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바케 - 에도시대 약재상연속살인사건 샤바케 1
하타케나카 메구미 지음 / 손안의책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기대하고 상상했던 딱 그만큼의 이야기다. 귀엽고 병약하고 착한 도련님과 무척 힘센 두 요괴가 일단은 주인공이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설정이지만 뭐 어떤가. 재미를 우선으로 추구하는 인간인지라 비슷하거나 닮은 건 오히려 실보다는 득이다. ‘백귀야행’이라는 만화의 열혈 팬으로 감질나게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아쉬워 한숨(?)이 절로난다면 두말이 필요 없다. 

 

사랑스러운 도련님을 보필하는 요괴에게는 반드시 여느 요괴와는 다른 숨은 능력이 있게 마련. 사스케와 니키치도 그런 존재들이다. 인자하고 다정한 어머니가 되기도 하고 엄한 아버지가 되어 거짓말을 하는 도련님을 나무라지만, 첫째도 둘째도 도련님의 안전과 건강을 위하고 보필하는 대요괴들의 충직함은 살짝 놀랍다. 이치타로의 탄생에 얽힌 비화가 드러나는 본문을 읽은 후 납득하게 되었지만 ‘사람도 요괴도 아닌, 기묘하게 생긴 생물’같은 손자를 보호하기 위한 할아버지의 안배가 두 요괴의 존재이유였다. 또한, 거기에는 손자를 위해 사랑하는 아내를 잃어야했던 비극적이고 놀라운 가족사가 숨어있기도 하다. 꼭 그래야했을 지는 무의미한 의문이다. 그것은 엄마라는 존재의 슬픈 염원이니까. 지독히도 아이를 원하는 저주에 가까운.

 

공포영화나 귀신 이야기를 싫어하는 것과 별개로 요괴가 난무하는 세계를 동경하고 상상하는 이유는 친근함 때문이다. 주변의 오래된 사물에 깃든 이런 저런 요괴의 일상을 받아들이는 건 복수와 원한의 산물인 토속적인 귀신들과 조우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반쪽요괴가 된 먹줄통의 원한으로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우리의 도련님이 병약한 몸을 이끌고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을 보면 무시무시한 공포와는 거리가 먼 연민과 동정이 앞선다. 백 년을 채워 겨우 요괴로서의 영생을 얻으려는 찰나 안타깝게도 먹줄통이 깨졌다. 완전한 요괴가 되고자하는 먹줄통의 집념이 잔혹한 살인을 불렀지만, 그것도 반혼향을 얻어 죽은 혼조차 살려낸 누구에 비할 바가 아니다. 도련님의 의연함에 깃들인 사유의 조각에는 그런 깨달음이 깃들어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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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팠다가 이제 겨우 일어났다. 그 뉴스를 보고 듣던 날은 이미 몸이 한계에 도달해 있었으므로 앓아 눕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몸이 그리고 마음이 사정없이 떨렸고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원래가 감상적인 인간이고 소소한 일에도 우는 일이 다반사라서 내 눈물에 내가 취한 것 뿐이라고 둘러대도 멈추지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원없이 울고 또 울었다. 인간이 인간에게 가지는 최소한의 예의를 다하여.  

신기하게도 마지막까지 뇌리에 남아 지워지지 않는 것은 정치가, 대통령으로서의 그가 아닌 아닌 소탈한 시골 할아버지로 돌아가서 보여준 모습들이다. 그의 말들이 진실했고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음을 안다고 이제와 말한들 무엇하랴. 살아서 들었다면 좋았을 응원이고 지지일텐데. 정치에 대한 습관적 무관심과 나태가 새삼 부끄럽다. 삶도 죽음의 자연의 일부라는 말에 공감한다. 죽어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는 것 뿐이니 애통하지 말라는 의미리라. 사실 죽음만큼 숭고하고 순결한 의사결정방식도 없지 않던가. 고뇌의 사슬을 단호히 끊을 수 있는 결단도 어쩌면 그라서 가능했을 것이다. 믿을까 말까 의구심을 품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결백이라는 신뢰라는 도장이 박혔다. 마음 아픔과는 별개로 가슴이 후련한 건 나뿐일까.  

그럼에도 살아서 보여줄 수 있었던 그의 다른 삶을 상상하면 아쉽고도 안타깝다. 아직은 할 일이 많았다. 그의 스케치북에 미완으로 남았을 그림들이 정녕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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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하는 일은 마당에 나가 쪼그리고 앉아 막 움트는 싹들이 얼마나 자랐는지 확인하는 거다. 일일초는 도무지 떡잎이 나온 이후로 변화가 없어 애를 태우더니 본잎이 아주 조그맣게 움트고 나오려 해서 마음이 놓인다. 얘가 느리다는 건 작년 여름에 진작 알았지만 그땐 어느정도 자란 아이를 옮겨심기 한 거였고 올핸 직접 씨앗을 뿌린 거라 기다림이 더 지루하다. 기껏 두 해째지만 느려도 이렇게 느린 애는 처음이다. 대신 기다림만큼 튼실하고 매끈하게 자라주므로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이미 흐드러진 꽃을 보여주는 건 사랑초와 로사캠피온. 로사는 햇수로 삼 년 만에 꽃대를 올린 것이다. 5월 초에 얻어 심었던 홍화는 모양이 영 시원찮다. 예쁜 꽃을 보려면 화분에 옮겨심어 집중 관리를 해야할까. 무화과나무 아래에서는 아무래도 제대로된 성장이 어렵다. 키만 삐죽 커서 비가 오면 드러눕기 일쑤다. 역시 땅이 부족하구나. 아무리 늘려도 부족한 화분은 또 어쩌구. 이미 마당을 가득 채울인데도 어째 해가 갈수록 더 부족하다. 오며가며 동네 어른들이 주시는 새로운 종류의 화초들을 욕심껏 다 길러보겠다는 의욕이 앞서서다.  

