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덕에 버티고 있는 中은행… 대륙발 금융위기는 시간 문제

중국의 경제 발전은 눈부시다. 누구나 중국 경제의 미래에 주목한다. 중국을 빼놓고 글로벌 경제를 얘기하는 사람은 없다.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영향력이 커져 주요 2개국(G2)으로 불릴 정도다.

그런 중국에도 결정적인 아킬레스건이 있다. 바로 경제 발전 뒤에 감춰진 은행의 부실이다. 많은 경제전문가는 중국의 은행 부실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지면 중국은 물론이고 세계경제가 위기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올 1월 미국 블룸버그통신이 세계 투자자와 경제분석가, 트레이더 등 경제전문가 1000명을 대상으로 글로벌 경기 전망에 대해 설문조사를 했을 때 응답자의 45%가 중국이 5년 안에 금융위기를 겪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중국 정부의 통제 아래 이뤄지는 은행의 과잉 대출과 부실, 투기적 자산투자 등이 원인으로 지목됐다.

중국에서 20여 년간 은행가로 일했던 칼 월터와 프레이저 하위가 함께 쓴 ‘붉은 자본주의(Red Capitalism)’는 바로 중국의 금융 부실에 대한 책이다. 두 저자는 중국 금융시장을 현장에서 지켜본 경험에 따라 중국 금융 시스템의 문제를 파헤친다.

저자들은 중국 공산당이 은행의 역할을 ‘국영기업에 무제한 자본을 대주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 결과 은행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엄청난 규모의 부실 채권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정부는 지금까지 이런 시한폭탄이 터지지 않도록 놀라운 능력을 보여줬다. 1980년대 중국 은행들은 지방정부의 압력으로 상환 능력을 따지지 않고 무분별하게 대출을 해줬다. 통화량이 급증하면서 물가가 치솟고 자산 거품이 심각한 문제로 부각됐다. 그 결과 대출을 갚지 못하는 일반인과 기업이 속출했다. 10여 년 후 중국 은행 ‘빅 포(Big Four)’ 대출의 40%가 부실채권이었다.

이 때문에 서방 전문가들은 중국의 은행 부실이 금융위기로 이어질 것으로 예측했지만 보기 좋게 빗나갔다. 중국 정부가 교묘한 방법으로 은행의 부실 문제를 덮어버렸기 때문이다. 1998년 중국의 중앙은행인 런민(人民)은행은 ‘빅 포’ 은행들이 런민은행에 쌓아야 하는 준비금 규모를 낮추었다. 덕분에 은행들은 남는 자금으로 자본금을 늘렸다. 또 중국 정부는 자산운용사를 설립해서 은행들의 부실채권을 액면가로 사들였다. 그리고 자산운용사들은 이 부실채권 구입 대금을 10년 만기 어음으로 지불했다. 2009년 이 어음이 만기가 돌아왔을 때 중국 정부는 만기를 10년 늦춰 주었다. 동시에 은행들은 이 자산운용사 지분을 취득했다. 이 같은 ‘눈속임’을 통해 부실채권 부담을 덜어낸 은행들은 또다시 대출에 나설 수 있었고 대출 부실은 다시 쌓여 갔다. 

