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역사
니콜 크라우스 지음, 한은경 옮김 / 민음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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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읽기가 아플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는 이라면, 이 책을 읽을 때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겨야 할 것이다. 물론 주의사항을 꼼꼼히 읽어도 가끔씩은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아픔을 피해가려고 하기보다, 차라리 마음의 준비를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책을 읽는 내내 묵직한 통증을 느껴야 했던 것이 무엇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언제 어디서든 울 준비가 되어 있는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특성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재치와 유머가 빛나면서도 몇 겹으로 세심하게 포장한 슬픔을 빚어내는 작가의 뛰어난 능력 때문이었는지. 어쨌든 이 소설은 아프다는 것. 때때로 깜찍하고 가끔은 유머러스하지만, 대부분 슬프다는 것. 소설에도 주의사항을 붙일 수 있다면 나는 이 소설에 반드시 그러한 주의사항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처럼 필요 이상으로 눈물이 많은 독자들을 위해서라도) 

시원하게 울고 나면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처럼, 슬픈 책을 읽고 나면 오히려 든든한 위로를 받은 것 같다. 나처럼 슬픈 이가 또 있구나, 하는 (지극히 단순한 차원에서의) 위안. 그리고 삶이란 원래 이런 거였어, 라고 인정하는 데서 오는 위안. 이러한 느낌의 책을 읽을 때면 나는 늘 책이란 외로움, 슬픔, 고독 같은 삶의 무거운 비밀들을 나누기 위한 은밀한 발명품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어떤 소설가는 자신은 잊기 위해 소설을 썼다고 말했었다. 쓰고 나면 고통스런 기억을 잊을 수 있기를. 그리고 읽는 자가 그것을 기억해주기를. 치유로서의 글쓰기. 어쩌면 읽는 것도 반대방향의 치유 행위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한 권의 책을 통해 글을 쓰는 자와 그것을 읽는 자가 아프게 맞닥뜨리는 일.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치유하는 일.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이 소설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열쇠다.

어쩌면 몇 가지의 열쇠가 더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사랑의 역사>라는 책을 통해 다양한 인물들과 사건들이 서로 얽혀 있고 각기 다른 화자의 시선에서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각기 다르게 진행되는 이야기들이 서로 연결되는 순간, 몇 가지 다른 사랑이 한 권의 책에서 서로 겹쳐지고, 다른 듯 보이지만 비슷한 삶이 한 권의 책에서 공유된다. 결국 여러 인물들 사이를 둘러싸고 있는 <사랑의 역사>를 추적하는 일은 결국 나와 당신, 바로 우리의 사랑의 역사를 이해하는 일이란 것을 깨닫게 된다. 책을 읽는 일은 거울보기와 비슷할 테니 말이다. 거울을 보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내가 책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에서 책이 내 삶 속으로 걸어 들어오는 순간, 아픈 감정이 밀려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책 속에서 벗어나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소설의 중요한 두 시선은 레오와 알마다. 사랑하는 알마를 위해 <사랑의 역사>를 쓴 레오. (그러나 불행히도 레오와 알마의 사랑의 역사는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리고 우연히 손에 넣게 된 <사랑의 역사>를 통해 결혼하게 된 다비드와 샬럿 사이에서 태어난 알마.(알마의 이름은 <사랑의 역사> 속 알마를 따서 지은 것이다.) <사랑의 역사>라는 책이 없었다면 전혀 연결될 수 없는, 전혀 다른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갔을 것만 같은 두 사람, 여든 살이 넘은 남자, 레오와 열다섯(?) 소녀 알마의 삶이 비슷한 그림자로 겹쳐지기 시작한다. 그들의 삶이 교차하는 지점은 외로움, 그리움 같은 것들이다. 우편 사고와 같은 운명적인 장난으로 한 생이 그저 긴 기다림으로 가득 채워져 버린 레오와 아빠가 죽고 마치 그리움에 갇혀버린 듯한 삶을 사는 엄마를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알마의 삶이 자꾸만 겹쳐졌던 것은 살면서 마주치는 너무나 익숙한 감정들 때문이었다. 외면하려 하면 할수록 더 가까이 다가오는 그리움 같은 감정들. 또 때로는 지독한 삶을 견뎌내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하는 그리움.  

