논의의 대상이다. 미점령 자유지역의 존재나 지하 운동의 규모와 활력이 해방 후 부역자 숙청의 집행 주체의 형성을 가능케 했다는 것이다. 또 해방의 방식과 양상의 차이도 주의를 요하는 대목이라고 지적하면서도 저자는 이 차이가 비교 자체를 불가능하게 한다든가 프랑스의 사례에서 교훈을 얻을 수 없음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프랑스의 사례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간명하다. 그것은 프랑스 부역자 숙청의 '엄격·단호·철저'한 성격이다. 36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일제에 의해 저질러진 폭압적 통치에 협력해 민족을 사지에 몰아넣은 이 땅의 민족반역자와 친일 부역자는 단 한사람도 처벌받지 않았다. 민족을 팔아 안락한 삶을 누리던 이들은 해방 이후에는 여전히 기득권으로 남아 있으니 이 전도된 역사 앞에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이 남긴 후유증을 이야기하는 것은 차라리 사치에 가깝다.

'광복'이 아니라, '건국'으로 현대사를 새롭게 포장하고 있는 이른바 뉴라이트 세력이 기대는 이론이 고작 '식민지근대화론'이며, 그것은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자학사관이라며 승리사관으로 대체하자는 일본 우익들의 의도와 절묘하게 조합되고 있는 것이다. 

불행했던 시대를 지우고 가해와 지배의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이들의 역사관은 보수신문들의 이해와 정확히 일치한다.

'민족지'로 거짓 포장된 조선·동아 양 신문은 추악한 대일 협력 행위의 진실을 가리기 위해서도 주권 피탈기 아닌, 그들 사주들이 우익 민족주의자로 거듭나던 정부수립기의 역사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반민특위를 해산시킨 우익 반공주의자 이승만을 '국부'로 추앙하고자 하는 그들의 의도가 뉴라이트의 속셈과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부역언론에 대한 단죄는 가혹하리만큼 엄정했다. 프랑스의 부역언론인은 처형당하거나 중형을 선고받았고, 모두 538개의 언론사가 기소되고 115개사는 유죄를 선고 받고 재산을 몰수당했다. 프랑스 역사는 적어도 자국민에게 나라와 민족에 반하는 부역은 '단죄'되리라는 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2008년 8월 현재, 치욕의 역사를 청산하지 못한 한국 현대사는 한국인에게 오로지 국가와 민족의 이해가 아니라, 일신의 안일과 행복을 위해 시대와 힘에 기꺼이 순응하라고만 가르칠 뿐이다. 36년 피지배의 역사를 기억 속에서 묻어버리려는 일련의 시도들이 가시화되고 있는 광복 예순세 돌을 보내면서 먼 나라 프랑스 현대사를 안타깝게  다시 뒤적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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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지음, 신현승 옮김 / 시공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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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된 지 6년이나 지난 구간(舊刊) 1권을 이른바 '쇠고기 정국'이 불러냈다. 미국의 미래학자 제레미 리프킨이 1993년에 쓴 <육식의 종말 Beyond Beef>(시공사, 2002)이 그것이다.

내 서가에 있는 리프킨의 이 책은 2002년 1월에 발행된 초판 1쇄다. 인류의 육식 문화를 광범위한 역사적, 사회적, 경제적 맥락으로 천착했던 이 책은 그 동안 스테디셀러로 꾸준히 읽혀 왔다.

광우병 정국이 이 구간을 불러냈다고 했지만 정작 리프킨은 이 책에서 광우병을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육식을 위해 소비되는 곡물에 주목했고, 그것이 수많은 사람들을 기아와 영양실조로 몰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지은이가 말하고자 하는 '육식의 종말'이 무엇인지 궁금한 독자라면 책을 읽는 동안, 차근차근 진행되는 역사적 고찰과 그 정치·사회·경제적 의미들에 대한 정교한 해석에 조바심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겠다. 리프킨은 소와 인간의 관계를 '특별한 관계'로 묘사한다.

