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듬
모리 에토 지음, 고향옥 옮김, 장해리 그림 / 웅진주니어 / 2007년 2월
평점 :
절판


어른들이 추억하고 숭상하는 어린 시절의 순수함이니 뭐니 하는 것들은 대개 자기최면이다. 내 기억으로 어린시절은 절대 순수하지 않았다. 사회적 룰을 모르니만큼 훨씬 잔인하기도 했고, 부모와 친구, 학교 틈바구니에서 지금처럼 치열했다. 그렇지만 항상 아련한 회상에 젖기 마련이다. 세상을 놀래킨 대도가 어린 시절의 첫번째 도둑질을 회상하듯, 세상을 감동시킨 작가가 어린 시절에 처음 쓴 글을 회상하듯.

어른이 되어서 그리워하는 것은 '순수함'이 아니라 소중한 첫 경험들이다. 그리고 이 책, <리듬>에서 수많은 그 첫 경험 중 한 뭉치를 찾아낼 수 있다. 처음 맛보는 의미 있는 이별. 처음 맛보는 쓸쓸함.

<바람에 휘날리는 비닐 시트>의 작가 모리 에토의 처녀작이란다. 서점에 갔다가 반가워 덥썩 집어들고 말았다. 내용도 보지 않고 샀는데, 아뿔사. 청소년 소설이란다.

중학생이 아니라 크게 감명 받지는 못했지만, 모리 에토 글의 원형을 볼 수 있어서 의미는 있었다. 아아.. 당신은 소녀였군요. 이토록 섬세하고 씩씩한. 그렇게 원석 그대로인 작가의 모습을 확인하면서 입맛을 다셨다. 성인 쪽으로 전향하셨으니, 얼른 장편을 내주세요. 아직도 배가 고픕니다.

또래 아이들에게는 어떻게 읽힐지 모르겠다. <...비닐 시트>처럼 묵직하진 않지만, 가벼운 청량감이 나름 매력적이다.

학교 선생님인 친구에게 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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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독자가 읽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좋을 것 같은 예쁜 책이라 보완해서 별 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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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휘날리는 비닐 시트
모리 에토 지음, 김난주 옮김 / 시공사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아아, 좋구나."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울컥 하는 마음에 절로 나오는 말이다. 그래, 평화 만세다. 세상은 이토록 아름답구나. 너무 당연한 것 같은 일상의 행복도 사실은 바람에 휘날리는 비닐 시트처럼 그렇게 나약하기만 한 것을. 그것을 붙잡으려는 사람의 의지가 세상 이곳 저곳에 존재한다는 것을 잊고 있었구나. ....무엇보다 내가 이렇게 착해빠진 말을 하다니, 나한테도 아직 영혼이라는 게 남아있구나.(....)

이 작품으로 모리 에토와 처음 만났다. 요즘 온다 씨와 데이트(...)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어쩜 이렇게 시기 적절하게 모리 씨를 만나게 되었는지, 참 이것도 인연인 것 같다. 온다 씨의 손을 잡고 추억 속으로, 신화 속으로, 비일상 속으로 훨훨 공중부양을 하고 있던 찰나에 만난 모리 씨는 나를 슬금슬금 끌어당겨 다시 땅 위에 발을 딛게 만든다. 그렇게 일상 속으로 나를 도로 데려다 놓으면서 말한다. 너덜너덜하고 따분한 그 일상이, 실은 가장 아름다운 평화라고.

여섯 편의 단편이 죄다 마음에 드는 건 아니다. 앞의 세 단편은 메인 메뉴 전에 먹는 전채처럼 입만 다시게 하더라. 그러다가 만나게 된 <종소리>와 < X세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만나게 된 <바람에 휘날리는 비닐 시트>.

뭐라 할 말이 없다.

이기적인 삶이 추앙받는 지금에 와서 이 무슨 시대착오적인 착한 이야기냔 말이다, 촌스럽게.......라는 외침이 울먹임이 되어버렸다. 그래, 조만간에 까맣게 잊고 투덜투덜 건성건성 살아갈 게 분명하지만, 지금은 잊지 않겠다.

평화 만세다. 세상은 이토록 아름다웠구나. 그리고 그 아름다운 일상의 평화를 지키는 사람들은 바로 너와 나였구나. 아아 기특해라 나의 비루한 일상이여.

