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나누면 농가당 487만원 고작’ 1조 지원대책 내놓고 생색

농민들 “버틸힘 없는데 어차피 빚만 늘리는 꼴”
“조사료 생산 확대도 한가한 소리” 곱잖은 시선
돼지생산안정제·양돈 폐업보상제 도입 등 촉구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지난달 4일 연리 3%, 상환기간 1년 조건으로 축산농가에게 사료구매자금 1조원을 한시적으로 특별 지원한다고 밝혔고 현재 농림부는 3월 중 지원을 목표로 관계 기관과 지원방식 등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하지만 축산농가들은 과연 실질적인 대책이 될 지 반신반의하고 있다.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의 자료에 따르면 현재 소 사육농가는 19만2000호, 돼지 사육농가 9800호, 닭 사육농가 3420호 등 주요 축종의 사육농가숫자는 20만5220호에 달한다. 규모와 여건에 따라 농장 사정이 다르지만 단순히 지원금을 전체 농가숫자로 나눠 계산하면 농가당 평균지원금은 487만원 정도에 불과하다. 2006년과 비교해 농가별로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까지 사료가격이 오른 것을 감안하면 상당수 농가에게는 한 달 사료비도 안된다.

또 정부가 대부분의 축산농가들이 금융권 등에 담보가 잡혀있는 상황에서 담보 설정을 통해 지원하려는 점, 한우의 경우 생산부터 출하까지 최소 2년이 소요된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는 부분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한우농가인 박시근 씨는 “단돈 100원이라도 보조해야지 대출로 처리하면 농가 빚만 증가시킬 것”이라며 “생산까지 2년이 걸리는 동안 농가들은 버틸 힘이 없어 농장이 무너지면 다시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김영원 전국한우협회 차장도 “1년이라는 상환기간도 출하까지 2년 이상이 소요되는 한우농가에게는 부담스러운 부분”이라며 “2년거치 3년상환 등으로 바꾸고 일부 농가가 아닌 모든 농가가 혜택받을 수 있는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12월 ‘조사료 생산확대로 뛰는 사료가격을 돌파하자’는 내용의 정부 대책안도 탁상행정의 표본이다. 2015년까지 청보리 10만ha를 포함해 조사료 재배면적을 24만ha를 조성하겠다는 이 대책은 조사료 수급안정 등에 기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돼지와 양계의 경우 배합사료 의존도가 100%에 달하는 등 각 축종별로 50~60% 이상 배합사료를 급여하는 상황이다. 또 전라지역의 경우 청보리가 수입 조사료보다 싸지만 경기·강원지역 축산농가들은 비싼 운송비로 인해 청보리 구매비용이 수입 건초보다 오히려 비싸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사료업계의 관계자는 “정부의 조사료 대책 발표 이후 일부 지자체에서도 조사료 생산확대가 사료가격을 잡을 수 있는 궁극적인 대책인 것처럼 제시하고 있어 안타깝다”면서 “운송비 지원을 확대하는 등의 방안이 없다면 이 대책 또한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현대축산뉴스   www.hyunchuk.co.kr

 

우리집도 아주 옛날 방식에 가깝게 소를 기른다. 아주 순하고 예쁜 덩치만 큰 녀석들은 가족과 닮았다. 물론 언젠가는 거래의 대상이 되지만 키우는 동안 만큼은 온갖 정성을 다해 애정을 쏟아붓는다. 논농사, 밭농사 말고 시골에서 소를 기르는 건 돈벌이도 돈벌이지만 키우다가 송아지를 낳고 그 녀석이 커서 어른 소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얻는 기쁨과 만족감이 더 커서다. 소라는 동물은 농부에게 행복의 원천인 것이다. 그래서 소값이 아무리 떨어지고 사료값이 올라 속이 썩어 문드러져도 녀석들을 처분한다는 건  꿈도 꿀 수 없다. 

