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단에 심어놓은 고추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키워냈다. 새끼손가락만한 푸른 고추가 두어 개씩 열린 것을 지켜보는 마음이 마치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 같달까. 저녁마다 마른 땅에 물을 듬뿍 주어도 다음날 그 맘때가 되면 잎이 시들시들 해서 비소식을 고대하고 있는데, 오늘 아침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어찌나 반가운지 '비다!'라고 소리까지 쳤다.

전 날 저녁에는 시골에 계신 엄마가 전화를 했다. 다음 주 즈음에 마늘을 수확하는데 다들 와서 도와주면 좋겠다는. 동생들과 상의를 해서 가겠노라 했다. 그러자면 일단은 비가 내려야 하는데 마른 땅을 흠뻑 적셔줄 비를 고대했겄만 내리는 모양새가 어쩐지 시원찮다. 수확기가 된 그 마늘을 심는다고 가서 중노동을 한 것이 어끄제 같은데 벌써 알이 토실토실 여물었다니.. 땅이란 정말 정직하다. 심으면 심은대로 나고 가꾸면 가꾼대로 알찬 열매로 보답을 한다. 얼마전에 돌밭을 일구어 심어놓은 옥수수도 파랗게 싹이 돋았다고 한다.

이번에 집에 내려가면 옥수수와 콩을 얻어다 화단 한켠에 심어볼 생각이다. 장기간 방치했던 땅이라 척박한 곳에서도 생장이 가능한 작물이 적합하다. 고추가 열렸다고는 하나 크는 속도가 실한 토양에서 자란 고추와는 비교도 안된다. 할머니가 화분에 키우는 고추도 짙은 초록색을 띄우며 튼실하게 컸는데 땅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비좁은 화단에 심은 고추는 크기도 제각각이고 햇볕 강한 낮이면 잎을 떨구고 기절하기 일쑤니 마음이 영 불편하다. 해마다 땅을 일궈 씨를 심고 가꾸는 농부의 마음은 위대하고 위대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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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오와 일기라는 부제가 말하듯, 이 책은 작가가 미국 아이오와주 아이오와 시티 아이오와 대학에서 주최하는 International Writing Program에 참가하며 씌어진 일기다. 지난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내 일기를 읽는 머쓱함에 비해 타인의 일기를 훔쳐보는 느낌은 지극히 비밀스럽고 설렌다. 더구나 이렇게 편견없이 소탈한 작가의 색이 분명한 글을 만나기란 쉽지 않으므로, 최승자가 누구지? 라는 호기심에서 비롯된 탐색은 그녀의 시집이며 에세이 번역서등을 찾기에 이르렀다.

여자로서 괜찮은 여자를 발견하는 것은 괜찮은 남자를 발견하는 것보다 가치가 크다. 이 나라에서 여자로 태어나서 살아보지 않으면 결코 모를 경험과 사유를 공유했다는 가치만으로 책을 통해 만난 그녀는 근사했다. 어지간하지 않고는 두어 번을 찾아 읽기가 드문 책 중에서도 손이 닿는 자리에 놓고 보는 책이란 얼마나 특별한지. 유독 여성작가에게서 동지애를 느끼는 것은 나 뿐일까?

이 책의 하단에는 전체적으로 누런 커피 얼룩이 번져있다. 때문에 누구에게도 선뜻 빌려주기 꺼렸던 탓인지, 영구적으로 내 소유가 되었다. 책에 관련한 나쁜 버릇 중에 하나가 너무 괜찮다 싶으면 반강제적으로 지인들에게 읽으라고 권하는 것인데, 그러다보면 그 책을 다시 돌려받기가 요원할 때가 많다. 다시 갖고 싶으면 새로 사던가 그게 귀찮으면 영영 무소유다. 그러지말자고 매번 결심하지만 혼자보기 정말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걸 어쩌랴.

아이오와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들....

