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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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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전신마비 상태, 나를 돌봐줄 수 있는 부모도, 형제도, 배우자도, 자녀도 없다. 유일한 간병인이자 유일한 가족인 장모가 어느 날부터 타운하우스의 정원 한 켠에 구덩이를 파기 시작한다. 아주아주 깊은 홀을. 공포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소설은 '오기'라는 이름의 남성 화자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아내와 강원도로 여행을 가던 중 빗길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한다. 조수석의 아내는 사망하고, 오기는 눈을 깜빡이는 것 외에는 의사표현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한때는 교수로 탄탄대로를 걷던 그가 한순간에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처지에 놓인 후 느끼는 무력감과 공포를 그렸다. 아니, 중반까지는 그런  이야기인줄 알았다. 반전 아닌 반전이 시작된 건 중간 즈음, 대학원 동료들을 초대해 정원에서 바베큐파티을 열었던 날에 대한 회상부터였다. 이날 이후로 아내는 정원을 가꾸는 일에만 몰입하기 시작하고, 오기는 그런 아내를 이해하지 못한다. 


오기가 생각하기에 죄와 잘 어울린다는 것만큼 사십대를 제대로 정의 내리는 것은 없었다. 사십대야말로 죄를 지을 조건을 갖추는 시기였다. 그 조건이란 두 가지였다. 너무 많이 가졌거나 가진 게 아예 없거나. 즉 사십대는 권력이나 박탈감, 분노 때문에 쉽게 죄를 지었다. 권력을 가진자는 오만해서 손쉽게 악행을 저지른다. 분노나 박탈감은 곧잘 자존감을 건드리고 비굴함을 느끼게 하고 참을성을 빼앗고 자신의 행동을 쉽게 정의감을 포장하게 만든다. 힘을 악용하는 경우라면 속물일 테고 분노 때문이라면 잉여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십대는 이전까지의 삶의 결과를 보여주는 시기였다. 또한 이후의 삶을 가늠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했다. 영영 속물로 살지, 잉여로 남을지. (78쪽)


오기는 자신을 '전자'로 여겼다. 오기가 생각하는 아내는 후자에 가까웠을지도 모르겠다. 오기의 시점에서 서술되었기에 감춰져 있던 사건의 전말이 소설 후반부로 갈수록 드러난다. 바베큐파티 당시 술취한 후배와 오기 사이에 어떤 사건이 일어났고, 아내에게 포착됐다. 오기는 아내를 무시했고, 대학원 동료와 바람을 피웠으며, 교수 임용 때도 은밀히 루머를 퍼트려 경쟁자를 따돌렸다. 학생을 건드린 적도 있었다. 행복의 결정체로 보이는 타운하우스의 외향과는 달리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않았고, 그럴수록 아내는 가드닝에 집착했다.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던 결혼생활을 먼저 끝내자고 한 이는 아내였다. 성공을 위해 속물이 된 남자의 사생활에 대한 고발문을 세상에 알리겠다고 했다. 교통사고는 아내와의 말싸움, 몸싸움 중에 일어난 것이었다. 



언제부터 생겨난 홀인가.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아버지에게 멸시당하며 자란 오기의 성장기부터? 가진 것없고 고아라고 장인에게 무시당했을 때부터? 이해할 수 없는 처가식구들을 외국인으로 생각하기로 한 때부터? 무리해서 타운하우스로 이사하고 아내와 점점 멀어진 때부터? 대학원 동료와 불륜을 저지른 때부터? 말다툼을 하다 교통사고를 낸 때부터? 전신마비 환자가 된 후 장모가 아내의 책상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후부터? 장모가 대학원 동료들을 집으로 불러 오기의 모습을 보여준 때부터? 오기의 인생에서 작은 균열로 시작되었던 홀은 점점 커져, 그를 삼키고도 남을 정원의 커다란 구덩이가 되었다. 


누가 가장 불행한 사람인가. 본인의 의지와 달리 발버둥쳐도 점점 홀로 빠져들어가는 오기일까, 불행한 결혼생활 끝에 사고로 목숨을 잃은 아내일까, 남편 대신 애착해온 딸을 맡긴 사위가 알고보니 천하의 나쁜 놈이었다는 걸, 딸이 죽고 나서야 알게 된 장모일까. 때로는 오기의 무력감에 공감하고, 때로는 아내의 배신감에 감정이입이 되기도 하며, 억장이 무너질듯한 장모의 마음도 이해가 된다. 그래서 이야기가 더 공포스럽고, 더 무겁게 느껴지며, 읽고 나서도 자꾸만 생각이 나는 묘한 소설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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