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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주식회사
사이먼 리치 지음, 이윤진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2월
평점 :
절판
요즘같은 시기에 딱 어울리는 유쾌한 소설을 만났다. 아이디어가 통통 튀는, 읽으면서 무한 상상하게 되는 즐거운 소설. 유머 작가이자 극작가인 사이먼 리치의 <천국주식회사>다. 이 회사의 최고경영자는 하느님이고 직원들은 천사다. 지구 사업에 회의감을 느낀 CEO는 돌연 전직을 선언하고, 인류의 종말을 막기 위해 천사들이 고군분투한다는 줄거리가 독특했다.
주인공 크레이그는 천국의 기적부에서 컴퓨터를 통해 기적 가능성 알람을 확인하고 지구에 소소한 기적을 만드는 일을 한다. 8월의 뜨거운 더위에 지친 소년, 소녀에게는 소화전을 살짝 터트려 물벼락을 선사하기도 하고, 중년 여성의 낡은 점퍼 주머니에서 지폐 뭉치를 발견하게 한다거나, 오랜만에 마주친 동창의 이름을 기억해 내려 애쓰는 중년 남성에게 생각해낼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는 등 '기적 코딩'을 통해 인간들의 삶에 간접적으로 개입한다. 뜻밖의 행운에 즐거워하는 인간들을 보며 보람을 느낀다.
"대부분의 천사들은 자신을 예술가라고 여겼다. 우아함을 위해 분투하는 섬세한 장인 말이다. 그들의 목표는 최대한 눈에 안 띄게 존재하면서 세상을 절묘하고 품위 있게 바꾸는 것이었다." (83쪽)
한편, 기도 수취부 계약직 사원이던 일라이자는 긴급도에 따른 7등급 기도 분류체계를 구축한 성과를 인정받아 기적부 천사로 승진해 크레이그의 후배가 된다. 하느님의 집무실에서 우연히 자신이 분류한 인간들의 기도가 읽혀지지 않은 채 쌓여있는 것을 보고 기겁한 일라이자는 홧김에 '그럴 거면 사업을 접는 게 어떠냐'고 내뱉는다. 다음 날 천사들의 메일함에는 한 달 후 지구를 파괴할 것이라는 CEO의 메시지가 도착한다.
지구의 멸망을 막기 위해 크레이그와 일라이자는 하느님과 내기를 한다. 무작위로 쌓여있는 기도리스트에서 한 가지 기도를 이뤄줄 수 있다면 지구멸망 결정을 철회하기로 한 것. 학창시절 첫 눈에 반했지만 서로에게 용기를 내지 못했던 남녀, 샘과 로라의 사랑이 기적처럼 이뤄져야만 한다.
"두 인간을 정확히 같은 시간에 정확히 같은 장소로 모이게 만들기 위해서는 수백 가지의 변수들을 조정해야 했다. 그건 창의성, 정확한 타이밍, 구역질 나올 정도의 방대한 조사량이 요구되는 일이었다. 세부 사항 중 어느 하나라도 망치면, 모든 게 헛수고가 됐다. (중략) 서로 떨어져 있는 거리는 채 여섯 블록이 안 됐다. 그러나 뉴욕시티에서는 여섯 블록이 6광년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두 사람은 벽 841개와 100,000명 이상의 사람들을 사이에 둔 채 떨어져 있는 셈이었다." (184쪽)
체감거리가 6광년쯤 되는 두 사람이 '우연히' 마주쳐 '우연히' 서로에게 말을 걸고 사랑에 빠진다는 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천사들은 이를 '기적'이라 부른다. 지구에 있는 샘과 로라를 만나게 하기 위해 수만 가지 가능성을 조정하는 천사 크레이그와 일라이자의 모습을 보니, 현실세계 속 연인, 친구, 가족, 동료들과의 만남도 어쩌면 우연이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분량도 많지 않고, 스토리도 단순해 술술 읽힌다. 천국주식회사의 모습이 자연스레 상상된다. 깊이와 허를 찌르는 반전은 기대하기 어렵지만, 표지도 내용도 연말과 꽤 잘 어울린다. 내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게 하고 마음 따뜻하게 하는 유쾌한 소설. 머리도 식힐 겸 천국으로의 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 솔라 레스토랑에서 아시안퓨전요리를 먹고 있는 크레이그와 일라이자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