지독한 외로움을 어떤 것으로도 지워버릴 수 없던 기억이 있다면, 그리고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으로 잠 못 드는 밤을 보낸 적이 있다면 레오와 알마의 시선 속으로 녹아들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다. 항상 누군가에게 억지로라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어 하는 레오의 모습에서 어떤 것으로도 감출 수 없는 외로움이 잔뜩 묻어난다. 아무도 읽지 않을 것을 알고 있지만 누구라도 읽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는 마음에서도,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누가 보게 될까 상상하는 마음에서도, 자신의 이름과 함께 가족이 없음을 알리는 메시지를 목에 걸고 다니는 모습에서도, 그리고 도시의 어떤 문도 열 수 있는 열쇠장이인데도 자신이 열고 싶은 것은 어떤 것도 열 수 없다고 고백하는 장면에서도, 자신이 쓴 두 권의 책이 늘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출판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서도. 작가는 레오를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듯 살아갈 수밖에 없는 등장인물로 그렸다. <사랑의 역사>를 쓴 작가로서는 분명 존재하지만, 그 자신의 삶에서는 작가가 아닌 그저 이름을 알 수 없는 등장인물처럼, 희미하게.

알마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글들은 레오의 그것보다 좀 더 발랄하고 (이런 표현을 써도 된다면) 좀 더 깜찍하다. 그렇지만 너무나 일찍 사랑 그 후의 시간들이 진한 그리움으로 채워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좀 더 슬프고, 좀 더 아프다. 아빠를 잊지 못하는 엄마를 보면서, 그리움 외에는 어떤 것도 마음에 담아둘 수 없는 엄마를 바라보면서 알마는 사랑을 하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한다. 사랑이 남기는 그리움은 어떤 것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것 같아 보이니까. 아빠에 대한 그리움으로 모든 것을 희생하는 엄마. 알마는 알아차린다. 사랑으로 세상의 모든 단어들을 잃어버려도, 그리움이라는 단어만 있으면 어떻게든 살아갈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움이라는 책을 놓아버리지만 않는다면 삶은 이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아빠를 잃고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한 권의 책을 통해 연결된 다양한 인물들은 그 책을 통해 사랑하고, 살아가고, 그리워한다. 글을 쓰는 일이 그러한 것처럼, 책을 읽는 일 또한 누군가를 이해하는 방식이고, 그리워하는 방식이다. 책은 사랑의 연결고리였고, 사랑의 원천이었고, 사랑 그 자체였다. 그리고 삶이기도 했다. 친구 레오의 원고를 스페인어로 베껴 적어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 로사에게 주었던 즈비. 자신의 일부를 잃어버려서 사랑하는 여자에게 아무 것도 줄 게 없었던 그에게 <사랑의 역사>는 사랑이었고, 그리고 모든 것이었다. 사랑하는 남자 다비드로부터 <사랑의 역사>를 받은 샬럿에게 그 책은 사랑을 하는 방법이었고, 사랑을 기억하는 방법이었으며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했다. 그리움이라는 감정 외에 또 다른 사랑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엄마를 위해 <사랑의 역사>를 추적하는 알마에게 그 책은 사랑의 암호였고, 그 자신을 존재하게 만든 이유이기도 했다.(그 책으로 인해 알마가 태어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책의 주인공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레오와 알마의 아들 아이작에게 <사랑의 역사>는 자신의 생부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했고 자신의 근원에 대한 추적이기도 했다. 이렇게 서로 다르지만, 비슷한 이유들로 <사랑의 역사>는 쓰이고, 복사되고, 읽혀지고, 번역된다. 한 권의 책이 만들어내는 몇 겹의 삶, 사랑들.

작가는 책 속에서 가상의 책 <사랑의 역사>를 통해 책에 관한 은밀한 암호들을 아름답게 숨겨놓았다. 한 권의 책이 누군가의 삶이 되는 비유(그러므로 결국 마지막 페이지는 죽음으로 장식될 것이다), 누군가의 삶이 다시 한 권의 책이 되는 비유(레오의 삶은 레오의 아들에게 보내는 한 권의 책 속에 담겨진다.), 그리고 그 두 가지가 겹쳐지는 과정(레오와 알마의 만남, 나아가 작가와 독자의 만남이라 해도 되지 않을까?) 같은 것들. 결국 작가가 숨겨놓은 비밀들을 풀기 위한 암호는 ‘책’이고, 그 해답은 ‘삶’ 속에 있다. 

