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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은 골병 든 활력 없는 나라? 정말로?

[프레시안 books] 유모토 켄지·사토 요시히로의 <스웨덴 패러독스



보편적 복지 국가의 대표적인 모델로서 스웨덴은 세계를 휩쓰는 신자유주의와 유럽의 경제 위기 속에서 과연 지속 가능할 것인가? 스웨덴식 사회 정책은 양극화를 극복하고 사회 발전의 지속성을 이룰 수 있는 대안적인 국가 운영 방식인가? 아니면 그저 복지 국가를 선호하는 사람들의 이상적 주장에 불과한가?


유모토 겐지와 사토 요시히로의 <스웨덴 패러독스>(박선영 옮김, 김영사 펴냄)은 바로 높은 수준의 복지 제도는 국민에게 높은 조세 부담으로 이어지고 결국 성장 동력을 잃게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스웨덴은 '그렇지 않다'고 반론한다. 스웨덴은 오랫동안 높은 국제 경쟁력을 유지하며 여전히 최상위 복지 국가의 위상을 잃지 않고 있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유모토와 사토 두 저자는 교토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이후 각각의 서로 다른 경험 속에서 느낀 바를 바탕으로 스웨덴 시장의 변화와 사회 정책을 공동으로 연구 분석한 결과를 이 책에 담았다. 두 저자는 경제학자로서 경제 정책과 사회 정책의 종합적 관점에서 복지와 성장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시대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세계 국가 경쟁력 순위에서 여전히 최상위를 차지하는 스웨덴식 모델과 정책의 독특성과 내용을 자세히 소개한다.


스웨덴은 고복지와 고부담 국가임에는 틀림없다. 동시에 거시 경제 성장률이나 노동 생산성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상위 그룹에 속한다. 2010년 국가 경쟁력 조사에서도 각각 2위(WEF)와 6위(IMD)를 보이고 있다. 한국의 삼성경제연구소 또한 선진화 지표를 바탕으로 스웨덴을 가장 선진화가 잘 이루어진 국가라고 2010년 5월에 발표한 바 있다.


저자들은 이러한 스웨덴을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드문 나라로 평가하고 이를 '아름다운 모순'이며 '스웨덴 패러독스'로 표현하였다.


당면한 세계적 경제위기에서의 탈출


사회 경제적 양극화, 저출산 고령화 그리고 지식 정보 사회화에 따르는 고용 없는 성장과 같은 현재와 미래의 사회 경제적 위기에 대한 해법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오늘날 일본과 한국은 위와 같은 세 가지 문제를 공통으로 안고 있으며 이는 비단 일본과 한국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21세기 선진 사회가 당면한 공통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저자들은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미래 사회의 해법을 스웨덴 모델에서 찾는다. 특히 미래의 국가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한 사회적 투자와, 맞벌이 부부를 뒷받침해주는 가족 정책 없이는 미래 사회의 도전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 저자들은 이러한 현실 속에서 스웨덴 모델의 가장 큰 특징이 "개인을 위한 여러 제도를 마련하고 기업의 국제 경쟁력을 배려하는 점"이라고 강조한다.


스웨덴 모델은 "다양한 제도와 정책이 상호 연관되며 복지와 성장의 양립을 꾀하는 시스템의 집합체이다." 저자들은 21세기의 스웨덴 모델의 특징을 7가지로 정리한다.


① 개방 경제(Open Economy)와 건전한 거시 경제·재정 운영

② IT 인프라의 정비와 혁신을 탄생시키는 전략적 연구 개발

③ 높은 여성 노동 참가율과 양육 지원 체제

④ 포괄적이고 대담한 환경 정책과 높은 국민 의식

⑤ 연대 임금 제도

⑥ 적극적 노동 시장 정책과 실용성 지향의 교육 제도

⑦ 노동 인센티브와 기업 활력을 배려한 과세 제도 및 사회 보장 제도 (15~16쪽)


이 책이 강조하는 스웨덴 모델의 특징을 열쇳말로 정리하면 고복지, 고부담, 고성장이며 이들의 상호 작용 속에서 세계 최상위 국가 경쟁력의 비결을 엿볼 수 있다.


고복지·고부담


스웨덴 모델의 역사적 맥락을 이 책이 충분히 담지 못한 것은 유감스럽다. 스웨덴은 1920년대 경제 불황과 실업 문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혼란 상태였다. 일찍이 시작된 고령화와 빈곤 국가의 운명을 바꾼 계기는 '국민의 집'을 주창한 사회민주주의 이념과 그 안에 담은 내용이었다.


모든 국민이 평등한 기회를 누릴 수 있도록 잘 발달된 사회 보장 제도는 1932년부터 본격화 되며 스웨덴 모델을 이루어 나간다. 1935년 도입된 세계에서 가장 보편적인 기초 노령 연금을 비롯해 1962년에 완성된 종합 사회 보험 제도는 임신·출산에 대한 소득 보장과 서비스, 육아·교육·주택 등 자녀를 부양하는 가족에 대한 사회 보장, 장애를 입은 사람에 대한 각종 서비스, 노인과 퇴직자를 위한 연금 제도 및 돌봄, 질병과 의료 보험, 고용 보험 그리고 자영업과 기업인을 위한 기업 보조 등을 포함한다.


스웨덴의 사회 보장 제도는 일정 연령 이상의 성인은 누구나 노동을 하는 것을 전제로 하며 완전 고용 실현을 목표로 한다. 또 모든 사회 보험의 급여 수준은 소득에 비례한다. 사회 보장 제도의 다른 한 축은 사회 서비스인데. 국민 누구에게나 절실한 건강 보호와 의료 서비스, 자녀 부양 가족을 위한 육아와 교육 그리고 주거 환경 조성은 개인의 부담을 덜어주도록 사회가 전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책임을 진다.


스웨덴 복지는 사회적 위험에 대한 대응이 뛰어나며, 소득 재분배에 의한 사회적 평준화와 아울러 사회적 투자라는 성격을 강하게 갖는다. 그러나 '기회의 평등'과 아울러 노동 시장에서의 1차적 분배의 평등 그리고 이를 보완하는 다차원적 사회 안전망의 구축이 스웨덴 복지의 견고함과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기초 생활 보조금은 마지막 단계의 장치로 적용된다.


고복지의 유지를 위해서는 조세에 의한 재정 확보가 불가피하다. "2007년 국민 부담률은 48.6퍼센트로 국내 총생산(GDP)의 절반 가까이를 세금과 사회 보험료로 납부하고 있다." 국민이 직접 부담하는 소득세는 평균 31.4퍼센트로 주로 지방세이며 국세는 20퍼센트, 25퍼센트로 고소득자만이 부담한다.


그 외 사회 보험료로는 7퍼센트의 연금 보험료뿐인데 이는 소득 공제 대상이므로 실제 부담은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국민 전체의 약 80퍼센트는 지방 소득세만을 납부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스웨덴의 세제는 국민 대부분을 과세 대상으로 하는 정률성이 강한 평등한 세제라고 할 수 있다."


