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의 영어 선생님 - 북한 고위층 아들들과 보낸 아주 특별한 북한 체류기
수키 김 지음, 홍권희 옮김 / 디오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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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사>에 이은 수키 김의 두 번째 책. 한국계 미국인으로, 전작에서 이민 2,3세대의 정체성 혼란과 한국계 이민사회의 부정적인 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해내 호평을 받았다. 이번에는 평양 과학기술대학교에 영어교사로 잠입해 북한 엘리트 학생들을 직접 만난 경험을 생생하게 써냈다. 원제는 "Without You, There is No Us".  작가의 외할머니는 이북 출신이었고, 피난 중에 장남을 잃었다. 분단의 아픔은 저자 본인 가족사의 상처이기도 했다. 

 

그가 담당한 평양 학생들은 평범하지 않았다. 1학년이었지만 대부분 김일성종합대학 등 다른 학교에서전학해 온 학생들이었고(타 대학들이 폐쇄되었기 때문에), 성적에 따라 1-4반으로 나뉘었다. 저자는 가장 공부를 잘하는 반인 1반과 가장 끝 반인 4반을 맡았다. 학생들 다수는 아버지가 의사, 과학자인 북한 고위층 자제들이었다. 서먹서먹함, 경직된 분위기, (수업내용과 부교재는 물론) 모든 말과 행동을 감시 당하는 상황이었지만 교사와 학생은 조금씩 마음을 열며 같은 '사람'이라는 걸 깨달아 간다. 친구의 예쁜 여동생에 대해 농담하고, 이성친구에게 호감을 얻는 방법을 얘기할 때면 평범한 캠퍼스의 모습 같기도 했다.

 

그러나 좁혀지지 않는 간극은 물론 있었다. 저자는 학생들의 상식이 턱없이 부족함에 놀랐다. 그들은 주체사상탑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주장하고, 놀이공원도 북한이 세계 최고, 냉면과 김치가 세계 최고의 음식이라 한다. 심지어 교과서에는 미국 정부가 애틀랜타 올림픽 공식 음식으로 김치를 지정했다고 써있다 주장한다. 맨체스트유나이티드에 북한 선수가 스카우트 되었다는 얘기도 있었다.  저자에 따르면 "늘 자신들이 최고라고 선언하면서 자신과 누구도 본 적 없는 바깥 세계를 비교"하곤 했고, 최상급 표현은 너무 자주 쓰여 그 본래 의미를 잃어 갔다.

 


나는 세상에 대한 그들의 일반적인 지식이 놀랄 만큼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들은 북한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들인데 유엔, 타지마할, 기자의 피라미드 등의 사진은 멍한 표정만 이끌어 낼 뿐이었다. 몇명만이 한참 더듬거린 뒤에야 에펠탑과 스톤헨지의 이름과 위치를 추측했다. 그들이 과학과 기술 전공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어느 나라가 달에 처음으로 인간을 착륙시켰는지 아무도 몰랐다. (…)

동시에 그들 모두는 알래스카가 터무니없이 싼 값인 720만 달러에 미국에 팔린 것은 알고 있었는데 이것은분명히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확실한 수업의 결과인 듯했다. 그들의 영어 단어 수준이 고르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모두가 줄줄 외는 한 구절이 있었는데 그것은 '브레인 드레인(brain drain. 두뇌유출)'이었다. 정부가 엘리트들의 탈북이 두려워서 그들에게 이 단어를 연습시켰을까? 단어 공부를  위한 게임 중 종이접기를함께해 보니 그들이 만들 줄 아는 것은 전투기뿐이었다.  (104쪽)



컴퓨터공학을 전공하지만 스티브 잡스가 누군지, 페이스북이 뭔지 아마존 킨들이 뭔지 모르는 아이들. '과학기술'대학에 다니지만 교사가 없어 일년 내내 영어만 배우는 아이들. 미 제국주의에 반대하며 맥도날드의 폐해에 대한 에세이를 쓰겠다더니 "맥도날드에서는 무슨 음식을 만듭니까?"하고 되묻는 아이들. 반 대항 퀴즈게임에서 진 이유는 컨닝하다 '걸렸기' 때문이 아니라 컨닝을 '잘'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부끄럼 없이 공개적으로 말하는 아이들. 주말 오전에 노동한다는 걸 알고 묻는 '오전에 뭐 했니'란 질문에 11시까지 늦잠을 잤다고 천연덕스럽게 거짓말하는 아이들. 


교사는 가까워진듯 하면 다시 멀어지는 학생들로 인해 좌절하기도 하고,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체제에 분노하기도 한다. 아이들의 인식의 폭을 넓혀 주고 싶어하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하는, '질문하는' 제자에게는 정작 하고픈 말을 꾹 삼킨다. 금지된 호기심 때문에 제자가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하는 건 원치 않으니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들이 미국을 비난하는 것으로 에세이 주제를 바꾸기로 단체로 결정한 것은 저커버그에 관한 기사 때문이었다. 내가 자극을 주려고 의도한 것을 그들은 내가 자랑하려는 것으로 보고 업신여김을 당했다고 생각했던 것임에 틀림없었다. 수 세대 동안 그들에게 스며들었던 민족주의로 인해 너무나깨지기 쉬운 자존심은 열등감이 되어 그들은 자신을 제외한 세계의 나머지를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시민들로 만들어졌다. 그들의 인식을 확장하려는 나의 노력은 계속 역효과를 냈다. (306쪽)


이 대목에서는 얼마전 UN 북한인권회의에서 북한 대표단의 막무가내 발언이 떠올랐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는 이유, 그의 얼굴에 떠오른 불만족스런 표정은 꾸며낸 표정이 아니었다. 그들은 뼛속 깊이 믿고 있었다. 그가 옳다고. 



책을 읽으며 저자와 함께 웃고 울었다. 자유를 반납하고 모든 말과 행동을 자기검열하며 조심할 때 함께 답답함을 느꼈다. 마침내 저자가 마음의 욕구를 따르는 방법도 자유를 누리는 방법도 모르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학생들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나도 같은 먹먹함과 좌절감을 느꼈다. 


북한과 한 민족임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가슴으로 이해하지는 못하는 내 또래 세대(80년대생?)에선 통일 이후의 삶이 쉽게 상상되지 않는다. 서로 간의 문화 차이가 너무 커져서, 통일 후의 갈등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북한의 실상을 생생하게 접하게 된 이후의 생각은 달라질 것 같다. 조금씩 밀려들어가는 변화의 물결을 언제까지고 막아내지는 못할 텐데. 어느 날 갑자기, 어떤 형태로든, 찾아올 통일의 날을 누군가는 미리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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