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멜
마우리체 필립 레미 지음, 박원영 옮김 / 생각의나무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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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들러 리스트>가 나왔을 때 이렇게 생각했다. 왜 나찌의 유태인 학살을 고발한 작품보다도 그 학살을 줄여보고자 애쓴 한 가해자의 양심이 더 큰 호소력을 지니는 것일까? 당시 한 영화평론가는 영화의 호소력이 바로 ‘중산층적인 거리두기’에서 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피해자의 위치에 서는 것은 감정적으로도 꽤나 힘든 일이기 때문에 차라리 가해자라는 안전한 위치에서 양심의 모험을 거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맞나? 어쨌든.

마우리체 필립 레미의 [롬멜]은 나찌의 영웅 롬멜의 신화를 벗기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이 책의 의의라면 ‘군인’으로서 그리고 뛰어난 지휘관으로서 그가 지닌 진정한 용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롬멜은 히틀러를 더할 나위 없이 존경했고 국가사회주의의 이념에 찬동했지만, 그의 잘못된 결정에는 따르지 않았다. 그는 진정한 용기란 실수를 인정하고 후퇴할 줄 아는 것이라는 자신의 원칙에 충실했다. 때문에, 롬멜은 전쟁을 지속하려는 히틀러의 암살계획을 묵인했으며 체제 붕괴 이후 서방과 강화조약을 책임질 국가 수반의 자리까지도 염두하고 있었다고 한다. 책의 전략은 이처럼 롬멜에서 겹쳐진 신화와 영웅을 분리하는 것이다 . 다만, 책이 너무 사실에 매몰되어 롬멜과 나찌 체제의 관계, 특히 소련 침공의 좌절 이후 광기로 치닫던 체제의 단면을 드러내지 못한 점이 아쉽다. 롬멜이라는 인물의 굳은 의지는 잘 드러나지만, 그 의지가 체제 내에서 어떻게 좌절되었는지는 입체적으로 보이고 있지는 못하다. 전기문학으로서 인물과 역사를 잘 섞어낸 주세페 피오리의 [그람시]나 이론과 인물을 제대로 소화하고 있는 실비아 네이사의 [뷰티풀 마인드]와 비교해서 다소 격이 떨어지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책을 통해 행간에서 엿본 나찌 체제에 관한 단상 두 가지는 이렇다.

우선, 나찌의 선전담당자였던 괴벨스의 의도와 역할이다. 괴벨스는 아프리카 전선에서 롬멜이 아프리카 전선에서 인상적인 승리를 일궈내자 그의 가치를 발견했고 그를 민족의 영웅으로 포장했다. 이때부터 롬멜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국가사회주의 아이콘이 되었다. 나찌와 같은 비정상적인 동원 체제에서 영웅의 존재는 매우 필수적이며 최고 통치자의 위치를 더욱 확고하게 만들어준다. 동시대인이든 과거의 인물이든 죽었던 살았든지 말이다. 박정희가 만들어낸 ‘이순신’의 신화, 김일성의 신화 등등에 대해 체제의 선전이라는 관점에서 재삼 음미해봐야 하지 않을까?

둘째, 나찌에 관한 경제사적 연구에 따르면 나찌 시대의 군비적 효율성은 서구의 상대국들에 비해 크게 뒤떨어졌다. 일사불란한 동원체제에서 그 효율성이 높을 것으로 판단하지만, 사실은 오히려 반대라는 것이다. 나찌에서 관료제의 폐해는 카프카의 [성]을 떠올리게 할 정도이다. 롬멜이 히틀러 체제에서 느꼈던 절망감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 히틀러의 총명함을 죽는 순간까지 신뢰했지만, 관료제는 히틀러의 과대망상증을 제어하기는커녕 오히려 순수한 형태로 전개되도록 부추겼다. 신하의 구름에 둘러쌓인 조선의 절대군주제와 나찌의 체제가 이 점에서 크게 다를까?