'이곳 아이오와 시티에서 발견한 재미있는 현상 중의 하나는 한 대학을 졸업한 뒤에 또 다른 대학에 들어가 또다른 것을 배우는 사람들이 무지 많다는 거다. 한국에서처럼, 대학을 졸업한 뒤에 일류기업체나 아니면 대학이거나, 아무튼 사회적인 신분과 안정된 생활기반을 얻기 위해 어떤 안정된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잘 보여주는 것이 이곳 X세대의 용어들이다. slacker는 본래 회피하는 사람, 게으른 사람, 병역기피자 등의 뜻을 갖고 있는데 X세대적 의미로는, 되도록이면 최소한의 일을 하면서 살아가고 흔히 서너 가지의 중요한 창작품을 쓰고 있는 중이며 -대개는 결코 완성되는 법이 없는- 그런 완정되지 않을 창작을 추구하는 것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terminal wanderlust는 결코 한 군데 머무는 법 없이 이 도시 저 도시, 이 대학 저 대학으로 떠돌고 고정된 직장을 갖지 않고 끊임없이 이 Mcjob(임금도 낮고 내노랄 것도 없고 안정성도 없고 품위도 없고 미래도 없는 서비스 분야의 직업, 이를테면 피자 배달부 같은 임시 직업)에서 저 맥잡으로 전전하는 것을 뜻하고 여기엔 제삼세계를 방문하는 것도 포함된다. 말하자면 한국에 가서 영어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것도 터미널 원더러스트에 들어가는 거다.

mid twenties breakdown은 20대 중반에 겪는 정신적 붕괴를 말하는데, 그것은 학교를 벗어나서 혹은 조직화된 환경을 벗어나면 제 구실을 못하는 무능력과 이 세상에서 자신은 원래부터 외롭다는 자각 때문에 생긴다는 것이다. 판단마비는 문자 그대로 무제한적인 선택권이 주어질 때,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는 판단마비 증세'

개인적으로는 슬랙커와 터미널 원더러스트를 지향한다. 최근 눈에 많이 띄는 외국인의 다수는 저런 종족들인가. 경제적 문화적 우월감으로 똘똘 뭉친 거만한 외국인들을 보면 화가 난다. 생존과는 무관하게 제3세계를 유랑하는 그들의 색깔있는 눈이 거북하다. 그들의 옆에서 유창한 영어를 쓰는 한국인도 또한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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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 2004-06-04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자로서 괜찮은 여자를 발견하기 어렵다는 말 맞아요. 최승자씨의 시는 전에 읽은 적이 있었는데 이 책은 모르는 책이네요. 남의 일기 읽는 것이 소설읽기보다 재미있을 때도 있어요. 이 책 언젠가는 읽어야 할 책에 넣어야겠어요.

겨울 2004-06-04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저는 이 책이 절판되었다고 생각했을까요. 검색해 보니 여전히 건재하네요. 깨끗하고 예쁜 책으로 다시 사고 싶어라..... 독자를 행복하게 만드는 책 중의 하납니다. 필히 보셨으면 좋겠네요.
 

처음 이 만화 봤을 땐, 어 그림이 이게 뭐야 혹은 또 요상한 스토리군 했다. 그러다가 여기저기서 이 만화에 대한 찬사들이 쏟아져나오면서 아는 게 약이라는 신념으로 읽기 시작. 지금은? 이성과 감성이 오랜만에 함께 흥분한 만화라고 지인들에게 열변을 토하는 중.

등가교환은 연금술에서 필연의 법칙이다. 무언가를 원하면 같은 값으로 대가를 치뤄야한다.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엄마가 죽었다. 어린 두 형제는 연금술사인 아버지의 재능을 이어받아 아기적부터 연금술을 놀이삼아 성장했고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창조하는 그 매혹적인 작업에 매료되었다. 그들이 원하는 단 하나의 소망은 죽은 엄마를 다시 만드는 것.

연금술에서 절대 해서는 안 될 인체의 연성을 시도한 에드와 알 형제는 결국 참혹한 대가를 치루는데, 알의 육신과 에드의 다리 하나를 잃는 것. 그리고 알의 혼을 연성하는 대가로 다시 팔 하나를 내어준 것. 거구의  강철 갑옷에 갇힌 알의 혼을 부여안고 에드는 피눈물을 흘리며 맹세한다. 널, 반드시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줄게.

이야기는 '현자의 돌'이라고 알려진 연금술의 최후의 비법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두 형제의 모험을 다루고 있는데,  시공간이 불분명한 시대는 내란으로 인해 혼란 속에 있고 국가에서 공인하는 연금술사의 자격증을 가진 '군부의 개'는 국가의 부름에 언제 어느 때라도 달려가 전투에 임해야 한다.  최연소의 나이로 국가 연금술사 자격증을 취득한 에드는 그 특권을 이용해서 자신이 실패한 인체 연성의 비밀에 한걸음씩 다가가고....