이번에 시골에 다니러 갔다가 위의 기사에 실린 돈을 대출받기로 했다는 말씀에 반신반의 했다. 빛 좋은 개 살구 같아서. 딱 1년 만기가 되면 이자가 무려 12%로 뛴단다. 날도둑놈들이다. 어~ 하다가는 이자 폭탄을 맞아 빚더미 위에 올라 앉을 수 있다. 아무리 싼 이자라도 빚은 빚이다. 남의 돈 그것도 나랏돈 우습게 여기다가 큰 코 다친 사람 여럿 봤다. 정부에서 저리라고 홍보하며 빌려주는 돈 공짜인줄 알고 얼싸 좋다 받아 먹고 논이며 밭이며 홀랑 날린 농민들이 어디 한둘인가. 돈이, 빚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확실히 교육 시킨 후에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안 빌리는 게 좋다고 반드시 교육을 시켜주었으면 싶다. 대책없이 빌려주고 갚을 능력 생각 안하고 덜컥 여기저기 푼돈으로 쓰고서는 거리로 나 앉는 사람 안 생기도록. 이 일로 아버지와 말다툼을 벌였다. 2년 3년도 아니고 1년이라는 저 조건과 담보대출이라는 장삿속에 진절머리가 나서 목소리가 커졌다. 능수능란한 수완가가 아닌 평범하게 사는 시골 분들에게 저런 조건의 돈은 없느니만 못하다. 소라는 게 어디 일년 키워서 이문이 딱 떨어지는 것이던가? 무섭게 오르는 사료값이나 보조를 해주던가 하지 선별 방식으로 담보대출이라니. 에라! 이 빌어먹을 정부 놈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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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중고샵이 문을 열었을 때다. 한 번 읽은 뒤로 방치된 책들을 고른 적이 있다. 하지만 결국 팔지 못했다. 그 책이 없는 책장의 빈자리가 쓸쓸해서. 이후로 다시 읽을 일이 없을지라도, 재미가 엄청나게 없어서 실망했던 책일지라도, 어느 귀퉁이에 보이지 않는 손때가 묻었을 나의(?) 책들에 대한 잊고 있던 애정이 솟구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스스로가 과잉된 감상주의자라는 건 알고 있다. 알지만 그것도 나를 이루는 일부다. 어느날 정신이 홱 돌아서 맘에 차지 않던 책들을 불살라버릴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종종 누렇게 낡은 책들을 시골로 가져가 불쏘시개로 쓰는 건 오히려 통쾌하다. 낡고 바랜 책을 찢어 가면서 불꽃이 너울거리는 아궁이 속으로 던지는 행위는 무슨 의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즐겁고 설레면서도 엄숙한?  이상한 녀석인가?

책을 읽는 취미에 거창하게 목적이 뭐냐고 묻거나, 허영심이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에게 그럴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 소설이나 시를 읽는데 무슨 목적이니 허영이니가 필요할까. 시간을 보내는 방법으로 즐기기 위해서란 단순한 이유로는 부족한가. 물론 일정부분 정상적으로 고등학교를 다니지도 못하고 대학은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자격지심을 책을 통해 해소한 일면은 있다. 있지만 그게 어때서. 좋아하는 옷이나 신발을 사는 행위나 좋아하는 책을 사는 행위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아름다워지기 위해서 화장을 하고 명품 옷에 연연해 하는 거나 모자란, 없는 지식에 목말라 이해가 딸리는 책이라도 읽으려 노력하는 거나 피장파장이다. 무겁고 거창한 책을 읽고 성인이 되거나 지식인이 된다고 믿는 사람이 있을까? 코메디다. 책상이 책상이듯 책은 그냥 책이다.  노예나 종에게 읽고 쓰기가 금지됐던 암흑시대라면 또 모를까. 비싼 옷이 신분을 결정짓지 않듯이 책을 읽거나 사는 것이 가치나 계급의 잣대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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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젠 아주 오랫만에 새벽 다섯시에 잠이 들어 열시에 일어났다. 밤이 깊을수록 명료한 정신과 눈에 도저히 불을 끄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불면과는 좀 다른 자발적인 깨어있음이다. 간만의 밤샘은 정겹기도 하고, 깊은 밤의 정적은 아득한 그리움을 낳았으며, 서서히 밝아오는 창은 하도 반가워 하마터면 눈물까지 흘릴 뻔했다. 다행히 나의 흘러 넘쳤던 감성은 적당히 메말라 버려 그런 불상사는 면했다. 까마득한 옛날 밤을 낮인듯 낮을 밤인듯 살았던 시절로 돌아가서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솔직히 더이상은 나이 때문에라도 밤새는 일이 불가능할 줄 알았으니까.

