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이드 오프 - 초일류 기업들의 운명을 바꾼 위대한 선택
케빈 매이니 지음, 김명철.구본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12월
평점 :
품절


충실성과 편의성이라는 두 개의 키워드로 기업의 전략과 선택을 분석한 책이다. 책에서 충실성이란 소비자의 이용만족도와 제품의 아우라, 아이덴티티가 결합된 것으로 제품이나 서비스를 이용했을때 느끼는 소비자의 총체적 경험을 의미한다. 대표적으로 소위 명품이라고 불리는 제품들이 충실도가 높은 상품으로 볼 수 있겠다. 편의성은 낮은 비용과 이용의 편리성, 쉽게 접할 수 있는 가용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습관적으로 사용하게 되는 제품들, 매스마켓을 대상으로 하는 제품들이 편의성이 높다고 하겠다.  

저자는 기업들은 충실성과 편의성의 한 쪽만을 추구하는 전략을 구사해야지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면서, 이도저도 아닌 제품은 충실성의 늪에 빠져 사멸하게 되며, 둘 다를 추구할 경우에는 어느 한 쪽도 제대로 달성하지 못해 역시 실패를 겪게될 확률이 높다고 한다. 편의성이 높은 저가 대량판매 시장에서 일정 위치를 차지한 기업이 애매하게 고가시장에 진출하려 하는 경우는 월마트에서 고가 상품을 판매하려다 실패한 사례가 있겠고, 충실성이 높은 보석상 티파니나 핸드백 메이커 코치가 저가 상품을 출시해서 스스로의 아우라를 갉아먹음으로써 뼈저린 실패를 경험한 사례 등을 들고  있다. 물론 실성과 편의성은 대상이 되는 소비자 집단에 따라 차이가 있으며, 기술발전에 따라 지속적으로 경계가 변하기 때문에 기업으로서는 충실성과 편의성의 축 상에서 높은 지점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적인 노력과 대응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다.  

충실성과 편의성은 소비자에게 광의의 편익과 비용으로 볼 수 있겠는데, 충실성과 편의성이라는 나름의 키워드로 기업전략을 재미있게 잘 풀어놓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인식(과학문화연구소장 KAIST 겸임교수), 2011.1.14, 

 

마음과 물질이 만나는 장소인 뇌를 탐구하는 신경과학의 연구 성과를 인문사회과학에 접목하는 융합학문이 잇따라 생겨나고 있다. 신경철학, 신경윤리학, 신경교육학, 신경신학, 사회신경과학, 신경인류학, 신경경제학, 신경마케팅 등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부분 신생 학문이어서 일반교양 도서가 흔치 않은 상태인데 신경인류학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역작을 만나게 되어 여간 반가운 게 아니다. 신경인류학은 신경과학과 인류학이 융합한 분야다. 인류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문화이기 때문에 뇌와 문화의 상호작용을 신경문화(neuroculture)라고 일컫는다.

지은이는 옥스퍼드대에서 신학 철학 영문학을, 존스홉킨스대에서 의학영상을 연구하고 정신과 의사를 지낸 융합적 지식인이다. 신경과학과 인지심리학뿐만 아니라 철학 역사 문학 예술은 물론이고 신화에서 고고학과 인류학으로 종횡무진 경계를 넘나들며 뇌가 서구 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탐색한다.

