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6월
평점 :
미국 청소년 필독서인 이 책의 원제는 "To Kill a Mockingbird (흉내쟁이지빠귀 죽이기)"로, 하퍼 리의 전작이자 후속작인 <파수꾼> 발간에 앞서 한국에 새롭게 소개되었다. 이야기는 1930년대 남부 앨라배마 주의 메이콤이라는 작은 읍내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9살 소녀 스카웃은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4살 많은 오빠 젬, 변호사인 아빠 애티커스 핀치와 함께 살고 있다. 그리고 흑인 가정부 캘퍼니아 아줌마가 살림을 맡아 아이들을 돌본다.
스카웃과 젬이 학교가는 길목에 위치한 래들리 가는 호기심의 대상이다. 부 래들리(본명은 아서 래들리)는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은둔자로, 아이들 사이에 소문은 무성하지만 실체는 밝혀진 적 없는 무섭고도 신비로운 존재다. 사춘기 때 물의를 일으켰다고도, 서른이 넘어서 아버지의 허벅지를 가위로 찔렀다고도 하고, 아버지에 의해 감금되어 있다고도 한다. 아이들은 부 래들리의 얼굴이 궁금해 마당 안을 기웃거리지만 좀처럼 만날 수 없다. 그 집앞 나무 옹이구멍에 가끔 놓여져 있는 껌, 메달, 비누조각인형 등의 선물을 제외하고는. 어느날 아버지 래들리의 임종으로 관이 집 밖으로 실려 나올 때, 백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한 적이 없는 캘퍼니아 아줌마는 그를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넣어 주신 인간 중 가장 비열한 인간"이라 평가한다. 그 이후의 언급은 따로 없기에 독자들은 은둔자 부 래들리보다는 어쩌면 아버지에게 뭔가 문제가 있었을지 모른다고 어렴풋이 추측해 볼 뿐이다.
1929년 미국의 경제 대공황 이후, 가난한 메이콤의 일상은 스카웃이 입학한 학교에서의 에피소드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새로 부임한 담임 선생님이 점심 도시락을 싸오지 않은 월터에게 돈을 주자, 아이들은 커닝햄 집안은 갚을 돈이 없기에 무의미한 행동이라 여긴다. 주정뱅이 유얼의 아들은 개학 첫 날만 학교에 오기에 유급 당하는 것이 아이들에겐 놀랄 일이 아니고, 아이의 머리에서 머릿니가 튀어 나오는 걸 보고 기겁하는 선생님을 아이들은 신기한 눈으로 바라본다. 이때, 스카웃의 반에서 가장 가난한 학생조차도 백인임을 기억해야 한다. 흑인이 같은 반은커녕 한 학교에 다닌다는 것조차 상상할 수 없던 시절이기에.
같은 앨라배마 주의 다른 도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으로 대표되는 흑백차별 철폐운동이 1955년에 일어났다는 걸 감안하면, 그보다 20여년 전 시골마을의 상황이 어떠했을지 그려볼 수 있다. 일요일에 아버지의 부재로 가정부 캘퍼니아 아줌마를 따라 흑인 교회에 가게 된 스카웃은 이상한 광경을 목격한다. 성경책과 찬송가 없이 앞에서 흑인 아저씨가 선창을 하면 나머지 사람들이 따라 부르는 모습이었다. 의아해 하는 스카웃에게 캘퍼니아 아줌마는 가난해서 찬송가 책을 살 수 없는 것이라기 보다는, 글을 읽을 수 있는 흑인이 몇 명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흑인과는 같은 교회를 다니지도 않고, 식사도 함께 하지 않으며, 혹여나 인종이 다른 남녀가 사랑에 빠질 경우 주변의 손가락질을 받는 흑백 분리 정책이 있던 시기였다.
이야기는 스카웃의 아버지가 백인여성 성폭행 혐의로 재판장에 선 흑인 청년의 변호를 맡게 되면서 절정에 이른다. 스카웃과 젬은 유색인종 전용석에서 재판을 지켜보고, 그가 무죄라는 정황적 증거가 있음에도 배심원들이 주정뱅이 백인의 손을 들어주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은 뿌리깊은 차별과 배척은 죄 없는 한 사람을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 어른들의 이해할 수 없는 판단에 크게 실망한 젬에게 앞집 모디 아줌마는 이렇게 말한다.
이런 생각을 했단다. 애티커스 핀치는 이길 수 없어, 그럴 수 없을 거야, 하지만 그는 그런 사건에서 배심원들을 그렇게 오랫동안 고민하게 만들 수 있는 이 지역에서 유일한 변호사야. 그러면서 나는 또 이렇게 혼자서 생각했지. 우리는 지금 한 걸음을 내딛고 있는 거야, 아기 걸음마 같은 것이지만 그래도 진일보임에는 틀림없어. (399쪽)
이 책의 제목이 '앵무새 죽이기'인 이유는 스카웃의 아빠가 아이들에게 공기총을 사주는 일화에서 드러난다. 애티커스는 맞힐 수만 있다면 어치새를 모두 쏘아도 좋지만, 앵무새를 죽이면 죄가 된다고 주의를 준다. 앵무새는 인간을 위해 노래를 불러주고, 농작물에 해를 입히지도 않는 무고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앵무새'를 상징하는 상대적 약자이자 무고한 인물이 여럿 있다. 먼저,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편견 때문에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사회적 낙인이 찍힌 부 래들리이다. 두 번째로는 감히 백인여성의 유혹에서 도망친 흑인(심지어 유부남인데)이자 장애인, 그렇기에 누명을 쓰고 실제로 목숨을 잃은 톰 로빈슨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 가족 없이 자신이 욕하는 '흑인' 소녀의 시중만 받으며 세상을 뜬 듀보스 할머니. 그도 어찌 보면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세상을 떠난 소외된 앵무새가 아닐까 싶다.
스카웃이 9살일 때 시작한 소설은 12살이 되어 마무리된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와 오빠 젬이 겪은 사건을 통해 아이들은 겉모습뿐 아니라 마음과 생각도 훌쩍 성장했다. 독자들은 그들의 시선을 통해 그 시대 남부의 실상을 간접 체험하며 인간의 이중잣대, 편견,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욕심을 들여다 본다. 한편 애티커스 변호사, 모디 아주머니 등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인물들을 통해 희망을 품기도 한다. 또한 선동에 이성을 잃고 톰을 죽이려 했던 폭도였던 동시에 스카웃의 천진한 말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마음을 바꾼(그러나 행동으로 옮기긴 어려운) 커닝햄과 같은 사람도 있다. 우리 사회의 불합리성을 보고 잘못되었다 느끼고 분노는 하지만, 나서서 행동하기는 주저하는 대중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이 책을 두고 왜 미국에서 편견과 인종에 관한 최고의 토론 교재라 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곁에 두고 우리 사회를 자주 비춰봐야 할 책이다. 현대판 '앵무새 죽이기'는 모습을 바꿔 계속 등장하고 있으니.
더 먼저 집필됐으나 50년 이상 지나서야 발표된 후속작 <파수꾼>에서는 성인이 된 스카웃이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니, 속편도 놓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