"내 책의 마지막 페이지와 내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가 같으리라고 믿을 때도 있다. 내 책이 끝나면 나도 죽을 거라고. 방 안으로 바람이 불어와 내 종이들을 날릴 것이며, 날아가던 하얀 종이들이 모두 사라지면 이 방은 적막해지고 내가 앉아 있던 의자도 텅 비리라."

 

이 소설 속에 숨어있는 책을 둘러싼 비밀들은 결국 책에 대한 사랑 고백의 성격을 띠고 있다. 몇 부가 읽혀지고, 몇 부는 책방에서 두꺼운 먼지를 입은 채 쌓여있고, 또 몇 부는 반품되어 책의 운명을 다하게 되더라도 단 한 사람에게만은 특별한 인생의 책이 되기를 바라는 욕심. 그것은 소설 속에서 <사랑의 역사>를 쓴 레오의 간절한 바람이자, 또한 그 속에 투영되어 있는 작가 니콜 크라우스의 작가적 욕심이기도 할 것이다.(그렇다면 그녀는 성공한 셈이다. 여기, 이렇게 책의 여운을 길게 늘어놓는 독자가 있으니까. 그리고 이 독자는 이 책 속으로 너무나 깊이 빠져버린 것 같으니까.) 그녀는 가상의 책 한 권을 통해 책과 삶에 관한 아름다운 이중주를 연주해냈다. 나는 사실, 책을 읽는 내내 그녀의 부드러우면서도 차갑고,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절묘한 문장들에, 그리고 책의 곳곳에 숨어 있는 절묘한 문학적 감각들에 약간(아니, 어쩌면 아주 많이) 부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책을 읽는 일이 이렇게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데에는 감사한 마음마저 생겨났다.

소설 속에서 다비드가 여행 중 우연히 아르헨티나의 헌 책방에서 운명의 책, <사랑의 역사>를 발견하게 된 것처럼, 지금도 어느 헌 책방의 창가 외진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단 한 권의 책을 생각하면 나는 마음이 두근거린다. 내 마음의 껍질을 벗기고, 내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올 그 미지의 책들을 생각하면 행복해진다. 내가 너무 늦으면 안 될 텐데, 너무 오래도록 그 책을 기다리게 하면 안 될 텐데, 마음이 갑자기 조급해지기도 한다. (소설 속 레오에게 글쓰기가 아픈 것처럼) 책읽기 또한 아픈 것이라 해도, 책 속의 문장들이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걸어 들어오는 것이라고 해도 나는 기꺼이 아플 준비가 되어 있다.

나는 조금 더 아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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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08-01-24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처럼 슬픈 이가 또 있구나

저, 무슨 이야긴지 알아요. 아린님, 저 알아요.

아린님. 여기 한번 들어왔다가는 못 나가겠어요. 이 서재 정말로 좋으네요. 이런 곳을 몰랐다니 지난 시간이 아깝지만 신나기도 해요. 아무도 모르게 여기 와서 정말 뒹굴뒹굴하다 가겠어요. 아린님의 문장들이 얼마나 단정하고 따뜻한지, 뭐라 답글을 달아야 할지 모르겠어서 기분 좋게 당황한 네꼬 드림.

ALINE 2008-01-24 22:31   좋아요 0 | URL
네꼬님. 이렇게 들러주시고 발자국 남겨주셔서 감사해요.
리뷰만 간간이 올리는 서재라 썰렁하기만 한데 좋게 봐주셔서 고맙고요^^;
그리고 특히 그 문장을 이해주셔서 정말 반갑고 기쁘고 그래요^^
네꼬님이 뒹굴뒹굴하다 갈 수 있게, 여기 이 곳...좀 더 따뜻하게 데워놓아야 할까봐요.^^
 