이런 융합 작업의 출발점은 두 개의 반구로 이루어진 뇌 구조이다. 우반구와 좌반구는 구조적으로나 기능적으로 비대칭이다. 구조적 비대칭성은 뇌의 왼쪽이 비대칭적으로 더 크다는 것을 뜻한다. 기능적 비대칭성은 두 반구가 서로 다른 유형의 기능을 수행할 목적으로 전문화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대뇌반구의 기능적 차이에 관해 획기적 발견을 한 인물은 미국 생리학자 로저 스페리(1913∼1994)이다. 그는 좌반구가 언어를 포함해 개념적이고 분석적인 기능에 우세한 반면 우반구는 지각을 포함해 공간적이고 종합적인 처리를 전적으로 맡고 있음을 밝혀냈다. 물론 스페리의 연구로 두 반구의 기능적 차이가 온전히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그의 업적은 신경과학 초창기에 신기원을 이룬 이정표의 하나로 평가되어 1981년 노벨상이 수여됐다. 저자는 비대칭적인 두 반구가 완전히 다른 세계관을 갖고 있다고 전제하고, 두 반구는 서로 도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 일종의 권력투쟁 같은 것이 진행되어 왔기 때문에 서구 문화의 많은 부분이 이런 메커니즘으로 설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2부로 구성된 이 책은 1부에서 두 반구의 기능적 비대칭성을 흥미진진하게 분석하고 2부에서 이를 토대로 서구 문화의 중요 사건을 독특하게 해석한다.


1부는 좌뇌와 우뇌에 대한 일반 통념이 얼마나 근거 없는 것인지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아마도 이 책만큼 두 반구의 비대칭성을 치밀하고 논리적으로 파헤친 저술은 찾아보기 어렵지 않을까 싶다. 가령 좌반구는 ‘세계를 효율적으로 활용하도록 설계되어 있지만 초점이 좁고, 경험보다 이론을 높이 평가하며, 생명체보다 기계를 선호하고, 명시적이지 않은 것은 모조리 무시하며, 공감하지 못하고, 부당할 정도로 자기 확신이 강하다’는 것이며 우반구는 ‘세계를 훨씬 더 넓고 관대하게 이해하지만, 좌반구의 맹공격을 뒤집을 만한 확신이 없다’는 것이다. 우반구는 ‘좌반구가 갖는 지식의 기반’이 되고 ‘양쪽 다 알고 있는 것을 활용 가능한 전체로 종합할 수 있는 쪽’이기 때문에 우반구를 주인, 좌반구를 심부름꾼에 비유한다.

저자는 반구 사이의 치열한 권력투쟁의 결과 심부름꾼인 좌반구가 주인인 우반구보다 지배력이 커졌다고 주장하고, 좌반구가 우위를 누리게 되면서 서구 문화의 주요한 사건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2부에서 보여준다. 가령 고대 그리스의 화폐 사용은 ‘우반구의 가치로부터 좌반구의 가치로 넘어가는 과정을 명료하게 반영’하며, 르네상스는 ‘우반구가 벌인 반란’이다. 산업혁명은 ‘좌반구가 우반구 세계에 가장 뻔뻔한 공격을 가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결국 심부름꾼인 좌반구가 주인을 배신하고 지배권을 장악하여 우반구 세계를 전적으로 제압함에 따라 예술은 ‘은유적 힘을 불러내는 육화된 능력을 잃고 개념이 되고’, 음악은 ‘리듬으로 축소될 것’이며, ‘신체는 기계로 여겨지고, 자연 세계는 수탈해야 할 자원더미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좌반구가 주도하는, 기계장치에 사로잡힌 엄격하고 관료적이며 비인간적인 사회가 형성되었고 그 대가로 인류와 우리 세계의 행복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저자는 서구 문화사에서 지난 500년 동안 벌어진 상황을 대뇌 반구의 권력투쟁과 배신으로 설명하고 “그동안 지혜롭게 백성들을 다스려 평화와 안정을 주었던 주인은 사슬에 묶여 끌려간다. 주인은 심부름꾼에게 배신당한 것이다”라고 재삼 강조한다.

