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 시끄럽게 울어대는 전화벨은 단연코 할머니다. 떠지지도 않는 눈을 비비며 전화를 받으니 힘없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어제 통화로 감기기운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 때문에 컨디션이 영 아니란다. 아침은, 약은 드셨는지 부러 큰소리로 물어도 여전히 나 힘들다고 하는 듯한  축 쳐진 목소리, 이럴땐 마음이 쓰리다. 토요일부터 태풍이 온다고 겁을 주어서 갈까 말까 망설이다 다음주에나 가겠노라 말씀드렸는데, 일요일 늘어지게 잔 잠조차도 죄스러운 생각이 들게끔 만드는 할머니의 전화에 내 정신은 명료해졌다.

할머니의 연세를 생각하면 그리고 그 연배의 누군가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면 불현듯 떠오르는 공포.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는 것, 거기다 지병없이 죽음을 맞는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겠는데, 그것이 내 가족 특히 할머니의 죽음을 상상하면 무섭다. 아마도 대부분의 시간을 할머니와 보냈고 부모님이 다하지 못한 자리를 채워 주신 정신적 지주였던 이유겠지만, 한 해, 두 해 흐르는 세월이 어린 조카들을 살찌우는 대신 할머니에게서는 기력을 앗아가고 있음은 역시 무서운 깨달음이다. 부모가 자식을 앞세워 보내는 고통의 깊이를 가끔 듣는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의 어떤 죽음이 자식을 보내는 고통보다 덜 하다고는 생각지 못하겠다. 가끔 농담처럼 할머니는 아흔 혹은 백 세까지도 사실 거라고 동생과 주고받다 보면 정말 그럴것 같은 확신이 마구 든다. 그리고 오늘처럼 걸려오는 전화나 어느날 찾아뵙더니 나빠진 안색을 보면 그런 확신은 다시 바닥으로 추락한다.

어쩌면 비 탓이겠지. 습한 날씨가 노인에게는 치명적이고 밖으로 들로 나들이를 못하시니 무료하고 적적하신 게지. 그렇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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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4-07-06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들이 모두 사회생활을 시작하고부터는 전부 모이게 장소가 친구의 상가집이더군요. 왠지 우울하지만 어쩔수 없는 현상이네요. 그런곳에 모이면 다들 나이들어가시는 부모님과 조부모님을 떠올리지 않을수가 없더군요.
아무튼 할머님 오래도록 무병장수하시길 바랍니다.

겨울 2004-07-06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삶의 대부분을 부모님이 아닌 할머니와 지낸 특이한 이력이 이런 감상에 빠져들게 하네요. 불가피한 가출을 시도한 몇 년을 제외하곤 늘 함께였는데, 고향으로 가신 이후부터 마음이 많이 불편합니다. 이번 주에는 꼭 찾아 뵈야죠.
 

 

아가사 크리스트의 전 작품을 설렵할 만큼 한 때는 추리소설의 절대적인 애독자였다.

대개는 장편을 선호하지만 <세계 미스테리 걸작선>같은 빼어난 구성과 문장의 밀도있는 단편을 읽고, 짧은 이야기속에 숨겨진 보물을 찾는 색다른 묘미를 알게 되었다. 평소 서사적이고 드라마틱한 장편만이 문학의 진수라고 자신하던 나 자신이, 추리소설에 맛을 들이게 된 동기가 추리물이 추구하는 범죄자와 형사 혹은 탐정의 두뇌싸움에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했다.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절묘한 인물배치와 구성력이었다. 이를테면 외도다.

<미소지은 남자>라는 작품 소개를 읽다가 눈에 뜨인 것은 잘 쓰여진 문장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스웨덴이라는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에 비해 상대적을 덜 알려진 나라의, 해닝 만켈이라는 작가의 프로필이었다. 아동문학가로서 범죄소설이라는 매개를 통해, 스웨덴의 현실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면서 문제점을 제기하고 비판하는 작가에게 왠지 호기심이 동했다. 모름지기 작가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내 나름의 틀 속에 적합했다.

아마도 책을 몹시도 즐겨있는 사람이라면, 책에서 발견하는 가장 큰 기쁨은 문체의 흡인력일 것이다. 의미없는 단어 하나도 빼먹을 수 없도록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글의 흐름과 연결은 인물이나 줄거리가 주는 매혹 이전의 산뜻한 첫인상으로 기억되었다. '안개. 안개가 마치 한 마리의 맹수처럼 소리없이 접근해 왔다. 그는 평생을 쇼넨에 살았지만, 앞으로도 결코 안개에는 익숙해지지 못하리라. 쇼넨의 안개는 언제나 사람들을 보이지 않는 형체로 가라앉혔다.'라는 첫 장을 열고 있는 것은 미지와의 조우였다.