 이에 더해 중국 은행들은 정부가 예금 이자를 낮게 정해준 덕분에 자금조달 비용을 낮출 수 있었다. 자본건전성이 떨어지고 예금 이자가 적은데도 중국 국민이 자국 은행에 돈을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은 중국 정부가 해외에 자금을 맡기지 못하도록 통제하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이처럼 지금까지 중국 정부가 운 좋게 은행 부실에 따른 위기를 봉합할 수 있었지만 앞으로 문제는 더 커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책에 의하면 ‘시한폭탄’이 언제 터질지는 단지 시기의 문제일 뿐이다.
(뉴욕=신치영 특파원 higgle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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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18세기에 산업혁명이 영국에서 먼저 일어났는가? 1960년대 한국과 필리핀은 1인당 소득이 100달러 내외로 비슷했는데 왜 지금은 큰 차이가 날까? 중세까지 유럽에 비해 경제적·문화적으로 월등히 우월했던 중국이 왜 근세에 들어와 지위가 역전되었나? 시기나 지역이 다르지만 질문의 성격은 같은 것이다. 경제발전이란 무엇이며 발전의 격차는 왜 생기는가 하는 의문이다. 이런 질문에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가에 따라 우리나라가 앞으로 해야 할 과제나 처방도 달라질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사회적 기술이란 개념을 소개한다. 생산성은 두 가지 기술로 좌우되는데, 하나는 자연을 변화시키는 물리적 기술이고 다른 하나는 제도나 조직 운영과 같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사회적 기술이다. “사회적 기술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교역제도다. 개방과 교역은 인류가 고안한 거의 최초의 사회적 기술이다. 수렵 채취시대에 가족에서 씨족과 부족 그리고 부족연합으로 확대되면서 최초로 씨족 간, 부족 간 교환이 시도된다. 오늘날도 해외무역은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일종의 기술로 간주된다. 국내 생산이 불가능하거나 가능해도 비효율적인 생산물을 교역을 통해 얻게 되면 이는 기술개발과 같은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사유재산제도, 법치, 투명성, 반부패 같은 것들이 대표적인 사회적 기술이다. 이런 사회적 기술이 경제활동을 촉진시키고 효율성을 높이며 생산성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사회적 기술이 경제성장에 기여하는 바를 실증적으로 확인하는 작업을 했다. 87개국을 대상으로 경제성장과 사회적 기술 간의 관계를 조사한 결과 사회적 기술이 성장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이 선진국과 후진국에서 동시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특히 소득 수준이 높을수록, 선진국으로 진행할수록 사회적 기술은 물리적 기술보다 더 중요해지고 성장에 더 탄력적이라고 한다. 이는 후진국의 성장속도가 빨라져 선진국을 따라잡는다는 수렴가설이 일반적으로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부패 법치 투명성 같은 사회적 기술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올라선 그룹 안에서만 후진국이 선진국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반부패 법치 투명성을 강조하는 데는 경제학자로서 그의 흔치 않은 경력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일치감치 경실련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한 데 이어 공정거래위원장으로 경제 현장을 나름대로 경험했다. 저자가 말하는 사회적 기술은 어떻게 보면 기존의 일부 경제발전 이론에서 강조하는 제도적 측면과 비슷하면서도 그보다 더 폭넓은 개념인 듯하다. 이 책은 사회적 기술 이론을 한국 현대사에도 적용하려고 시도한다. 1948년 제헌헌법을 만든 이후 9번에 걸친 헌법 개정을 비롯한 사회적 기술의 발전이 오늘날의 경제발전을 가능케 했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저자의 결론은 앞으로 한국사회가 해결해 나가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아울러 아시아와 아프리카 중동 후발국가의 경제발전에도 도움이 될 것임은 물론이다. 박영균 논설위원 parky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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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론자들이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근대화는 전통의 기억을 지운 원형이지만, 그 기억을 되살리게 한 은인 또한 근대화라는 사실이다. 근대화의 성공과 자신감이 없었더라면, (조선왕조를 망하게 했던 유학을 포함한) 전통은 여전히 굳게 봉인된 채 열어서는 상자 속에 갇혀있을 것이다.”

 동양철학자 한형조(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가 『왜 조선유학인가』(문학동네)에서 던졌던 말인데, 이게 중국학자 러우위리에(樓宇烈·77)의 신간 『중국의 품격』과 내내 공명을 이룬다. 두 책은 지난 세기의 아픔을 딛고 현대화에 성공을 거둔 한·중 학계가 전통을 새롭게 발견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형조가 전통의 깊은 우물에서 지혜의 물을 길어 올리듯, 러우위리에 역시 유교·불교·도교에 담긴 인문주의·인본주의 가치를 강조한다. 인문주의야말로 동북아문화의 핵심이고 우리의 품격을 완성하는 핵심 요소란 적극적인 주장이다.