그렇다면 심부름꾼의 손에 잡혀 있는 서구 문명의 활로는 없는 것일까. 저자는 동양 문화에서 배워야 할 것이 많다고 말한다. 서구 문화에서 두 반구의 존재 방식 사이에 그어진 날카로운 이분법은 동양 문화에는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더라도 서구와 같은 방식은 아닌 듯하기 때문이다. “동양인들이 경험하는 세계는 여전히 사실상 우반구의 세계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서구에서 찾아보기 힘든, 자연을 존경하는 태도는 일본의 과학적 교육 체계의 특징이라고 치켜세우지만 중국이나 한국의 문화에는 눈길을 주지 않는다. 어쨌거나 “동양의 문화는 두 반구의 전략을 더 균등하게 사용하는 데 비해 서구의 전략은 좌반구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동양에서는 심부름꾼이 주인과 협력하여 일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서구는 심부름꾼이 주인을 찬탈하는 과정에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과연 우리나라 문화도 그런 식으로 설명이 가능할지 궁금증이 남는다.
 

http://news.donga.com/Culture/Liter/3/0703/20110115/33957815/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20C, 인종 갈등·경제적 변동·제국 쇠퇴가 '극단적 폭력' 불렀다
"1900년 이후 100년은 의심의 여지 없이 역사상 가장 잔인한 세기였고 절대적인 관점뿐 아니라 상대적 관점에서도 그 어떤 시대보다 폭력적이었다."

영국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경제사를 가르치고 있는 저자 니얼 퍼거슨 교수는 20세기를 '증오의 세기'라고 부른다. 20세기는 민주주의와 복지의 개념이 확산되고 의료·과학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달하는 등 분명 진보의 시대였다. 그러나 사라예보의 총성으로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 무차별 폭격과 원자폭탄으로 상징되는 제2차 세계대전, 난징 대학살, 스탈린의 대숙청, 한국전쟁, 중국의 문화대혁명, 유럽을 휩쓴 인종 청소 등 20세기는 전쟁과 살육의 시대이기도 했다. 진보가 대량학살로 전락한 까닭은 무엇일까.

저자는 20세기의 극단적인 폭력성의 이유를 세 가지로 든다. 인종과 민족 갈등, 경제적 변동성, 그리고 제국(帝國)의 쇠퇴이다. 20세기 들어 인종 상에 극복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는 유전적 주장이 널리 퍼지고, 인종이 뒤섞인 이주 지역의 분쟁지가 정치적으로 분열되면서 인종·민족 갈등이 증폭되었다. 국내외 이주 집단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현실과 동질적인 정치조직의 수립이라는 이상의 간극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1940년대에 대량학살이 자행된 지역들이 여러 민족이 뒤섞여 살고 있던 지역과 일치한다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특히 중동부 유럽은 20세기의 살육장 중에서도 가장 비극적인 지역이었다. "20세기 내내 인간은 신체적으로 서로 다른 인종이 별개의 종(種)인 양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일부 집단을 '인간 이하'로 분류했다."

이러한 갈등은 경제적 변동성과도 관련이 있었다. 경제적 변동성이란 경제성장률, 가격, 금리, 고용 변화의 빈도와 진폭, 그리고 그와 관련된 모든 사회적 압력과 긴장을 의미한다. 불규칙적으로 불황과 호황을 반복하는 만성적인 경제 변동은 사회적 갈등을 악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경제사가들은 경제주기와 다양한 파동을 확인하느라 고심해왔지만, 호황과 불황의 빈도와 진폭이 얼마나 변하는지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이 변화가 예나 지금이나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대체로 먹고사는 문제가 어려워지거나 빈부격차가 커지면 소수 민족집단을 적대적으로 바라볼 가능성이 커진다.

저자는 20세기의 충돌을 이해하려면 배경에 있는 제국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세계를 지배했던 다민족 거대 제국의 쇠퇴와 몰락이 그런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세계대전의 주요 참전국 대부분은 제국이었거나 제국이 되려고 애썼다. 또한 자세히 들여다보면, 민족국가나 연방국가가 되려 했던 그 시기의 여러 정치조직은 사실상 제국이었다."