제비를 기르다
윤대녕 지음 / 창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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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녕의 소설을 펼쳐들 때면 언젠가 머물렀던 제주의 기억이 떠오른다. 환한 햇빛이 비치는 아름다운 날도 있었을 텐데, 푸르게 넘실거리던 바닷가의 물결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던 눈부신 날도 있었을 텐데, 제주를 떠올리면 이상하게도 흐린 하늘과 세찬 바람에 대한 기억뿐이다. 온몸으로 부딪혀 오던 그 거친 바람이, 마음을 세차게 때리던 바람 소리에 대한 기억이 책장을 넘기는 내게 애잔한 그리움처럼 밀려들었다. 윤대녕의 소설은 그 바람 소리를 닮았다.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누군가를 잊지 못하면서도 그렇게 마음에 담아두기만 하는 그의 인물들을 보면서 제주의 바람 소리를 떠올린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마음 속 담아두었던 깊은 그리움을 툭툭 건드리는 것만 같았던 제주의 바람, 그리고 그 바람소리로 기억되는 제주. 작가가 제주에서 쓴 소설, 「탱자」는 고단한 생을 누린 고모가 제주에서 머무른 여정을 담고 있다. 고모의 고단한 생이 제주의 거친 바람을 닮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고모의 한탄 섞인 자조의 목소리도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결국 따스한 햇살을 기다리며 차가운 바람을 견뎌내는 게 우리네 인생일 테니까. 「못구멍」에 나오는 말처럼, “헐벗은 나뭇가지 사이로 잠깐잠깐 스쳐 지나가는 빛을 바라보는 게 우리들 인생”일 테니까 말이다. 

 

그리움은 어쩔 수 없이 우리 생에 스며드는 운명 같은 것이어서, 그의 인물들은 그리움을 멍에처럼 이고 살아간다. 「제비를 기르다」의 어머니는 가슴에 스며있는 그리움을 어찌할 수 없어서 집을 떠났다 다시 돌아오곤 했다. 마치 제비처럼 떠났다 돌아오는 어머니의 삶은 어디 한 곳 정착하지 못하고 평생을 떠도는 사람처럼 황량하고 고독했을 것이다. 그것을 지켜보는 가족들의 삶이야 말해 무엇하랴. 곁에 있는 가까운 사람들조차 어루만져 줄 수 없는 내밀한 생의 고독은, 그리고 그 고독으로 이루어져 있는 관계는 「못구멍」에서도 마찬가지다. 운명처럼 두 사람이 만나 결혼하지만 이들은 고단한 생을 핑계 삼아 서로를 가장 외롭게 한 후에 헤어진다. 이들은 다시 만나게 되지만 그 재결합이 쓸쓸하게만 느껴진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준 상처가 못구멍처럼 어떤 것으로도 지워질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상처는 겉으로는 치유된 듯 보이지만, 그 앙금은 깊숙하게 남아 우리 삶을 이끌고 갈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 ‘가족’으로부터 깊은 상처를 받기도 한다. 가까운 듯 보이지만 가장 멀리 존재하는 관계일 수 있는 가족. 그 가족의 고단한 관계가 여러 소설에서 보인다. 「제비를 기르다」에서 어머니는 그 자신의 고독으로 남은 가족들을 고독하게 만들었고, 「고래등」과 「편백나무숲 쪽으로」의 아버지는 ‘나’에게 ‘가족’이라는 이름의 멍에 같은 존재이다. 「못구멍」에서 부부는 함께 있으면서도 혼자 있을 때보다 더한 외로움을 느낀다. 함께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내밀한 외로움을 나누지 못했다. 따뜻한 관계라고 생각했던 ‘가족’이 그렇게 고단한 삶의 짐이 되기도 하고, 마음 속 깊이 맺힌 고독의 무게를 더하기도 한다. 그의 소설 속에 자리하고 있는 그리움의 정체는 ‘가족’이라는 무거운 관계에 빚지고 있는 부분이 크다.

 