그들의 태도는 20세기 사상가 후스(胡適)와 대조적이다. 후스는 “내가 전통을 연구하는 목적은 전통 안에서 쓰레기를 찾아내기 위해서다. 쓰레기를 찾아낸 뒤에 그것들을 철저히 없애기 위해서다”라고 말했다. 우리도 그러했다. 『조선상고사』의 저자 단재 신채호의 경우 조선조 문약(文弱)의 전통이 끔찍했기 때문에 “일찌감치 육경(六經)을 불 싸질렀어야 했다”고 일갈했다. 그렇다면 『중국의 품격』은 후스와 단재가 없애고 불 태우려했던 것에서 보석을 재발견하려는 21세기의 노력이다.

 확실히 동북아 한자문화권은 예전과 달라졌는데, 이 책은 중국 ‘국학 붐’에 대한 호응이기도 하다. 지난해 주윤발 주연의 영화 ‘공자’, 세계를 대상으로 한 공자학원의 설립도 저들의 자부심을 반영한다. 그러나 이 책은 자국 중심주의의 흔적은 별로 없으니 안심해도 된다. 강연 내용을 토대로 했기 때문에 일단 평이하면서도 깊이도 있어 전통사상 입문서 류와는 차별화된다.

러우위리에는 유교·불교·도교를 두루 이야기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석학의 한 명으로 평가 받는데, 스케일도 크다. 즉 서양의 오랜 지적 전통과 맞대결하려는 자부심이 곳곳에 보인다. 그에 따르면 동양의 품격은 인본주의에서 나온다. 그건 한 마디로 “사람을 근본으로 하는 문화”(94쪽)다. 신을 근본으로 하는 서구 신본주의(神本主義) 문화는 차원이 다르다. 저들도 합리적이고 이성을 앞세운 근대문명을 일굴 때 신본주의가 족쇄이자 걸림돌이라는 걸 감지했다.

 그래서 근대 휴머니즘이 꽃을 피운 18세기 계몽주의에는 선교사들이 수입해간 중국 인본주의 영향이 스며들어 있다. 당시 중국문명이 대안으로 검토·수용됐던 게 사실이다. 그럼 인본주의 핵심은 무엇일까? “위로는 신에 대한 숭배를 중시하지 않고(上薄拜神敎), 아래로는 물질적 가치에 휘둘리지 않는 가르침(下防排物敎)”이다. 이게 이 책의 키워드다. 이런 태도가 동북아 고유의 가치를 창출해냈다는 주장은 논란의 소지가 아주 없지 않지만, 큰 줄기는 무리 없다. 흥미롭게도 저자는 유교·도교의 사이도 그렇게 벌려놓지 않는다.

 일테면 무위자연(無爲自然) 사상은 도교 사상이지만 유교 역시 비슷했다는 것이다. 하늘과 인간이 하나라고 하는 천일합일 사상도 그렇다. 만물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순응해 조화로운 공동체를 만들려는 태도란 점에서 닮은꼴이다. 자연 파괴의 충동을 숨긴 서구 휴머니즘과 또 다른 게 사실이다. 한가지. 이 책에 실린 중국 전통의학에 관한 두 꼭지 글도 관심거리다. 중국의학에는 전통사상의 모든 게 담겨있다는 게 저자의 논리다.

의문은 남는다. 의문은 이 책에 긴 서문을 쓴 도올 김용옥의 질문이기도 하다. “그토록 훌륭한 인문정신을 왜 우리는 근대 초입에 제도적으로 구현하지 못했느냐?” 한 권의 책에서 어찌 세상 모든 것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으랴. 그렇다고 이런 질문이 『중국의 품격』에 담긴 논의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이 책은 어디까지나 인문정신의 회복, 동북아 인문학의 재발견 쪽이니까.

