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고 미루던 숙제를 해결하듯, 병원엘 갔다. 누군가 뒷덜미를 움켜쥐고 병원 앞에 던져줬음 싶은 치과와 겸사겸사 근처에 있는 안과까지. 스케일링은 굳이 할 필요 없다는 얘길 듣고 약간 시리고 부은 잇몸만 간단하게 치료하는 걸로 끝. 환절기마다 의례 겪는 일이라 등한시했던 눈은 생각 외로 심각하다는 말에 좀 놀랐다. 너무 심하게 비벼서 눈 안과 밖이 헐 지경이란다. 좀 강한 스테로이드 안약이랑 방부제가 안 든 일회용 안약을 처방받고 알레르기 약 아침과 저녁 분 3일치를 처방 받았다. 부작용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말에 강한 거 말고 효과가 늦어도 좋으니 약한 거 달라고 했더니 그래도 며칠은 써봐야 한단다. 약국언니한테 물었더니 별로 강한 것도 아니라고. 약국에서 느끼는 거. 이 사람들 자신들이 배운 지식의 몇 프로나 써 먹을까. 어떤 질문이건 건성이고 병원에서 받아온 처방대로 약 짓기만 분주하다. 약국이란 약을 파는 마켓 이상도 이하도 아닌 곳. 처방전을 들고 오는 손님에게는 서비스 만점이고 그 외는 대충인 듯 기분이 들고. 병원과 약국 사이의 어떤(?) 거래도 궁금하고. 집 근처에 아주 바쁜 내과가 있는데(당뇨 전문) 그 아래 약국의 주인과 혈연관계라더라, 는 소문이 있다.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지만.

오는 길에 산 사과가 겁나게 달다. 트럭 한가득 쌓인 붉은 사과가 어찌나 탐스럽던지 풍덩 빠지고 싶더라. 사과는 이맘때가 가장 싱싱하고 맛나다. 또, 어떤 과일도 사과맛에 비할 바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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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호박이 세 통 생겼다. 항아리처럼 생긴 호박은 시골 다녀온 동생이 업어왔고, 팔뚝마냥 길쭉하니 매끄럽게 잘 익은 건 앞집에서 주셨고, 긴 것과 둥근 것의 중간 정도 되는 곰보마냥 얽은 흔적이 표면에 있는 건 오가며 인사 나누는 아주머니가 선뜻 안겨 주셨다. 늙은 호박 아니 탐스럽게 익은 호박을 윤기 나도록 닦아서 신발장 위에, 마루에, 방에 하나씩 놓아두고 바라본다. 요리는 모르겠고 두고 보는 용도로 제격이다. 가을이다. 고향은 가을걷이로 바쁘다. 작년부터인가. 매상(추곡수매)을 안 하면서 쌀의 수확량은 급격히 줄었다. 힘들어 하실 때마다 쌀농사를 줄이라고도 했었다. 논 위에 버섯막사, 축사가 세워진 것도 옛일이다. 그것들도 곧 헐리어 잡초만 무성한 잊혀 진 땅이 될 거다. 부모님 살아서는 쌀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는 어찌될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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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7-10-16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걷이 끝난 논은 얼마나 허전할까요.

겨울 2007-10-17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전하다는 생각보다는 한가로워 좋다는 생각이 먼저였어요.
정말 징그럽게 바쁘니까요.
요즘은 그럴 여가도 못 내지만, 텅 빈 논을 가로질러 걷는 걸 좋아해요.
이를테면 지름길.
 

 

 

 

 

 

 

찰라 속으로 들어간다




벌 하나가 웽 날아가자 앙다물었던 밤송이의 몸이

툭 터지고




물살 하나가 스치자 물속 물고기의 몸이 확 휘고




바늘만 한 햇살이 말을 걸자 꽃망울이 파안대소하고




산까치의 뾰족한 입이 닿자 붉은 감이 툭 떨어진다




나는 이 모든 찰라에게 비석을 세워준다




오랜만에 내 맘을 홀리는 시집(가재미)을 샀다. 근데, 가재미가 어떻게 생겼더라.




