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 제14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은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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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통의 편지처럼 이 책을 받았다. 문학 잡지를 정기 구독하는 이유가 어느 날 우체통에 꽂혀 있는 책을 꺼내드는 기분을 즐기기 때문이라면, 너무 단순한 걸까? 그렇게 기분 좋게 이 책을 만났고, 책을 읽는 내내 누군가가 내게 보내 온 정성스러운 편지를 읽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 읽고 나서 무언가, 답장을 써야 할 것만 같은 느낌에 빠진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오랜만에 리뷰를 쓴다. 마치 편지를 쓰는 듯한 편안한 마음으로. 아주 오랜만에 소설 속에 제대로 빠질 수 있게 해 준 데 대한 고마움을 담은 편지라고 해도 될까.


제목에서 눈치 챌 수 있듯이, 소설을 이끌고 가는 것은 ‘편지’다. 눈 먼 개와 모텔을 전전하며 여행을 다니는 남자, 지훈은 매일 밤, 누군가에게 편지를 쓴다. 지훈이 매일, 부지런히 편지를 쓰는 대상은 그가 여행 중에 만났던 사람들이다. 저마다 다른 빛깔로 살아가는 사람들, 고독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편지’라는 위로를 건넨다. 그래서 지훈의 편지 여행은 단순한 여행이라기보다는 어떤 성스러운 의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지금도 어디에선가 어느 모텔의 방에서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려고 사각사각 연필을 깎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던 건 그만큼 소설의 매력에 빠져들었기 때문일까.


이 소설은 ‘편지’라는 따뜻한 장치로 오래된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아무도 편지하지 않았다’라는 문장이 반복되면서부터 오래된 그리움은 쓸쓸함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집으로 돌아와 비어 있는 우체통을 바라볼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이 서글펐던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는 내내 그런 서글픔을 느껴야 할지도 모른다. 제목에서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지훈에게 편지를 받은 사람들 중 아무도 지훈에게 편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훈의 여행은 길어진다. 여행은 누군가에게 답장이 오는 순간, 끝나므로.


성스러운 의식과도 같은 지훈의 여행에 한 여자 소설가가 끼어들면서 소설은 흥미로워진다. 지하철에서 자신의 소설을 직접 파는 소설가 751.(751은 지훈이 붙여준 숫자다. 지훈은 소설가를 만나기 전, 750명을 만났으므로) 일방통행처럼, 편지 쓰기를 계속하며 여행을 다니는 지훈에게 소설가 751의 존재는 실시간으로 답장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불편한 만남으로 시작되었지만, 이들은 점차 서로 익숙해진다. 여행을 하며 편지를 쓰는 남자와 자신의 소설을 팔러 다니며 소설을 쓰는 여자. 둘 다 자신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들려준다는 공통점이 있다.


편지 쓰는 남자, 지훈이 여행 중에 소설가와 함께 여행을 하게 되는 설정이 꽤나 흥미로웠던 것은 어쩌면 작가는 소설가를 편지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서다. 그러고 보면, 매일 매일 부지런히 연필을 깎아 자신의 이야기를 편지지에 담아내는 지훈의 이미지는 매일 원고지와 씨름하며 혹은 모니터를 눈물겹게 응시하며 글을 써내려가는 소설가의 이미지와 꽤나 비슷하다.


때때로 정말 이런 일이 가능할까, 하는 비현실적인 설정이 눈에 띄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설정을 눈감고 넘길 수밖에 없는 것 또한 이 소설이 가진 매력이다. 반복되는 설정에서 눈치 빠른 독자는 소설의 결말을 짐작할 수 있다. 여러 빛깔의 삶이 지훈의 연필 속에서 되살아나며 결국에는 지훈 자신의 깊숙한 삶까지 편지지 위에 새겨진다. 깊은 밤, 때로는 감상적인 기분에 잠겨 편지를 써 본 사람은 알 것이다. ‘편지’는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음으로써, 자신의 짐을 털어버릴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보냄으로써 자신은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매혹적인 수단이라는 것을. 지훈에게도 편지는 결국 자신만의 집에서 살아내기 위한 방법이고, 쓸쓸한 생을 버텨내기 위한 수단이다.