20세기는 영국·스페인·네덜란드 등 세계를 지배했던 유럽의 기존 제국들이 해체되고 소련·독일·일본 등 새로운 제국들이 등장한 시기였다. 히틀러의 제3제국, 일본의 식민제국, 소비에트연방 등은 300년 정도 지속된 이전 유럽 제국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단명했지만 파괴와 살상에서 비범한 능력을 발휘했다.

새롭게 등장한 이들 제국은 과거의 제국들과 달리 중앙집권적인 권력과 경제적 통제, 사회적 동질성을 추구했다. 또한 새로운 제국은 무력 사용에 대한 전통적인 종교적·법적 제한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들은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서라면 적국(敵國)의 훈련받은 군인만이 아니라 모든 국민을 공격하려 들었다. "영국이 인도의 민족주의자들을 지나치게 부드럽게 다룬다고 비난했던 히틀러는 신세대 황제 지망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이는 20세기 대격변의 진원지가 새로운 제국의 주변과 정확히 일치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저자는 또한 '서구 세계의 몰락'에 대해 이야기한다. 20세기의 가장 거대한 격변은 아시아에 대한 서양의 지배력이 쇠퇴한 것이라는 지적이다. 이는 1904년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로 거둔 승리로부터 시작하여 1978년 이후 중국의 경제부흥에서 절정을 이룬다. 아시아와 유럽의 소득격차는 좁혀지기 시작했고, 서양의 상대적인 하락은 막을 수 없는 현상이 되었다. "이는 바로 1500년 이후 4세기 동안 무너졌던 동서양의 균형이 회복되면서 세계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방대한 분량의 통계와 역사자료를 동원하면서 20세기를 전쟁과 학살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H. G. 웰스의 공상 과학소설 '우주 전쟁'을 언급하며 "우리는 지난 세기의 전쟁을 야기했던 동인(動因)들을 이해할 때에만 다음 세기의 전쟁을 피할 수 있다"면서 "경제위기의 와중에서 인종 갈등과 제국들 간의 경쟁을 불러내고, 그 과정에서 모든 인간이 공유한 인간애를 부정하는 어두운 세력은 여전히 우리 내부에서 꿈틀거리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신용관 기자, 2011.1.7)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12/24/2010122401781.html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치용 |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경제연구소 소장, '11.1.14)

 ㆍ경제적 선택을 좌우하는 것은 합리적 판단보다는 개인의 정체성

시장이 가치중립적이지 않다는 데는 이미 적잖은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공평하다는 신화와 달리, 애초에 참여자들 속에서 유불리가 발생하도록 시장은 설계됐다. 또한 어떤 형태로든 부의 이전이 일어난다는 점에서 시장은 정치적이다.

시장 참여자에 대한 상도 변하고 있다. 행동경제학에서 주로 거론되는 것으로, 기존 주류 경제학에서 상정하는 ‘호모 이코노미쿠스’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다. 널리 받아들여지는 ‘호모 이코노미쿠스’는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태생적으로 이기적인 개인이다. <국부론>에서 애덤 스미스는 개인의 이기심이 전체로서 경제적 편익을 늘린다고 주장했고 실제로 대부분 그렇게 작동했다.

<아이덴티티 경제학>의 제1 저자인 조지 애커로프는 합리성과 이기심에 지배받는 ‘개인’들에 의해서 시장이 기능한다는 생각에 반대한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애커로프는 시장에서 일어나는 정보의 비대칭에 주목하는 자신의 ‘레몬이론’을 통해 전통적인 시장에 대해 회의적 시각을 드러냈다. 교과서에 나오는 두 개의 곡선이 교차하는 시장은, 현실에서는 대체로 유사하게 구현되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다. 

교과서의 시장과 현실의 시장이 다른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정보의 비대칭이다. 중고차 시장에서 차를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 사이에 중고차의 실상에 관해 축적한 정보의 양이 다르다면 (거의 항상 판매자의 정보가 더 많다) 공정한 거래가 되기 힘들다. 시장을 복수로 상정해 두 개의 시장에서 동일한 상품의 가격이 다르게 형성됐다면 이 시장에서 싸게 사서 다른 시장에서 비싸게 파는 차익거래라는 것이 가능해진다. 정보 비대칭은 ‘가치중립적이고 공정한’ 시장의 신화를 무력화하는 여러 가지 증거들 가운데 하나다.