그의 소설 속에서 헤어짐, 상처, 그리움의 쓸쓸한 이미지는 자연스럽게 ‘죽음’의 고독함으로 이어진다. 「제비를 기르다」에서 그토록 고독한 생을 살아온 어머니는 당연한 귀결처럼 죽음을 준비한다. 「탱자」의 고모나 「편백나무숲 쪽으로」의 아버지가 맞이하는 죽음은 그 고단했던 생과 맞물려 애잔한 느낌을 가지게 한다. 남겨진 사람들에게도 타인의 죽음은 지독한 아픔이어서 「낙타 주머니」에서처럼 쓸쓸한 느낌을 어찌할 수 없다. ‘죽음’이라는 끝을 가지고 태어나는 한, 우리 삶에 드리운 고독은 우리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숙명인지도 모른다. 윤대녕의 소설은 그러한 필연적인 고독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마치 그러한 필연적인 고독에 의해 소설이 쓰인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각별히 고독을 챙기며 살았다는 작가의 말을 읽으며 가슴이 먹먹해져 온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주 행복하다고 생각했던 어떤 시간, 갑자기 터져 나온 울음에 먹먹해졌던 기억이 있다. 환한 빛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생이란 끊임없이 고독한 질문을 요구하는 것일까. 그 때의 먹먹했던 기억만큼이나 가슴을 아련하게 파고드는 문장들은 마치 옛사람을 우연히 마주치게 된 것만큼이나 쓸쓸하다. 윤대녕의 서정적인 문장들 속에서 서서히 아픈 통증을 느끼는 사람처럼 거닐었다. 그 아픈 통증을 쓰다듬어 주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그의 문장들이었다. 부드럽게 매만져주는 따뜻한 손길처럼 그가 속삭이는 듯 했다. 쌓여가는 그리움들이 상처가 되어 삶 속으로 파고들어도, 그래도 살아가다 보면 따스한 강물 같은 위로 받을 수 있는 날이 있다고. 고독한 삶 위로 따스한 빛이 내리쬐는 순간, 그런 순간들이 이 삶에도 존재한다고. 그러니 살아가는 게 아니겠냐고.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는 감정들로 아파할 때, 잠들지 못하는 밤 그리움들이 가슴 시리도록 스며들 때, 누군가의 위로로도 스산해진 마음을 다독이지 못할 때, 그럴 때면 늘 윤대녕의 소설집을 꺼내들었다. 살아 있는 일이 이토록 고독한 일이었던가. 그의 문장들에서 나는 얼마나 고독해졌고, 그러면서도 이상하리만치 편안해졌는지. 우울했던 시간, 그의 문장들에서 나는 또 얼마나 위로받았었는지. 그의 말처럼 살아 있는 한 그리움은 계속되고 누군가 글을 쓰는 일도 계속된다면, 이제는 더 이상 내 깊은 그리움을 홀로 삭이지는 말아야겠다. 마음이 시리거나, 그리움이 서걱거리는 밤이면 펼쳐볼 한 권의 책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그래서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따뜻한 이불에 파고들듯, 그리운 이가 전해주는 엽서를 읽듯, 그의 소설 속으로 파고들어야겠다. 내 깊은 그리움을 달래주기 위하여. 내 고독한 삶에 아름다운 위로 하나 건네주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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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를리외르 아저씨 쪽빛그림책 2
이세 히데코 지음, 김정화 옮김, 백순덕 감수 / 청어람미디어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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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따뜻했다. 책 한 권이 어떻게 새롭게 만들어지는지 따라가며, 어느새 마지막 장에 이르렀을 때 마음이 참 따뜻해졌다. 낡은 책이 다시 태어나는 그 따뜻한 순간들을 천천히 감상했다. 오래되어 낡고 책장이 떨어진 책 한 권이 아주 멋지고 특별한 책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도 아름다웠지만, 어린 소녀와 를리외르 아저씨와의 우정어린 만남도 참 아름다웠다.

프랑스어로 제본을 뜻하는 를리외르. 오래되어 보수가 필요한 책을 다시 꿰매고 표지까지 꾸며주는 일을 뜻한다. 자신의 소중한 도감이 낱장이 떨어져 나가자 소녀는 를리외르를 찾아가게 된다. 책에 대한 사랑이 그들을 자연스레 연결시켜준다. 아저씨는 책을 너무 좋아해서 낱장이 다 뜯어지도록 본 소녀의 마음을 알아차린 것 같고, 소녀는 아저씨가 책을 다시 멋지게 고쳐 주리라는 것을 믿는 것 같다. 이제 책의 멋진 변신이 시작될 차례. 를리외르 아저씨는 낱낱이 책을 뜯어내고, 가장자리를 자르고 실로 꿰매며 책을 정성스레 손보기 시작한다.

