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용 |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경제연구소 소장, '11.1.14)

 ㆍ경제적 선택을 좌우하는 것은 합리적 판단보다는 개인의 정체성

시장이 가치중립적이지 않다는 데는 이미 적잖은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공평하다는 신화와 달리, 애초에 참여자들 속에서 유불리가 발생하도록 시장은 설계됐다. 또한 어떤 형태로든 부의 이전이 일어난다는 점에서 시장은 정치적이다.

시장 참여자에 대한 상도 변하고 있다. 행동경제학에서 주로 거론되는 것으로, 기존 주류 경제학에서 상정하는 ‘호모 이코노미쿠스’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다. 널리 받아들여지는 ‘호모 이코노미쿠스’는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태생적으로 이기적인 개인이다. <국부론>에서 애덤 스미스는 개인의 이기심이 전체로서 경제적 편익을 늘린다고 주장했고 실제로 대부분 그렇게 작동했다.

<아이덴티티 경제학>의 제1 저자인 조지 애커로프는 합리성과 이기심에 지배받는 ‘개인’들에 의해서 시장이 기능한다는 생각에 반대한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애커로프는 시장에서 일어나는 정보의 비대칭에 주목하는 자신의 ‘레몬이론’을 통해 전통적인 시장에 대해 회의적 시각을 드러냈다. 교과서에 나오는 두 개의 곡선이 교차하는 시장은, 현실에서는 대체로 유사하게 구현되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다. 

교과서의 시장과 현실의 시장이 다른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정보의 비대칭이다. 중고차 시장에서 차를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 사이에 중고차의 실상에 관해 축적한 정보의 양이 다르다면 (거의 항상 판매자의 정보가 더 많다) 공정한 거래가 되기 힘들다. 시장을 복수로 상정해 두 개의 시장에서 동일한 상품의 가격이 다르게 형성됐다면 이 시장에서 싸게 사서 다른 시장에서 비싸게 파는 차익거래라는 것이 가능해진다. 정보 비대칭은 ‘가치중립적이고 공정한’ 시장의 신화를 무력화하는 여러 가지 증거들 가운데 하나다.

애커로프는 이제 시장 안에서 시장신화의 핵심 근거인 ‘호모 이코노미쿠스’에 메스를 댄다. 그는 이미 다른 책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s)>에서 ‘개인의 합리성’이라는 경제학의 가정을 재검토했다. 케인스에서 인용한 ‘야성적 충동’은 시장에 참여하는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합리적 선택이 때로 비합리적으로 흐를 수 있음을 요약한 표현이다. 시장이 아무리 공정하게 설계됐어도 합리적 선택이 아닌 야성적 충동에 지배받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시장기능은 훼손된다.

<아이덴티티 경제학>은 다른 수준에서 경제적 선택 또는 결정에 접근한다. 행동경제학은 합리성과 이기심에 추동되는 개인이 때로는 야성적 충동과 이타심에 좌우된다는 사실을 규명했다. 이때 선택하는 주체는 개인이다. <아이덴티티 경제학>에서 말하는 개인은 범주화한 사회적 개인이다. 간단하게 말해 13살 먹은 어린이가 회전목마를 타고 싶지만 ‘나는 그렇게 어린 나이가 아니다’라는 정체성 판단에 따라 다른 놀이기구를 선택하는 현상을 표현한 용어다.

자신의 정체성에 따라 경제적 선택이 달라진다는 발상은 사실 별로 새로운 게 아니기는 하다. 사회학이나 심리학에서 흔히 받아들여지는 통설을 가지고 왜 호들갑을 떠느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행동경제학의 문맥에서 파악하면 조금 다른 이야기가 된다. 철학이나 정치로 환원해도 된다. 내가 알고 있는 ‘나’는 사실 내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 말이다.

<아이덴티티 경제학>은 경제행위의 주체로서 개인은 유지하되 선택과정에서 탈개인화하는 모습을 포착했다. 외부효과를 외재성으로 옮기는 등 번역상의 몇몇 아쉬움을 감안하더라도 한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1142124235&code=90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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