애커로프는 이제 시장 안에서 시장신화의 핵심 근거인 ‘호모 이코노미쿠스’에 메스를 댄다. 그는 이미 다른 책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s)>에서 ‘개인의 합리성’이라는 경제학의 가정을 재검토했다. 케인스에서 인용한 ‘야성적 충동’은 시장에 참여하는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합리적 선택이 때로 비합리적으로 흐를 수 있음을 요약한 표현이다. 시장이 아무리 공정하게 설계됐어도 합리적 선택이 아닌 야성적 충동에 지배받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시장기능은 훼손된다.

<아이덴티티 경제학>은 다른 수준에서 경제적 선택 또는 결정에 접근한다. 행동경제학은 합리성과 이기심에 추동되는 개인이 때로는 야성적 충동과 이타심에 좌우된다는 사실을 규명했다. 이때 선택하는 주체는 개인이다. <아이덴티티 경제학>에서 말하는 개인은 범주화한 사회적 개인이다. 간단하게 말해 13살 먹은 어린이가 회전목마를 타고 싶지만 ‘나는 그렇게 어린 나이가 아니다’라는 정체성 판단에 따라 다른 놀이기구를 선택하는 현상을 표현한 용어다.

자신의 정체성에 따라 경제적 선택이 달라진다는 발상은 사실 별로 새로운 게 아니기는 하다. 사회학이나 심리학에서 흔히 받아들여지는 통설을 가지고 왜 호들갑을 떠느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행동경제학의 문맥에서 파악하면 조금 다른 이야기가 된다. 철학이나 정치로 환원해도 된다. 내가 알고 있는 ‘나’는 사실 내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 말이다.

<아이덴티티 경제학>은 경제행위의 주체로서 개인은 유지하되 선택과정에서 탈개인화하는 모습을 포착했다. 외부효과를 외재성으로 옮기는 등 번역상의 몇몇 아쉬움을 감안하더라도 한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1142124235&code=90030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박순성 동국대학교 교수, 2011.1.21)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은 하나의 텍스트인가, 두 개의 텍스트인가? 도덕의 세계와 경제의 세계는 동일한 원리로 연결되어 있는 세계인가, 서로 다른 원리가 작동하는 세계인가? 1800년대 중반 독일의 사회·경제 사상가들이 애덤 스미스의 두 저작을 읽고 그의 사상 체계 전체에 대해 던졌던 질문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도, 경제 위기가 상존하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똑같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도덕과 경제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도메 다쿠오의 <지금 애덤 스미스를 다시 읽는다>(우경봉 옮김, 동아시아 펴냄)는 이 질문에 하나의 관점을 보여준다.

애덤 스미스의 두 저서를 함께 다루는 도메 다쿠오의 저서는 금융 위기가 발생하여 세계 경제가 불황에 빠져 있던 2008년 3월 발간되었다. 그는 스미스의 두 저서를 서로 연결시켜 해석하면서 "애덤 스미스가 '탐욕'을 용인했다는 것에 대한 오해를 푸는" 동시에 "'탐욕'이 시장 경제를 파탄시킬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려고 한다(6쪽).

 
그의 표현을 빌면, 자신이 제시하려고 하는 "애덤 스미스의 이미지는 종래의 이미지, 다시 말해 규제를 철폐하여 경쟁을 촉진함으로써 한 나라의 경제 효율을 향상시키고 높은 성장률을 실현하여 풍요롭고 강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254쪽).