낡은 책이 다시 튼튼한 책으로 변신하는 섬세한 작업들이 그림책 속에 잘 표현되어 있다. 오직 손으로만 할 수 있는 정밀한 작업들. 아저씨 손이 꼭 나무옹이 같다는 소녀의 말에 를리외르 아저씨는 를리외르의 일은 모조리 손으로 하기 때문이라고 말해준다. 실의 당김도, 가죽의 부드러움도, 종이 습도도, 재료 선택도 모두 손으로 기억해야 한다고. 그 섬세한 손을 통해 책이 다시 만들어지고 귀중한 지식과 소중한 이야기들이 오랜 시간을 거쳐 전해진다고. 60가지도 넘는 공정을 거쳐, 마지막에 책등 가죽에 금박으로 제목을 넣는 일까지 마치게 되면 를리외르의 작업은 끝나게 된다.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책제목과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으로 만든 표지. 낱장이 다 뜯어져 보기 힘들었던 책이 그렇게 자신만의 책으로 다시 태어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 행복한 마음과 책을 정성스럽게 매만지는 를리외르의 열정이 아름다운 수채화 속에 담겨져 있다. 여행 도중 우연히 를리외르를 만나 수작업 과정들을 스케치하고 싶어서 몇 번이나 파리의 뒷골목 공방을 찾았다는 작가의 말을 읽고 보니, 지금도 파리의 뒷골목에서 나무옹이 같은 손으로 낡은 책을 부지런히 매만지고 있을 백발의 노인을 상상하게 된다. 지금도 그 곳에선 낡은 책이 새로운 생명으로 멋지게 태어나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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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길
베르나르 포콩 사진, 앙토넹 포토스키 글,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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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적인 두 개의 단어가 제목인 <청춘 ․ 길>이라는 책을 펼쳐들었을 때, 나는 내가 경험하기 힘들 것 같은 아름다운 여행을 예감했던 것 같다. 내가 가보지 못할 여행에 대한 꿈을 꾸고 있는 듯 아련한 느낌으로 다가왔던 <청춘 ․ 길>은 앙토넹 포토스키가 쓴 글과 메이킹 포토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는 베르나르 포콩이 찍은 사진이 담겨 있는 책이다.

베르나르 포콩이 일회용 카메라에 담아낸 풍경들은 어쩐지 쓸쓸한 느낌을 가지게 한다. 모래바람이 부는 것 같은 사막, 황량한 벌판과 맞닿아 있는 바다, 짙은 노을이 내려앉은 바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는 푸르스름한 낯선 도시의 풍경, 어스름한 하늘과 나무와 빛... 단 한 장의 사진만을 얻을 수 있는 일회용 카메라이기 때문일까. 단 한 순간에 담아낸 풍경들은 되돌릴 수 없는 시간들에 대한 애틋한 감정들이 담겨 있는 것만 같다.

 바간, 바마코, 사헬 같은 낯선 지명의 공간들 속에서 담아낸 사진들과 글. 두 남자의 여행은 천천히 지나간 시간들 위로 내려앉는다. 

   
  열네 살 무렵, 거리를 걸을 때면 나는 누군가가 나를 납치해주기를 꿈꾸곤 했다. 내 등뒤로 다가오는 자동차 소리를 들으면서, 이번이야, 라고 혼자말을 하곤 했다. 자동차가 급정거를 하고 문이 열리고 누군가 나를 낚아채 잠재우기를 기다렸다. 자동차는 오랫동안 달려갈 것이다. 아주 긴 수면의 밤이 될 것이다. 그러다 동이 틀 무렵 어느 바닷가에 당도할 것이며, 자동차 뒷좌석에서 잠을 깬 나는 몽롱한 상태에서 피부 위로 점점 더 따가워지는 햇볕을 느낄 것이다. 그러고도 한참을 남쪽으로 달려갈 것이다.  
   


‘너무도 뜨거운 대기와 먼지와 덤불숲,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납치의 본고장인 사막의 습곡’은 그렇게 감미로운 꿈을 떠올려보기에 좋은 공간인지도 모른다. 뜨거운 공기 속에서 몽롱한 꿈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와 기분 좋은 상상 속으로 몸을 내맡기려 하는 시간. 뜨거운 길 위에서 아련한 꿈은 마치 생생한 현실처럼 다가와 우리를 부드럽게 감싼다.  

   
  사헬의 어느 도로 위에 몸을 내맡긴 채 나는 어린 시절의 꿈을 되살린다. 아무것도 볼 수 없고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접촉은 해도 보이지는 않는 검은 육신들에 기댄 채 먼지를 들이마시며 요동에 몸을 내맡기는 꿈을.  
   