- 젊은 황소신은 새로운 이집트 제국의 정신적인 권좌에 올랐으며, 자랑스런 그 지위로부터 천상과 사회의 관심사를 지배했다.
- 그들(소)의 운명과 우리의 운명은 인간 역사의 온갖 중요한 시기에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관련을 맺어왔다. 우리는 그들 속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했고, 우리 문화를 창조하기 위해 그들을 이용했다. 어떻게 보면 서구 문명은 수소, 그리고 암소와 함께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소'를 뜻하는 'cattle'은 '자본'을 뜻하는 'capital'과 동일한 어원을 갖고 있다. 많은 유럽어에서 '소'는 '자본' 및 '동산'(chattel)과 동일한 어원을 갖고 있다.
- 소는 인간과 문화 사이에서 표준적인 교환 매체로 이용될 수 있는 최초의 유동 자산들 중 하나였다. 
                                                                                        - <육식의 종말> 본문 중에서

식량에서 사료로 바뀐 곡물

소는 때로는 신의 모습으로, 때로는 교환 매체로도 이용되는 자본의 한 형태로 인류의 삶과 함께 해왔다. 오랫동안 '신이 내려준 선물'로 인식되었던 소는 인류 역사의 진전에 따라 '새로운 생명체'로 변화되었다. 사람들은 소의 육체에 깃들인 '신성함' 대신 '부를 낳는 경제적 생산성'이라는 세속적 개념으로 소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인도에서 소는 '토지를 놓고 인간과 경쟁하지 않'는다. 또 간디가 지적한 것처럼 '암소는 풍요의 제공자'요, '우유를 제공하고 농사를 가능하게' 해 주는 존재였다. 그러나 유럽에서 소는 여러 대륙의 원주민과 영토를 식민화하고 착취하기 위해 훨씬 세속적으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아메리카 대륙이 광대한 소 사육장이 되는 이 시기로부터 오늘날의 축산문화가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서부 정복기는 소 사육을 위해 광대한 초원에서 버팔로와 인디언을 쫓아내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지방 많은 쇠고기를 선호하는 영국의 소비자들을 위해 목초지뿐 아니라 옥수수로 사육하는 육우정책이 시행된 것도 이 무렵이다. 이 새로운 육우정책은 1세기가 지난 오늘날 '미국에서 가축들, 그것도 주로 소가 소비하는 곡물이 전 국민이 소비하는 곡식의 두 배에 육박'하는 결과를 낳는다.

'미국 평원이 때 묻지 않은 초원에서 상업적인 목초지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통해서 유례없는 쇠고기의 산업화가 이루어졌다. 효율을 목표로 한 쇠고기의 도축과정은 역설적으로 헨리 포드의 자동차 종합공정에 대한 발상을 제공하기도 했다. 결국 2차 세계대전 이후 아메리카 대륙은 전 세계적 '육우 기지화'를 완성하게 된다.

저자가 길고 지루하게 진행해 온 소의 역사적 역할에 대한 고찰은 현대적인 육식문화가 인간에게 끼친 영향을 검토하고자 함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일어난 가장 극적인 변화는 '전 세계 곡물이 인간을 위한 식량에서 가축을 위한 사료로 전환'된 것이었다.

부와 지위 드러내는 특권이 된 쇠고기

저자는 쇠고기 소비가 단순한 '입맛'의 차원이 아니라 인류의 가장 복잡한 문제인 '사회정의와 평등의 차원으로 확장'된 것으로 이해한다. 즉, 쇠고기 소비가 소득 수준과 연관됨으로써 대부분 나라에서 부와 지위를 드러내는 특권의 한 형태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유럽과 북 아메리카의 거대한 육식문화는 전 세계적으로 인위적인 '단백질 사다리'(protein ladder)를 구축했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그리고 그 사다리의 맨 위에 곡물사료로 사육된 쇠고기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축우를 포함해 다른 가축들이 미국에서 생산되는 모든 곡물의 70%를 소비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지구상에서 생산되는 전체 곡식의 1/3을 축우와 다른 가축들이 먹어치움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이 기아와 영양실조에 허덕이는 '위대한 모순'이 창조되는 것이다.

