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책들의 도시 1
발터 뫼르스 지음, 두행숙 옮김 / 들녘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그런 곳을 꿈꾼다. 온통 책들로 둘러싸인 방. 오래된 책의 냄새가 폴폴 풍기지만 원했던 모든 책들이 있어서 보기만 해도 배부른 그런 곳. 그 곳에서 나는 그저 손이 가는 대로 책을 펼쳐들고 읽는다. 읽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책을 집어 든다. 서정적인 시를 읽다가 고전 소설을 읽기도 하고 평소에는 읽기 꺼려했던 딱딱한 과학 서적들도 뒤적인다. 그곳에서 나는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언제 어디로든 갈 수 있다. 먹지 않아도 배부를 것만 같은 그런 책들로 둘러싸인 풍경. 책과 내가 하나가 되는 풍경. 그 속에서 나도 한 권의 책이 되어버리는 상상을 한다.


꿈꾸는 책들의 도시. 이 소설은 책을 위한 판타지다. 발터 뫼르스는 작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꿈꾸었을 오직 책을 위한 책을 환상적으로 창조해냈다. 오로지 책을 위한 책을 꿈꿔왔던 모든 이들에게 책장을 넘기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되어버리는 그런 책 말이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상향이라고 할 수 있을 꿈꾸는 책들의 도시, 그 도시에 숨겨져 있는 비밀과 모험들이 책장을 넘기는 순간 환상적으로 펼쳐진다.


아직 일흔 일곱 살 밖에 되지 않은 어린 공룡 미텐메츠는 대부 시인 단첼로트가 죽고 나서 그가 남긴 몇 장의 원고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꿈꾸는 책들의 도시인 부흐하임으로 가게 된다. 꿈꾸는 책들의 도시, 부흐하임. 그 곳은 수천 개나 되는 고서점들과 출판사와 종이 공장들, 시인들의 낭독회가 열리는 카페, 독서용 안경이나 장서표 등을 파는 가게 등 오직 책을 위한 모든 것들이 있는 곳이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꿈꾸었을 그 모든 것들이 존재하는 도시다. 미텐메츠는 바로 이 곳에서 단첼로트가 남긴 원고에 관한 비밀을 풀어나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문자실험실의 스마이크를 만나게 되면서 미텐메츠는 오직 책들을 위한 도시인 것만 같았던 부흐하임에 숨겨져 있는 지하 세계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어쩌면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귀중한 책들을 가지기 위한 책 사냥꾼들의 혈투와 살아 움직이며 생명을 위협하는 책들, 책을 먹고 사는 부흐링족들과 지하 미로에 숨겨진 갖가지 위험, 그리고 그림자 제왕에 이르기까지 지하 세계 속에서 미텐메츠가 겪는 다채로운 모험들이 펼쳐진다. 책을 둘러싼 갖가지 모험들은 작가가 가진 상상력의 깊이에 놀라게 만들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또한 지하 미로에서의 모험은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는 책들에 대한 첫 장의 경고가 상기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책과 관련된 다양한 모험들을 담고 있지만 책에 관련한 현실 세계의 상황들을 날카롭게 꼬집고 있다는 점에서 다분히 시사적이다. 자본의 힘에 종속된 출판계의 현황과 독설적인 비평가의 모습 등을 꼬집는 장면은 환상적인 미텐메츠의 여정 속에 숨겨진 재미를 선사한다. 책이 이제 더 이상 책 그 자체의 가치가 아니라 자본의 힘으로 평가받는 현실의 상황을 발터 뫼르스는 재치 있는 비유와 상징들로 멋들어지게 표현해 냈다. 또한 하나의 책이 탄생하기까지 겪게 되는 작가의 고뇌를 표현하고 있는 부분들도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작가란 무언가를 쓰기 위해서 있는 거지. 체험하기 위해 있는 게 아니다. 만약 네가 무엇을 체험하려면 해적이나 책 사냥꾼이 되어야 할 것이다. 네가 글을 쓰고 싶다면 그냥 써야 한다. 만약 네가 그것을 너 자신으로부터 창조해낼 수 없다면 다른 어디서도 찾아낼 수 없다.”


한 권의 책을 탄생시키기 위한 작가적 고뇌는 ‘오름’이라는 단어로 요약된다. ‘오름’은 작가가 한 권의 책을 만들어내는 어떤 영적인 순간을 일컫는데 잠재되어 있던 거대한 이야기들이 찬란하게 쏟아지는 그런 순간이 바로 ‘오름’이다. 오름을 느꼈을 때 작가는 한 권의 책을 탄생시킬 수 있다. 오름을 느끼지 않고 만들어지는 책은 단순한 종이 뭉치들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것. 활활 타오르는 오름의 순간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의 위대한 작품이 탄생할 수 있다는 것. 오름은 살아있는 동안 활활 타오르는 순간을 가지라는 삶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순간적인 것이다. 아무리 쇠로 책을 만들고 다이아몬드로 글자를 새긴다 해도 언젠가는 이 지구와 함께 태양에 부딪치면 녹아버리고 말 것이다. 영원한 것이란 없는 법이다. 예술에는 전혀 없다. 한 작가가 죽은 후에 얼마나 오랫동안 그의 작품이 희미한 램프처럼 서서히 꺼져 가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얼마나 활활 타오르는가다.”


꿈꾸는 책, 그저 오랜 시간을 누군가가 펼쳐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책. 이제 당신이 집어 들면 그 책은 살아 움직이며 당신에게 다가오기 시작할 것이다. 당신이 책장을 넘기는 순간, 그 책은 더 이상 꿈꾸지 않고 살아서 존재하기 시작한다. 당신 생의 한 가운데로 깊이 들어오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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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27 00: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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