고성장


스웨덴의 사회 정책은 시대적 변화와 환경에 따라 진화되었으며 때대로 대내외적 환경 변화에 따른 위기를 겪어 왔다. 이 책은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서의 사회 현상 및 이에 대한 대응을 소개하고 있다. 각 장이 다소 중복되는 인상을 주기는 하나 스웨덴을 소개한 다른 책과의 차별성이 두드러진다.


특히 이 책은 스웨덴을 기업하기 쉬운 나라로 소개하며 스웨덴의 개방 경제와 건전한 거시 경제 및 효율적 재정 운영을 부각시킨다. 또 스웨덴의 대표적인 정책으로 낮은 법인세율을 들고 있다. 2009년 현재 법인세는 26.3퍼센트로 한국의 22.5퍼센트보다 조금 높으나 일본의 39.5퍼센트를 크게 밑돈다.


그리고 물가 안정 목표제를 도입하여 임금과 물가의 악순환을 끊고 물가 안정을 도모하고 있다. 일명 간접세라고 부르는 기업의 사회 보험료 부담은 31.4퍼센트로 얼핏 보면 대단히 높다. 그러나 법인세율이 낮고 복리 후생비나 부양 수당, 통근 수당 등 기타 수당 부담이 없어 기업의 노동 비용은 결과적으로 영국이나 독일 등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낮은 편이다.


스웨덴은 1970년대 제1차 석유 파동, 1990년대 금융 위기, 2008년 리먼 브러더스 쇼크까지 세 번의 대규모 위기를 거쳤다. 그러나 그 때마다 정당, 정파를 초월한 세제 개혁, 연금 개혁, 다년도 예산 제도 도입 등의 국가적 대응 정책으로 건전한 거시 경제와 재정 운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국가 채무 잔고는 2008년 GDP 대비 35퍼센트로 서유럽 중 가장 건실한 건전 재정 국가가 되었다.


스웨덴의 국제 경쟁력을 유지하는 요소 중 정부 효율성 분야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관료가 기업 활동을 제약하지 않는 투명성이다. 기업 효율성 분야에서도 대기업의 효율성과 높은 생산성을 자랑한다. 또 인터넷 회선 속도, 브로드밴드 가입자 수, 연구 개발(R&D) 지출 등에서의 잘 갖춰진 사회 기반이 역시 스웨덴 국가 경쟁력을 최상위로 유지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스웨덴 모델의 특성


스웨덴이 기타 유럽 국가와 다른 사회 정책상의 특징 중 하나가 또 있다. 여성 인력의 노동 시장 참여를 뒷받침하는 가족 정책의 내용과 가치관이다. 여성 인력을 활용한 맞벌이 사회의 형성으로 인구 감소 문제와 소득 유지를 동시에 해결한 것은 가족 정책에 힘입은 것이다. 이 책에서 "여성 노동력을 활용한 맞벌이 사회"를 별도 장으로 구성하여 여성 노동력을 강조한 것은 돋보인다.


다른 하나는 적극적 노동 시장 정책이다. 이는 20세기 중반기의 렌-마이드너 모델에서 시작하였으나 21세기 시장 경제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며 오히려 신자유주의의 폐단을 방지하는 완충제 역할을 한다.


스웨덴의 안정적 노사 관계, 투명하고 효율적인 공공 분야, 우수한 인적 자원 양성, 잘 갖춰진 사회 기반은 스웨덴 기업의 경쟁력 제고와 이를 통한 고성장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특히 세계적으로 우수한 스웨덴의 노동력과 인적 자원은 교육 분야의 공공화와 지속적 투자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또 양성 평등적 가족 정책으로 인하여 잘 교육된 여성 노동력을 남성 노동력과 거의 같은 비율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이 스웨덴 경쟁력의 주요한 원천이다. 노동 시장 정책, 교육 정책, 가족 정책과 같은 핵심 사회 정책이 스웨덴 고성장의 비결인 것이다.

이를 위한 국민적 부담으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웨덴의 소득세, 법인세, 부가가치세와 아울러 기업의 사회 보장 부담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정부의 복지 지출로 인한 소득 이전 효과로 인하여 이는 실질적으로 조세 환급 혹은 소득 재분배의 효과를 갖는다는 것이다.


고복지·고부담은 교육, 보육 등 핵심적 사회 서비스를 탈상품화, 공공화한 것이며 세금과 사회 보험 부담이 약탈적이거나 징벌적 성격을 갖지 않음으로 인해 국민적 동의를 얻어낼 수 있었다.


<스웨덴 패러독스>는 최근 20년간의 경제적 변화와 스웨덴의 대응, 현상에 관한 실증적 자료와 통계를 통해 스웨덴 사회 특히 경제 현상을 설득력 있게 묘사하였다. 그러나 스웨덴 모델은 위에서 지적한 대로 1928년 이래 사민당이 주창한 '국민의 집',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렌-마이드너 모델" 그리고 기능 사회주의적 접근의 종합을 의미하며 이를 근간으로 한 21세기의 새로운 해법이 또 하나의 스웨덴 모델이다.


2009년 선거 이후 보수 연립 정부의 정권 재창출 이후에도 스웨덴의 '국민의 집' 정신은 보수당을 통해 실현되고 있다고 유럽 학자들은 분석한다. 따라서 이 책이 주장하는 스웨덴 패러독스는 스웨덴의 역사적 발전과 진화에 관한 깊은 성찰과 연계 속에서 읽혀야 할 것이다. 스웨덴 복지 국가의 형성과 발전은 스웨덴의 인본주의와 민주주의 발전 과정의 표현이며 수단으로 인식할 때에 스웨덴 패러독스가 지닌 패러독스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여겨진다.


이 책을 읽으면서 서울대학교에서 서양사를 가르치는 박지향 교수가 올해 초 <조선일보>에 쓴 글이 떠올랐다. "스웨덴이 성장·복지 성공? 속은 골병 든 활력 없는 나라, 빌붙어 사는 사람 너무 많아 이젠 개혁 엄두도 못내…" 이런 부제가 붙은 글이었다. (☞관련 기사 : 한 명 세금 갖고 두 명 먹고 사는 스웨덴)


<스웨덴 패러독스>는 이런 비역사적이며 사실(fact) 파악에 게으른 감성적 비판자에게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복지와 성장의 양립을 풀어나간 스웨덴 방식을 도전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세계 유명 조사 기관 평가에서 여전히 세계 최상위 수준의 경쟁력을 갖추고 있음은 스웨덴 패러독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근거의 하나이다.