결코 완벽하지 않은, 결핍의 주인공 발란더의 심리만으로도 족히 한 편의 소설감이 될 거라는 걸 작가도 알고 있을까. 그의 사고와 상념을 따라 가는 과정은 매끄러운 문장을 미끄럼처럼 타고 내려가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동료들과의 대화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무언가가 좋았다. 그것이 스웨덴 경찰의 특성인지 아님 번역자의 의도인지는 모르겠다. 범죄에 직면하고 그것을 다루는 그들의 방식과 접근이 아마도 시끄럽고 거칠고 고압적인 헐리웃 영화와 우리 영화 속의 경찰과 달라서였는지도...

이 소설은 스웨덴이라는 나라의 부를 경계하라고 한다. 정당하지 않은 부의 분배에도 경고를 한다. 사고 팔아서는 안될 인간의 장기까지도 매매시키는 극단적인 자본주의 논리를 비판하면서 자신감에 찬 우월한 인간의 병든 정신을 고발하고 미소안에 갇힌 짐승의 정체를 밝히고 있다. 도덕과 부도덕의 의미가 물질적인 풍요속에서 사라져가는 사회, 명령할 뿐 스스로의 손에 피를 묻히지는 않는다는 논리로 스스로의 죄를 사하는 권력자의 오만과 자부심은 픽션이 아니다.

간결하고 쉬운 글로 쓰여진 <미소지은 남자>는 분명 다시 한 번 읽고 싶은 목록에 들어간다. 잘 쓰여진 글을 읽어가는 동안의 행복감은 좋은 글 즉 내용이 훌륭한 글을 읽는 재미와 비교할 수 있다. 또한 읽는 것 만큼 쓴다는 것의 즐거움도 멋질 거라는 걸 부추기는 데, 읽기를 즐기는 사람들의 꿈은 바로 쓰는 것이므로 이보다 더한 즐거움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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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이라 불리는 세계와 소년만화의 조우랄까. 판타지 혹은 학원물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무겁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게 한없이 다정다감한 만화를 그리고 쓰시는 작가님께 선망을 넘어 질투를 느끼곤 한다. 색으로 비유하면 푸른색 내지 초록색일까. 아니면 투명한 흰색? 부드럽고 매끄러운 그림체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그림에 녹아드는 글을 읽노라면 마냥 마음이 느긋해진다.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만화라는 매체는 다분히 아직까지도 평가절하되고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산문과 시를 풀어놓은 그림의 위대성을 높이 사지는 못할망정 '순정만화 따위'등의 무지몽매한 비하를 서슴없이 던지는 소수, 혹은 다수에게 의식의 각성을 촉구하고싶다.

주인공인 긍하의 주변 인물들, 한강, 소현민, 최정언 등을 보면 곁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드러내지 않는 문제를 품고 있음을 암시하는데 이상하게 유독 긍하만은 보이는 그대로이다. 원만하고 완벽한 가족관계와 무난한 성격, 성적도 상위이고 외모도 귀엽다. 어쩌면 가장 평범한 듯 싶지만 가장 이상적인 모델이다. 미남 미녀로 선망의 대상이 된 강이나 현민 정언은 긍하와는 다른 부류다.

먼저 강은 어머니가 부재하고 현민은 대단한 집의 손자임을 언급하지만 부모에 대한 언급이 역시 없으며 강과 정언 사이에서 표류하면서 의도적으로 과장된 행동을 한다. 특히, 정언의 존재는 무게감을 느끼게 하며 고립되어 있다는 인상을 짙게 풍긴다. 차갑고 도도하게 비치는 외향의 틀을 스스로 깰 의지도 없고 강을 향하는 감정마져도 성숙된 분석과 의도로 잠재운다. 매력적이지만 외롭고 저 홀로 떨어진 별같다.

