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지음, 유혜자 옮김 / 아래아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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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연히 도서관에서 발견했던 뒤렌마트의 소설. 100페이지도 되지 않는 짧은 분량이긴 했지만 단숨에 읽어내려 갈 수 있었던 건 강렬한 사건 전개로 독자들을 끌어 당기는 이 소설만이 가지고 있는 강한 흡입력 때문이었을 거다. 이 소설은  '1945년 이후 독일어권에서 발표된 책 가운데 최고의 작품'이라는 찬사가 과하지 않은 작품이다

소설은 우연한 사고로 출발한다. 평범한 회사원 트랍스는 출장후 집으로 돌아가던 중 단순한 엔진 고장으로 차가 말을 듣질 않자, 집으로 굳이 가려 하지 않고 낯선 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민박집 주인인 노인은 트랍스에게 친구들과 하는 게임에 참여해 줄 것을 부탁한다. 유능한 법조인으로 평생을 보내고 은퇴한 노인과 노인의 친구들이 벌이는 게임이란 바로 모의재판을 하는 것.

트랍스는 이 놀이에 흥미를 느껴 자신이 피고역할을 하는 데 흔쾌히 승낙한다. 그렇게 본격적인 재판이 시작되면서 노인들은 트랍스의 죄를 밝혀내기 위해 심문을 시작한다.

그러나 연신 자신은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트랍스. 그는 자신이 평범한 회사원이고 지극히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간혹 여자들을 만나 불륜을 저지르는 것 외에는 특별히 죄를 저지른 게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노인들은 그의 지극히 평범한 일상 중에서 몇 가지 의심 가는 부분들을 캐낸다.

그렇게 그들은 평범한 회사원 트랍스의 삶을 낱낱이 파헤치면서 그냥 무심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간과하기 쉬운 도덕성의 문제를 끄집어낸다. 그들이 트랍스의 죄에 대해 열변을 토하자 트랍스도 점차 자신의 죄를 인정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진정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정의, 죄, 벌이라는 고상한 단어들이 꼭 필요한 이유를 이제야 뒤늦게 깨달았다”고 말한다.

그런데 모의법정이었지만 트랍스에게 내려지는 벌은 의외로 가혹하다. 그리고 그 벌이 실현되는 과정은 단순한 차사고로 트랍스의 삶이 달라지는 것을 말해주는 듯 우연성이 짙다. 역자는 뒤렌마트의 소설이 “늘 예상치 못한 우연성과 그래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개연성이 숨어 있어 흥미진진한 재미를 준다”고 말한다. 삶은 우연한 사건들의 집합체이고 그런 사실이 뒤렌마트의 소설 속에 우리들이 쉽게 수긍할 수 있을 만큼 타당하게 전개되어 있다는 뜻일 것이다.

이 소설은 우연한 사고로 의외의 결말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부도덕한 현실을 풍자하며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해, 그리고 인간성에 대해 되돌아보게 만든다. 한 평범한 회사원에게 일어난 작은 사건을 통해서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자연스레 풀어내고 있다.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이 세상에 아직도 작가가 쓸 이야깃거리가 남아 있는 걸까?”라고 묻는다. 그러면서 그는 우연한 사고들로 점철되어 가는 이 세계에서도 인간성을 되돌아보게 하고 법과 정의 혹은 연민이 반사되는 ‘그래도 가능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고 대답한다. 그의 얘기에 의한다면, <사고> 또한 우리 자신의 인간성을 되돌아보게 하는 그래도 가능한 이야기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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