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만경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4년 9월
평점 :
품절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의 어떤 차가움을 기대했다면 이 소설은 조금 싱거울 수도 있다. 이젠 조금 식상해져 버린 연애소설에 게다가 만남의 계기도 미팅 사이트라는 인터넷이라는 게 조금 진부하게 느껴졌었다. 그리고 뭐랄까. 요시다 슈이치만의 어떤 특별한 것들, 이를 테면 미세한 감정의 자극 같은 게 느껴지지 않았다고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었던 것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조금 진부하게 출발하긴 했지만 도쿄만의 풍경들과 어우러지는 감정의 엇갈림들이 소재 자체의 진부함을 상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의 미팅 사이트에서 만난 료스케와 료코. 그들 만남의 계기가 보여주듯 처음 이들의 만남은 단순한 쾌락의 충족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그들의 가벼운 관계 속에서는 상대방의 자극적인 몸외에는 이름도 직업도 사실 별로 중요한 사실이 되지 못한다. 료코는 료스케에게 안겨 있는 그 시간, 그 몸의 감촉 속으로 깊숙이 빠져들면서도 정작 자신의 실제 이름은 그에게 밝히지 못한다. 몸과 몸은 접촉하지만 마음과 마음은 서로 소통되지 못하는 사랑의 단면들. 그들이 도쿄만을 사이에 두고 일하는 것처럼 그들 마음 속에도 도쿄만의 물리적 거리가 존재한다. 메일과 핸드폰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물리적 거리. 어디서든 울려 퍼지는 메시지의 수신음은 그래서 더더욱 공허하게 느껴진다.

료스케의 과거와 료스케를 취재하는 소설가, 그리고 료스케를 모델로 하는 소설 등은 다소 따분하고 지루해 질 수 있는 전개를 피하는 데 도움을 준다. 료스케를 모델로 하는 소설은 적당히 현실을 예측하기도 하고 료코가 료스케의 마음 한 부분을 읽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료코가 알지 못했던 료스케의 상처에 관한 일화를 소설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이다. 료코는 그 상처를 통해 어쩌면 료스케에게 더 가까이 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료스케는 한 발 물러서 있는 상태다.

“......정말로 사랑했었어. ......그랬는데 그렇게 사랑했는데...... 그런데도 끝나버렸지. 사람은 무엇에든 싫증을 내기 마련이야. 나 자신도 어쩔 수가 없어. 계속 좋아하고 싶지만, 마음이 제멋대로 이제 싫증이 났다고 말하는 거야. ......끝나지 않는 게 있을까? 응? 너 역시 우리의 이런 관계가 계속될 거라고는 믿지 않을 거 아냐?”

한때 사랑을 했지만 이제는 사랑의 끝을 냉철하게 인식하고 있는 남자 앞에 여자는 어쩌면 그저 공허하게만 들려왔던 사랑의 주인공이 내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했었다고, 서글프게 말한다. 서로 엇갈려 버린 감정의 선. 여자의 마음이 ON되는 순간 남자의 마음이 OFF되는, 그 절묘한 엇갈림. 소설은 영화 <일식>의 장면들을 중간 중간 교차시키며 사랑의 쓸쓸한 풍경들을 무리없이 끼워놓는다.

순간 순간 공허하긴 하지만 요시다 슈이치의 다른 소설들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시선이나 날카로운 관계들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결말이 다소 의외로 느껴질 정도다. 차가움을 기대했다간 다소 싱거울 수 있겠다는 것도 그것 때문이다. 그렇지만 책을 덮고 나서 천천히 생각해 보니, 요시다 슈이치가 말하는 사랑, 타인과의 관계는 여전히 서늘했다. 사랑을 말하지만 그것은 어느새 사랑의 쓸쓸한 풍경이 되고 사랑의 약속이나 맹세를 말하려 하지만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어서 씁쓸한 미소를 짓게 만든다.

요시다 슈이치가 말하는 타인과의 관계, 그 서늘함은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을 읽으면 나는 조금 더 쓸쓸해지고 냉소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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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5-24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어, 그러면 안되는데요?
ㅎㅎ 본인 마음이죠.
말은 이렇게 하지만 꼭 사보고 싶게 리뷰를 쓰셨네요.^^

ALINE 2005-05-26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마지막 문장 말인가요?^^
이상하죠...쓸쓸해질 걸 알면서도 자꾸만 그의 소설이 끌리니 말이예요.

플레져 2005-06-03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리네님, 잘 지내셨지요?
겨우 보름간의 외출을 하려고 호들갑스럽게 서재를 비운다 어쩐다 한 거 같아 좀 쑥쓰러워요 ^^;;;
이 책, 참 좋지요. 제목만 봐도 한 켠이 쓸쓸해져요...

ALINE 2005-06-08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님의 리뷰를 보지 못하는 보름간은 너무 길었답니다^^
얼른 님의 서재로 달려가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