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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휘날리는 비닐 시트
모리 에토 지음, 김난주 옮김 / 시공사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아아, 좋구나."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울컥 하는 마음에 절로 나오는 말이다. 그래, 평화 만세다. 세상은 이토록 아름답구나. 너무 당연한 것 같은 일상의 행복도 사실은 바람에 휘날리는 비닐 시트처럼 그렇게 나약하기만 한 것을. 그것을 붙잡으려는 사람의 의지가 세상 이곳 저곳에 존재한다는 것을 잊고 있었구나. ....무엇보다 내가 이렇게 착해빠진 말을 하다니, 나한테도 아직 영혼이라는 게 남아있구나.(....)
이 작품으로 모리 에토와 처음 만났다. 요즘 온다 씨와 데이트(...)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어쩜 이렇게 시기 적절하게 모리 씨를 만나게 되었는지, 참 이것도 인연인 것 같다. 온다 씨의 손을 잡고 추억 속으로, 신화 속으로, 비일상 속으로 훨훨 공중부양을 하고 있던 찰나에 만난 모리 씨는 나를 슬금슬금 끌어당겨 다시 땅 위에 발을 딛게 만든다. 그렇게 일상 속으로 나를 도로 데려다 놓으면서 말한다. 너덜너덜하고 따분한 그 일상이, 실은 가장 아름다운 평화라고.
여섯 편의 단편이 죄다 마음에 드는 건 아니다. 앞의 세 단편은 메인 메뉴 전에 먹는 전채처럼 입만 다시게 하더라. 그러다가 만나게 된 <종소리>와 < X세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만나게 된 <바람에 휘날리는 비닐 시트>.
뭐라 할 말이 없다.
이기적인 삶이 추앙받는 지금에 와서 이 무슨 시대착오적인 착한 이야기냔 말이다, 촌스럽게.......라는 외침이 울먹임이 되어버렸다. 그래, 조만간에 까맣게 잊고 투덜투덜 건성건성 살아갈 게 분명하지만, 지금은 잊지 않겠다.
평화 만세다. 세상은 이토록 아름다웠구나. 그리고 그 아름다운 일상의 평화를 지키는 사람들은 바로 너와 나였구나. 아아 기특해라 나의 비루한 일상이여.
천만 배쯤 착해진 듯한 느낌이다.
물론 느낌뿐이겠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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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앞에서부터 차근차근 한호흡에 읽는 단편집으로서는 완성도가 높다. 하지만 '골라서 읽는' 단편집으로서는 부족하다. 크레센도의 느낌이랄까. 이 때문에 별 하나 뺀다.
그릇을 찾아서 ★★★ | 강아지의 산책 ★★★ | 수호신 ★★★ | 종소리 ★★★★☆ | X세대 ★★★★ | 바람에 휘날리는 비닐 시트 ★★★★★★(마음의 별점♡)
2. 심리묘사가 좋다. 섬세하면서 힘이 있다. 이 측면에서 최고는 역시 또 마지막 작품.
3. 냉소적이고 절망적인 책들이나 불량한(...) 책들과 데이트를 하다가 지치면, 꼭 다시 만나고 싶은 작가. 차기작은 부디 장편이 되길 빈다. <바람...>을 장편으로 만났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4. 덕분에 이 작가의 처녀작이라는 <리듬>이란 책을 샀다. 처녀작이라니 기대는 많이 안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