조우석(문화평론가)

함께 읽을 만한 책

러우위리에의 『중국의 품격』과 짝을 이룰만한 책은 일본 학자 모로하시 데쓰지의 『공자 노자 석가』(동아시아)이다.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대한화사전(大漢和辭全)』의 저자인 그가 100세 되던 해에 펴냈다. 공자·노자·석가의 가상토론 방식으로 동양사상을 압축해 보여준다. 해박함과 넓은 시선은 『중국의 품격』과 흡사하다. 다른 건 유불선(儒佛仙)의 차이점 변별에 상대적으로 악센트가 찍힌 점이다. 그에 비해 『중국의 품격』은 3교의 사상을 회통하는 쪽이다. 서로 보완해 읽을만하다. 유감스럽게도 한국 쪽의 이런 ‘노회한 저술’이 금세 떠오르지 않는다. 있다면 ‘젊은 유학철학서’인데, 그건 한형조의 3부작 『왜 동양철학인가』 『왜 조선유학인가』 『조선유학의 거장들』(이상 문학동네)다. 전통사상의 자기반성도 경청할만한데, 러우우리에나 모로하시보다는 읽기에 빡빡하지만 치열한 접근이 큰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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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살아있는 물리학자 가운데 최고로 추앙받는 미국 텍사스 대학의 스티븐 와인버그의 교양 과학책을 몇 년 전에 번역한 적이 있었다.

나는 과학 이야기로 가득한 그의 저작을 읽으며, 프런티어 과학자로서의 그가 정말로 지금의 현대 문명을 이끌고 있는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구나(어쨌든 지금 우리는 '과학 문명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만들어 온 문명을 아끼면서 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점을 암암리에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한국어 번역본 출간에 때맞춰 진행했던 인터뷰에서 문명에 대한 질문들을 준비했었다.

그런데 내 주변의 동료 과학자들은 대개 "뜬금없이 웬 문명?"이라는 반응이었다. 이런 반응은 나이, 지위, 성별, 혹은 분야를 가리지 않았다. 언제인가 인문학자들과 함께하는 어떤 모임에서 문명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더니, 많은 사람들은 물리학자가 '감히' '문명'을 생각하다니 기특하다는 듯한 격려의 말을 내게 던졌다.

비슷한 일들을 몇 번 겪으면서 나는 한국이 문명국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한국의 지상과제는 선진국 진입이 돼 버렸지만, 나는 한국이 진정한 문명국가가 되는 것이 거시경제 지표상의 몇몇 기준을 만족하는 선진국에 진입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문명의 사전적인 의미는 "보다 나은 삶의 양태"이나 나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독자적인 통찰이 가능한 사회를 문명사회라고 생각한다.)


나처럼 '불경'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아마도 레베카 코스타의 <지금, 경계선에서>(장세현 옮김, 쌤앤파커스 펴냄)가 일종의 21세기형 비급(秘笈)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원제 'Watchman's Rattle'에서 알 수 있듯이 현대 인간 문명의 최전선에서 파수꾼이 보내는 경고음이다.

이 경고음은 상당히 독특하면서도 흥미롭다. 파수꾼 코스타가 보내는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인류 문명의 복잡성이 가속화되는 정도가 인간 두뇌의 인식이 진화하는 정도를 훨씬 능가하기 때문에 인식의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두뇌에는 사회적 복잡성에 맞설 수 있는 '통찰'이라고 하는 진화의 선물이 있어서 기존의 게임 법칙을 완전히 뒤엎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할 잠재력이 있다. 통찰은 말하자면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를 외쳤던 순간의 깨달음과 비슷하다. 통찰에 이른다는 것은 "이전까지 간파하지 못했던 여러 요소 사이의 연결고리를 포착할 수 있는 상태"로 갑작스럽게 도약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우리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정보와 기술을 보유하고 있어서 사회 복잡성과 두뇌 진화의 불균등한 발전이 야기하는 문명 붕괴를 막을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다. 이 길을 가로막는 데에는 크게 다섯 가지의 슈퍼밈(사회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널리 만연하여 다른 모든 믿음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거나 억압을 가하는 모든 종류의 믿음, 생각, 행동을 가리키는 말)이 있다. 불합리한 반대, 책임의 개인화, 거짓 상관관계, 소통 없는 사고, 극단의 경제학이 그것이다. 저자는 이 모든 슈퍼밈을 극복하고 단기적 완화책과 함께 근본적인 치유책을 함께 준비할 것을 주장한다.