 

어스름한 사진들과 어우러진 짤막한 글들은 아련한 꿈속으로 초대하는 것 같다. 오랜 시간 버스에 몸을 내맡기고, 끝없이 펼쳐지는 길을 달리며 지나가는 풍경들에 가만히 마음을 내어놓을 때, 풍경은 그저 나의 시선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기억과 삶 속으로 스며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여행은 일종의 '단절'이 된다. 지금까지 내가 속했던 세계와의 단절. 어쩌면 여행은 지금까지 내가 속했던 세계에서 나를 데리고 나와 전혀 다른 세계로 가져다놓는 도구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떠나온 세계들은 멈추지 않고 계속 돌아간다. 여러 세계를 접하는 경우, 그 세계들은 각기 서로에게 고통이 된다. 몇 광년이 걸리는 여행에서는 우리가 떠나온 세계가 우리보다 빨리 늙어버리기 때문에 그 세계를 다시 찾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라오스에는 ‘사는 게 그런 거야(chivit ko pen bep ni)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은 머나먼 여행을 떠나면서 친구에게 남기는 말이다. 우리는 어쩌면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우리는 출발할 때 이미 알고 있었다.  
   

 

<청춘 ․ 길>의 마지막 장을 읽으며 내가 오랜 기간 떠나는 여행을 과감하게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는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일상은 지극히 안락한 지금의 모습에서 조금이라도 변화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내 삶을 뒤흔들어놓을지도 모를 그 어떤 것이 두렵기 때문에.


   
  난 이제 덜 더운 곳에서는, 살기가 편한 곳에서는 살지 못할 것 같다. 다른 어느 곳도 이곳보다는 살기가 편할 것이다. 검은 아프리카를 보고 나면 북아프리카의 온화함이 그렇게 쾌적할 수 없다. 그렇지만 사헬로부터 멀어져서 안락하게 사는 것은 세계의 표면에서 산다는 느낌을 준다. 내면은 여전히 나 없이 돌아가고 있는데 말이다. 육신이 편한 곳에서는 더 이상 나의 존재를 느낄 수 없다. 내 육신이 견뎌낸 혹독한 삶이 이젠 존재규범이 된 듯하다. 아주 뜨거운 열기가 정상적인 규범을 녹여버리기라도 한 듯이......  
   


지친 일상 속에서 나는 습관처럼 이 책을 펼쳐든다. 감미로운 사진과 글 속에서 아름다운 생의 순간을,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 삶의 순간을 떠올리게 만드는 책. 그들의 여정을 따라가며 나는 내 삶에 뿌려지는 뜨거운 열기를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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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9-05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제목부터 매혹적인 느낌을 물씬 풍기는 군요. 두남자의 여행과 일회용 카메라로 찍어낸 풍경들이 꼭 만나고픈 이미지로 다가옵니다. 저도 이 책을 만나게 되면 습관처럼 펼쳐들게 될까요? 아무튼 아련한 이미지를 쉽게 떨쳐내지는 못할 것 같군요.

ALINE 2007-09-06 00:12   좋아요 0 | URL
제목이 참 매혹적인 책이죠?^^ 일회용 카메라로 찍었다고 해서인지 사진들이 더 아련한 느낌으로 다가왔었어요. 여행에 관한 생각이 날 때마다, 자주 이 책을 펼쳐들곤 해요. 볼 때마다 감미로운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이 드는 책이예요.^^

비로그인 2007-09-06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싸~하면서도 계속 맴도는 이미지들인 것 같은 느낌이에요. 가을에 무척이나 어울릴 것 같은 예감.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서평 잘 읽고 가요. ^^

ALINE 2007-09-07 23:13   좋아요 0 | URL
디드님.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책 속의 사진들이 가을과 잘 어울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쓸쓸한 가을날 읽으면 그 여운이 더 깊어질 것 같아요.^^
 
8월, 당신의 추천 도서는?
진실된 이야기
소피 칼 지음, 심은진 옮김 / 마음산책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카메라 앞에 서면 나는 늘 두려웠다. 나도 모르는 나의 눈빛을, 어디에 닿아 있을지 모를 나의 시선을 들킬 것만 같아서. 이 책을 읽으며 왜 그런 두려움과 비슷한 감정들이 생겨났는지 모르겠다.

삶의 한 순간을 응시하는 듯한 강렬한 시선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공허한 고독의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들 때문이었을까. 