그는 독일의 역사학파 사회·경제 이론가들이 제기한 '애덤 스미스 문제'와 관련해서 '문제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주려고 한다. <도덕감정론>과 <국부론> 사이에 단절 또는 전환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애덤 스미스가 "시장 경제의 기본 원리를 해명하면서 결코 '인간'의 문제를 놓치지 않았"(6쪽)다는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제 "애덤 스미스의 독창성은 인간에 관한 기존의 폭넓은 연구를 바탕으로 경제학의 체계를 확립한 데 있다."(6쪽) 인간은 두 세계 모두의 중심에 놓여 있으며 또한 두 세계를 이어주는 고리이다.

도메 다쿠오는 자신의 저서에서 인간의 도덕적 감정을 다루는 <도덕감정론>에서 출발하여 국민들의 부를 다루는 <국부론>으로 나아간다. 스미스의 두 저작을 어렵지 않고 쉬운 방식으로, 가끔 도식을 사용하여 간결하게 정리하면서, 그는 도덕철학이나 경제학에 친근하지 않은 독자들도 논의를 쉽게 쫓아갈 수 있도록 만든다.

도덕의 원리가 자연스럽게 경제의 원리로 연결되고, 도덕의 세계와 경제의 세계는 이음매가 없는 완전한 하나의 세계가 된다. 그리고 마침내 "참된 행복은 마음이 평온한 것"(258쪽)이라는 신념이 애덤 스미스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귀중한 유산이라는 주장이 저서의 핵심적 주장으로 제시된다.

길지만 그의 결론을 인용해 보자.

"부와 지위, 명예는 추구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개인이 부와 지위를 추구함으로써 사회가 번영한다. 그러나 부와 지위가, 가까이 있는 행복의 수단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사회적 성공이라는 큰 뜻을 품으면서도, 자기 마음의 평정을 위해서는 무엇이 정말로 충족되어야 하는지를 마음속 깊이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각 개인의 몫으로 나누어지는 행운과 불운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가치가 있든 없든, 우리는 우리 몫으로 나누어지는 행운과 불행을 모두 달게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다. 그렇다면 우리는 행운 속에서 오만해지지 않고 불행 속에서 절망하는 일 없이, 자신을 평안한 상태로 되돌리는 강인함이 우리 자신에게 있음을 믿고 살아가야 한다. 나는 애덤 스미스가 도달한 이러한 경지야말로, 현대의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어진 가장 귀중한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259~260쪽)

도메 다쿠오가 스미스의 가장 귀중한 유산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행운과 불행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평정을 지킬 수 있는 강인함을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음을 믿고 살아갈 줄 아는 것'이다. 여기에서 갑자기 우리는 의아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경제의 세계는 사라지고 도덕의 세계만 남은 것이 아닌가? 진정 우리가 강인하다면, 어떠한 조건에도 상관없이 우리의 마음은 평안할 것이다. '강인함'은 우리를 경제의 세계로부터 자유롭게 해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신념이나 깨달음이 아무리 훌륭한 정신적 유산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애덤 스미스만의 유산은 아니다. 인류는 이미 애덤 스미스 이전의 시대로부터 수많은 종교와 철학의 지혜를 물려받았다. 애덤 스미스에게서 근대 사상의 새로움은 사라지고 만다. 또한 이러한 수많은 지혜는 상존하는 경제 위기 속에서 불안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의 일상에 쉽게 다가오지도 않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도메 다쿠오가 책의 결론 부분에서 강조하고 있는 '애덤 스미스의 사상 체계에서 배울 수 있는 내용' 세 가지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네 번째 내용은 검토하지 않을 것이다.)

먼저 도메 다쿠오는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서 파악하는 것"을 스미스 사상 체계의 첫 번째 핵심 요소로 들고 있다. "개인은 자신이 소속된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공평한 관찰자'를 마음속에 형성하여 자신의 감정과 행위를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가 인정하는 것이 되도록 노력한다."(246쪽) 이러한 노력을 할 줄 아는 것이 '현명함'이다.

