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마이클 커닝햄 지음, 정명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3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영화를 즐기기 위해 소설을 선택했고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는 세 여인들이 6월의 눈부시게 화창한 하루 속으로 걸어가는 과정이 독특한 방식으로 교차하는 영화를 떠올리면서 읽는 묘미가 즐거웠다.

버지니아 울프는 커다란 돌을 주머니에 넣고 강물 속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막 댈러웨이부인이라는 소설을 끝냈다. 뉴욕, 클라리사 보건은 남자친구 리차드의 문학상 수상을 축하는 파티를 준비한다. 그녀는 꽃을 샀다. 그리고 어린 아들 리치와 함께 남편의 생일 케이크를 만드는 브라운부인이 있다. 어딘가 산만하고 피곤한 얼굴로 여기 아닌 어딘가를 응시하는 눈으로. 어린 리치에게 엄마의 불안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무엇이 울프부인을 죽음으로 몰아갔을까. 무엇이 죽음만이 최선이라는 결정을 내리게 했을까. 그녀에게 남편 레너드 울프는 어떤 존재였을까. 그러나 이 소설은 그 의문의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브라운부인의 일탈과 회귀, 댈러웨이부인으로 불리는 클라리사와 리차드의 만남과 사랑, 이별로 이어지는 과정은 나른한 듯 치열하다. 그들은 소설속의 인물이고 나라는 독자에게 관찰당한다. 또한 버지니아 울프의 펜대는 그들의 삶은 결정짓는다.

버지니아 울프는 죽었지만 실제했던 인물이고 브라운부인과 클라리사는 살아있지만 실제하지않는다. 우리 생의 이면에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고 소설이 말한다. 언제라도 뒤집어질 수 있는 게 우리의 생이라고 한다. 삶을 선택하듯 죽음을 선택할 수 있음을 안다.

6월, 아름다운 날. 각각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여자들이 있다. 그리고 여기 또 하나의 생을 선택한 내가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상 끝의 사랑
마이클 커닝햄 지음, 김승욱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2월
평점 :
절판


버지니아 울프를 주연으로 한 영화 '디아워스'의 원작자라는 이유만으로 선택한 소설이다. 영화와 함께 원작자의 프로필이 따라다닐 정도로 그의 소설은 근사했다는 평이다. 그런데 어째서 '세상 끝의 사랑'이었을까. 세상의 가운데, 중심이 아닌 끝이라는 어감은 막다른 골목같기도 하고 지독히 슬프거나 아름다울 거라고 생각했다.

죽음을 꿈꾸지도 않지만 행복해 죽을만큼 생이 즐겁지 않은 바비, 조나단, 클레어, 에릭, 앨리슨의 시점이 번갈아 바뀌며 지극히 평범하고 담담한 일상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깊은 몰입을 방해받는다. 감각적이고 빠른 이야기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적응이 어렵다. 그것이 작가의 의도겠지만, 아무것도 특별할 것 없는 그들의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진지한지 보여주는 것은 많다. 바비와 조나단이 열망하는 가족이란 제도다. 동성애자와 사회부적응자, 그리고 에이즈 환자라는 공동체는 새로운 대안이다. 클레어의 일탈은 현실도피가 아닌 세상 속으로의 한걸음이다. 순전히 아이를 위한 선택이다.

다르게 생긴 외모 혹은 사랑의 다른 방식 때문에 상처를 입은 사람을 치유하는 약으로써 읽는 방법도 나쁘지 않다. 작가가 제시하는 대안과 해법은 통쾌하진 않아도 위로가 된다. 모자람과 부족함, 다름을 바라보는 여유로운 시선을 통해 그 방식은 조금 어쩌면 많이 달라도 삶 자체의 진지성과 소중함은 같다는 것. 생각이 필요하다. 지금보다 더 많은 생각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침묵의 봄
레이첼 카슨 지음, 김은령 옮김 / 에코리브르 / 200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근래 읽은 책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 충격을 두려움과 공포라 부르겠다. 산다는 거, 더블어 살아가는 삶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세상에는 이 책을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 두 부류가 존재할 것이다. 그것은 침묵의 봄이 불러올 재난을 인식하는 사람들의 염원과 소망, 의지의 집합체가 침묵을 깨울 가능성과 함께 영원한 무지의 무덤에서 잠드는 것의 선택을 의미한다. 미래의 어느 날을 위해 나는 어디에 있을 것인가.