북반구의 육식 문화, 즉 쇠고기 과잉 섭취로 인한 지방소비 문화가 비만과 '풍요성 질병'으로 발전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소의 증가가 열대우림을 파괴하고 사막화의 주된 요인이며 지하수 오염의 원인이면서 지구온난화의 주범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 눈을 감고 있다.

351쪽에 달하는 본문과 100쪽이 넘는 주석을 통해 이 미래학자는 '육식의 종말'을 제안하고자 인간과 소의 관계를 회고한다. 인간과 소의 첫 번째 관계에서 인간은 '번식의 힘'을 숭배했고, '신성한 번식의 힘을 존재 속에 합일시키고, 재생의 주기에 동참'하기 위해 쇠고기를 먹었다. 그리고 두 번째 관계에서 소를 '조작 가능한 자원으로 탈바꿈'시키고 자연과 동료들을 지배하는 힘을 얻기 위해 쇠고기를 먹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인간과 소의 세 번째 관계 앞에 서 있다. 저자는 '쇠고기를 먹지 않는 선택'을 제안한다. 그는 '현대식 초대형 비육장과 도살장에서의 고통과 모욕에서 소를 해방시키는 것은 위대한 상징적 실천적 의미를 지닌 인도적 행위'라고 주장한다.

또 '육식의 종말은 자연을 대하는 적절한 태도에 관한 우리의 사고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이라면서 그는 '육식을 끊는 행위에는 모든 대륙의 자연을 대대적으로 회복시키는 생태계적 르네상스가 동반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최종적으로 그는 '육식 문화를 초월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원상태로 돌리고 온전하게 만들고자 하는 징표이자 혁명적인 행동'이라 규정함으로써 그것이 새로운 인류의식을 향한 중요한 발걸음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다. 

육식 중단, 자연을 대대적으로 회복시키는 생태계의 르네상스

어떤 사람에게 육식은 단지 식단의 변화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제레미 리프킨은 문명사적으로 그것이 인류의 삶과 역사에 얼마나 크나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실증적으로 보여 준다. 아울러 그의 해박한 논변은 2008년 현재, 한국에서 벌어진 쇠고기 정국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환기해 주는 듯하다.

'검역주권 포기'에 대한 저항을 폭력시위로 몰아가고 있는 한국사회의 퇴행은 단순한 식품위생에 관한 사항의 문제만이 아니다. 천문학적 숫자로 도배되곤 하는 광우병 발병의 확률 여부는 오히려 일부의 문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이는 자국산 쇠고기를 수출하여 더 안정적인 부를 창출하려는 미국 축산기업의 이해가 어떤 형식으로 관철되는가 하는 농산물 유통의 시스템에 관한 문제다. 또 이는 '소와 자연의 번식력에 대한 지배'를 획득함으로써 우리가 상실한 '다른 창조물과의 신성하고 친밀한 교류'의 결과가 '광우병'이라는 가공할 질병으로 발전했다는 자연의 경고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부와 지위의 척도가 되는 '쇠고기 소비'는 적어도 '값싸고 질 좋은 미국산 쇠고기'가 수입되기 시작한 한국 사회에서는 매우 '역설적'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수백 만분의 1에 불과한 발병 확률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기득권 계급은 '비싸지만 안전한' 한우를 선호하겠지만, 그만한 대가를 지불할 능력이 없는 다수의 저소득층은 그 값싼 쇠고기를 즐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 '10년이나 30년 후'에 발병할 수도 있는 질병의 문제는 그들의 기약 없는 미래만큼이나 먼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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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10-13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지난 연말에 산 6권의 책이다. 사긴 샀는데, 과연 언제쯤이면 이걸 다 읽게 되나, 한숨이 나온다. 나이 들수록 책읽기의 속도는 더뎌지고, 한번에 읽는 양도 나날이 줄어든다. 한국 사람들은 책을 사는 데 든을 쓰지 않는다는 통계를 들으면서 나는 지난 한 해, 얼마를 썼나, 하고 겸연쩍게 되돌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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