/신필균 사회투자지원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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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의 야누스적인 속성

최근 들어 미국의 경제적, 정치적 파워의 쇠락에 주목하면서 달러의 "과도한 특권(exorbitant privilege)"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있다. 더 이상 미국이 세계 경제의 최강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달러의 국제 기축 통화 지위를 활용해 부당 이익을 향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의 세계 경제에 대한 지배력의 약화와 세계 경제의 다극화는 "달러의 특이한 지배력과 불편한 긴장 관계"를 보이고 있다. 이런 가운데 달러의 위기, 혹은 세계 헤게모니로서 미국의 몰락을 점치는 목소리가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이따금 달러화 표시 유동성을 확보하는 데 혈안인 모습이다. 리먼 브라더스 사태 직후의 모습이 단적인 예다. 당시 위기의 진원은 미국이었지만, 정작 그 여파로 달러화 유동성이 고갈되면서 세계 도처에서 달러를 확보하려는 움직임이 가열되었다. 그 결과 달러는 초강세를 보였다. 원/달러 환율이 외환 위기를 방불케 할 정도로 치솟았던 것도 그 때였다. 지금도 사정은 유사하다. 유럽 재정 위기가 달러화 유동성의 경색 우려로 번지면서 원/달러 환율이 폭등하고 세계 경제가 또 다시 극심한 몸살을 앓은 것이다.

마치 야누스와 같은 달러의 두 얼굴이다. 국제 경제학계의 대가 배리 아이켄그린(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 교수)이 <달러 제국의 몰락(Exorbitant Privilege)>(김태훈 옮김, 북하이브 펴냄)에서 조망하고 있는 달러의 미래 역시 바로 이 점에 천착하고 있다. 그는 "달러의 몰락에 대한 예측과 현실 사이에 격차"가 크다고 지적하면서, "달러를 둘러싼 통념들은 대부분 틀렸다"고 역설한다.

아이켄그린이 먼저 환기시키는 '환율의 경제학'의 제1원리는 "환율과 관련된
문제는 언제나 상대적으로 살펴야 한다"는 점이다. 사실 두 통화의 교환 비율을 의미하는 환율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제 아무리 특정한 통화의 가치가 하락하려고 해도 그 짝이 되는 다른 통화의 가치가 오르지 않는 이상, 환율이 변할 수는 없다. 그래서 "달러가 제 아무리 문제가 많다고 해도, 달러 이외 다른 통화 역시 문제가 많"은 이상 달러의 가치가 떨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다른 통화의 문제가 더 크다면 달러의 가치가 오를 수도 있다.

세계 금융 위기, 또 최근의 유럽 재정 위기 과정에서 나타난 달러의 강세는 바로 이 때문이다. 세계 경제가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이른바 '시스템 안정'을 위해서는 사실상의 기축 통화인 달러의 원활한 유통이 관건이다. 그래서 너도나도 달러를 확보하는 데 혈안이 되고, 그 결과 달러의 가치가 상승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달리 의존할 수 있는 대안 통화가 없다는 점도 달러 강세에 일조했다. 이에 아이켄그린은 지난 1970년대 달러의 위기가 언급되기 시작한 이후 "달러는 부전승으로 국제 통화의 최강자 자리를 지켜 왔다"고 꼬집는다.

달러 중심 국제 통화 체제의 내재적 긴장
 

그렇지만 달러의 자체 하중이 커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세계 금융 위기의 주범으로서 달러 중심 국제 통화 체제의 불안정성과 불공정성에 주목하는 시각이 늘고 있다.

실제로 국제 자금흐름 교란의 원천으로 지목되는 '달러 리사이클링(dollar recycling)'도 이 때문이다. 달러가 기축 통화로서 군림하는 이상, 나머지 주변국의 위기 예방을 위해서는 준비 자산으로서 달러 비축이 절실했던 탓이다. 또 스탠더드 앤 푸어스(S&P)의 미국 신용 등급 강등에서 드러났듯이, 미국의 재정 부실 역시 심각한 문제다. 금과 같은 상품 통화와 달리 법화(fiat money) 체제에서는 정부의 공신력이 관건인데, 재정 부실로 인해 이런 신뢰에 금이 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세계 금융 위기, 또 최근 미국의 재정 불안 역시 모두 역설적으로 달러화 강세로 귀착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만큼 달러 중심 국제 통화 체제 자체의 내재적인 긴장은 더욱 증폭되고 있다. 달러의 위기가 목전에 다가섰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이켄그린은 19세기 후반 국제 통화 체제의 역사라는 맥락에서 달러 중심 국제 통화 체제의 이러한 문제점을 파헤치고 있다. 여기서 그는 통화의 세계 지배력이 결국 해당국 경제와 재정의 기초 체력에 의존한다는 데 주목한다. 따라서 달러의 위기는 미국의 기초 체력이 그만큼 약화된 탓이며, 달러의 운명 역시 "미국 경제가 어떻게 굴러갈 것인지, 금융 위기로 이어진 심각한 정책적 실패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여부"에 의존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국제 통화 체제의 향방과 관련해 세계 경제의 다극화에 부응하는 통화 체제의 다극화에 초점을 맞춘다. 사실 우리에게 익숙한 달러화 일극 지배 체제는 역사적으로 볼 때 극히 이례적인 사례다. 오히려 복수 통화 체제가 일반적이다. 여기서 아이켄그린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유로와 위안이다. 사실 유로야말로 달러화 일극 국제 통화 체제에서 비롯된 제약이나 문제점을 염두에 두고 보완 수단으로서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지금은 유럽 재정 위기의 영향으로 유로가 와해 지경에 내몰리고 있다. 하지만 역내 통합을 위한 강력한 정치적 의지를 감안할 때 유로의 붕괴는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위안도 당장에는 자본 통제 등의 영향으로 국제적 활용도가 떨어지지만, 중국의 막강한 경제력과 위안화 국제화노력을 감안할 때 국제 통화로의 성장도 마냥 미래의 일로 치부하기 어렵다. 실제로 중국은 점진적으로나마 위안의 결제 통화 역할을 확대시켜 가고 있고, 상하이를 중심으로 국제금융센터 육성 계획도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아이켄그린은 20세기 초 미국의 달러가 국제 통화로 올라서던 경험을 환기시킨다. "달러가 국제 무대에 데뷔한 지 20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지배적인 통화로 자리매김을 했다"는 것이다.

한편, 달러, 유로, 위안 등 "세 개의 국제 통화를 수용할 여지가 있다는 것은 곧 더 많은 국제 통화를 수용할 여지가 있다는 뜻도 된다"고 덧붙인다. 여기서 그는 인구 성장에 초점을 맞추어, 인도의 루피와 브라질의 헤알 역시 국제 통화의 잠재 후보국에 올린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앞으로 국제 통화를 둘러싸고 치열한 경쟁이 예상된다. 하지만 아이켄그린은 이 경쟁이 "죽음의 경주"는 아니라고 설명한다. 국제 통화의 자리가 하나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달러의 몰락 혹은 붕괴 가능성에 대해서도 거리를 둔다.

항간에서 거론되는 달러의 붕괴 시나리오는 크게 두 가지다. 우선, 미국과 중국 간의 정치적 갈등이다. 하지만 경제적 상호의존성이나 달러 위주의 막대한 외환 보유액 등을 감안할 때 달러 붕괴에 저항할 수밖에 없는 중국의 이해관계도 크다. 두 번째는 시장 심리가 돌변하면서 외국인들이 달러 자산을 투매하는 경우다. 그러나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방어막이 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아이켄그린은 "달러가 주도적 역할을 하는 국제 금융 체제를 안정시키는 일에 모든 나라의 공통된 이해관계가 걸려 있다"고 평가한다.