이 만화의 매력은 그 조악하고 거칠은 그림에도 불구하고 눈물샘을 자극한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들을 버리고 떠났다. 엄마는 두 형제를 위해 고생하다 병에 걸려 죽었다. 어린 두 형제는 연금술로 엄마를 살릴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위대한 스승을 찾아가 갖은 고난을 겪으며 연금술사의 수련에 정진한다. 그러나 그 소망은 산산히 부서지고 지울 수 없는 상처만을 남겼다. 이야기 안에는 상당히 유쾌하고 재밌는 부분들이 많지만 그럼에도 본질은 진지하고 어둡다. 그래서 읽히는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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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4-05-27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을것 같네요. 저도 한번 읽어볼 생각입니다.^^
 

글 / 위미경(만화칼럼니스트)

"난 서른이 되기 전에 인생의 숙제 둘 중에 하난 해결할 줄 알았어. 결혼하거나 일에 성공하거나 근데 이게 뭐냐고, 서른이 코앞인데 당장 이달 카드값은 어떻게 할 지 그 걱정뿐이야."

작년에 개봉했던 영화 '싱글즈'를 보며 이 땅의 20대 후반, 30대 초반 미혼여성들은 거의 자신의 일기장을 보는 것 같았으리라. 직장에서의 좌천, 오랜 연인과의 이별, 결혼적령기를 이미 벗어난 나이에서 생기는 새로운 만남에 대한 두려움과 관계의 지속에 대한 불안.... 나난의 옥탑방이나 새로운 연인의 설정은 여성의 환상을 자극하기 위해 만들어진 듯 조금 비현실적이긴 했지만 그 속에 담긴 고민은 스물여덟의 나에게 공감과 위로, 약간은 안이한 안심과 희망을 안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다가 생각났다. 만화 '금지된 사랑'에서 지이가 읊조린 대사가.

"서른이 넘으면 어떤 느낌이 들까. 쓸데없이 격정적이던 십대와 방향을 갈피 못잡는 이십대를 보내고 서른이 넘으면, 서른이 넘으면... 조금은 평화로울까?"

'싱글즈'에 앞서 1999년에 발표된 만화 '금지된 사랑'의 주인공 지이는 직장을 잃고, 5년간 사귄 애인에게서 이별 통지를 받는다. 작가 한혜연은 '그치는 것을 금한다'라고 해석하며 결코 멈출 수 없는 사랑을 제목에서 얘기하는데, 만화는 박동을 멈추는 하나의 사랑에서 출발한다. 사랑을 잃은 그녀의 마음의 흐름을 따라 조용히 흘러가는 만화는 작가의 현실적 감각이 살아있는 연출(그녀의 만화는 머리를 묶는 손가락 놀림의 묘사에서도 그 진가를 찾을 수 있다)을 따라 십대의 그녀와 현재의 그녀를 교차하고, 주변인들의 사랑 이야기를 에두르다가 강과 강이 만나듯 끊임없이 유입되는 새로운 사랑을 예고하며 끝을 맺는다.      그 사랑은 스물일곱의 지이에게는 부러운 대상이었던 삼십 대의 태경. 자신을 편안하게 받아주는 태경을 보며 서른의 평화를 궁금해 하는 지이는 나와 별 다르지 않았다.  

위의 질문을 십대 때부터 읊조리던 나는 왜 그리 조급한 애늙이였을까. 십대의 격정 따위가 실질적인 소용을 낳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이십대가 되어봤자 방황만 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나이기에 스무 살의 성인식은 전쟁 전의 공포와 집단 환각이 뒤엉킨 축제, 전야제였다. 어디선가 책임과 의무가 슬금슬금 걸어 들어와 덮칠 것 같은 그 날 밤, 문을 꼭 잠그고 난생처음 소주 한 병을 비우고 쓰러진 나는 서른을 기다리는 데 스물의 대부분을 바친 것 같다.

