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길
베르나르 포콩 사진, 앙토넹 포토스키 글,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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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적인 두 개의 단어가 제목인 <청춘 ․ 길>이라는 책을 펼쳐들었을 때, 나는 내가 경험하기 힘들 것 같은 아름다운 여행을 예감했던 것 같다. 내가 가보지 못할 여행에 대한 꿈을 꾸고 있는 듯 아련한 느낌으로 다가왔던 <청춘 ․ 길>은 앙토넹 포토스키가 쓴 글과 메이킹 포토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는 베르나르 포콩이 찍은 사진이 담겨 있는 책이다.

베르나르 포콩이 일회용 카메라에 담아낸 풍경들은 어쩐지 쓸쓸한 느낌을 가지게 한다. 모래바람이 부는 것 같은 사막, 황량한 벌판과 맞닿아 있는 바다, 짙은 노을이 내려앉은 바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는 푸르스름한 낯선 도시의 풍경, 어스름한 하늘과 나무와 빛... 단 한 장의 사진만을 얻을 수 있는 일회용 카메라이기 때문일까. 단 한 순간에 담아낸 풍경들은 되돌릴 수 없는 시간들에 대한 애틋한 감정들이 담겨 있는 것만 같다.

 바간, 바마코, 사헬 같은 낯선 지명의 공간들 속에서 담아낸 사진들과 글. 두 남자의 여행은 천천히 지나간 시간들 위로 내려앉는다. 

   
  열네 살 무렵, 거리를 걸을 때면 나는 누군가가 나를 납치해주기를 꿈꾸곤 했다. 내 등뒤로 다가오는 자동차 소리를 들으면서, 이번이야, 라고 혼자말을 하곤 했다. 자동차가 급정거를 하고 문이 열리고 누군가 나를 낚아채 잠재우기를 기다렸다. 자동차는 오랫동안 달려갈 것이다. 아주 긴 수면의 밤이 될 것이다. 그러다 동이 틀 무렵 어느 바닷가에 당도할 것이며, 자동차 뒷좌석에서 잠을 깬 나는 몽롱한 상태에서 피부 위로 점점 더 따가워지는 햇볕을 느낄 것이다. 그러고도 한참을 남쪽으로 달려갈 것이다.  
   


‘너무도 뜨거운 대기와 먼지와 덤불숲,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납치의 본고장인 사막의 습곡’은 그렇게 감미로운 꿈을 떠올려보기에 좋은 공간인지도 모른다. 뜨거운 공기 속에서 몽롱한 꿈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와 기분 좋은 상상 속으로 몸을 내맡기려 하는 시간. 뜨거운 길 위에서 아련한 꿈은 마치 생생한 현실처럼 다가와 우리를 부드럽게 감싼다.  

   
  사헬의 어느 도로 위에 몸을 내맡긴 채 나는 어린 시절의 꿈을 되살린다. 아무것도 볼 수 없고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접촉은 해도 보이지는 않는 검은 육신들에 기댄 채 먼지를 들이마시며 요동에 몸을 내맡기는 꿈을.  
   

 

어스름한 사진들과 어우러진 짤막한 글들은 아련한 꿈속으로 초대하는 것 같다. 오랜 시간 버스에 몸을 내맡기고, 끝없이 펼쳐지는 길을 달리며 지나가는 풍경들에 가만히 마음을 내어놓을 때, 풍경은 그저 나의 시선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기억과 삶 속으로 스며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여행은 일종의 '단절'이 된다. 지금까지 내가 속했던 세계와의 단절. 어쩌면 여행은 지금까지 내가 속했던 세계에서 나를 데리고 나와 전혀 다른 세계로 가져다놓는 도구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떠나온 세계들은 멈추지 않고 계속 돌아간다. 여러 세계를 접하는 경우, 그 세계들은 각기 서로에게 고통이 된다. 몇 광년이 걸리는 여행에서는 우리가 떠나온 세계가 우리보다 빨리 늙어버리기 때문에 그 세계를 다시 찾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라오스에는 ‘사는 게 그런 거야(chivit ko pen bep ni)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은 머나먼 여행을 떠나면서 친구에게 남기는 말이다. 우리는 어쩌면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우리는 출발할 때 이미 알고 있었다.  
   

 

<청춘 ․ 길>의 마지막 장을 읽으며 내가 오랜 기간 떠나는 여행을 과감하게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는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일상은 지극히 안락한 지금의 모습에서 조금이라도 변화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내 삶을 뒤흔들어놓을지도 모를 그 어떤 것이 두렵기 때문에.


   
  난 이제 덜 더운 곳에서는, 살기가 편한 곳에서는 살지 못할 것 같다. 다른 어느 곳도 이곳보다는 살기가 편할 것이다. 검은 아프리카를 보고 나면 북아프리카의 온화함이 그렇게 쾌적할 수 없다. 그렇지만 사헬로부터 멀어져서 안락하게 사는 것은 세계의 표면에서 산다는 느낌을 준다. 내면은 여전히 나 없이 돌아가고 있는데 말이다. 육신이 편한 곳에서는 더 이상 나의 존재를 느낄 수 없다. 내 육신이 견뎌낸 혹독한 삶이 이젠 존재규범이 된 듯하다. 아주 뜨거운 열기가 정상적인 규범을 녹여버리기라도 한 듯이......  
   


지친 일상 속에서 나는 습관처럼 이 책을 펼쳐든다. 감미로운 사진과 글 속에서 아름다운 생의 순간을,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 삶의 순간을 떠올리게 만드는 책. 그들의 여정을 따라가며 나는 내 삶에 뿌려지는 뜨거운 열기를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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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9-05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제목부터 매혹적인 느낌을 물씬 풍기는 군요. 두남자의 여행과 일회용 카메라로 찍어낸 풍경들이 꼭 만나고픈 이미지로 다가옵니다. 저도 이 책을 만나게 되면 습관처럼 펼쳐들게 될까요? 아무튼 아련한 이미지를 쉽게 떨쳐내지는 못할 것 같군요.

ALINE 2007-09-06 00:12   좋아요 0 | URL
제목이 참 매혹적인 책이죠?^^ 일회용 카메라로 찍었다고 해서인지 사진들이 더 아련한 느낌으로 다가왔었어요. 여행에 관한 생각이 날 때마다, 자주 이 책을 펼쳐들곤 해요. 볼 때마다 감미로운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이 드는 책이예요.^^

비로그인 2007-09-06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싸~하면서도 계속 맴도는 이미지들인 것 같은 느낌이에요. 가을에 무척이나 어울릴 것 같은 예감.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서평 잘 읽고 가요. ^^

ALINE 2007-09-07 23:13   좋아요 0 | URL
디드님.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책 속의 사진들이 가을과 잘 어울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쓸쓸한 가을날 읽으면 그 여운이 더 깊어질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