대신에 그가 주목하는 것은 미국의 재정 부실이다. 물론 여기에도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개입할 수 있다. 즉, 돈을 풀어서 미국의 국채를 매입하는 식으로 재정을 떠받칠 수 있다. 하지만 최근 유럽의 경험을 보면, 중앙은행의 지원만으로는 위기를 억제하는데 역부족이다. 결국 강력한 재정 안정 조치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중앙은행의 지원이 '부채의 화폐화(monetization of debt)'로 변질되면서 극단적인 인플레이션 위험으로 귀착될 소지가 크다.

불확실성의 새로운 원천으로서 달러 위기

이런 맥락에서 아이켄그린은 미국의 '허리띠 졸라매기'를 해법으로 내세운다. 외환 위기 당시 우리도 익히 체험한 바 있고, 최근 유럽 위기 과정에서도 되풀이되는 논리다. 물론 이로 인한 "생활수준의 정체"라는 대가는 심각한 문제다. 따라서 그는 미국의 "정책 실수" 가능성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정치적 논리로 인해 내핍의 불가피성이 용납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달러의 운명이 중국이 아니라 미국의 손에 달려 있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어쩌면 이 문제야말로 가장 치명적 쟁점 아닐까? 아이켄그린은 미국이 실수하지 않는다면 달러의 붕괴는 없을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미국의 실수는 불가피해 보인다. 사실 세계 금융 위기 이후 미국 경제의 회생을 위한 경쟁력 있는 옵션이 부재한 상황이다. 오바마는 녹색 뉴딜을 미국 경제의 미래 청사진으로 제시했지만, 수익을 좇는 투기성 자본의 새로운 소재(바이오 테크 등)로서만 관심을 끌 뿐 지속적인 번영을 담보할 원천으로서는 아직 감감 무소식이다. 한편, 최근 '월가를 점령하라'는 캐치프레이즈와 함께 주목되는 분배의 재조정 역시 정작 세계 헤게모니에 집착하는 미국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따라서 지금은 내부적으로 모순이 응축되고 있는 달러의 위기 가능성을 진지하게 고려해 봐야 할 시점이다. 또 유럽 위기를 비롯하여 중국의 경착륙 가능성 등으로 인해 사실상 복수 통화 체제의 구도 자체가 이미 심각한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국제 통화 체제 자체의 재건이다.

문제는 그 방향이다. 위기의 직간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던 달러 일극 체제가 아니라 국제적으로 호혜평등의 원칙을 살린 균형적인 체제로 국제 통화 체제가 재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실질적인 의미에서 국제 통화 체제 재건의 축이 되었던 '마셜 플랜(유럽 부흥 계획)'의 경험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달러 중심의 현행 체제가 만들어졌지만, 이번에는 다른 접근 방식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지금도 불안이 증폭되고 있는 유럽 위기가 출발점이다. 각자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충돌하면서 오리무중에 빠진 유럽의 재건을 위해 국제 사회에서 새로운 마셜 플랜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이제는  글로벌 유동성의 새로운 공급원으로서 미국보다 중국 등 신흥 경제 대국이 부각되고 있다. 그간 달러 리사이클링으로 국제 자본 흐름의 불안정성을 유발하던 모습에서 벗어나 위기의 세계 경제를 구원할 주체로서 신흥국의 외환 보유액이 관심을 끄는 것이다. 아마도 이 과정이 원활하게 진행된다면, 선진국과 신흥국, 서양과 동양 간의 적절한 권력 균형에 입각한 새로운 글로벌 거버넌스(governance : 지배 구조)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말보다는 행동이 어려운 법이다. 글로벌 금융 위기 와중에 세계 주요 7개국(G7)을 대신하여 세계 주요 20개국(G20)이 새로운 글로벌 거버넌스로 부상하고 있지만, 여전히 내부의 불협화음이 큰 가운데 효과적인 구심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달러의 위기, 그리고 유럽 위기가 자칫 각국의 경쟁적 평가 절하, 즉 국제적인 환율 전쟁으로 귀착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제는 세계 금융 위기의 새로운 전개로서 국제 환율 위기의 가능성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즉, 국제 외환 시장이 글로벌 불확실성의 새로운 경로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켄그린의 이번 역작은 세계 금융 위기 이후 세계 경제의 향방과 관련해 일종의 '누락 고리(missing link)'로 자리매김 되는 달러의 위기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한다. 

  /장보형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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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책이 아니다. 정치학, 그것도 국제정치학 책에 가깝다. 조금 양보한다면 현대 정치 지형도를 조망한 정치사라고 할까. 그러니 제목에서 언뜻 '혁명의 시대'에서 '극단의 시대'까지 다룬 영국의 진보적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책을 떠올렸다면 접는 게 좋다. '불안의 시대'라 했지만, 문화와 경제를 아우르며 시대를 촘촘하게 조망한 홉스봄의 책과는 많이 다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1978년 이후 현재까지를 세 시기로 구분해 국제 정치의 역학 구도 변화를, 역사가나 학자의 눈이 아니라 저널리스트의 시각에서 훑어본 것이다. 그것도 지은이 기디언 래치먼이 <파이낸셜타임스>의 외교 문제 수석 칼럼니스트여서인지 미국의 입장에서 서술했다.

 
그렇다고 책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것은 아니다. 그 반대다. 역사책이리란 선입견만 떨치면 책은 흥미롭고 유익하다. 우리 대부분이 정신없이 휩쓸려 돌아가며 몸으로 체험한 시기를, 변화의 현장을 가까이서 지켜본 이가 시대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생생한 뒷이야기를 전해주기 때문이다. 요컨대 흥미와 통찰력이 가득한 책이다.

래치먼은 지난 30년을 '전환의 시대', '낙관의 시대', '불안의 시대' 세 시기로 구분한다.

1978년 12월 열린 제11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에서 덩샤오핑 주도로 중국 공산당이 '사회주의 근대화' 정책을 공식 채택한 것이 '전환의 시대'의 시작이었다. 잠자던 용이 서구 세계와 자유 무역을 수용한 것은 세계사 흐름은 대변환을 맞이했다. 개혁 개방은 거스를 수 없는 국제 정치의 대세였다.

미국과 영국에선 로널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가 집권해 자유 시장 사상과 민영화가 부활했다. 1980년대엔 민주화 물결이 라틴 아메리카를 휩쓸면서 16개국이 민주화를 이루었다. 한국에서도 1987년 대통령 직선제로 독재 시대를 청산했다. 1980년대 말에는 폴란드 등 동구권의 소련 블록이 무너지면서 민주화되었다.

'전환의 시대'는 1991년 크리스마스이브에 모스크바 크렘린 궁정의 소련 국기가 마지막으로 내려지면서 막을 내렸다. 이후 2008년 세계적 금융 위기가 닥칠 때까지 전 세계적으로 낙관주의가 풍미했다. 지은이가 말하는 '낙관의 시대'다.