사랑을 처음 잃었을 때도, 그리고 불신감에 두 번째 사랑을 포기할 때도, 연애와도 같은 직장 생활을 아슬아슬 이어나갈 때도 서른이 넘으면 모든 것은 나름의 자리를 찾아갈 줄 알았다. 그러나 지이가 그랬듯이 나 역시 이제 알겠다. 자신의 힘겨운 상황을 고백하며 눈물짓는 태경을 안고 위로하는 그녀의 말처럼, 삼십대 역시 힘들게 사랑하고, 힘겹게 살아가긴 마찬가지라는 것을, 그렇게 살아가면서 아무에게도 상처주지 않으려 애쓰면서, 자신도 상처입지 않으려 애쓰면서 그러면서도 삭막하게 메말라가지 않으려 애쓰면서 산다는 것을 말이다. 삶은 그렇게 사랑과 이별, 상처와 회복을 반복하며 이어져가는 것이다.

'금지된 사랑'은 사랑을 멈추지 말라고 말한다. 아! 4년간 이 책을 가지고 있었지만 미련하게도 이제야 알았다. 왜 작가가 마지막에 양희은의 노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를 틀어줬는가. 다시 또 사랑을 할 수 있을까란 질문을 왜 던지는가. 사랑이 그쳤던 시점에서 시작하여, 다시 새로운 사랑을 할 수 있었던 지이, 그 사랑을 떠나보낸 지이와 진정 금지된 사랑을 하고 있던 친구 희성에게 이 음악은 쓸쓸함이 아니라 희망으로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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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커트된 머리라 조금만 길어도 성가지고 신경이 쓰여, 머리 자를 때가 됐느데, 하면서 전전긍긍한다. 미용실에 가서 잡지를 읽으며 느긋하게 기다릴 인내심도, 그렇다고 한가하게 수다를 떨 여력이 늘 딸리는지라, 이맘  때, 목덜미를 덮는 머리카락이 거슬리기 시작하면 괜히 조바심을 친다. 적당히 바쁜 때엔 바쁘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피루다 결국에 목적하던 바를 이루면 그만이지만 조금, 아주 조금 한가한 시기가 되면 다른 날보다 더 자주 거울을 들여다보고 머리 길이 살펴보고, 쇼윈도를 지나치다가도 내 머리가 어떤가 들여다보고, 만나는 사람마다 '머리 자를 때 됐지?'하고 물어보고, 눈에 스치는 미용실이란 미용실은 한 번씩 다 들여다 보는 웃기는 기행이 이어진다.

'뵈뵈'라는 아주 기이한 이름의 미용실이 오가는 길 옆 이층에 있는데, 퇴근 길에 쳐들어가듯 들렀다. 늘 다니던 미용실이 확장 이전을 하는 바람에 새 미용실을 어디로 결정할지 몰라 방황하던 차였다. 짧게 쳐 주세요. 다짜고짜 하는 내 말에 웃는 예쁜 언니, 지금도 충분히 짧다고 난색을 표했다. 전에는 더 짧았다고 전체적으로 짧게라고 주문하자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

그런데, 갑자기 '머리가 익었네요'라고 한다. 정수리가 빨갛게 익었다고 온종일 햇볕에 노출시켰냐고. 어, 진짜로 익었어요? 나는 전혀 몰랐다. 어쩐지 정수리 부근이 따끔거리고 정신이 멍한 상태가 계속된다 싶었는데 원인이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일요일에 시골에 가서 새벽부터 오후 늦게까지 퇴약볕에서 나가 밭일을 한 탓이다. 가벼운 선캡을 썼으니 머리 한 가운데가 고스란히 노출되었고, 거기까지 자외선차단제를 바른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못했다.

요즘 시골은 논일, 밭일이 지천으로 널려있다. 틈을 내어 가도 주말에 비라도 내리면 헛탕을 치기 일쑤고, 다행히 이번 주에는 날이 좋아 몸이 부서져라 봉사를 했다. 몸살난다고 적당히 하라는 부모님의 만류에도 죽을 때 죽더라도 일하다 죽겠다고 하면서 했다. 내가 어쩌다 가서하는 그 일이 엄마에게는 일상이라는 것을 아는 이상, 적당히라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음이다. 그 댓가를 치루듯, 지금 내 몸은 삐그덕 삐그덕 요상한 신호음을 보내면서 한계에 다다랐음을 알리고 있다. 깔아져 잠을 자고, 스트레칭으로 굳은 근육을 풀어주기를 이틀째인 지금은 그래도 살만하다. 월요일 아침에는 죽다 살아났다.

그런데 볕에 탄 두피는 무엇으로 치료를 해야할 지 감이 안 잡힌다. 얼음찜질이라도 해야하나. 이로써 얻은 교훈 하나, 일하러 갈 때엔 꼭 벙거지 모자를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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