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밑줄 긋는 남자 - 양장본
카롤린 봉그랑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읽는다는 것은 독특한 행복감을 주는 취미생활인 것 같다. 고요한 밤, 스탠드 불빛에 의지해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겨가다 어느 한 페이지 위에서 갑작스레 마주치게 되는, 잘 알지 못하는 작가와의 일치되는 그 무엇들. 두 개의 의식이 친밀하게 교감할 때 발생하는 그 행복감.
이 소설은 그런 책읽기의 특별한 행복을 잘 보여준다. 작가와 독자가 만나는 그 은밀한 만남을 '밑줄'로 상징하여 보여주면서 책읽기의 즐거움을 그대로 전달하여 준다. 그리고 하나 더. 이 소설은 좋은 책들과 그 책 속의 아름다운 문장들을 만날 수 있는 부수적인 즐거움까지 안겨준다.
스물 다섯 살 된 콩스탕스. 그녀에겐 일상이 그저 지루하고 고독하다. 그녀는 사랑받고 있다는, 그런 평안한 느낌들에 메말라 있다. 그런데 그녀가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에서 밑줄과 낙서들을 발견하는 순간부터 그녀의 삶은 점차 달라지기 시작한다. 밑줄 긋는 행위. 엄연히 도서관 규정에 어긋나는 이 행위를 용감하게 감행한 사람은 누구일까? 그리고 친절하게도 다음에 읽어야 할 책까지 추천해주고 있다.
그런데 그녀는 그 밑줄을 누군가 자기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고 느끼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녀는 도스토예프스키, 로제 니미에, 키에르케고르 등의 책에 밑줄 쳐져 있는, 마치 한 여자에게 구혼하는 듯한 남자의 독백 같은 문장들을 읽으면서 밑줄 긋는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는 그녀 자신도 용감하게 그 남자를 찾기 위해 밑줄을 긋기 시작한다. 이제 그들은 책의 밑줄을 통해 서로 대화 나누게 된다.
"어찌나 실감이 났던지 나는 밑줄 긋는 남자와 열렬한 사랑에 빠졌다. 그는 실재할 뿐만 아니라 내 말을 알아듣고 스스로에게 훌륭한 질문을 던졌으며 나에게 훌륭한 답을 주기도 했다. 그는 나를 사랑하고 있었고,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 책 덕분에 내 삶은 하루 아침에 달라졌다. 갑자기 삼라만상이 저마다의 의미를 띠었고, 나는 누군가를 위해 존재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나는 존재하고 있었다."
책을 통해서 살아있음의 기쁨을 느끼는 콩스탕스. 그녀는 그 알지 못하는 밑줄 긋는 남자를 위해 목욕 가운을 사고 그가 편안해 하도록 집을 아늑하게 만든다. 그러면서 그녀는 마치 그가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을 가진다. 그녀는 상상 속에서 완전히 사랑에 빠져버린 것이다.
밑줄 긋는 남자에 대한 그같은 콩스탕스의 사랑. 어쩌면 책읽기의 행복 또한 그런 것이 아닐까. 잘 알지 못하는 작가와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몇 줄의 문장, 몇 개의 단어들에서 교감하는 그 순간, 두 의식이 만나서 하나가 되는 그 순간. 바로 그 순간을 위해서 책을 펼쳐드는 건 아닐까.
콩스탕스와 함께 밑줄 긋는 남자를 추적하다 보면, 그런 책읽기의 행복에 대해 느낄 수가 있다. 어쩌면 이 소설이 가져다주는 부수적인 즐거움이 더 클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을 읽고 나서 도스토예프스키나 로맹 가리, 키에르케고르의 책들을 뒤적이고 싶어졌으니까.
눈치 빠른 사람들은 이 소설이 가져다 주는 즐거움을 한가지 더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이 소설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책을 통해 어떻게 기발하게 사랑을 전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