이 기간에는 민주주의가 승리했고, 자본주의는 세계화 열풍을 타고 전례 없이 성장했으며, 인터넷 등 기술의 발달로 지리적 장벽이 무너졌다. 평화와 번영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모든 나라, 모든 사람이 이익을 누릴 수 있는 윈-윈 세계를 세계화와 단극 체제인 미국의 파워가 뒷받침했다.

미국은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세계의 중심이었다. 뉴욕 월가는 전 세계 자본 흐름을 좌지우지 했으며 미국의 군비 지출은 나머지 모든 나라의 군비 지출을 합한 것보다 많았다. 자연히 미국이 주도하는 '새로운 세계 질서'를 유럽연합(EU)이나 아시아의 신흥 국가들도 수용했다. 중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상 유례가 없는 성장률을 기록하면서 얻는 것이 많아졌으니 불만이 따로 있을 리 없었다.

오사마 빈 라덴이 주도한 9·11 테러가 미국이 주도하는 '새로운 세계 질서'에 대한 가장 놀랍고도 충격적인 도전이었지만 미국의 신보수주의자들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며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의 가치를 옹호하는 '십자군'으로 나섰다.

하지만 이게 '낙관의 시대'에 대한 조종(弔鐘)이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미국 사람들의 낙관주의는 조금씩 무너졌고 2008년 월가에서 비롯된 금융 위기는 낙관주의에 확실한 마침표를 찍었다.

래치먼은 2008년 이후를 '불안의 시대'라 이름 지었다. 미국이 주도권을 상실하면서도 새로운 대체 세력이 등장하지 않는 시기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큰 이유는 성장의 신화가 사라지면서 주요 강대국을 비롯해 한 쪽이 얻는 만큼 다른 쪽이 피해를 보는 제로섬 체제가 국제 정치의 틀로 자리 잡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여기에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쇠퇴로 지구촌의 미래는 한층 불안해졌다는 것이다.

핵 문제, 실패 국가 처리, 지구 온난화 등에 대해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표현한 대로 "글로벌한 문제에 대한 글로벌한 해결책"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 래치먼의 말이다. 현재 진행형인 국제 정치의 흐름을 분석한 3부가 이 책의 핵심으로, 시간이 없다면 이 부분만 읽어도 세상을 읽는 눈을 얻을 수 있을 정도이다. 한데 이 대목에서 지은이의 미국중심주의 시각이 살짝 드러난다.

이를테면 지구 온난화에 대처하는 방안을 다룬 부분이 그렇다. 탄소 배출량을 규제하려는 국제적 움직임을 언급하면서 중국과 브라질 등 후발국의 입장보다는 미국과 EU 등 선진국의 입장에 기우는 인상이다. 하지만 탄소 배출량을 선진국, 개발도상국을 가리지 않고 일률적으로 규제하려는 안은 이미 이산화탄소를 배출할 만큼 하면서 경제 발전을 이룬 선진국이 후발국에 족쇄를 채우는 것은 아닌가?

이를 두고 "서구 국가들은 비싼 음식을 맛있게 먹고는 가난한 이웃을 초대해 커피를 같이 마시고는 음식 값을 나누어 내자는 부자나 마찬가지"라는 중국과 브라질의 주장에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지. 게다가 지금도 선진국의 국민 1인당 에너지 소비량이 개발도상국의 그것보다 훨씬 많은 마당에 말이다.

래치먼은 중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국제 정치의 난맥을 짚은 후 마지막 장에서 현장을 뛰는 저널리스트의 자세로 돌아온다. 나름의 세 가지 해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첫째는 미국과 유럽인들에게 '평정심을 유지하며 하던 일을 계속하라'고 조언한다. 지난 세기의 역사를 돌아보면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은 충분한 회복력을 가졌다는 이유에서다.

두 번째로 국가 간의 라이벌 의식이 필연적으로 국제 관계를 규정지을 것이란 생각을 버리라고 한다. 창의적인 리더십을 발휘하면 중국과 미국을 포함한 주요 강대국들이 윈-윈 논리로 협력할 수 있는 새로운 방안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란다.

마지막으로 미국과 EU가 자신의 경제와 사회를 재구축하고 강화하면 자본주의 시스템을 다시 회복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미국은 혹은 서구 자본주의는 1930년대, 냉전 시대에 이미 소련이나 일본의 도전으로 비슷한 '쇠퇴 과정'을 겪었지만 극복해냈다는 전례를 들면서 하는 이야기다.

역사를 서술하는 데 시대를 구분하는 것은 의미 있고 유용하다. 해서 많은 역사가들이 시대를 규정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래치먼은 역사가는 아니지만 특정 시기의 성격을 규정함으로써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틀을 만들었다. 어찌 보면 책은 막강한 경제적 파워를 지니면서도 민주 정치의 불완전으로 국제 정치 불안의 핵으로 등장한 중국에 초점을 맞춘 느낌인데 지은이가 설정한 틀은 나름대로 현대사의 큰 줄기를 조망하는 데 도움을 준다.

어쨌거나 곳곳에서 주요 인물들의 면모를 보여주는 등 '현장' 분위기를 전하는 대목이 적지 않아 흥미를 높였다. 낙관의 시대를 상징하던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앨런 그린스펀의 사생활을 소개하는 이야기가 그런 예로 보통 역사책이라면 다루지 않을 이야기다. 그린스펀이 재능 있는 수학자이자 경제학자이면서 음악에도 남다른 재능을 보여 재즈 악단의 연주자로 활동했다든가, 그러면서도 악단원의 세금 환급 업무를 처리해주는 등 수리에 밝은 면을 보여주었다는 일화가 그것이다. 또 그린스펀의 정신적 스승인 러시아 출신의 소설가 에인 랜드가 유부녀임에도 불구하고 25세나 어린 제자와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는 데까지 이어지는 식이다.

책을 읽는다 해서 장삼이사에게 당장 도움이 될 것은 없지만 갈수록 한국 사회에 비중이 커져가는 중국의 실체를 볼 수 있게 해주면서 역사가들이 흔히 회피하는 당대의 정치 흐름을 짚어준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김성희 북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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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의 고층 빌딩과 기타큐슈의 공장 지대, 중국 베이징의 찻집과 다롄의 산업 지구, 인도의 어느 시골 역과 농촌. 이 일련의 장소에서 펼쳐지는 풍경과 담화가 릴레이식으로 차례차례 눈과 귀에 들어오는 일은 영화나 TV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패트릭 스미스의 <다른 누군가의 세기>(노시내 옮김, 마티 펴냄)를 읽다 보면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게다가 스미스는 일본, 중국, 인도를 종횡 무진하는 공간 이동만이 아니라 19세기부터 21세기까지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시간 여행도 무리 없이 감행한다. 그에게 '아시아'는 시간적으로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공간적으로는 (상실된/되었다고 여겨온) 동양과 서양 사이의 복잡하고 난잡한 "이종 교배(miscegenation)"의 산물이기에, 이 공간 이동과 시간 여행은 "'있는 그대로의 아시아'의 본질적인 측면 몇 가지를 조명"한다는 이 책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가장 적합한 방식이었을 터이다. 물론 뒤집어 보자면 시공간을 넘나드는 감각과 상상의 여정이 '이종 교배로서의 아시아'라는 상(像)을 가능케 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고 말이다.