그런데 인간은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의 판단보다 자신의 이해관계 또는 세간의 평판을 우선시하여 행동하는" '연약함'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연약함' 때문에 인간은 부를 축적하려는 야심과 경쟁에 빠져든다. 당연히 이러한 야심과 경쟁은 '현명함'이 우리 마음속에 형성시켜 놓은 정의감에 의해 제어되어야 한다.

"제어되지 않은 야심과 경쟁은 사회 질서를 어지럽혀 사회의 번영을 방해한다." (247쪽)

이제 우리는 '강인함'보다는 약화된 형태의 덕성인 '현명함'과 인간의 약점인 '연약함' 사이에서 인간이 부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애덤 스미스가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 다소 안도한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야심과 경쟁이 '어느 정도로' 제어되어야 하는지를 알 수 없다.

또한 우리는 '현명함'과 '연약함'이라는 두 개념보다는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 '자신의 이해관계', '세간의 평판' 등의 개념이 더 주요한 분석 도구이며, 이러한 스미스의 개념들을 둘러싼 논쟁들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다. 합리성이나 정의/공평, 이기심과 동감/공감 등의 개념들이 여전히 철학적·분석적 차원에서 복잡하게 논의되고 있는 상황에서, '현명함'이나 '연약함'과 같은 개념으로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다소 의외라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완전히 강인하지 않고 또한 '현명함'이 완전히 '연약함'을 제어하지 않아야만, '연약함'은 사회를 번영으로 이끌 수 있다. 우리는 부와 지위를 추구하는 경제의 세계에서 살아가게 된다. 도메 다쿠오는 애덤 스미스의 사상 체계에서 배울 두 번째 핵심 내용이 바로 이 경제의 세계, 곧 '시장 사회에서 부의 기능'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다.

부는 단순히 인간의 생존과 안락을 위한 것을 넘어서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시장에서 특별한 애정이 없는 사람들이 상호 동감을 바탕으로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다. 경제 성장은 단순히 부의 증가를 의미하지 않고, '투자하는 부자들'과 '임금을 받고 일하는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관계가 생겨나는 것을 의미한다. 무역은 언어와 문화, 관습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교류를 심화시켜 상호 의존 관계를 강화시킨다. 도덕의 원리가 경제의 세계에 적용되면서, 경제의 세계는 상호 존중과 평화가 지배하는 세계로 그려진다.

"부는 시장을 통해 한 나라 안의 사람들을 연결하고, 성장을 통해 부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이으며, 나아가 무역을 통해 서로 다른 나라의 국민들을 연계시킨다. 시장, 성장, 무역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 부의 기능에서 각각 다른 국면을 나타낸다. 말할 것도 없이, 부가 이러한 기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250쪽)

스미스가 <국부론> 전체에 걸쳐 틈틈이 강조하는 지주/자본가/노동자 세 계급으로 구성된 (따라서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계급 관계라는 경제 체제의 핵심 속성에 따라 설명되어야 할) 자본주의 경제와 중상주의 체제의 어두운 면은 완전히 사라지고, 순수한 시장경제와 자유로운 무역질서의 아름다운 모습만이 드러난다.

그런데 중상주의나 식민지 지배라는 어두운 현실 역사에 대한 스미스의 비판(7장, 8장)을 잘 알고 있는 도메 다쿠오는 스미스로부터 배워야 할 세 번째 내용으로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부의 기능을 충분히 살릴 수 있는 경제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것"이라는 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250쪽)

"애덤 스미스는 참가자의 독점과 부정을 막기 위해 시장은 어느 정도 정부에 의해 감시되고, 법에 의해 규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251쪽)

하지만 이것이 도메 다쿠오가 생각하는 스미스의 마지막 말이 아니다. 시장에서의 독점과 부정을 막기 위해 공적 기관의 감시와 법의 규제가 필요하지만, 충분한 감시와 적절한 규제는 쉽지 않으며 또한 공적 기관이 도덕적으로 부패할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 경제 체제는 공적 기관이라는 외부의 공평한 관찰자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시장 참가자 한 사람 한 사람 내부의 공평한 관찰자에 의해 감시되고 규제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 경제가 구축될 수 있을지 여부는, 그 사회를 구성하는 각 개인이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의 목소리에 얼마나 귀를 기울일 줄 아느냐, 다시 말해 그 사회가 얼마나 도덕적으로 성숙한 사회이냐는 점에 달려 있는 것이다." (251~252쪽)