이 모든 논의의 출발점은 인간 두뇌가 현대 문명의 복잡성을 모두 따라 잡을 만큼 충분히 진화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것은 코스타가 처음으로 제기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도 <블랙 스완>에서 현대 문명의 복잡성과 이에 뒤처지는 인간의 한계를 지적했고 그로부터 경험주의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탈레브나 코스타가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인간의 다른 신체적인 한계를 생각해 보면 이는 당연하다. 우리는 하늘을 날 수도 없고 물속에서는 몇 분을 버티지 못한다. 세상이 아무리 눈 튀어나오게 빨리 돌아가도 인간의 걸음걸이와 달리기 속도는 그만큼 획기적으로 향상되지 않았다.

인간 두뇌가 현대 문명을 직관적으로 이해하도록 진화하지 않았다는 점은 오래 전부터 과학자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20세기의 시작과 함께 촉발된 두 번째 과학혁명은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두 개의 기둥으로 삼고 있다.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이 중요해지는 물리적 영역은 인간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거시 세계와는 거리가 멀다. 상대론적인 효과를 보려면 물체의 속도가 광속(초속 30만km)에 근접해야만 한다. 양자역학의 효과를 확인하려면 원자 수준으로 내려가서 세상을 들여다봐야 한다. 두뇌를 포함한 인간의 모든 신체 기관은 이런 물리적인 영역에 최적화되도록 진화하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우리 인간은 냉정한 자연선택의 결과 도태되고 말았을 것이다.

특히나 양자역학은 지금까지도 인간이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분야로 여전히 남아 있다. 양자역학이 태동했던 초기에는 양자역학의 출현과 발전에 큰 공을 세웠던 플랑크나 슈뢰딩거, 심지어 아인슈타인조차도 현재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른바 코펜하겐 해석에 격렬히 반대했다. 당시의 과학자들은 물론 철학자들조차도 왜 인간의 언어는 원자 이하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일까 하며 한탄을 했다고 한다.

저명한 물리학자인 레너드 서스킨트는 그의 최신작 <블랙홀 전쟁>에서 양자역학을 이해하려면 아예 자신의 두뇌 신경회로를 완전히 재배선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충고한다. 이는 물리학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현대 물리학에 대해 강연을 하거나 글을 쓰면 나는 항상 내용이 어려우니 좀 더 쉽게 설명해 달라는 주문을 받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양자역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리학자들조차도 자신의 뇌신경을 재배선 해야만 한다는 얘기를 들려준다. 인간의 감각과 인지 능력은 대체로 자신의 신체 크기와 엇비슷한 척도의 자연환경에 최적화되도록 진화해왔다. 따라서 미시 세계를 인간이 직관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원래부터'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양자역학처럼 시간을 많이 들여도 쉽게 이해할 수 없지만 그만큼 가치 있는 것들이 적지 않다는 얘기도 꼭 들려준다.)

비슷한 논리를 약간만 확장해 보면 현대 문명의 복잡다기한 상황을 인간이 단번에 이해하고 통제하는 데에는 진화생물학적인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코스타의 결론에 이르게 된다. 코스타는 이 한계를 극복할 진화의 선물로 '통찰'을 지목했다. 생물학이나 뇌 과학에 대해 문외한인 나로서는 코스타가 현대 문명의 돌파구로 제시한 이 통찰이 얼마나 학문적으로 강건한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는 다섯 가지 슈퍼밈을 피해가며 진화의 선물인 통찰을 얻는다면, 지금 인류가 이상 기후, 자원 고갈, 테러, 경제 위기 등 현대 문명이 처한 위기적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 나는 두 가지 의문이 든다.

