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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자히르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7월
평점 :
집착, 탐닉, 광기, 그리고 에너지라는 단어를 이 책의 소개글에서 보고 단숨에 책을 주문했다. 무언가 헛헛한 요즘의 내 일상에 이 책이 어떤 변화라도 가져다 주지 않을까 하는 일종의 기대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유난히 책이 읽히지 않았던 요즘의 상태에도 불구하고, 꽤 두꺼운 책을 한숨에 읽어내려 갔다. 어쩌면 ‘책’은 내 삶의 가장 강력한 자히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했던 것도 같다.
소설 속의 ‘나’는 잘나가는 작가다. 어느 정도의 부와 명성과 사랑하는 아내. 모자랄 것 없는 그의 삶이 어느 날 문득 아내의 실종으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가 아내의 실종에 관한 미스테리를 풀어가는 과정은 그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사랑과 문학,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자히르에 관한 새로운 발견의 과정이기도 하다.
# 자히르
'자히르'는 광기 어린 편집증, 어떤 대상에 대한 집념, 집착, 미치도록 빠져드는 상태,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에너지원등을 가리키는 아랍어라고 한다. 이 소설에서 “나”의 자히르는 그의 아내 에스테르이다. 글이 써지지 않는 무의미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그가 소설을 쓸 수 있도록 만들었던 그녀. 그의 자히르는 그녀가 사라졌을 때 그 의미를 발하기 시작한다. 그는 그의 자히르를 다시 찾아야만 한다. 무의미한 시간 속에서 그를 구원해 주었던 그 힘이 그에게는 필요하니까. 무언가에 미치지 않고서 살아갈 수 없다면 자히르는 삶의 근원적 동력이다. 이 소설은 그리하여 삶의 근원적 에너지를 찾아 떠나는 남자의 이야기다. 그것은 자신의 가장 깊숙한 곳을 들여다 보는 여행이기도 할 것이고, 때로는 감히 들여다볼 수 없어서 그저 외면했던 부분들을 조용히 들여다보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자히르,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그 삶의 뜨거운 에너지에 대해 생각했다.
# 사랑
이 소설은 사랑과 사랑의 에너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랑의 에너지는 인간의 삶에서 가장 강력한 자히르일 터. 사랑은 어느 날 삶의 강력한 에너지가 되었다가 또 어느 날 불현듯 시들시들해진다. 언제나 내 삶의 강력한 에너지원이 되어 줄 것 같던 그 사랑이 어느 순간 그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 책에서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 모험의 필요성에 대해, 꿈을 위해 투쟁하는 기쁨에 대해 이야기해. 그런데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누구지? 자기가 쓴 글을 읽지 않는 사람이야. 사랑을 편안하고 익숙한 것으로, 모험을 쓸데없이 위험한 짓을 저지르는 것으로, 즐거움을 강제적 의무로 착각하는 사람이지. 내가 하는 말에 귀기울이던, 내가 결혼한 남자는 어디 있는 거야?”
남자가 사라진 그의 아내를 찾아 떠나는 것은 삶의 열정적인 에너지원이었던 그 사랑이 찢어져버린 순간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그는 정확하게 그 시간들을 바라보려 애쓴다. 그리고 서로에게 차가워져 버린 순간, 무감각해져버린 순간을 기억해내는 순간 그는 열정적인 에너지로서의 사랑에 대해 다시금 인식하게 된다. 그는 이제 드디어 아내를 만날 준비가 된 것이다. 찢어진 시간에 대해 인식할 때 비로소 그 시간들을 꿰맬 수도 있을 테니까.
# 글쓰기
그는 작가다. 그는 글을 쓰게 만드는 힘에 대해 이야기한다. 작가는 그저 받아쓰기를 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예전에 작가들의 전기에서 “책은 저절로 씌어진다. 작가는 받아쓰는 사람일 뿐이다”이라는 구절을 읽었을 때, 나는 그게 자신들의 작업을 그럴싸하게 보이기 위한 작가들의 수사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 말이 절대적으로 진실이라는 것을 안다. 파도가 왜 그를 그가 다다르고자 꿈꾸었던 저 섬이 아닌 이 섬으로 데려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글쓰기의 고독. 완전히 미치지 않고서는 쓸 수 없는 그 무엇. 어쩌면 글을 쓰게 만드는 것도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그 무엇과 비슷한 힘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그 강력한 힘. 그 강력한 힘에 빠져 한 권의 책이 탄생될 때 그 책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혼과 맞닿아 있는 또 다른 영혼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뭔가 되돌려주기를, 너의 노력이 인정받기를, 사람들이 네 재능을 발견하기를, 사람들이 네 사랑을 이해하기를 바라지 마라. 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하지만 그 이유가 자존심이나 무능이나 교만이어서는 안 된다. 네가 그 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하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이젠 네 삶과는 맞지 않기 때문이다. 문을 닫아라. 다른 음악을 틀어라. 집을 청소하고, 먼지를 떨어내라. 지금까지의 너이기를 그만두라. 그리고 너 자신이 돼라.”
책은 공감 가는 구절들로 가득하다. 열정적인 그의 문장들에 빠져들었지만 책을 읽고 난 후 나는 아직까지 무언가 허전하다. 어떤 것의 도움을 받아서가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이 변화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 때문일까. 내 삶을 변화시킬 에너지. 뜨겁게, 좀 더 뜨겁게 삶에 빠져들 수 있는 그런 에너지. 그건 바로 내 자신이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것. 내 삶의 자히르를 찾는 건 순전히 나의 몫이어야 한다는 것. 그러한 공감만으로도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조금은 뜨거워져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