뒷집에서 줘서 뭔지도 모르고 심었던 게 맥문동이란다. 보라색 꽃을 피우고 추위와 건조에 강한 풀이다. 키가 제법 크게 자라는 거란다. 올해는 두고 보다가 내년 봄엔 담벼락 쪽으로 옮겨심을까. 문제는 세를 확장한 초롱꽃들이다. 초봄에 파릇하게 자라는게 기특해서 방치했더니 군락을 이루어 무섭게 성장중이다. 작년에 키도 작고 포기도 작고 가지도 갸날펐는데, 이파리 하나가 딱 작년의 세 배다. 베어버리라고 하는데 자그만 새싹부터 오매불망 봐와서 그런지 그렇게 쉽게 베거나 뽑을 수가 없다.  화초기르기의 가장 어려운 점은 죽이고 살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야한다는 거다. 장소는 한정되고 개체수는 많고, 튼실하게 적게 키울 것인가. 약하게 많이 키울 것인가. 마음이 약한 건지 욕심이 과한 건지 도무지 햇갈릴 정도로 어려운 문제다. 사실 이것도 요령이고 경험이다. 농사의 달인인 엄마를 보면 그냥 휙 휙 가차없이 뽑아 던지잖는가. 난 어쩔수 없는 초보다.  

희소식들. 올봄 옮겨심은 연산홍도 드디어 꽃을 맺었고. 부레옥잠이 새끼를 치기 시작했다(겨우내 봄내 눈 빠지는 줄 알았다). 고맙다.      

  길모퉁이 집에 사시는 아주머니댁 초롱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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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르던 마지나타 삽목을 하다. 온갖 방법을 다 써도 화분에 박힌 뿌리가 빠지질 않아서 힘을 콱 줬더니 뿌지직, 뿌리가 끊어지는 듯한...... 뭉텅 잘려진 뿌리를 보는 순간 심장이 쿵,이다. 이왕 끊어진 거 잊는 게 상책이다. 새로운 화분에 옮겨 심고 흙을 채우고 물을 준 다음 그늘에 고이 모셨다. 부디, 건강히 살아다오. 하늘을 향해 만세를 부르는 키 큰 가지 중 하나를 중간쯤에서 뚝 잘라 삽목용으로 준비해 둔 모래에 심다. 자른 가지에서 중간을 또 잘라 도합 두개를 삽목한 셈이다. 무성한 이파리도 싹둑 잘라주다., 물꽂이도 고민했지만 일단은 삽목부터다. 실패하면 또 하나의 가지를 잘라야 하는 것이다. 그래도 뿌리쪽에서 올라온 가지가 보험용으로 남는다.^^;; 앞으로 일주일이 고비라는데 어떻게 기다리지?  아직까지 분갈이에서 크게 실패한 적은 없다가 아니라 있구나. 작년 겨울 포인세티아가 결국 뿌리를 내리지도 못하고 죽었다. 시기가 문제였고 잦은 자리 이동도 나빴고 지나친 관심도 죽음에 일조했다. 사람에게나 식물에게나 적당한 무관심과 거리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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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오랫동안 집을 비워놓은 적이 아마 없었을 것이다. 예정에도 의도에도 없던 그냥 그렇고 그런 날들의 연속이다 보니 잠시 잊었다랄까.  까맣게 잊을 정도는 아니지만 잊은 척에 가까운 방임이다. 유쾌하게 살지는 못했다. 행복했다라고도 말하기가 껄끄럽다. 불행과 행복의 중간 정도면 나쁘지 않겠다. 의식이건 무의식이건. 별일도 없이 이렇게 오랜시간을 무얼하고 살았던 건지,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서 어쩔수가 없었다고 한다면 믿을라나. 헛헛한 웃음이 나는 걸 보면 아닐거다. 오늘, 갑작스런 변덕은 맥주 한캔의 마법이다. J가 사온 라이트맥주가 어찌나 부드럽게 목안으로 빨려들어가는지 간만에 마신 술맛에 뿅 갔다. 술, 거의 안마신다. 거의, 아주가 아닌 거의. 때때로 기분에 따라서는 맛나게 들이키거나  홀짝거리지만 어지간해서는 즐기지 않는 것이 술인데, 이 술이란 것에 약간의 의도된 심리적 거부반응이 있어서다. 할아버지가 술을 즐기시다 술 장사도 하셨고 술 주정도 상식 이하였고, 젤 큰 아버지도 술만 들어가면 주사가 장난이 아니셨고 아버지에 대한 나쁜 기억의 전부는 술에 의해서였고(술만 아니면 천하의 둘도없는 호인), 그래서인지 거나하게 취해서 말실수하는 사람과는 상종을 하기가 싫었고 취해서 붉어진 사람 얼굴도 무진장 싫어하고(그러면서 술만 들어가면 빨개지는 얼굴의 소유자면서), 암튼 술과 나는 악연도 인연이라면 인연인 셈이다. 집안이 주당이다보니 작정하면 제법 마신다는 것도 사실 슬프다. 술만큼 멋진 벗도 없다는 데 동의하기에 빌어먹을 나의 선입견이 애달프다. 그러나 어쩌랴. 늘 싫다가도 때때로는 근사해 보이는 걸로 위안삼아야지.  

어떻게 사냐고 묻는다면 그냥 웃지요가 정답이다. 그저 그뿐.  


괭이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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