첫째, 지금 우리가 문명사적인 위기들, 자원 고갈이나 이상 기후나 테러리즘 등등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과연 그 문제의 해결책을 '통찰'해 내지 못하기 때문일까? 어쨌든 복잡성이 증가한 것은 사실이다. 예컨대 서브 프라임 모기지가 여러 단계의 파생 상품을 거치면서 누구의 위험성이 누구에게 얼마만큼 전가되는지를 일일이 추적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신용에 위기가 생겼을 때 그 모든 체계가 무너질 것이라는 점은 구석기 시대의 두뇌로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중동 문제가 부족들끼리 생존 경쟁을 벌이던 시절의 문제와 비교했을 때 그 본질에 있어서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를 발견하는 정도의 통찰을 더 필요로 하는 것일까?

우리가 아직 우리 두뇌의 통찰을 자유롭게 제어할 수 없기 때문에, 문명사적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통찰을 기다리는 것이 (아무리 갖가지 두뇌 훈련을 한다 하더라도) 과연 좋은 해결책인지도 의문이다. 게다가 그 통찰이라고 하는 것이 말하자면 "궁극적인 해결책"의 다른 말이어서, 결국에는 인간이 문명사적인 문제들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책을 인식할 수 있는 진화의 선물이 있으므로 문명을 구할 수 있다는 동어반복적 논리에 빠질 수도 있다. (어떤 문제든 궁극적인 해결책을 생각해 내서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식으로.)

둘째, 설령 우리가 문명사적인 문제들에 대한 통찰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가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코스타가 두 번째 슈퍼밈으로 책임의 개인화를 지목하면서 설명했듯이, 대부분의 문제는 시스템적으로 발생한다. 시스템적으로 생긴 문제를 개인에게만 전가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마찬가지로, 문명사적인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 각자가 두뇌 개발을 열심히 하고 통찰에 이르는 가능성을 높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본문에서 지적했듯이 미국 에너지부 장관인 스티븐 추의 제안대로 모든 지붕과 도로를 흰색으로 칠한다면 지구 온난화에 획기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말하자면 노벨상 수상자인 추의 통찰이다. 그런데 왜 모든 나라에서는 지붕과 도로를 흰색으로 칠하지 않을까? 시스템적인 문제에 대한 시스템적인 해결책은 무엇일까?

구조적인 해결책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제아무리 천지를 뒤엎는 통찰이라도 현실에서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 중소기업이 어느 날 갑자기 획기적인 기술을 가진다고 해서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나 한국적인 풍토에서는 중소기업의 기술이 대기업의 갖은 압박을 물리치고 온전히 생산력으로 전환되어 안정적인 수익을 내려면 제도와 체제가 뒷받침되어야만 한다.

코스타가 제시한 다섯 가지 슈퍼밈은 깊이 음미해 볼 만하다. 이들은 저자의 말마따나 우리의 전진을 가로막는 오래된 믿음들이다. 적어도 이 다섯 가지 슈퍼밈을 제대로 피하기만 하더라도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좀 더 정확하게 직시할 수 있을 것이다. 사태의 명확한 인식이야말로 문제 해결의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리는 오래된, 그리고 잘못된 믿음을 타파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한국에서도 이런 수준의 고민을 요구한다면 또 다시 뜬금없는 욕심으로 치부되는 것일까?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고 일부 분야에서 세계 1등을 선점한다고 늘 스스로를 자부하지만 우리의 인식은 예나 지금이나 한반도와 동북아시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문명사적인 시각을 가진다는 것은 단지 지구 반대편까지 혹은 수백만 년 전까지 관심사를 확대하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우리 스스로를 잘 알기 위해서조차도 우리가 인류사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어디에 어떻게 위치해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어야만 한다.

2012년은 총선과 대선이라는 굵직한 정치 일정이 한국 사회를 지배할 예정이다. 그래서 예컨대 <진보 집권 플랜> 같은 고민들이 하나씩 세상에 고개를 내밀기 시작할 것이다. <진보 집권 플랜>을 읽으면서 나는 줄곧 간이 되지 않은 곰탕을 먹는 느낌이었는데, 그건 아마도 이 문명사적인 고민의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인 것 같다.