 
아시아가 이종 교배의 산물이라면, 그 안에 정통성 있는 족보를 엮으려거나 단일한 본질을 찾으려는 시도는 스스로의 밑바닥에 깔린 논리적 파탄과 정신적 허무주의를 은폐하기 위해 언제나 정치적으로 불순하고 경제적으로 사악한 폭력을 수반하기 마련이었다. 스미스가 여행의 무대로 삼은 일본, 중국, 인도는 물론이고 한반도에서 전개된 근대화 과정도 예외는 아니다.

이는 한반도 남쪽에서 본격적으로 근대화 과정이 시작된 박정희 정권의 등장 이후를 보면 쉽게 수긍이 갈 것이다. 20년 가까이 지속된 박정희 정권의 통치 기간은 하나의 색조로 환원할 수 없는 복합적이고 비균질적인 사건과 관념으로 얽혀 있는 시간대였다. 이 시기에 이승만 정권 이래의 반공 민족주의는 그 목표의 무게 중심을 북진 통일로부터 조국 근대화로 이동시켰고, 국가 주도의 준-사회주의적 계획 경제는 삶의 모든 부문을 전체주의적으로 재조직화했으며, 전통 문화의 선별적 보존과 창조적 날조는 민족의 정통성을 허구적으로 표상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 때 한반도 남쪽에서 진행된 '근대화'란 초가집이 슬레이트 지붕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이자 공동체의 구성원이 서로를 경쟁 상대로 여기는 파괴적 공존의 성립이었으며, 한 편에서 과거를 부정하면서도 다른 한 편에서 전통을 새롭게 날조하여 보존하는 기묘한 시간관념의 탄생이기도 했다. 그래서 도시와 농촌으로 분리된 공간적 감각은 시간적으로 진보와 퇴보를 표상하는 위계질서를 체화시켰고, 이렇게 전적으로 새로운 시공간적인 지각 양식을 자리 잡게 한 것이 박정희 시기의 근대화였던 셈이다.

그런데 국가 주도의 근대화가 지속적으로 수행되기 위해서는 경쟁이 공존으로, 날조된 시간 의식이 진보로 바꿔치기 되었어야 했기에 박정희 정권은 피비린내 나는 폭력을 행사했어야 했고, 그 폭력 위에서 벌겋게 꽃피운 것이야말로 반만 년 역사를 공유한 단일한 민족이라는 신화와 정권의 정통성을 보장하는 자유 민주주의라는 이념이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즉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등장한 민족주의와 자유 민주주의는 서구 근대에 적응하려는 데에서 나타난 도착적 시간 의식과 위계적 공간 의식의 산물이었고, 이는 스미스가 서구의 세기라 칭한 19세기에 아시아가 처한 상황의 특징적 현상이었던 셈이다.

이 책의 물음은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이렇듯 뒤틀린 시공간 의식과 이에 수반된 폭력을 어떻게 기억하고 극복할 것인가 하는 물음이 바로 스미스의 문제의식인 셈이다. 사실 이런 문제의식은 그렇게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1960년대 프란츠 파농이 더할 나위 없이 치열하고 분노로 가득 찬 문체로 식민주의의 파괴적 속성을 고발했고,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과 이에 뒤이은 일련의 탈식민주의는 서구 근대가 어떻게 비서구 세계를 유린했는지 역사적이고 체계적인 비판적 분석을 축적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미스의 문제의식은 파농의 분노나 오리엔탈리즘의 고발이나 탈식민주의의 급진성과 결을 달리 한다. 그는 19세기와 20세기 내내 서구를 좇아 사회 체계를 구축해온 아시아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평가하되, 서구로부터 이입된 문명을 '남의 것'이라고 부정하여 아시아 고유의 특질을 상실된 과거로부터 찾으려는 시도를 향수에 기초한 르상티망이라 비판한다.

물론 오리엔탈리즘이나 탈식민주의의 언설들도 비서구-피식민지 지역의 고유한 전통이나 정체성을 안이하게 긍정하고 낭만화하는 경향에는 비판적이다. 그러나 이들 언설들이 식민주의와 서구화에 급진적 비판을 풍부하게 전개했음에도, 탈오리엔탈리즘과 탈식민주의에 기초하여 어떤 질서와 가치의 구축이 가능한지를 '구성적으로' 제시하지는 못했다. 이와 달리 스미스의 강점은 21세기 아시아가 제시하는(해야 하는) 새로운 질서와 가치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는 점에 있다.

이를 위해 스미스는 19세기에 시작된 서구화를 이제 '남의 것'으로 평가하는 데에서 벗어나 '자신의 역사'로 받아들일 것을 제안한다. 즉 이제 '이식/수용'이나 '남의 것/나의 것'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에서 벗어나야 하며, 그 이분법을 내면화하여 스스로를 위축시켜왔던 아시아의 인식과 실천의 구조조차도 상대화하여 역사적인 것으로 평가할 단계에 왔다는 것이다.

이런 스미스의 제안은 서구 근대의 역사 경험과 인식 체계에 대한 폭넓은 안목과 아시아 여러 국가/지역을 오랜 동안 취재하며 축적된 경험에 뒷받침되어 설득력 있는 논리로 다가온다. 특히 19세기에 시작된 서구화가 국가 주도의 생산성 향상을 추구하다가 고도 자본주의의 소비 사회에 이르러 허무주의를 만연시켰다는 역사 과정에 대한 분석은 현재 아시아의 상황을 역사적이고 정치경제학적으로 조망하는 날카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아시아의 서구화, 즉 경제 발전이라는 목적을 국가가 주도하는 패러다임은 전체주의적 통치 체제와 파괴적 경쟁의 내면화에 의해서 뒷받침 되었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개인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허무주의로 귀결되었다는 것이다. 스미스는 이런 현상이 개발 독재에서 소비 사회로 변화하는 가운데 나타난다는 단계론적 설명이 아니라, 개발 독재라는 서구화에 필연적으로 내포될 수밖에 없는 경향성이라는 역사철학적 설명 방식을 택한다.