‘편지’에는 늘 위험이 따른다. 우편배달부였던 지훈이 직접 경험했던 배달 사고처럼, 편지에 는 수신자에게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는 가능성이 숨어 있다. 잘못 배달된 편지, 엉뚱한 이에게 도착하는 편지는 영화 속에서나 소설 속에서 늘 흥미로운 모티프가 되어 왔다. 이 소설도 그러한 모티프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이 소설이 어떤 방식으로 흘러가는지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 소설은 편지 그 자체가 주는 따뜻함에 많이 기대고 있다. 이 소설이 쓸쓸하면서도 정겹게 여겨졌던 이유는 소설을 읽는 중간 중간, 여러 감정과 기억이 얽혀 마음이 따뜻해졌기 때문이다. 어느 날 서랍을 정리하다가 문득 오래된 편지들을 발견할 때 느끼는 감정, 늘 비어있었던 우체통에 어느 날 문득 예쁜 편지가 꽂혀 있을 때 느끼는 감정, 언제였는지 가물가물하지만 누군가에게 정성스럽게 편지를 썼던 기억, 거리에서 빨간 우체통을 발견할 때마다 느끼는 반가움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이 얽히면서 책을 읽는 이의 마음을 따사롭게 만들어 준다.


소설을 읽고 나서, 이 소설을 쓴 작가는 아마도 편지를 많이 써보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정성들여 쓴 편지에 답장을 받았을 때의 기쁨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리뷰를 답장이라고 할 수 있다면, 꼭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당신의 편지 잘 받았다고. 편지를 읽는 동안, 마음이 쓸쓸하면서도 참 따뜻했다고. 앞으로 당신이 보내오는 편지, 열심히 기다리고 있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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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살의 털 사계절 1318 문고 50
김해원 지음 / 사계절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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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순간은 시간보다 강하다.”

책을 읽다가 이 문장에서 멈칫했다. 이 문장을 읽었던 순간처럼, 멈칫했던 순간들이 많았다. 물컹했던 아이 일호가 단단해져 가는 순간들. 그 순간들을 읽으면서 자꾸만 따가운 듯 아픈 느낌이 들었던 건 내가 너무 미지근한 열일곱을 보냈기 때문이었을까. 단단해져가는 일호를 보면서, 아프지만 달콤했던 순간들, 생에서 가장 반짝거렸던 그 때의 순간들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나는 너무 평범한 열일곱의 시간들을 보냈다.

이 소설은 수상한 제목에서부터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렇지만 그 수상한 제목의 실체를 알게 되었을 때,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열일곱 평범한 아이가 어떻게 털에 매달리게 되는지. 평범한 아이의 인생이 털로 인해 어떻게 달라지게 되는지.

일호는 평범한 아이처럼 보였다. 적어도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진. 체육 선생이 두발 규정을 어긴 아이의 머리에 라이터를 들이대는 것을 보는 그 순간, 일호의 가슴에도 불이 붙었다. 불이 붙는 그 순간부터 일호는 예전의 평범한 아이가 아니다. 불이 붙을 수 있는 심지가 마음속에 남아 있었으니, 일호는 원래 평범한 아이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일호의 이야기만 다루었다면, 소설은 시시해졌을 것이다. 일호의 마음에 불이 붙은 그 순간, 아버지가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흥미로워진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아버지가 가장 좋지 않은 순간 등장하는 것이다. 게다가 태성이발소의 주인 할아버지의 이야기까지 더해지며 3대의 이야기가 흥미롭게 엇갈리기 시작한다. 옳다고 생각되는 일에 대해서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 할아버지, 20년 만에 돌아와 아들의 신념을 지지해주는 든든한 아버지, 그리고 부당한 현실에 대해서 당당히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줄 아는 일호. 정말 매력 넘치는 가족 아닌가. 이 특별한 가족들 외에도 매력적인 인물들을 만나는 재미가 있다. 일호의 친구 정진이, 재현,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두발 규제를 해야 하는 처지이지만 따뜻한 마음씨가 살짝 엿보이는 선생 오광두에 이르기까지.