천만 배쯤 착해진 듯한 느낌이다.

물론 느낌뿐이겠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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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앞에서부터 차근차근 한호흡에 읽는 단편집으로서는 완성도가 높다. 하지만 '골라서 읽는' 단편집으로서는 부족하다. 크레센도의 느낌이랄까. 이 때문에 별 하나 뺀다.

그릇을 찾아서 ★★★ | 강아지의 산책 ★★★ | 수호신 ★★★ | 종소리 ★★★★☆ | X세대 ★★★★ | 바람에 휘날리는 비닐 시트 ★★★★★★(마음의 별점♡)

2. 심리묘사가 좋다. 섬세하면서 힘이 있다. 이 측면에서 최고는 역시 또 마지막 작품.

3. 냉소적이고 절망적인 책들이나 불량한(...) 책들과 데이트를 하다가 지치면, 꼭 다시 만나고 싶은 작가. 차기작은 부디 장편이 되길 빈다. <바람...>을 장편으로 만났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4. 덕분에 이 작가의 처녀작이라는 <리듬>이란 책을 샀다. 처녀작이라니 기대는 많이 안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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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제국 도코노 이야기 1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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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탤지어의 마법사, 온다 리쿠. 전작 <밤의 피크닉>을 읽었을 때 '노스탤지어' 부분에 동의했다면, <빛의 제국>을 읽고나니 나도 모르게 '마법사' 라는 데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이 책으로 '도코노'라는 신비로운 일족을 처음 만났으니 말이다.

열 편의 단편(단편이라고 말하기도 좀 뭣하지만)을 읽는 동안 이번에도 내내 기묘한 그리움에 사로잡혔다. 데라사키가 까닭없이 두루미 선생을 그리워한 것처럼, 아키코가 꽃잎을 보고 그러했던 것처럼.

도대체 이 그리움의 정체는 뭘까?

<밤의 피크닉>이 변화무쌍하고 불완전하지만, 수많은 '잡음'의 전파를 잡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인 청소년 시기로 회귀했다면, 이 도코노 이야기는 그보다 한층 더 먼 인간 이전의 것, 논리와 인과의 세계 너머로 회귀하고 있는 듯하다. '먼 눈'이 정말 '먼 눈'이고, '먼 귀'가 정말 '먼 귀'였던, 먼먼 옛날로. 그 시절 사람들은 마치 도코노 일족처럼 온화하고, 지적이고, 권력을 지향하지 않았을 것 같은, 순진하지만 아름다운 노스탤지어.

현대를 살고 있는 작가 온다 리쿠는 인류의 청소년기, 신화의 세계에서 살던 사람들이 들었을 법한 '잡음'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노인이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듯 DNA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기억을 더듬어 재구성하는 것이다. 200년을 넘게 살아온 두루미 선생처럼 사람들이 꿈꾸던 신화는 세상 어디에나 남아있지만, 그 정체를 알 수 없어 까닭없이 그립다. 아니, 그래서 더욱 그립다. 또 그 행복한 그리움이 끝나지 않아 그립다. 이야기는 지금 막 시작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번역가 선생님. 힘내셔서 다음 편도 얼른!  TㅁT)/;;;

덧> 아직 프롤로그라 별 넷. 앞으로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까? 사실 거대한 이야기의 프롤로그 같아서 책 한권으로서는 완성도가 좀 떨어진다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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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피크닉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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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 읽고 나니 다리가 아팠다. 마치 내가 밤의 피크닉을 한바탕 치르고 난 것처럼.

2. 나 고등학교 시절에 이렇게 멋진 녀석들이 주변에 있었나? 아니면 치열했던 첫 경험들에 대한 기억을 재구성한 온다 리쿠식 노스탤지어의 착시 현상일까. 어쨌거나 매혹적인 착각이다. 나도 저 녀석들처럼 멋졌을지도 모른다는 착각.

3. "근친상간은 안돼!" 대목에서 완전 폭소. 성적 긴장감으로 두 존재가 느끼는 긴장감을 극대화시킨 작가의 유머랄지, 장난이랄지.... 여하튼 너무너무 웃겼다. 이런 식으로 곳곳에 보이는 장르적(?) 요소들은 되레 작가에 대한 신뢰도를 높였다. 존경합니다. 모든 장르를 알고 계시는군요.

