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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
장 에슈노즈 지음, 이재룡 옮김 / 현대문학 / 1997년 12월
평점 :
품절
삶의 불행이 가계부처럼 수치화될 수 있을까? 내 삶에 대한 절망(혹은 희망)또한 잔액을 표시할 수 있을까? 조금 상투적인 질문들이 이 책을 읽고 나서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장 에슈노즈는 이 소설에서 한 여자가 몰락해 가는 가정을 생동감 있는 빠른 문체로 그려내고 있다. 마치 가계부를 쓰듯 말이다.
"2월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빅트와르는 지난밤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데 침대 옆자리에서 펠릭스의 시체를 발견하곤 트렁크에 짐을 챙기고 은행에 들른 뒤 택시를 잡아타고 몽파르나스 역으로 내달렸다."
소설은 급박하게 시작된다. 엉뚱한 사건으로 궁지에 몰려 낯선 곳에서 방을 얻어 숨어 지내는 생활을 시작하는 빅트와르. 그녀는 이제 가지고 있는 돈의 범위 내에서 생활해야 할 처지에 놓인다. 그런데 방안에 숨겨두었던 고액의 돈을 도둑맞으면서부터 그녀의 몰락이 점차 가속화되기 시작한다. 보다 품위가 떨어지는 호텔을 전전하는 동안 돈은 점점 줄어들고 그녀의 외양 역시 아름다움을 잃어가기 시작한다.
"정말 돈이 바닥이 나자 목숨을 이어가는 것 자체가 점점 괴롭게 되었고 빅트와르의 외모도 정말 눈뜨고 보지 못할 지경으로 변했다."
'제 4세계의 가난, 비참함은 일상 생활 속에서 불쑥 분출하는 거대한 폭력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작가는 그 비참함의 느낌이 너무 강해서 자신의 소설 속에 가난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다루게 되었다고 한다. 사회적 지위의 허약성, 육체의 격렬한 몰락 등이 작품의 주요한 모티브가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경제적으로 너무나 나약한 존재이다. 그런 인간의 허약한 지위가 이 소설에서는 물질적 표현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작가는 빅트와르의 가계부를 보여주는 것처럼 그녀의 지출품목과 가격을 상세하게 적고 있다. 그가 적어 놓은 지출상품의 가격들을 일일이 따라 가다보면 그 절박한 감정들마저도 수치화되는 것 같다.
삶을 유지시켜 주는 조건들이 얼마나 물질적인 것에 의존하고 있는 것인지, 그 물질적인 것들이 무너지는 순간 인간은 얼마나 허약한 존재가 되는 것인지. 소설은 잘 말해주고 있다. 이 소설은 다소 무거운 것을 말하고 있지만 장 에슈노즈의 문장은 멋지다. 급박한 출발과 의외의 반전. 한 편의 스릴(다소 싱거울 수도 있겠지만) 있는 영화를 본 듯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