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린 날의 외출 아니 산책은 나름 운치가 있다. 얼어붙은 땅만큼이나 마주치는 사람들의 마르고 고달픈 얼굴에 가벼운 안부인사를 건넨다. 명절을 앞두고 왠지 바빠 보이는 걸음들이다. 방앗간을 지나는데 엿기름과 전장김이 수북하게 쌓여 손짓을 한다. 구석구석 응달진 곳에 쌓인 눈의 흔적에 강아지가 멈춰서 코를 박는다. 어떤 개가 머물다가 안부를 남기고 갔음이다. 답장이라도 쓰려는듯 떠나질 못하고 머뭇거리는데, 성질 급한 주인은 얼른가자고 목줄을 당긴다. 우체국은 만원이다. 돈을 찾고 보내고 택배를 보내는 어르신들로 복작인다. 인터넷이란 편리한 문물과 도구가 있음에도 선뜻 엄두가 나질 않으시려나. 부탁할 젊은 자식들도 바쁘거나 곁에 없으려나. 이래나 저래나 삶은 나이든 자들에게는 더 고달프다.

 

주고받음의 단순한 기쁨을 누려보질 못했다. 둔감한 성격도 한몫했다. 이제와서 새삼스럽기는 하지만 어린 조카들이 자라서 기쁨을 가르쳐 주고 있다. 감격과 고마움의 시간이 물밀듯 밀려왔다 가려고 한다. 작은 아기였던 새들이 어른이 되어 나이들어가는 이모를 돌보고 있다. 미안하고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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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날짜를 보니 지난 여름이 마지막이었다. 와... 새삼 스스로의 무신경에 놀랐다. 

 

이제는 귀하신 몸이 된 겨울날의 눈을 기억하기 위해서라는 핑계아닌 핑계, 이렇게 쓰는 것이 맞나싶은 글자들, 언제부턴가 글자의 생김생김이 낯설고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마치 처음보는 글자들처럼 생경해서 이건 뭐지? 하곤 사전을 찾을 정도다.

 

아침 7시. 평소보다 이른시간에 눈이 떠졌다.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고, 강아지 콩이는 밖이 궁금하다고 법석을 떠니, 아니 일어날 수가 없지않은가. 이 강아지는 눈이 오는 소리 , 눈 치우는 소리, 그 눈을 밟고 달려가는 고양이 소리, 바람에 무언가가 떨어지고 날리는 잡다한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나의 깊은 잠을 방해한다. 방과 거실을 들락날락 정신없고 부산스런 새벽을 지나 아침이 되고 결국에는 나를 일으켜 깨우고 말았다. 천지사방에서 눈이 내리는.

눈치우는 밀대를 찾아 들고 마당으로, 대문 밖으로 나가 쌓인 눈을 치우고, 계단 위도 쓸어내리고, 콩에게도 두툼한 옷을 입혀 생애 두번째의 눈과 만나게 해주었다.

 

물론, 역시나, 좋아한다. 혀를 내밀어 할짝거려도 보고, 얼굴이 눈범벅이 되도록 눈밭을 헤치고 이리뛰고 저리뛰는 날다람쥐 같은 녀석에 할말을 잃었다. 축하한다. 너의 두번 째 겨울 그리고 눈을.  부디, 다음 겨울도 무탈하게 오기를 바랄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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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적으로 멀다고 느꼈던 보건소에 다녀오는 길이다. 인터넷으로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었던 문제를 장대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하필 오늘 같은 날에 돌고 돌아온 이유가 어떤 사람의 융통성 없음과 지나친 오지랍 때문임을 깨닫자 마구 화가 솟는 거다. 그래도 그 사람을 향하여 화는 내지않고 잘 참았다. 대신 속으로만 궁시렁 투덜대며 비와 만원버스를 원망했다. 흔들리는 버스에 몸을 맡기고 불특정 다수의 땀냄새와 굽 높은 샌들로 인해 아픈 발바닥을 의식하노라니 기분은 가라앉고 몸은 주저앉을 것처럼 무거웠다.