4. 뛰어난 묘사. 미니 마라톤에서 뛰었던 기억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책을 읽는 내내 같은 호흡으로, 같은 심장 박동으로, 같은 풍경을 보며 함께 뛴 느낌이다. 뜨거운 땀방울과 발에 생긴 물집의 아픔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5. 일본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의 이름은 외우기가 너무 힘들다. 종이에 하나하나 써놨더니 한 페이지가 꽉 차고 말았다.

6. 온다 리쿠의 다른 소설을 산더미처럼 사고 말았다.

7. 여하튼 반갑습니다, 온다 씨. 앞으로 잘 부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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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하게 사랑하라 똑똑하게 시리즈 1
필 맥그로 지음, 서현정 옮김 / 시공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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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런 책 안 좋아한다. 이런 책들을 보면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워야할 것 같은 사랑 자체가 상품화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이다. 이런 식으로 투덜대면서도, 나 자신도 사랑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구태의연한 꼰대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아니면 대책없는 낭만주의자이거나. (둘 중 어느 쪽이 더 나은 건지는 모른다.)

우연찮게 집어든 책. 읽을 생각도 사실 안 했다. 표지가 독특해서 차례 정도를 뒤적거린 것뿐이었다. 나이를 이만큼 쳐먹었으니 남자 여자 이러쿵저러쿵은 대충 넘어가고, 실전에 적용할만한 게 나와있을 것 같은 6챕터, '최고의 애인을 만드는 6단계 전략'을 무의식적으로(과연?) 펼쳤다. 눈에 들어온 문구는 다음과 같다.

남자를 유혹하기 위해 새 자동차 냄새가 나는 향수를 뿌렸어요. _리타 러드너(미국의 여자 코미디언)

솔직히 말하면 저 문구 하나 때문에 방어벽을 내리고 적대감 게이지를 낮췄다. 웃겨서. 유쾌하고 솔직해서. 이 책에 나온 모든 이야기들이 그렇다. 작가는 분명히 남자인데, 솔직하고 대담하게, 그러면서도 애써 예의를 차리면서 여자들을 깐다. (...)  그게 다소 불쾌하기도 하다가, 안쓰럽기도 하다가, 마침내 여자들이 얼마나 답답했으면 저럴까 하는 생각에 귀기울이게 된다. 게다가 이 양반, 꽤나 재미있기도 하다.

말은 이렇지만 절대 불쾌한 책이 아니다. 왜냐하면 남자들에 대해서는 '까는' 수준을 넘어서니까. 특히 낄낄거리면서 읽은 내용을 남자 친구들한테 얘기해줬더니, "....그 작가 어떤 놈이야?-_-" 따위의 과민반응을 보였을 때는 불쾌하기는 커녕 최고로 유쾌했다. 남자보다 백만 배쯤은 복잡해서 이런 책으로 조금이라도 일반화를 시키기 어려운 여자로 태어난 것이 살짝 즐거워질 정도로.

물론 이 책에 나와있는 이야기들이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리라고는 절대 믿지 않는다. 친구들의 반응도 그저 유쾌한 농담일 뿐이란 사실도 안다. 하지만 '하늘에서 멋진 남자가 뚝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소심한 여자들, 남자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여자들을 보면서 답답해했던 작가의 '까발리기'는 어떤 측면으로는 화해의 제스추어로 보이기도 한다. '이제 우리 편견과 오해의 전쟁을 끝내자. 우리 이만큼 까발릴 테니'라고 하는.

그래, 그쯤은 되어야 나의 대책없는 낭만주의도 풍자의 대상으로 전락시킬 마음의 준비가 된다. 전적으로 여자들을 위한 책이니 더욱 그렇다. 작가가 표하는 화해의 제스추어에 맞춰, 나는 미숙했던 옛날 연애를 마음껏 비웃으며 즐길 수 있었다. (교활한 작가 양반 같으니라고.)

여하튼. 정말 간만에 건진 즐거운 책이다. 아마 내가 이런 종류의 책을 잘 읽지 않기 때문에 더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다. 뭐, 아무렴 어때. 즐겁고 유익하면 그만이다.

사랑을 상품화한 어쩌고?

 ...그러거나 말거나. 원래 나 귀 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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