아, 정말, 나이라는 거. 순간이라도 잊을 수가 없다. 나이의 이런저런 굴레와 제약에 놀랄 정도다. 원래 매사가 지나치게 진지하고 심각한 타입이라 더욱 그렇다. 무엇보다 자발적으로 병원을 드나드는 것부터 시작해서 눈가에 깃드는 주름, 그늘을 드리우는 피부까지. 물론 삼십대에 미련 따위는 눈꼽만큼도 없다. 잘가라고 손도 흔들수 있다. 애초에 미련이나 집착 같은 거 나와는 상관없는 것들이므로.  

손바닥보다는 큰 화단에 이름을 아는 꽃에서 뭔지도 모르는 꽃들까지 지극정성으로 열심히 심고, 물주고, 물을 주고, 잡초를 뽑고, 보살피는 것도 변화라면 변화다. 분초를 다투며 사는 사람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한가로운 일상에 깊이 깊이 잠수하는 나날들 속,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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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어찌나 살랑살랑 불어주시는지 아주 황홀해 숨이 널어갈 지경이다.

아침과 점심의 그 언저리 쯤, 햇살은 좋고, 바람은 불어주고, 녹음 짙은 나뭇잎은 묘한 춤사위를 보여주는 날이다. 

보자기처럼 하늘을 둘러싼 감나무의 건강한 연초록 이파리가 이렇게 눈이 부시게 멋졌나. 

바람이 지나가다 한소끔 쉬어가고, 햇살이 내려오다 가볍게 비켜가는 손이 닿지 않는 저 높은 곳의 나뭇잎이란 실로 의젓하다. 

감나무가 몸 전체를 느리게 흔드는 걸 따라서 무화과나무, 보리수나무, 목련나무, 으름나무 이파리도 흔들기 시작한다. 

짧거나 길게, 빠르거나 느리게, 때로는 경박하게, 혹은 귀엽게. 이것은 5월의, 5월만의 경이다.

그것을 향해 시선이 박히면서 시작된, 하늘보다는 가까운 곳을 바라보지 않으면 찾을 수 없는 보물이다.

그럼에도, 5월은 그 자연의 무한한 혜택과는 무관하게 약간의 불편함과 죄책감에 시달린다. 

챙김을 받는 것도 챙기는 것도 도무지 서툰 나와 같은 사람에게 치뤄야할 겹겹의 의무는 고역이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이야 반가우나, 그 순간 건네는 인삿말과 웃음이 완전 내숭이나 거짓도 아니건만, 약간의, 아주 약간의 과장, 호들갑, 인내심이 뭐 대수랴만, 오롯이 홀로 사는 사람에겐 쉽지 않은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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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한낮, 말라비틀어진 낙엽들을 긁어모아 태웠다. 양지쪽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시는 할머니를 위한 작은 이벤트랄까. 부지깽이를 들고 빨간 불꽃이 너울거리는 낙엽더미를 들쑤시는 게 제법 재밌다. 파르라니 귓불을 얼리던 추위는 단숨에 사라졌다. 대신 낙엽 태우는 열기가 확 얼굴로 달려든다. 이렇게 뜨거운 게 불이란 걸 잊고 살았다. 기껏해야 가스레인지의 불꽃이나 라이터 불꽃이 내가 아는 불꽃의 전부였던가 보다. 




그리고 의식처럼, 십오 년 전 쯤의 일기장 하나를 꺼내와 한 장씩 뜯어 불 속에 던져 넣는다. 낯선 감정의 파편, 흐린 기억의 아득한 한 때를 훔쳐 읽으며. 저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나란 이름으로, 저 많은 말들을 쏟아 붓는 저 이가 과연 나인가. 아니면 치명적인 기억의 오류? 일기장이 소멸하는 순간은 비감하다. 기억뿐만 아니라 기록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두고두고 보기가 싫은 것이 또 그것들이다. 무슨 의식처럼, 해마다 한두 개씩 재가 되는 게 숙명인 듯, 오늘도 한 권의 일기장이 사라졌다.




감귤 혹은 사과가 없는 겨울은 겨울이 아니다. 그 둘이 똑 떨어진 어제 하루, 나는 금단현상에 시달렸다. 날이 밝자마자 슈퍼로 달려가 귤 한 박스를 실어올 정도로. 냉장고 야채 박스 안에 귤을 가득 채우고서야 마음이 놓인다. 과일도 중독이 되나. 단맛이 강한 과일은 덜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라, 덜. 오렌지의 단맛, 배의 단맛, 참외의 단맛, 혹은 달콤한 포도 같은 경우. 날마다 때마다 먹기에는 민숭민숭하고 시금털털한 귤이나 사과가 제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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