서구화가 결국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물질적 대상 없는 욕망의 산물이라면, 결국 인간이 세계를 만나고 향유하는 방식이란 실체 없는 기호의 생산과 소비로 귀결될 터이기에 그의 설명은 현재의 문화론적 분석으로 봤을 때도 매우 설득력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타자의 욕망이나 기호의 소비와 같은 문화론의 기본 개념들이 이 책에서는 역사적 경험에서 추출된 구체적 사례를 통해 실증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국가 주도의 개발과 파괴적 경쟁과 허무주의적 소비라는 '삼중고'에서 아시아가 벗어날 길은 무엇일까? 위에서도 말했듯이 서구가 난입해 들어와 망가뜨리기 이전의 아시아적 가치에 기대는 일은 무용한 일이라는 것이 스미스의 입장이다. 그런 향수와 르상티망은 심정적 위안은 줄망정 미래를 향한 건설적 전망을 주지는 못한다. 향수와 르상티망은 150년 동안 개인과 공동체가 몸소 겪은 고통스러운 적응의 과정을 깡그리 부정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즉 자동차, 빌딩, 통신 매체 등의 기술은 물론이고 국가, 시장 질서 등의 사회적 질서의 뼈대까지를 좋았던 아시아를 파괴한 폭력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스미스는 이런 향수와 르상티망에서 벗어나 남의 것을 수용하여 적응하고 자기의 것으로 만든 아시아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자기의 역사'로 바라 볼 것을 제안한다. 그럼으로써 서구화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파괴적 폭력과 허무주의를 극복할 길을 아시아가 선도적으로 찾아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의 제안과 전망은 단순히 아시아가 서구화를 자기의 역사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비판적으로 평가하라는 메시지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아시아의 그러한 비판적 자기 성찰이 고스란히 서구로 되돌아가 서구 자체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시아의 변화를 계기로 서구 주도의 근대 문화/문명이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인 것이다.

현재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부진이 동아시아 지역 최대의 화두임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과연 이 상황 속에서 어떤 미래에 대한 전망을 가져야 할까? 19세기 이래 한반도는 일본을 비롯한 주변 강국에 휘둘려왔다. 이제 중국이 부상하고 일본이 힘을 잃어간다고 할 때, 한반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일본-미국의 보폭이 아니라 중국의 보폭에 맞춰야 된다는 생각이 등장할 가능성은 크다.

그것이 단순히 중국 추종으로 가자는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중국의 부상이라는 국면 속에서 어떻게든 번영의 길을 찾는 전략 구상이 지배적이 되리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그러나 스미스의 제안을 감안하면 이런 발상은 매우 19세기적인 것으로, 한국이라는 국가가 살아남을 수는 있어도 파괴적 경쟁과 허무주의에 침윤당한 삶의 의미와 가치는 회복될 수 없을 것이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한 기호의 생산과 소비가 지배하는 국가-자본주의의 결합은 극복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자의 욕망과 기호의 생산/소비를 극복하는 일은 스미스가 말한 대로 서구화와 근대화를 남의 것이라 부정하는 일이 아니라, 자기의 역사로서 온몸으로 끌어안아 성찰하는 일을 요청한다. 그랬을 때 서구인의 세기였던 19~20세기를 극복할 수 있는 세기가 도래할 것이다. 그 세기는 결코 아시아의 세기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세기(Somebody else's Century)", 즉 '모두의 세기'일 터이다.

그의 욕망을 욕망해야 하는 타자인 서구인의 자리에 아시아인이 온다면 누군가가 아시아인의 욕망을 욕망할 것이기에 위계 구조는 재생산된다. 따라서 이 '누군가의 세기'는 '주인 없는 세기'이어야 하며, 스미스는 21세기 아시아의 경험 속에서 이 도래할 세기에 대한 청사진을 조심스레 제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21세기가 단순히 '국격'이나 '경쟁력' 향상의 세기가 아니라 삶의 가치와 의미를 일신하는 새로운 세기로 만들기 위해서 <다른 누군가의 세기>는 풍부한 상상력을 제공해준다. 이 책과 더불어 '나'를 주인이나 주어가 아닌 '다른 누군가'로 만들기 위한 여정을 떠나보는 것도 무더운 더위를 나는 한 방법이 아닐까 생각하며 두서없는 독후감을 마무리해본다. 
 

/김항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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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10년 연말 갑자기 중국 전문가 타령들이 각 언론을 장식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은 아니지만 이번의 경우는 천안함 침몰 사건과 연평도 폭격 사건을 겪으면서, 중국에 대한 불편한 심기가 있는데다가 수교 20여 년이 다가오는데도 아직 '중국을 잘 모른다'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그러한 호들갑 속에 역대로 주중 한국 대사 중에 중국어를 구사할 줄 알았던 대사가 한 명에 불과했다던가, 정부 내에도 중국 전문가가 없다고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근원적으로 중국이 오만해졌다는 등의 다양한 분석이 줄을 이었다. 그 결과 정부는 부랴부랴 외교안보연구원에 중국연구센터를 개설하였고, 외교통상부에서는 '중국 관련 일일 언론 보도' 내용을 전문가들에게 이메일 서비스를 시작했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될까? 우리는 정말 중국 전문가가 없는 것일까? 아니면 있기는 있지만 중국을 너무 잘 알아서 오히려 '친중 인사'로 역차별(?)을 받는 경우는 아닐까? 그런데 왜 미국은 정당이 다른데도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존 헌츠먼을 대사에 임명했었고, 후임으로 중국계 미국인 게리 로크를 임명하였을까?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일인가? 그렇지 않으면 혹시 우리 사회의 리더 그룹 대부분이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들이라 중국에 대한 저평가가 일상화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꼬리를 문다.

외교는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일이고 내정의 연장선이다. 따라서 어떠한 외교 정책인가는 결국 지도자의 대외 인식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우리의 지도자가 "우리가 미국과 가까워지는 것이 중국에게도 좋은 일이다"라고 인식하고 있는 한 우리에게 중국은 여전히 종속변수에 지나지 않으며 중국의 역할은 북한 문제나 잘 해결해 주길 기대하고 있으니 한중 관계가 좋을 리가 없다.

국제 사회에서 중국은 이미 명실상부한 강대국이다. 세계적인 미래학자인 존 나이스비트는 중국이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정치·경제·문화 등 각 분야에서 세계를 바꾸고 있다고 평하기도 했다. 또한 '팍스 시니카(Pax Sinica :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 유지)'를 구현할 날도 멀지 않았다는 것이 중국인들의 대체적인 생각이기도 하다.

중국은 2029년까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을 1만5000달러, 국가 전체의 GDP는 25조 달러를 기록해, 중국의 GDP가 세계의 20%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와 같은 지표는 미국이 세계 패권국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던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때의 상황과도 유사하다. 당시 미국의 GDP는 세계의 18.9%를 기록했었다.

