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을 만들다 - 특별한 기회에 쓴 글들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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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기회에 쓴 글들>이라는 다소 특별한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특정 주제에 대해 움베르토 에코가 기고한 담화, 칼럼을 재구성해 소개한다. 각각의 글은 하나의 주제어와 연관된 신화, 역사, 기호학, 철학, 때로는 신학적인 측면으로도 조명된다. 그런가 하면 상상의 나래를 펼쳐 픽션같은 세계를 선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글에서 소개하는 작가의 서술방법을 이해시키기 위해 똑같은 서술방법을 택하기도 해 독자를 미소짓게 만든다.

에코의 방대한 지식은 익히 알고 있으니 논외로 하고, 책을 읽으며 내가 주목한 건 그의 다양한 서술방식이었다. 관찰하는 재미가 있었다. 책에 실린 열네 편의 글 중 인상 깊은 부분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불꽃의 아름다움>

밀라네지아 축제의 주제인 4대원소(불, 공기, 흙, 물)중 하나를 선택해 서술한 이 글에서는, ‘불꽃’과 관련된 신화, 중세 미학, 우주, 성서, 고전문학, 과학, 예술, 설화 등을 순차적으로 소개하며 다양한 각도로 조명한다. 저자도 예상치 못했지만 불꽃이라는 주제에 뜨겁게 매료되었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멋진 도전”이라 밝히기도 했지만, 읽는 이에게도 즐거운 담화였다. 대체 그 지식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에코의 옆자리에 앉아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옛날이야기를 듣는 느낌이었다.

 

 

2. <오, 빅토르 위고! 과잉의 시학>

빅토르 위고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인데, 에코가 소개한 후로 더 좋아졌다. 밀쳐뒀던 위고의 소설들을 다시 읽고 싶을 정도로. 에코는 위고 문학의 특성으로 “과도하게 기술하는 방식과 신의 관점에서 보려는 불굴의 의지”를 꼽았다. 재밌는 점은 위고의 ‘과잉의 기법’을 소개하는 그자신도 부연설명을 과다하게 늘어놓음으로써 위고의 ‘과잉 문체’를 흉내내는 모습이었다. 글 분량도 조금 과했던 것 같기도 하고..?

 

 

3. <상상 천문학>

천문학의 역사라는 진부한 내용은 다루지 않는다. 에코의 세계에서는 “천문학에 관한 상상의 역사”와 상상의 지리학이 펼쳐진다. 태양은 차갑고, 우주의 행성은 회전하며 음계소리를 내고, 지구는 평평한 원판이고, 지구의 남반구에는 거대한 남방대륙이 있고... 지금 들으면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지만, 결국 이러한 상상 천문학, 지리학이 집념의 탐험가를 양성했고, 실제 역사를 창출한 위력이 있노라고 에코는 감탄한다. 그리고 나는 그의 통찰력에 감탄한다.

 

 

4. <속담 따라 살기>

이어지는 상상의 세계는 속담으로 건설된 행복 공화국 이야기를 다룬 가상의 책을 읽고 남긴 상상 서평이다. 모든 속담은 지혜의 소리라는 이념으로 건국된 공화국, 그러나 이러한 유토피아는 몇 년 가지 못했다. ‘배가 익으면 스스로 떨어진다’고 여겨서 농업에 위기가 닥치고, ‘냄비는 악마가 만든다’는 말에 구리 세공인은 냄비 뚜껑만 만들어 파는 등 부작용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갚을 시간과 죽을 시간은 늘 있다’고 했기에 상인들은 외상값 때문에 쫄딱 망한다. ‘일을 급히 서두르면 망친다’는 말에 차량 통행은 금지되고, ‘침묵은 금’이기에 사회생활은 몇 마디 단음절만 교환하게 됐다. 이런 식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속담으로 건설된 유토피아가 속담으로 망해가는 모습을 그린다. 재치에 웃는 건 기본이고, 우리나라에는 없는 속담을 접하는 새로움은 덤이다. 

 

 

이 책을 번역한 역자는 능동적인 읽기를 제안했다. 상당 부분 공감하며, 이 책을 읽을 (예비)독자들께 적극 권하고 싶다.

첫째, 저자의 새로운 시도를 즐기라. 에코의 칼럼, 잡지 기고문, 강의 등 제한된 시간과 지면을 할애하여 쓴(게다가 뚜렷한 주제도 없는듯한) 글이니. 둘째, 현장에 있는 나를 상상하며 읽으라. 친절하게도 글 끝에 발표기회(장소)와 날짜가 수록되어 있다. 잡지에 실린 글을 읽을 때는 깐깐한 독자가 된 듯, 강연 발표문을 읽을 때는 청중이 된 나의 모습을 상상하며 읽기를 권한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은, 역자의 추천으로 각 글을 읽기 전에 맨 뒷장을 펼쳐 날짜와 장소를 보고, 독자층을 예상하며 읽었는데, 앞뒤를 오가며 페이지를 넘기려니 불편함이 있었다. 글 앞쪽에 먼저 소개했다면 좀 더 편하게 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은 독자, 주제에 대해 풀어놓는 에코식 접근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해도 스트레스 받지 않을 자신이 있는 독자, 나처럼 에코의 은근한 유머를 좋아하는 독자들은 분명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일독을 권한다.  

 

 

 

 

장 폴 사르트르는 희곡 『닫힌​ 방』에서 가장 비관적인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다른 이들의 현존을 통해서 비로소 우리 자신을 인식할 수 있으며, 여기에 근거하여 공존과 순응의 규율들이 세워진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서 못마땅한 구석을 더 쉽게 발견한다. 그들은 우리와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을 적으로 만들고 지상에다 산 자들의 지옥을 건설한다. 사르트르의 작품에서 3명의 남녀는 죽은 뒤에 출구가 없는 한 방에 갇히게 된다. 이후 그들 중 한 명은 그곳에서 무서운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바로 끔찍한 지옥은 그들 서로라는 것, 즉 타인이 곧 지옥이라는 것이다. (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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