아직은 이 만화가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가 없다. 긍하가 자신의 감정을 고백할지 혹은 강이 그것을 알아챌지는 미지수다. 상투적이고 틀에 박힌 전개가 아니라는 것은 짐작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작가의 것이므로 궁금중을 참고 기다릴 뿐이다. 정말 괜찮을 작가를 좋아하는 아주 괜찮은 독자이고 싶은 마음이 전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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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님의 이전 소설 <장길산>을 읽은 기억이 생생합니다. 소설만큼 현실에서의 삶도 치열했다고 기억합니다. 때로는 너무 가슴이 아파서 당신의 책을 펴기가 겁이 난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책의 제목을 접하는 순간 마음이 놓였습니다. 분노나 증오의 코드가 아닌 화해와 용서, 인내를 연상시키는 '오래된 정원'이라는 제목때문입니다. 진심으로 반갑고 기쁩니다.

오래된 정원에는 잡초가 무성하다. 질긴 생명력의 뿌리를 가진, 그 풀은 어느 곳에나 존재하면서도 존재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지 못한다. 이름이 없음이다. 그러나 그 잡초가 피워내는 꽃은 얼마나 작고 어여쁜가. 살아남은 이에 대한 열렬한 찬사에 이마가 시릴 기도의 결정체처럼.

오래된 정원에는 추억으로 다져진 마당의 흙과 돌이 뒹군다. 먼지와 거미줄과 이슬의 조화로운 휴식도 깃든다. 말못할 서러움과 고독과 비밀을 빠트린 우물은 텅 빈 어둠을 간직하고 입을 벌린다. 그러나 감나무 잎은 무성히 푸르고 석류꽃은 소담하며 휘드러진 보리똥 나무 열매도 그 선연한 빛깔이 생기롭다.

오래된 정원에는 아무도 다녀가지 않는다. 옛주인을 기다리던 가축도 떠나고 낡은 편지함은 녹이 슬어 허물어졌다. 바랜 기억과 아문 상처를 기억하는 친구도 없고 연인은 먼 나라로 떠났다. 다만 끊임없이 죽으면서도 다시 살아나는 풀만이 정원을 가득 채운다. 죽음은 다시 살아나기 위한 준비라고 일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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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동이 행성, 우라스와 아나레스.
과거, 우라스의 아나키스트들이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여 이주 후 개척한 행성이 아나레스이며 이 소설은 아나레스에서 태어나 성장한 물리학자 쉐벡의 이야기다.

소유의 개념과 개인 이기주의, 성의 차별이 없는 꿈의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일들을 하는지에 대한 호기심이 이 책을 선택하게 된 동기였다. 과연 이상이 실현된 후, 어떤 변화가 생길 것이며 그것을 발전 혹은 진보라 부를수 있을지 궁금했다.

아나레스는 근본적으로 척박하고 황폐한 환경이었고 기근과 가뭄으로 인해 식량배급이 원활하지 않지만 공정한 분배로 인해 그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 곳이다. 단 지나친 모자람으로 인한 작은 균열이 굳건한 신념에 균열을 일으키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보이지 않는 권력이 창의적 개인성을 소멸시키고 억압하는 가운데 불신과 의혹의 싹이 스며들기 전까지 그들의 삶은 평온했다.

천재물리학자 쉐벡으로 하여금 아나레스 밖 우라스로의 망명을 필요케 한 요인은 자급자족의 안일에 안주하고 진보와 발전을 두려워하는 집단이기주의다. 고인 물이 언젠가는 썩어 냄새를 피운다는 것을 증명하듯 다른 별의 사람들과의 소통과 새로운 세계관과 가치를 갈망하는 창조적인간에게 아나레스의 폐쇄성은 감옥일 따름이다.

물론 우라스도 대안이 아니라는 것도 곧 알게된다.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아름다운 나라지만 권력과 부의 분배가 평등하지 않고 성차별 등 어둠과 빛같은 양면성을 가진 우라스 사회는 쉐벡에게 지독한 공허와 절망을 안겨준다. 그는 평등한 인류를 위해 그의 지식을 사용하려 하지만 몇몇 권력자의 손아귀가 뻗쳐올 따름이다. 쉐벡의 선택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꿈꾸는 것은 불행이자 행복이다. SF문학은 여기 아닌 다른 곳을 꿈꾸는 상상의 물적 증명이자 기회이다. 어슐러 르귄의 상상력이 뿜어내는 이 거대한 오라는 독서하는 이로 하여금 숨을 멈추게 한다. 상상하는 자의 위대함과 즐거움이 그야말로 축복의 비처럼 쏟아진다.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이 각각의 고유한 특색을 지닌 생명들의 안식처라고 할 때, 여기 현실에 사는 자의 고독과 암울은 훨씬 가벼운 데미지를 입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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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2004-07-03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일 주소를 바꾸면서 잃어버렸던 리뷰. 이렇게 퍼오는 방법이 있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