<그레이트 차이나? : 한·중·북 애증의 삼국지, 그리고 끝없는 스트레스>(대선 펴냄)는 한국과 중국의 중국 전문가들이 <프레시안>의 '중국 탐구'에 연재 중인 글들을 모아 <중국 속의 中國> 시리즈로 두 번째로 출판한 것이다. 크게 두 분야로 나누었다. 하나는 '한·중·북 애증의 삼국지'로 한국과 중국 그리고 북한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문제에 대한 다양한 분석이고, 또 하나는 '파워 중국의 끝없는 스트레스'로 중화의 부흥을 꿈꾸는 중국이 발전 과정에서 나타나는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있다. 결국 '그레이트 차이나'로 가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극복해야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작업은 이른바 '집단 지성'으로서 매우 의미가 있다. 나는 중국을 연구하는 그룹이 더욱 다양하게 이러한 시도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제너럴스트'의 시대는 가고 '스페셜리스트'의 시대가 도래했다. 한 전문가가 중국에 관한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리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의 연구를 국가가 국익의 차원에서 정보를 통합하고 이를 활용하는 방향을 제시해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국을 더 깊이 연구해야한다. 그리고 분야도 다양해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중국은 '그레이트 차이나'가 될 것인가? 필자들은 '그레이트 차이나'를 흥미 있는 의미로 설명하고 있다. 영문으로 'GREAT'를 다시 해석하고 있다.

"'중화의 부흥'을 통해 '위대한 중국(Great China)'을 이루려는 꿈은 국제 무대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세계 주요 2개국(G2)으로 미국과 양대 강국의 시대를 열었고, 소프트 파워의 첨병인 공자(孔子)를 천안문 광장으로 끌어내는 '문예 부흥'을, 유인우주선 썬저우(神舟) 7호를 성공적으로 발사, 우주 탐사를 강화하면서 첨단 국가 중국의 이미지 부각에 주력하고 있다.

핵무기를 제외하고는 최고의 전력으로 평가받는 스텔스기 개발과 항공모함 건조를 비롯, 첨단 무기 개발에 뛰어들어, 미국에 버금가는 군사력을 갖추겠다는 야망을 착실히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의 중국을 있게 한 세계의 공장 중국은 세계 수출 1위국으로 부상하였으며(Trade), 이제는 세계의 시장으로 강력한 경제적 영향력을 세계적으로 투사하고 있다" (머리말)

그러나 이러한 '그레이트 차이나'를 달성하기 위해서 중국 앞에 놓인 상황은 그렇게 녹록해 보이지 않는다. 가장 큰 문제는 한반도 문제다. 이는 단순하게 남북한 문제이기보다는 중국과 미국 등 다양한 요인이 모두 엉켜있는 실타래이기 때문이다.

"북중 관계가 과연 한중 관계보다 중요한가의 문제를 살펴보자. 북중 관계에 관해 중국 지도자들은 분명히 정상적인 국가 관계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북중 관계의 특수성도 항상 강조되고 있다. 중국도 대북 정책과 관련해서는 전략적으로 실책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은 대북 영향력의 한계를 강조하면서 북한의 국내 안정을 위해 많은 것을 용인하는 한반도 정책을 실시해 왔다. 그 결과 중국은 '핵 보유국을 주장하는 북한'과 '안정된 북한' 사이에서 고민하는 정책적 모호성이 노정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은 여전히 '관리 가능한 북한'이 필요하므로 북한의 요구를 계속 수용하고 있다. 이 점을 잘 아는 북한은 결정적인 위기 때마다 중국에게 손을 벌리고 있다. 때문에 북중 관계는 한마디로 애증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35쪽)

여기에서 우리는 왜 중국이 우리에게 운명처럼 중요한지를 파악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이렇다.

"한반도 문제의 난국은 모두 북한과 관련되어 있다. 비록 애증의 관계가 교차하고 있지만 불확실한 북한의 미래에 배팅하기보다는 비록 힘들지만 현재의 북한이 중국에게는 전략적으로 훨씬 매력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이러이러한 입장이 중국에 어떻게 유리하니 우리의 뜻을 받아들여 이렇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또는 통일된 한반도가 중국에게도 이렇게 유리하니 이랬으면 좋겠다는 우리의 요구나 정책은 중국 측에 전혀 전략적 고려의 대상이 아닐 수도 있다. 이제 중국을 말로 설득하기 보다는 내부적으로 중국과 같이 북한에 대한 구체적인 지원 정책이나 정책을 펼쳐가는 것이 더욱 실질적일 수도 있다" (36~37쪽)

그렇다면 우리에게 중국과 미국은 어떠한 의미인가?

"우리는 한중 협력이 긴밀해질수록 한미 협력이 손상되거나 견고한 한미 관계 하에서 한중 협력은 커다란 효용성이 없다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물론 한미 관계는 우리의 국익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한 동맹 관계이지만 중국의 위상과 중미 협력, 경쟁 관계 등 동북아 국제 관계의 변화를 주시할 필요가 있다.

한미 관계를 공고히 하면서도 한중 협력을 확대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한중 관계, 한미 관계, 중미 관계가 상호 배타적인 관계가 아닌 상호 보완적이고 상호 촉진적인 관계로 설정되고 작동되어야 할 것이며, 최소한 한반도 및 북한 문제에 관한 한 한·미·중 3자 협의체를 구성하도록 노력해야할 것이다." (49쪽)

이제야 분명해졌다. 그러나 중국도 반드시 깊이 인식해야하는 것은 '그레이트 차이나'든지, '중화의 부흥'이든지 간에 절대로 주변국을 희생하거나 패권적 행태를 보여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역사에서는 최고 정점에 이르면 다시 하강한다는 것이 진리다. 그럴 만한 요인들은 무수히 많다. 중국의 미래 발전에 발목을 붙잡는 것은 외부적인 강대국 간이나 주변국과의 관계 이외에도 중국 내부 문제라는 점을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책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중국 사회를 이끌어야할 지식인들은 '문화 권력'으로 관방과 결탁(238쪽)하였고 새로운 동력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 또 우리의 장자연 사건과 같은 중국의 연예계의 숨겨진 규칙 '첸꿰이저(潛規則)'의 폐해 등은 중국 사회 각 분야에 만연하였으며(260쪽) 결국 '빨간 불이라도 손잡고 건너면 무섭지 않다'라는 중국식 속담이 오늘의 중국의 문제점을 가장 적절하게 지적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문화계가 '자존심의 현대화'(318쪽)를 위해 노력한다는 글에서는 희망을 갖기도 한다.

이 책은 중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러한 문제들을 전문가들이 소개하고 평가하고 있다. 과거 중국을 하나의 연구 대상으로 평가해오던 많은 서적들과는 달리, 다양한 시각에서 이슈별로 평가하고 분석했다는 점은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날로 제고되고 있는 중국의 국제적 위상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시의적 문제들에 대한 독자들의 궁금증을 간단하고도 명료하게 풀어줌으로써 일반인들에 대한 접근성도 고려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하고 싶다.

중국의 부상을 기존 사실이라 전제하며 중국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 존재하고 있던 선입관을 배제하려는 노력이 돋보이는 구성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부상으로 인한 인식상의 영향력, 즉 중국이 '위협'적인가 아니면 또 다른 '기회'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보다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판단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 출판물들과 구별되기도 하다. 또 중국 문제를 한반도 문제와 연관 지었다는 점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런 점에서, 한반도 문제와 한중 관계를 둘러싼 현안을 파악하고, 향후 중국의 행보를 가늠해 보고 싶은 독자들에게 이 책은 적잖은 시사점을 남길 것으로 생각된다.
 

/전가림 호서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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