***엄마가, 도토리묵을 쑤어 오셨는데 함지박 안에서 출렁거린다. 적당히 굳어야 모양 좋게 잘라낼 텐데, 하룻밤을 재워도 출렁거린다. 시외전화를 걸어 왜 이러느냐 하소연을 했더니 엄마의 한숨 섞인 말; 누가 도토리와 밤을 반반으로 섞어 묵을 만들면 맛이 좋다하길 레 덥석 사고를 쳤노라고.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굳지를 않아 썩은 밤새 한잠도 못 잤노라고. 그리하여, 당분간 흐물흐물 출렁거리는 도토리와 밤이 섞인 묵을 열심히 먹지 않으면 안 된다. 언제는 묵 맛을 알고 먹었나. 간장 맛으로 겨우 먹었지. 청포묵, 메밀묵은 아는데 밤묵은 처음이다. 그런 묵이 정말 있기는 한 건가. 아님 울 엄마가 순진하신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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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녘에는 주위가 어두워져 가는데다 피로가 겹쳐 우울해졌지만, 해가 저물어버리자 오히려 조금씩 힘이 나기 시작했다. 자신이 새로운 세계의 주민이 된것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낮의 세계는 끝났지만, 밤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다. 모든 것의 시작은 언제나 기대에 가득 차 있다. (105쪽)

그들이 원한 것은 아니지만, 태어남과 동시에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인 관계. 아무리 외면해도 없던 일로 되돌릴 순 없는. 그 소년과 소녀가 밤의 피크닉을 떠난다. 그리고 길 위에서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진다.  그들이 치뤄내는 성장통이 어찌나 달콤한지.

낮보다는 밤을 좋아한다. 밤의 세계에는 보이지 않는 마법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다. 일반적인 피크닉은 상식적으로 낮에 이루어진다. 일본의 고등학교에 이런 행사가 정말 있는 건가. '밤의 피크닉'은 멋진 발상이다.   

중학교 2학년인 현에게 책을 건넸지만 그 아이가 어떤 방식으로 읽어낼지는 모르겠다. 작고, 약하고, 울보였던 현이는 어느덧 남자의 모양을 갖추고 목소리를 깐다. 요즘은 한창 농구에 열중인데, 성장을 지켜본 입장에서는 길쭉길쭉한 손가락 발가락만 봐도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예쁜 건, 간간히 건네는 책들을 대부분 소화해 낸다는 것. 운동과 공부하는 틈틈히 소설을 읽는 소년의 모습은 아름답다.   

'도서실의 바다'는 묘한 단편들이다. 위의 책 외에는 온다 리쿠를 몰랐기에 더욱 생경하다. '밤의 피크닉'에도 이야기의 전반적인 흐름과 엇갈리는 미스테리 요소가 끼어 있다. 그 부분이 중요한 열쇠라서 뜨악스럽기도 했다. 단편들은 하나같이 미스테리와 판타지가 버무려진 영화의 줄거리를 읽는 느낌이다. 이 작가의 책만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몰아서 읽으면 재미있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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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긍정파워 - 행복과 성공을 부르는 긍정의 심리학
미아 퇴르블롬 지음, 윤영삼 옮김 / 북섬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서평단 도서에 이 책이 떴을 때 무조건 손을 든 이유는 제목의 포스 때문이다. 절대적으로다 내게 부족한 ‘자기 긍정 파워’. 제목만으로도 뭔가가 속에서 불끈 하지 않는가. 사실 이런 책은 읽을 기회가 없었다. 문학, 추리, 감상적인 산문 류가 취향인지라. 책읽기에 배어든 일정부분의 허영심은 그 이름이 ‘책’인 이상은 당연한 거라고 본다.