다시 처음 문제로 돌아가보자. 롬멜은 어떤 인물인가? 저자는 잘못된 신화에 유폐된 롬멜을 구하여, 한 사람의 지휘관으로서 그리고 말년에는 나찌에 반대했던 진정한 애국자로서의 면모를 살려내고자 한다. 하지만, 어쨌든 그도 나찌라는 거대한 시스템의 유지에 동조했다. 유태인 학살을 단 한번도 승인한 적은 없지만, 저지하고자 적극적으로 행동하지도 않았다. 롬멜이라는 인물에 대한 판단은 구조에서 비롯되는가 개인에게서 비롯되는가? 진부한 질문 같지만, 나찌와 같은 중요한 역사를 대면할 때면 어쩔 수 없이 튀어나오는 질문이다. 혹시, 롬멜에 더 주목하게 되는 이유가 제삼자로서의 편안함이라는 비열함 때문은 아닐까?

책은 모두에 롬멜이 '명백한 나찌이자 명백한 영웅'이라고 적고 있다. 이 딜레마가 좀 더 역사적인 형태로 서술되었더라면 훨씬 흥미진진한 책이 되었을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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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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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을 집어든 날 바로 저녁 무렵에 끝내버렸다. 책이 워낙 재미있어서 일까? 가볍고 날렵한 문체가 속독을 부추긴 것일까? 크게 집중해서 읽은 것도 아니건만 단숨에 페이지가 지나가 버렸다.
소설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우선 첫 번째 부분은 어린 시절 삼미 슈퍼스타즈를 통해 배운 한국 사회의 쓴 맛을 해학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책 전체에 걸쳐 가장 압권이라 불러도 좋다.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반 학번들이 알아챌만한 농담과 수다의 코드를 모아놓고 타이틀전을 벌이는 격이다. 프로야구에 대한 서술이라든가 이를 풀어내는 소년들의 기지는 누구나 어린 시절 추억의 한 켠에 쟁여두었을 만한 내용이다.
더불어, 은근한 회고풍으로 쓰고 있는 초반부는 소설이 가져야 마땅한 두가지를 잘 구현하고 있다. 우선, 회고풍으로 서술된 슈퍼스타즈에 대한 추억은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 “잡기 힘든 공은 잡지 말고 치기 힘든 공은 치지 말자.” 어린시절 끝까지 삼미의 팬으로 남았던 두 소년은 이 잠언을 아픔으로 새기지만, 이후 삶의 궤적에서 다시 중요한 깨달음으로 다가온다. 두 번째로는 전반부의 회고체 서술이 지닌 문체의 독특함이다. 표지 뒤에 나와 있는 황석영의 선정 이유에는 '가벼움'이 문제로 떠올랐다고 되어 있지만, 거꾸로 이러한 자조적이고 독백적인 농담이야 말로 이 시대의 수다를 특징짓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정작 주인공이 박터지게 머리 속에 지식을 우겨넣어 일류대에 입성하는 이후를 다룬 대학 시절은 매우 실망스럽다. 일단, 이 가운데 토막은 소설 전체의 주제의식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 이 시기의 삶이 삼미에 대한 추억과 교훈, 그리고 이후 교훈의 재발견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고리를 좀처럼 발견하기 힘들다.
에피소드나 스토리 진행, 그리고 문체까지 살짝 바뀐 이 토막은 90년대 초반에 크게 붐을 이루었던 주인석, 박일문 등의 '(운동권)회고담 소설'과 퍽 닮아 있다. 혁명, 섹스, 록큰롤은 삼중주는 그것이 진짜 그 누군가의 삶을 관통해 지나쳤다고 해도, 전혀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 개인적인 악감정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운동권에 몸이나 마음의 일부를 담궜던 작가들은 엽기발랄함으로 한 없이 달려가다가도 줄에 매인 짐승처럼 다시 과거로 끌려들어간다는 것이다. [무협학생운동사]로 데뷔했다는 사실을 은근히 감추는 김영하, 이 방면의 대표주자인 백민석, 이들 모두에게서 비슷한 흔적을 읽게 되는 것은 그들이 지니고 있을 법한 일종의 찜찜한 부채감 때문일까?
그나마 마지막 토막은 좋았다. 프로의 세계에서 칠 수 없는 공을 쳐내지 않는 것, 잡을 수 없는 공을 포기하는 것은 죄악에 가깝다. 더구나, '프랜차이즈'의 실현에 불과한 식민지 땅에서 그 죄악에 대한 질타는 더욱 가혹하기 마련이다. 슈퍼스타즈가 준 교훈, 이러한 가짜 프로 의식을 거부하고 이기는 것을 거부하고 오직 자기 수양을 위해 야구를 한, 목적보다는 수단을 중요시한 교훈이 주인공에게 새로운 삶의 가치를 일깨워준다. 맑스의 사위인 라파르그가 말한 ‘게으를 수 있는 권리’란 게 이것일터이고, 네그리가 말한 노동의 거부란 바로 쳇바퀴처럼 순환하는 자본의 당위를 물리칠 때 가능한 것임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더구나, IMF라는 황망한 배신의 시간을 통해 전개되는 삼미의 재발견은 더욱 설득력있고 감동적이다. 다만, 주인공에게 교훈 전달자로 갑자기 부활한 그 시절의 단짝 조성훈이 일본에서 겪은 일은 너무나 동화같아서 고대극에서 볼 수 있는 "데우스엑스마키나dues ex machine" 만큼이나 작위적이라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전체적으로 단숨에 읽히는 흥미와 함께 진지한 고민거리를 더불어 지닌 흔하지 않은 작품이다. 다만,체험에 기반해 쓰는 작가가 지닐 수 있는 한계 또한 또렷이 보여주었다는 점은 실망스럽다. 회고담 소설이나 내면을 주절거리는 소설을 혐오하는 나로서는 이처럼 서사에 강한 소설가가 또 하나 등장했다는 것을 두 팔로 환영하는 바이다. 그를 소개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이 소설은 유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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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인간의 동반자
제임스 서펠 지음, 윤영애 옮김 / 들녘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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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개를 키운 적이 있는 나는 가끔 ‘개고기 논쟁’에 휘말리면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약간의 논쟁을 거쳐 사람들이 도달하는 합의점은 ‘키우는’ 개와 ‘먹는’ 개를 구분하자는 것이다. 즉, 먹는 개는 식용이기 때문에 아무런 죄책감 없이 먹어도 괜찮지 않겠냐는 것이다. 한번은 이런 의문이 들었다. 일부의 개는 원래 인간의 친구로 태어나고, 다른 일부의 개, 그리고 모든 소나 돼지는 원래 인간의 식량으로 태어나는 것인가? 동물에게 부여한 인간의 질서를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제임스 서펠의 <동물, 인간의 동반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인간들은 잔인한 과정을 거쳐 도륙된 돼지를 태연하게 먹으면서도 애완 동물에 대해서는 그토록 한없는 애정을 쏟을 수 있는가? 서펠은 이러한 종류의 문제가 이른바 ‘사회과학’에서는 이상하게도 봉쇄되어온 질문이라고 지적한다.