앞으로 <진보 집권 플랜 2>가 나오든 혹은 <보수 집권 플랜>이 나오든, 그렇게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선은 <지금, 경계선에서>를 먼저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이종필 건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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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태블릿PC 등 스마트 기기가 보급되면서 '스마트 혁명'의 바람이 생활 곳곳에 몰아치고 있다. 출근길에 이메일과 인터넷 뉴스를 검색하는 등 스마트 기기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찾을 수 있다.

국내 한 대기업은 스마트폰을 선전하면서 '세상이 만만해진다'는 광고 문구로 소비자의 눈길을 사로잡기도 했다.

과연 스마트 기기 덕분에 세상은 만만해졌고 인간은 과연 더 '스마트'해졌을까.

미국의 세계적인 IT 미래학자인 니콜라스 카는 스마트 기기 등을 통해 인터넷 사이트와 서비스에 익숙해지고 의존하게 되면서 "뇌를 잃어버렸다"고 고백한다.

"나의 뇌는 굶주려 있었다. 뇌는 인터넷이 제공하는 방식으로 정보가 제공되기를 바랐고, 더 많은 정보가 주어질수록 더 허기를 느끼게 된 것이다. 나는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을 때조차도 이메일을 확인하고, 링크를 클릭하고, 구글에서 무언가를 검색하고 싶어했다."

2008년 미국 언론에 기고한 칼럼 '구글이 우리는 바보로 만들고 있는가?'에서 인터넷이 양산해내는 얕고 가벼운 지식을 경고해 주목받았던 그는 저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청림출판 펴냄)에서 인터넷이 인간의 사고 능력을 빼앗아가 버렸다고 말한다.
이 책에서 그는 문자혁명부터 인쇄혁명, 인터넷혁명에 이르기까지 기술과 도구의 발전이 인간의 삶과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본다.

특히 디지털 기기에 종속된 이후 인간의 사고방식이 어떻게 변하는지, 글을 쓰고 읽는 방식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등 디지털 기기와 정보기술의 폐해를 날카롭게 파헤친다.

저자는 인터넷이 인간의 생각을 넘어 뇌 구조까지 바꿨다고 말한다.

인터넷에서 정보를 검색하고, 검색된 내용을 빠르게 훑어보는 등 인터넷 사용과 관련된 뇌 신경회로는 강화된 반면 상대적으로 깊이 사고하고 분석하고 통찰하는 능력은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인간이 기술의 편리함을 얻기 위해 지불한 대가도 크다.

저자는 "기술의 힘을 지니기 위해 우리가 지불한 대가는 소외"라면서 "사고의 도구들은 확장되고 그 대가로 우리의 자연스러운 능력들 중 가장 사적이고 인간적인 것들, 즉 이성, 인식, 기억, 감정 등은 마비된다"고 말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운전자들에게 위치를 알려주는 GPS(위성항법장치).

저자는 런던 택시 운전사들의 뇌에 대한 연구 결과를 소개한다. 연구를 이끌었던 신경과학자인 엘리노어 맥과이어는 "위성 내비게이션은 택시 운전자들의 뉴런(신경세포)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GPS를 사용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GPS를 사용하면 시내 도로 지리를 알아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뇌는 학습 흥미를 잃게 되고, 뇌에 쌓이는 지식의 양도 줄어들어 결과적으로 뇌의 신경세포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다양한 연구결과와 사례를 제시하면서 인터넷 등 기술 혁명이 결국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깊은 사고'를 빼앗아 갈 것이라고 경고한다.

"우리가 새로운 정보 환경에 맞게 변화하고 있다는 주장들은 분명 옳다"면서 그러나 "인간성의 정수라고 여긴 '깊은 사고'는 돌진하는 진보의 희생양이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원제는 'The Shallows'로, 영문판은 지난해 출간됐다. (연합뉴스, 황윤정 기자,2011/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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