 

나이듦은 구차하다. 보이지않는 작은 글자를 들고 노안이라고 설명하기가 구차하다. 비오는 날 다리 허리가 아픈 것도, 망각의 강을 건너버린 온갖 기억들도, 스마트폰 사용법 앞에서 버벅거리는 전혀 아름답지않은 풍경도 일상이 되었다. 한번도 꿈꾸지 않았던 날들이 기다리고 있다. 망각과 상실, 결핍의 총체적 문제다. 이런 삶을 괜찮게 만들 방법에 대하여 도움이 필요한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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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비다. 장마다. 지하철 역에서 계단을 올라 후두둑 떨어지는 빗방울에 에코백에서 얼른 우산을 꺼내 쓰는 준비성은 전에 없던 일이다. 집으로 가는 길 어디쯤에 석류나무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나이를 짐작할수 없는 오래된 나무에는 작은 아이 주먹만한 석류가 익어가는 중이다. 가을이 되면 발갛게 발갛게 영글어 중력의 힘을 이기지 못해 휘청거릴 테다. 석류는 여자의 과일이고 엄마의 과일이다. 만삭의 임부처럼 탐스럽게 영그는 늦은 가을 어느 날, 툭 소리나게 땅으로 떨어질 테다. 누군들 그 보석이 탐나지 않을까. 반짝반짝 빛나는 선홍빛의 구슬들이 쩍 벌러진 아구에서 쏟아질 듯 말 듯 위태로울 것이다. 

 

때로 맘씨 좋은 주인은 이웃들에게 잘 익은 석류 한 덩이를 선물하기도 한다. 오며가며 탐을 내고 보았을 천상의 열매는 그렇게 나누어 가질수록 가치를 더한다.

 

오늘 하루도 잘 버티고 돌아와 비에 흠뻑 젖은 화초들 사이로 오가며 생채기난 마음을 치유한다. 단단해졌다고 생각한 마음에도 상처는 남아있다. 나 아닌 타인과의 관계는 늘 숙제같다. 문을 닫은 마음은 또 깊은 동굴을 찾아 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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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를 내면 손해인건가. 화가 나는데, 부당해서 화가 나는데 화를 내면 지는 것처럼  모자란 인간처럼 보여지는 걸까. 아니면 너무도 비겁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이라 자신 외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불감증 환자들이라서 또, 어디서 누가 떠들어대네 라는 건지도. 내 안에 숨어있던 싸움꾼 본능이 다시 꿈틀거린다. 따지고 싸우고 소리지르고 싶다. 조곤조곤 생글생글 웃으며 애교내지 아양을 떠는 건 불가능이다. 싸우고 싶지 않다. 그런데 싸울 일이 자꾸만 생긴다. 세상은 평화롭지 않은데 그런 척하고 살라 하는 것 같다. 잘살지 못하는데 잘 사는 척, 행복하지 않은데 행복한 척, 만족한 척, 유순한 척, 누구를 위해서지? 음모론이 슬슬 고개를 든다.

 

나이를 먹으면 반드시 어른이 된다는 맞지 않다. 요즘, 주변을 둘러보면 나잇값 못하는 어른들이 보인다. 유치하고 이기적이고 오로지 자신과 자신의 가족 외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그런 어른, 노인들... 그들처럼 나이들지 말자고 다짐하지만 모를 일이다. 내가 원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영화나 드라마 속 세상은 어찌나 선명하고 명료한지. 잘 만들어진 네모상자 속 세계에 흠뻑 빠져있으면 아편인 듯 심신이 몽롱하다. 꿈이라면 깨고싶지 않을 만큼이다. 다시 보아도 달콤한 '정글북' 영화는 이런저런 결점들이 보이긴 하지만 그럭저럭 재미있다. 아이와 맹수와의 교감, 우정, 선은 이기고 악은 멸망한다. 쉬어칸은 불에 타 죽을 운명이었고 거대한 비단뱀 카는 그렇게 나타났다 찰나의 순간 사라지고, 탐욕스런 오랑우탄 루이왕은 제가 사는 성에 깔려죽을 운명이었던 것이다.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가 들어갔다가 나왔다. 흑표범 바기라의 헌신과 유쾌한 발루의 애정어린 시선은 언제나 어깨를 들썩이게 만들고 늑대 무리들은 다시 봐도 멋지다. 아기 늑대는 울집 강아지를 닮았다. 이 영화에서 약간의 심오한 뭔가를 기대한 건 착오다. 저렇게 멋진 정글을 만들어놓고 겨우... 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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