평소 자존감이 낮다는 자각을 해서인지 책은 흥미진진이다. 누군들 보다 나은 삶을 꿈꾸지 않고, 누군들 자신감이나 자존감의 가치를 모르랴. 아는 얘기다. 익히 아는 단순한 얘기지만, 그 가치만큼 실천하거나 얻기 어려운 거니까, 이렇듯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면서 세뇌훈련을 시키는 것이리라.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주변사람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다.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은 지극히 사소한 비방에도 거의 인생이 끝장난 것처럼 울부짖으면서 말이다. (36쪽)

성격형성에서 자존감이 결여된 경우인가. 애초에 자신감이건 자존감이건 어려서부터의 훈련이 중요하단 건 누구나 아는 얘기다.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자신감)’이나 ‘자신만이 가진 특별한 가치에 대한 인식(자존감)’이나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진 않은데, 자신감이 아무리 높아도 자존감이 낮으면 비록 성공한 인생을 살아도 행복하거나 만족스럽지 않다는 게 요지다. 부와 명예를 거머쥔 사람들의 탈선이 그 예다.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라. 살면서 수없이 듣고 읽는 말이다. 자기 학대, 반항, 좌절감, 질투심으로 타인에게 보이는 것 이상으로 스스로에게 가혹한 사람들을 종종 본다. 그러면 충고랍시고, 당신이 가진 것, 누리는 것의 가치도 대단하다고 떠들지만 당사자에겐 소귀에 경 읽기가 대부분이다. 그만큼 말, 충고, 코치는 쉽다.




나는 지금까지 수치스러운 일을 겪어왔다. 하지만 그 어떠한 경험도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앞에서 이야기한 정신적, 육체적 학대로 얼룩진 관계에 대해서도 후회하지 않는다. (51쪽) 정말, 균형 잡힌 높은 자존감을 가지면 저렇게 될까. 가정에서, 사회에서, 학교에서 학대를 당하는 당사자들에게 자존감이 부족해서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의 자존감이 높지 않을 수는 있지만 그것은 단지 자존감만의 문제는 결코 아니지 않나. 저자는 마약 중독자였다고 고백한다. 사랑은 계속 실패하고, 교도소에 가는 등의 결코 평범하지 않는 경험들과 그녀가 리더십코치로서 만난 사람들과의 결과물이 일명 ‘자존감 프로그램’인 이 책이다. 그녀가 설득력 있는 언변가라면 글보다도 말이 호소력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책의 내용만으로는 어딘가 부족하다. 과거를 디딤돌 삼아 현재의 삶을 무조건 긍정하고 즐겨라. 자기애를 극대화 시켜라. 아침마다 거울 앞에서 ‘거울아, 거울아 누가 제일 예쁘니’라고 물으면 그 대답은  ‘바로, 당신’이라는. 세뇌를 넘어 최면을 걸어라?  




진실과 자신의 생각은 상당히 다를 수 있다. 자신이 너무 솔직해서 탈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가끔 본다. 이러한 솔직함은 정직과는 아무 상관없다.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느끼는 생각을 주변사람들이 묻지도 않았는데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이 이러한 솔직함이다. 어떤 사람의 스웨터가 마음에 안 든다면, 그것은 진실이 아니라 생각? 의견일 뿐이다. 굳이 이야기해야 할 만큼 중요한 것도 아니며 오히려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106쪽)

그러고 보니 생각이나 표현의 자유라는 미명하에 타인의 험담을 꽤 한 듯싶다. 인성의 결여도 자존감을 높이는 적이라는 말씀이다. 어째 뒤로 갈수록 공자님 말씀 투다. 어떤 사람은 맨 앞장만을 읽고 던져버릴 수도 있고, 어떤 이는 직접적인 사례를 통해 고개를 주억거릴 지도 모르겠다. 내게는 저 제목만으로도 한 권의 가치와 맞먹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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