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머리 여가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3
외젠 이오네스코 지음, 오세곤 옮김 / 민음사 / 200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머리 여가수 비슷한 사람조차 찾아볼 수 없는, 마치 팝 아트 작품처럼 적과 흑의 조화가 단순하고도 묘하게 어우러진 표지를 봤을 때부터 알아챘어야 했다. 대머리 여가수가 이 작품의 등장인물이 아니라는 것쯤은.

'부조리극', 그 이름부터가 왠지모를 도전정신을 불러일으키는 이 장르에 감히 도전해보자 마음먹은 것은 다름이 아닌 남아도는 시간. 수능 끝난 고3은-물론 논술이라는 난제가 아직도 남아있긴 하지만-요즘 무한정 주어진 시간 속에서 부유하고 있었다. 이미 노는 것도 슬슬 지겨웠고, 늘 읽던 소설, 에세이류는 내 지적 허영심을 채우기엔 역부족. 그래서 '이 참에 아예 연구를 해봐' 하는 심리로 산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연구'는, 아무래도 수십년 전의 획기적 도서였던지라 21세기의 인간이 읽기에는 이미 뻔한 내용들의 나열에 불과했다. 그래서 선택한 장르가 부조리극(왜 굳이 부조리극이었냐-를 묻는다면... 글쎄 사실 나도 잊은 지 오래랄까;;). 부조리극의 효시이자 고전인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와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를 사서 읽었다. '고도를 기다리며'가 이모저모로 더 수작으로 평가되는 듯 하지만 글쎄, 내겐 '대머리 여가수'가 훨씬 흥미롭게 다가왔다.

'대머리 여가수'는 스미스 부부의 우스꽝스러운 행동으로 시작된다. 그들은 아주 전형적인 영국인들로 묘사되는데, 그 설명 방식이-외양 묘사에서 수식어를 전부 '영국식의-'로 통일되어 있다는 것부터가 우스웠다. 그리고 정상적인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부부. 대머리 여가수의 주제의식은 극 전반에 걸쳐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소통 불가의 인간, 그리고 불완전한 소통의 매개인 언어. 부부간에도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설정은 상당히 파격적이면서 효과적이다(물론 인위적이고 억지스럽다. 이오네스코의 부조리극의 묘미는 바로 '억지'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뒤에 등장하는 마틴 부부 역시, 소통의 불가라는 점에서 스미스 부부와 마찬가지다. 첫 등장에서 그들이 서로를 몰라보고 타인을 대하듯 하는 것은 지나친 억지로 보여지며 별로 우습지도 않다는 것이 단점이지만(물론 연극으로 볼 땐 배우에 따라 우스울 수도 있을 듯) 주제를 효과적으로 부각시키는 데에는 어느 정도 적절했다고 생각된다. 어쨌든 이 극작품은 스미스 부부의 집에 마틴 부부와 소방대장이 방문하여 서로 대화를 나누다가 언쟁 같은 말장난인지, 말장난 같은 언쟁인지를 펼치고는 다시 첫 장면으로 돌아가 버리는 것으로 끝나버리는데 안타까운 부분이 바로 언쟁 같은 말장난이 나올 때다. 꽤 긴 그 부분에는 꽤 많은 각주가 달려 있는데(번역자의 노력이 실로 가상하다) 이유인즉, 대부분의 대사가 그야말로 '말장난'같은 것이어서 그것을 이해하기에 필요한 문화적 배경지식도 부족하고 리듬감도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별로 재미도 없고 썩 와닿지도 않는 게 사실이다. 프랑스어를 더 공부하든지 해야지 원...

음, 어쨌든. 대충 위에 설명해 놓은 내용이라든지 등장인물을 보면 알겠지만 대머리 여가수에는 대머리 여가수가 등장하지 않는다. 단 한번 소방대장이 '그런데 대머리 여가수는?'이라고 하던가, 하는 물음에 '여전하죠. 여전히 그 머리 스타일이고요'(정확하진 않지만 이런 내용이었던 듯)하는 대화가 전부다. 자신의 눈에 우스운 것은 인류 전체라고 이오네스코가 말했던가. 제목은 작품을 포괄하는 것이든지 작품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완벽하게 부정해버림으로써 이오네스코는 우스운 인류를 더욱 우습게 만들어버렸다. 끝까지 대머리 여가수의 출연을 기다렸던 나 같은 인간들은 더더욱. 끝까지 읽고 나서야 뒷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뒤에 남은 두 작품은 읽어보지도 못한 채(나중에 읽어봤는데, 아무래도 대머리 여가수만한 충격은 아니었다.) 책장을 덮었을 때 붉은 바탕에 검은 그림으로 서 있는 인물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런 표정도 없는 그 그림을 보면서 문득 소름이 돋았다.

좋은 작품은 우리를 생각하게 만든다고 한다. 물론 좋은 작품을 선별하는 방법이야 그 외에도 여럿 있지만 단순히 그 점만을 따져본다면 나는 대머리 여가수를 최상위권에 올려두고 싶다. 이 작품을 읽은 지 한 달 가량이 되었지만 나는 아직도 이오네스코가 던져준 화두를 명쾌하게 풀어내지 못하고 있다. 책 뒷면에 박힌, 기괴하게도 웃고 있는 이오네스코의 사진을 보며 생각해 본다. 당신이 던져준 화두를 내가 능란하게 다루게 되는 날, 나도 부조리극을 써보겠다고. 모든 인류에 대한 통쾌한 비웃음을 담은 너무나 매력적인 장르, 부조리극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