두발 규제 반대 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정학을 맞은 것을 어머니가 알게 되었을 때, 일호가 어머니에게 자신의 신념을 이야기하는 장면은 소설 속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이었다. ‘아!’하는 감탄이 저절로 나올 만큼. 인상적인 장면들은 더 있다. 멈칫하게 만들었던 순간들 말이다. 그러한 순간들 속에서 나는 소설의 힘을, 소설을 읽는다는 것의 매력을 다시금 느꼈던 것 같다. 

이 소설이 아름다운 것은 그러한 인상적인 순간들 외에도 작가의 매력적인 문장 덕분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우리말을 잘 살려 쓴 작가의 문장은 생동감이 넘친다. 20년 만에 돌아온 아버지의 어수룩한 말투, 남자 아이들의 소심하면서도 의리를 엿볼 수 있는 대화들은 소설 읽는 맛을 느끼게 했다. 일호의 힘든 여정을 웃음 지으며 따라갈 수 있게 만들었던 것은 은근하게 녹아 있는 유머 덕분이었다. 덕분에 책을 읽으면서 나는 눈물짓다가, 또다시 웃음 짓는 변덕스러운 사람이 되어버리곤 했다.

뭉클한 감동을 느끼며 책장을 덮었지만, 아직 이야기는 끝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어디에선가 계속되고 있을 열일곱의 이야기. 그 무궁무진한 이야기들이 궁금해졌다. ‘모든 세상 사람들의 끝없는 이야기를 담아내고 싶다’는 작가의 말을 눈 여겨 보았다. 앞으로도 어디에선가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려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생의 다른 이면들을 곱씹어 볼 수 있는 시간들을 만들어주기를. 끝없는 호기심으로 책을 펼쳐볼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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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똥도 아끼다 자린고비 일기 시공주니어 문고 2단계 49
정해왕 지음, 오승민 그림 / 시공주니어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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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며 아주 오랜만에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진정한 구두쇠란 바로 이런 것’임을 보여주는 이야기들이 구수한 입담으로 실려 있으니 웃음이 저절로 나올 수밖에.

담이 할머니가 300년 전의 자린고비 일기를 발견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책 속의 책’이라는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치 담이가 되어 할머니가 풀어 적은 일기를 읽는 것처럼 일기를 들여다보면 할머니 무릎을 베고 듣던 옛이야기 같은 푸근함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의 또 하나 독특한 형식은 각각의 일기가 속담과 연관된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 각각의 일기에는 하나의 속담이 어우러져 있어 읽는 맛을 더한다. 알뜰한 어머니로부터 절약정신을 물려받았다는 일기에서는 ‘콩 심은 데 콩 난다“라는 속담이, 자신보다 더한 구두쇠를 만나게 되는 일기에서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라는 속담이 들어가 있다. 각각의 일기 속에 맛을 더해주는 양념처럼 들어간 속담들이 이야기의 흐름과 잘 어우러져 있어 약간의 감탄까지 하게 된다. 속담으로 풀어낸 자린고비 이야기라고 해도 될 정도다.


무엇보다도 이 책의 진정한 묘미는 바로 우리가 알고 있었던 자린고비에 대해 새롭게 알게 해주는 점이 아닐까. 자린고비 일기를 읽기 전의 담이처럼 자린고비는 놀부나 스크루지 영감처럼 지독한 구두쇠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책을 읽고 나면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쓰다’라는 속담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자린고비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책의 마지막에 가면 처음의 웃음이 감동으로 변하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책의 끝부분에는 친절하게도 자린고비 생가에 관한 자료도 실려 있다. 푸근한 옛이야기 속의 인물이 실존 인물로 다가오는 순간, 현실과 상상의 묘한 경계를 느끼게 된다. 아울러 그 속에서 힌트를 얻어 신선한 형식으로 이야기를 빚어낸 작가의 솜씨에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된다.