여기에서 몇 개의 질문을 던짐으로써, 도메 다쿠오의 스미스에 대한 해석이 얼마나 견고한가를 검토해 보자. 도덕적으로 성숙한 사회라면, 곧 사회의 구성원이 모두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규제를 철폐하여 경쟁을 촉진하기만 하면' 경제 성장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성립된다면, 도메 다쿠오가 제시한 스미스의 이미지와 종래의 이미지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이기적 인간들도 최소한의 법만 있으면 시장 경제의 원리에 따라 완전 경쟁 하에서 공정한 거래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이기적 인간들과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회 구성원 사이에는 경제 행위에서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시장 경제 자체가 독점과 특권을 낳을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하지 않는다면, 부패할 수도 있는 정부가 사라지기만 하면 시장 경제는 저절로 돌아갈 것이다.

심지어 일부 시장주의자들은 거대 경제 권력이나 독점체조차도 교환의 일반법칙을 제대로 따르고 있으며 따라서 그런 상황에서도 정부의 간섭이 없다면 시장 경제의 효율성이 보장된다고 주장한다. 불안정과 위기는 경제적 효율성에 따르는 불가피한 대가일 뿐이다. 도메 다쿠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종래의 애덤 스미스 이미지는 그다지 크게 손상되지 않았다.

논의를 약간 다른 식으로 전개해 보면, 도메 다쿠오는 역설적으로 애덤 스미스의 사상 체계로부터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 경제 체제'가 결국에는 도출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이기적 인간을 상정한다면, 정부의 감시와 법의 규제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지만 공적 기관의 도덕적 부패도 배제할 수 없다.

다른 한편,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개인들로 구성된 사회라면, 그러한 사회 속에는 부와 지위를 추구하는 헛된 야심을 가진 사람들, '자연의 기만'에 속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도덕의 세계와 경제의 세계를 분리한다면, 그 둘을 이어줄 다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도덕의 원리에 따르는 사회 구성원들을 상정한다면, 경제의 세계는 위축되고 결국 도덕의 세계 속으로 흡수되고 만다. 결국 애덤 스미스의 사상 체계는 훨씬 복잡하게 해석되어야 한다.

근대 사회·경제 사상가로서 애덤 스미스가 갖는 사상사적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도메 다쿠오가 주장하듯이, 동감의 원리라는 인간 본성의 도덕 원리로부터 사회 질서를, 특히 시장 경제가 지배하는 근대 경제 질서를 설명해 내는 데에 있는가? 아니면, 많은 자유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 비판자들이 주장하듯이, 도덕의 원리로부터 경제의 원리를 완전히 분리해 내고, 또 이기심의 원리가 작동하는 경제 세계가 동감의 원리가 작동하는 도덕 세계조차는 장차 지배하게 될 수밖에 없는 근대 세계의 운명을 미리 보여준 데에 있는가?

스미스 사상 체계의 특성에 대한 질문은 근대 세계 자체의 본질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근대 세계에서 도덕과 경제는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근대인들은 도덕과 경제 둘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과연 우리는 두 세계 중 어느 하나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두 세계를 끊임없이 오가며 살아가고 있는가?

과연 근대 세계는 두 개로 나뉘어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하나의 세계일뿐인가? 아니면 우리는 도덕과 경제 두 개의 세계만이 아니라 더 많은 세계, 정치와 예술, 종교, 환상 등이 각각 지배하는 세계들 사이에 걸쳐있는 다리 위에서 여전히 서성이면서 불안하게 살아가는 존재인가? 
  

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1012117044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