난 이제 시장에서 벌레먹고 초라한 채소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겠다. 작고 못생긴 과일을 달게 먹겠다. 몇 마리의 모기나 파리를 향해 스프레이 모기약을 분사하지 않겠다. 개미들의 행렬을 못본척하고 나무를 기어오르는 벌레와 새들을 기쁜 마음으로 응시하겠다. 화단 곳곳을 기웃거리는 잡초에게 경의를 표하겠다. 빠른 기차의 미덕만큼 낡고 느린 기차가 보여주는 풍경과 소리의 가치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많이를 위해 희생한 우리가 잃어버린 무언가가 있다. 레이첼 카슨의 이 책에 그 해답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면 뒤의 소년 SAM
톰 홀만 주니어 지음, 이진 옮김 / 한숲출판사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과거에도 앞으로도 책 한 권을 읽기 위해 이토록 많은 눈물을 흘리지는 않을 것이다. 아픈 샘을 응원하며 마지막 책장을 넘기기까지 긴긴 여행의 종착역에 도달한 듯 기운이 빠졌다. 그리고 오래도록 울었다.

샘은 멋진 부모님을 가졌다. 그의 생명을 만드셨고 지키기 위해 고난을 선택하셨다. 한치의 망설임도 의혹도 없는 결정이었다. 그들의 용기와 결단력, 당당하고 의젓하게 똑바로 걸어가는 샘을 멀리서 바라보는 시선에는 부끄러움이나 수치심, 망설임이 절대 없다. 누구도 샘이 될 수는 없다. 가정도 불가능하다. 샘은 혼자지만 동시에 혼자가 아니다.

샘은 기적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동시에 고통의 이름이다. 그것은 신의 뜻일까. 샘도 그렇게 생각할까. 그것은 너무 어려운 문제일 것 같다. 다른 이의 희망이나 구원이 되기를 바란 것은 아니리라. 샘은 단지 조금 더 평범했으면 바랬다. 언제나 그랬다. 그러나 지금 그의 이름과 얼굴은 성자와 동일시된다. 아름답지 않은 반쪽 얼굴을 보며 사람들은 순교자를 떠올리지 않을까.

망상은 그만. 샘은 착하고 순진한 남자아이다. 예쁜여자애를 보면 얼굴이 붉어지는 보통의 소년이다. 그는 앞으로 자신의 마비된 몸과 일그러진 얼굴과의 힘든 전쟁을 계속할 것이다. 그것은 언제 어떻게 끝이 날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왜 사는가라는 원초적 의문이 파고든다. 무엇이 우리를 살게 하는가. 다른 존재를 위해 사는 게 가능할까. 샘이 된다면 과연 살아낼까. 한가지는 분명하다. 샘이 거기 있음으로해서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을 수 있고 할 수 없다고 포기했던 일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은 샘의 존재이유일지 모른다..... 다른 이의 필사의 생존을 바라보는 타자의 비열한 시각이지만 빈약한 의지를 지탱하는 지팡이가 절실히 필요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일숙의 만화를 좋아하지만 작가에 대해 아는 건 거의 없다. 요즘 우리나라 출판 만화계의 불황이 심각하다는 말을 듣는데, 작가들의 스스로에 대한 적극적인 홍보가 부족한 것도 불황의 한 원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매체든 뛰어들어 자기를 알리고 작품을 알리려는 노력, 언젠가 독자들이 알아서 찾아와 주겠지 라는 안일한 사고는 더이상 먹히지 않는다. 심각하긴 심각하다. 재미있는 만화를 꼽으라면 일본만화가 먼저 떠오른다. 재미있는 일본만화를 읽지 않는다고 우리만화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까? 개성있는 신인만화가의 발굴에도 출판사가 발벗고 나서야한다. 공모전을 자주 열어야한다. 만화가를 지망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그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결국은 투자인가? 정부 혹은 법인의 투자. 만화책 자체를 우습게 아는 사람들에게 그런 소리가 먹힐리가 없지.

신일숙의 만화는 가벼운 소일거리의 해피엔딩 만화가 절대 아니다. 길건 짧건 그녀의 만화는 적당한 무게감으로 읽는 이의 마음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일상을 다루면서도 그것이 마치 비현실적인 듯 낯설고, 어디선가 보거나 들은 얘기들이 꿈처럼 펼쳐진다. 부정하지도 않지만 긍정도 아닌 무엇이 있다.

루딘 나이츠, 현재를 살지만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남자의 휴식처. 어느 날 비처럼 천사가 내리고 남자의 영혼을 사로잡는다. 그녀와의 필연적인 결혼, 그리고 짧은 안식과도 같던 행복한 시간이 흐른 후 예고된 이별이 조용히 찾아든다는 몽환적인 분위기의 이야기는 극히 짧지만 절대 단숨에 읽어치우고 망각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사람은 원래 오로지 행복을 원하면서도 비극에 매혹되는 경향이 있다. 영화도 책도 슬픈 이야기라면 사족을 못쓴다. 입으로는 싫다 싫다 되뇌면서도 눈과 귀와 가슴은 그곳으로 집중된다. 그리고 지워지지 않는 각인이 찍힌다. 신일숙이란 작가를 좋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심리도 아마 그러할 것이다. 지금 작가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