서펠은 동물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단순한 차원으로 환원하려는 태도를 경계한다. 그는 애완동물이 다른 인간을 찾지 못해 끌어들이는 대용물이라는 해석, 인간정신이 지닌 미약함의 증거라는 시선, 그리고 잉여생산물의 존재와 함께 등장한 기생성의 단편이라는 비판 모두를 거부한다. 서펠은 애완동물에 대한 기존의 해석을 의학적인 증거와 역사적인 지식을 넘나들며 솜씨있게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기능적인 관점과 단순한 설명을 거부하는 대신, 서펠은 동물이 인간 사회에 정서적인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약하게’ 수용한다. 즉, 인간 사회에 대한 동물의 독특한 기여가 그들을 인간의 친구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사실, 동물에 대한 이러한 갑론을박은 서펠에게는 하나의 징검다리이다. 그는 여기서 자연에 대한 인간 중심의 신화를 추적한다. 그는 전형적인 사냥꾼과 채집자들은 자신의 사냥감을 열등한 존재로 보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들에게 동물은 정복해야 할 대상이라기 보다는 동반자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농경사회는 전체 시스템이 자연 정복 그리고 생물에 대한 지배와 조작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생산 조건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의식 속에 더욱 많은 균열을 일으켰고, 이는 어떻게든 봉합되어야 했다. 그리고, 자연 앞에 우뚝 선 인간이라는 관점이 그 역할을 담당했다. 서펠은 이러한 지배와 패권에 대한 집착, 그리고 이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다시 인간을 향해 겨눠진 것이 ‘제국주의’와 ‘노예제’라고 말한다.

개인적으로 농경 사회로의 전환에 대한 서펠의 관점이 매우 신선했다. 생태학에 큰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생태’라는 좌우를 아우르는 모호한 정치적 구호 속에 느꼈던 일말의 찜찜함이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정교한 생태학이랄까? 서펠은 자연에 대해서 어떤 관점을 지니는지가 중요하다는 기본을 전혀 다른 방향에서 일깨워주고 있는 셈이다.

