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경사 바틀비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허먼 멜빌 지음, 공진호 옮김, 하비에르 사발라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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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 , 동화 <프레드릭>과 함께 읽기.



<프레드릭>의 서두는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 같다. 하지만 결말은 다르다. 네 마리의 들쥐가 열심히 일할 동안 프레드릭은 햇살과 색깔과 이야기를 모은다. 다른 쥐들에겐 한량의 여유로 보인다. 추운 겨울이 되어 식량도 다 떨어질 무렵 프레드릭은 생쥐들에게 일 년간 간직해온 자연의 생생함을 전해준다. “프레드릭은 파란 덩굴 꽃과, 노란 밀짚 속의 붉은 양귀비꽃, 또 초록빛 딸기 덤불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들쥐들은 마음속에 그려져 있는 색깔들을 또렷이 볼 수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프레드릭을 시인으로, 예술가로 인정하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

  

<필경사 바틀비>의 배경은 19세기 중반 월스트리트, 법률문서 필사원이다. ‘나’는 터키, 니퍼스, 진저너트라는 별명을 가진 직원들의 고용주이다. 신입 필경사 바틀비는 사흘 동안 기계적으로 필사를 해낸다. 다른 일을 시키려는 변호사에게 그는 상냥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I prefer not to)."라 대답한다. 다른 일을 시켜도, 이유를 말해보라 해도 ‘안 하는 편을 택’한다는 의지를 표현한다. 주체적 선택을 고집하던 바틀비는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프레드릭>에 다섯 마리의 들쥐가 등장했듯 <바틀비>에도 다섯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통념에 따르지 않고 소신을 따르는 소수(1명)와 당연한 듯 의문없이 사회의 질서를 따르는 절대다수(4명)로 나뉜다. <프레드릭>이 동화 속 해피엔딩이라면, <바틀비>는 현실세계를 반영한다. 프레드릭은 다수의 인정, 심지어 찬사까지 받지만 소설에서 바틀비는 그를 외면하는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 아래 죽어가는 모습으로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주목할 부분은 바틀비를 바라보는 고용주의 심경과 태도의 변화다. <바틀비>의 서술자가 “나”라는 관찰자이므로 자연히 독자도 그의 시선을 따라가게 된다. 처음에 바틀비에게 매료되었던 그는 바틀비로 인해 난처한 입장에 처하자 반쯤 등을 돌린다. 회유하고 화를 내기도, 피하기도 하지만 나중엔 동정심과 책임감으로 바틀비를 돌아본다. 안타깝게도 그를 건져내는 직접적인 행동은 취하지 않는다.

  

옮긴이는 바틀비에서 기독교적 색채가 강한 부분을 주목하기도 했는데, 전전긍긍하는 변호사의 모습에 예수를 심판하던 빌라도가 오버랩 된다. 자신의 이해관계 때문에, 당대의 통념과 사람들의 등쌀에 못 이겨 해결사의 자리에 섰으나, 결정을 남에게 미루며 회피한다.

속으로는 동정(혹은 동경)하며 관심을 갖고 지켜볼지언정 적극적으로 죽음을 막지는 않은 방관자다. 행동에 나서지 않음으로써 다수의 의견대로 흘러가게 방조한다.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은 아닌지.

  

프레드릭과 바틀비는 우리에게 타인의 의지와 선택, 다양성을 존중하자는 메시지를 던진다. 동시에 바틀비의 고용주를 통해, 남과 다르다고 해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방관하는 것은 다수의 폭력에 동조하는 것이라 외친다. 물질적 만족보다 무형의 만족을 추구하는 신념가도 있겠지만, 우리 대부분은 행동가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지만 용기를 낼 자신은 없는 평범한 소시민일 것이다. 프레데릭이 되지 못할 바엔, 프레데릭의 친구들이 되자. 바틀비가 만약 들쥐 친구들을 만났다면, 이야기의 결말은 분명 달라졌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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