설치미술가, 개념미술가, 사진작가라는 많은 수식어를 가지고 있는 소피 칼의 작품들은 흥미롭다. 옮긴이의 글에서 발췌하자면, 그녀는 “길에서 우연히 만난 한 남자의 일상을 카메라로 추적”하거나 “호텔의 객실 여종업원으로 일하며, 손님이 나간 객실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그곳에 머물렀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허구로 재구성”하기도 했다. “사설탐정을 고용해 자신을 미행하도록 하고, 자료와 사진을 받아” 책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특별한 작업들을 통해 그녀는 미술과 문학, 사진의 경계를 없앴는데, <진실된 이야기>도 그러한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 책에서 그녀는 사진과 소설이 결합된 독특한 형식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남자는 매력적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사랑을 나눈 첫날밤부터 그를 쳐다보는 것이 두려웠다. 나는 여전히 그렉을 사랑한다고 믿었다. 그러면서도 내 침대에 있는 이 남자가 평생을 같이할 만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될까봐 두려웠다. 나는 눈을 감는 편이 더 좋았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도 의심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느 날 어리석게도 나는 왜 내가 침대에서 눈을 꼭 감게 되는지 그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하나도 내비치지 않았다. 몇 달 후 그렉의 유령으로부터 벗어난 다음, 나는 비로소 눈을 뜰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바라보고 싶었던 사람은 바로 그였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깨닫게 되었다.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날이 될지 나는 몰랐다. 그는 나를 떠나버렸다.

 
   

자서전 형식을 빌려온 이 책에서 그녀는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 거기에 덧붙여진 사진들은 그녀 삶의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한다. 마지막으로 훔친 물건인 빨간 구두, 100프랑을 지불하고 얻은 연애편지, 면도칼날에 찢어진 누드화, 첫날밤 입은 웨딩 드레스, 돌아가시기 전 할머니가 자신의 이니셜로 수놓아준 침대 시트, 비어 있는 침대 위에 걸려 있는 ‘사랑의 편지’라는 그림 등 그녀 삶을 스쳐지나간 이미지들이 강렬하게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미지 덕분일까. 그녀의 글들은 강렬한 마침표를 새겨놓는다. 삶의 어떤 한 순간도 건조하지 않다. 이미지와 이야기 사이의 강렬한 긴장. 

그녀는 그렇게 강렬한 이미지들을 통해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듯 보인다. 우리는 그 이미지들 덕분에 그것이 그녀 자신의 삶이라고 믿는다. 그렇지만 정작 그녀는 웃으며 이렇게 묻고 있는 것 같다. “나를 보았나요?”(“나를 보았나요?”는 퐁피두 현대미술관에서 열렸던 소피 칼의 전시회 제목이었다고 한다.)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그녀가 묻는다. “나를 (정말?) 보았나요?”

그녀는 이미지들을 통해 “진실된” 이야기들을 만들어 낸다. 이미지로서 그것이 진실처럼 보이도록 믿게 만든다. 진실과 허구 사이에서 우리는 갈팡질팡하며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다. 우리 삶을 스쳐지나가는 만남과 이별, 죽음 같은 사건들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우리 삶의 어떤 부분들에 대해. 몇 장의 이미지들처럼 흩어지는 순간들, 그리고 잡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어떤 한 순간에 대해.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에피소드는 이별의 슬픔으로 괴로워하는 미국 청년에게 자신이 쓰던 침대를 비행기로 보낸 것, 그리고 에펠탑의 높은 곳에 꾸며진 방에서 밤을 보내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 끊임없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누군가를 관찰하고,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상상하던 그녀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허구와 진실 사이에서, 그리고 장르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갈팡질팡하는 독자들과의 진실 게임을 계속할 것이다.

그녀의 <진실된 이야기>는 계속해서 새로운 이야기가 덧붙여진 개정판이 나온다고 한다. 새로 들어갈 그녀의 이야기를 기대하며, 그녀에게 이야기하고 싶다. 당신을 보고 싶다고. 그리고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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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8-19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폴 오스터와 함께 작업한 책은 혹평이 자자했던지라 읽지 않는 게 낫겠구나, 싶었는데, ALINE님의 이 책 리뷰를 보니 이 책은 근사해 보입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듣기 쉽지만, 그 중 재미있는 이야기, 읽기 전, 듣기 전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이야기를 발견하기는 어렵지요.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ALINE 2007-08-21 01:10   좋아요 0 | URL
뉴욕이야기에 혹평이 많은 줄은 몰랐네요^^; 안그래도 서점에서 잠깐 보고 다시 찬찬히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던 책이거든요. <진실된 이야기>는 저 개인적으로는 무척 마음에 들었는데, 생각해보니 개인적인 차이가 있을 것 같은 책이기도 해요. 게다가 (우리나라 출판 현실상) 사진도 원본 그대로가 아니라, 가려진 부분이 있어서 아쉬웠답니다.^^; 물론 그래도 제겐 무척 인상적인 책으로 남을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