서펠의 인식론적인 전환은 분명 값진 것이다. 하지만, 망설여지는 부분이 없다면 거짓일 터이다. 자연에 대한 정복적 관점이 결국 인간에 대한 착취를 낳았다면, 관점의 탈식민화를 통해서 반대의 결과를 낳을 수 있을까? 여전히, 비참한 인간사회에 눈을 돌리는 것이 애완동물에 대한 애착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직 근본적인 전환을 이루지 못한 탓일지 모른다.

언제나 그렇듯이, 전선은 하나씩 차례대로 걷어나가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한번에 움켜쥐고 맞서나가는 것이 싸움인 법이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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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청한 백인들
마이클 무어 지음, 김현후 옮김 / 나무와숲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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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때 세미나를 하거나, (당분간 '어쨌든' 공부를 직업으로 삼았으니) 이른바 ‘학문’을 하다 보면 세상을 필요 이상으로 심오하게 보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특히나, 이른바 변혁/개혁 이론들에 대해서 그런 생각이 가끔 들 때가 있다. 즉자적인 반대보다는 근본을 파헤쳐야 하며, 경박한 행동주의 보다는 과학에서 비롯하는 참된 '실천'을 해야 한다는 메시지의 압박 말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에서는 액티비즘을 낮게 평가하곤 한다. 머리는 빈 놈들이 목소리만 크다는 식일까?

<멍청한 백인들>이 북미에서 베스트셀러의 대열에 올랐을 때 무척이나 놀랐다. 이 넉넉하게 생긴 아저씨가 걸출한 다큐 작가인 것은 일찍이 알고 있었지만, 책까지 쓸 줄이야! 그것도, 미국에서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꽤 오래 지켰으니 말이다.

한번인가, 책을 사려고 집어든 적이 있었다. 하지만, 심각한 주제를 다루기에는 책이 경박스러워보였다고나 할까? 어쩔 수 없이 먹물티가 발동했는지, 무거운 이야기를 하는 책이 경박스럽다는 무의식에 책을 집지 못했다. 마이클 무어의 작품을, 그리고 그의 홈페이지에 게재되는 통렬하고 강렬한 메시지들을 좋아하면서도 막상 미국사회의 근본적인 폐부를 논하는 책이라면 이렇게 가벼워서는 안 된다는 편견을 품고 있었을 게다.

어쨌든, 이렇게 한번 멀어져 간 책을 다시 찾게 된 계기는 아카데미 시상식이었다. 미국 사회의 “fiction/non-fiction의 역설'을 말하며 'Shame on you, Bush!'를 외치던 그의 당당함은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역시! 책은 그의 다큐 작품들 만큼이나 예리한 비판의식과 블랙 유머을 담고 있었다. 이렇게 통렬한 책을 만난 것이 얼마만인가? 책의 주제는 산만한 듯해도 몇 가지로 정연하게 나눠져 있다.

우선, 미국 대선에서 고어의 승리를 무대포로 짓밟은 부시와 그 공화당 깡패사단들에 대한 고발로 시작된다. 미국 대선에 대해서 우리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주로 접한 나로서는 무척 당혹스러운 내용들이었다. 현재 부시 행정부의 참여한 내각의 숨기고 싶은 악행들 및 부시 자신의 백수스러움과 무식을 꼬집는 부분이 특히 인상적이다.

그 다음으로는 미국 내 흑인에 대한 구조적인 인종차별, 여성차별, 빈부격차의 문제가 도마에 오른다. 익히 알려진 문제들이지만, 꼼꼼한 통계수치와 통렬한 유머를 섞는 그의 입담이 새삼스럽다. 공교육이 무너지는 것은 비단 이 땅의 일만은 아닌 듯 했다. 기업에 스폰서로 변해가면서도 변변히 가르치는 것이 없는 학교에 대해 무어는 10대들에게 교묘하게 법의 테두리 내에서 적들을 약올리라고 권한다.

민주당 역시 그의 면죄부를 받지는 못한다. 클린턴이 되도 않는 '흑인대통령'을 자처하면서 뒤로 깐 무수한 호박씨를 무어는 일일히 센다. 클린턴이 저지른 은밀한 악행에 비하면 되려 솔직한 레이건 시절이 좋았다고 늘어 놓으며, 르윈스키의 드레스에 묻은 정액은 그가 민중들에게 저지른 몹쓸 짓에 비하면 무시할만한 정도라고 깐죽대기도 한다.

책의 뒷부분은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고발, 그리고 랠프 네이더가 이끈 녹색당의 선거운동에 참여한 계기(그와 네이더는 개인적으로 좋은 인연은 아님에도)와 부시의 당선을 도왔다는(역시, 비판적 지지나 대동단결론은 이땅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비판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 책이 주는 미덕은 솔직한 통렬함이다. 그는 복잡하게 돌아가지 않는다. 범 지배블럭이 아니라, 공화당의 누구, 민주당의 누구이다. 그들에게 항의 메일을 보내고 그들을 낙선시켜야 한다고 목청을 돋운다. 부시 일가에 대한 그의 공격을 읽노라면,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면 어땠을까 싶다.

하지만, 역시 무어는 얇팍하고 표면에 머무르기에 역시 근본적인 변혁을 추구하기에는 너무 경박한 인물이 아닌가? 어쩌면, 그 무거움 때문에 혹자는 너무 깊이 들어가버렸고, 또 누구는 굴레를 아예 버리고 권력의 치마폭에 의탁한 것이 아닐까. 카메라를 든 '투사' 마이클 무어라면 이들을 가볍게 비웃고 넘어갈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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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뽀이, 경성을 거닐다 - 만문만화로 보는 근대의 얼굴
신명직 지음 / 현실문화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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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문화연구에서 나온 이 책은 일전에 출간된 김진송의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와 쌍을 이루는 책이다. 김진송에 책에 크게 실망했던 바, 이 책에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지만 이른바 '만화만평'들이 상당수 실려있다는 것을 알고는 냉큼 구입했다. 역시, 책의 가치는 저자의 논리 전개보다는 당시의 만화만평을 직접 볼 수 있다는 데 있다. 사실, 저자의 분류나 해설은 특별히 도움이 되지 않는다. 때로는 방해가 된다고 편이 맞을 것ㅇ,이고, 지나친 과잉해석으로 읽는 도중에 고개를 갸우뚱 거리게 되는 일이 적지 않았다.

이 식민지배기 근대와 전근대가 혼융된 시기의 신문 만화만평들을 보는 일은 경이 그 자체이다. 당시 식민지의 삶 속에서 형성된 '모던'이라는 것과 오늘날 우리의 삶들은 어쩌면 그리도 닮아 있는 것일까!

엉뚱한 이야기이지만, 식민지 근대화론 혹은 남한의 왜곡된 근대화론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한때, 한국 사회 변혁론의 주류를 이루었던 NL/PD론은 현실인식과 혁명 노선의 차이가 있었을 뿐, 남한사회가 근대화/자본주의화의 과정에서 어떤 의미로든 일탈/왜곡되었다는 점에서는 닮아있었다. 이와는 다르지만, 압축성장을 통한 (정상에서 벗어난) 근대화 때문에 우리가 제대로 된 근대적 '의식'이나 삶의 양식(모두스 베빈디)을 지닐 기회를 박탈했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의 만평들을 접하면서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식민지라는 일제시대, 그 굴절/왜곡된 환경 속에서 움텄던 근대의식과 근대의 모습은 '식민지'이든, '제국주의 속의 자본주의'든, '압축성장'든 그 무엇이 되었든 간에 그 속에서 배양된 오늘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저자의 해설이 방해가 되었던 이유도 식민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포착하려들기 보다는 이러한 왜곡된 근대화라는 렌즈 속에서 억지로 잡아내려 했기 때문이었다.

왜 당시의 삶과 지금의 삶이 닮아 있는가? 우리의 삶은 결국 '식민지 근대화'의 장기지속이었던가? 우리는 그 미몽에서 여전히 깨고 있니 못한 것인가? 오히려 반대가 아닐까? 우리가 갈망했고 지향했던 정상적인 근대의식, 정상적인(혹은 혁명적인) 근대화라는 이런 이미지가 미몽은 아니었을까? 오히려, 남한 자본주의의 발전을 주변부 자본주의/제국주의 하의 근대화/근대의식라는 또다른 유형으로 마땅히 제대로 분류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근대의 '다양한' 얼굴의 하나로 봤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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