사랑하는 아들에게도 천장에 매달린 고등어자반을 너무 오래 바라보지 말 것을 주문하는 자린고비. 왠지 곁에 가면 짭조름한 소금냄새가 날 것만 같은 자린고비라는 인물이 이제 새롭게 기억될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이 아껴서 모은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 줄 아는 넉넉한 마음씨를 지닌 사람으로.


책을 다 읽고 나면 저절로 이런 생각이 든다. 이제 ‘자린고비’라는 이름은 지독한 구두쇠에 붙여주는 이름이 아니라, 아끼되 제대로 쓸 줄 아는 사람에게 붙여주는 훈장과 같은 이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이제 내게 ‘자린고비’는 아름다운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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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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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내 삶 속으로 스며들다

소설이 어떻게 우리의 삶 속으로 스며들 수 있을까, 나는 종종 궁금해지곤 한다. 이 두꺼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늘 멀찌감치 떨어져 구경하는 구경꾼처럼 소설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곤 했다. 이 책을 처음 펼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책의 첫 장을 펼치고 나서, 처음에는 그저 멀게만 느껴지는 그 삶의 이야기들을 관찰하듯 읽어 내려갔다. 마치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의 삶을 훔쳐본다는 심정으로. 그러나 책을 펼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이건 나의 이야기라고.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라고. 바로 우리 삶에 관한 이야기라고.

이 책을 읽었던 시간은 소설이 어떻게 타인의 삶 속으로 온전히 스며들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지를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타인의 삶을 관찰하듯 바라보다 어느덧 서서히 스며들면서, 그것이 바로 내 자신의 삶 속으로 들어오는 순간, ‘소설’이라는 형식이 얼마나 아름다워질 수 있는지를 느꼈다. 소설 속 그녀들의 삶이 내 자신의 이야기가 되는 순간 아릿한 슬픔에 마음이 아파온다. 내 자신의 이야기가 된 것처럼 느껴진 그 순간부터 한 글자, 한 글자가 마치 강렬한 통증을 몰고 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프게 읽어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책을 읽는 내내 고통스런 병을 앓고 있는 지독한 환자가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그만큼 아팠다.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고통스럽다고 느끼는 것조차 오히려 미안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도 그 곳에서 소설 속의 모습과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 그녀들을 떠올리면.

두 여자 이야기- 그리고 그리움에 관하여

두 여자가 있다. 마리암과 라일라. 두 여자는 각기 다른 환경 속에서 자라났다. 먼저 마리암. ‘사생아’라는, 마리암의 삶을 결정짓는 아픈 운명 속에서 그녀의 삶은 마치 불운한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 여행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여자의 삶에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문득 책장을 넘기는 일이 두려워졌다. 그녀의 삶에 드리울 어둠을 만나는 일이 겁이 났다. 아버지를 찾아가지만, 아버지를 만날 수 없었던 밤, 그녀의 운명은 이미 짙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아버린 느낌이 들었다. 남겨진 어머니가 자살하면서 그녀의 삶에 평생 지워지질 않을 상처가 새겨진다. 그녀의 삶은 그렇게 자신도 어찌할 수 없었던 상처를 평생 다독여 가야 할 수밖에 없는 삶이었다. 그래도 어찌할 수 없는 그리움과 회한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녀는 믿었던 아버지로부터 버려진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부인들에 의해 마치 팔려가듯, 결혼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마리암. 이제 늙은 구두장이 라시드라는 낯선 남자의 집에서 그의 부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녀는 자신 또한 아버지를 버리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한 여자의 삶에 깊은 상처가 드리워진다.

그리고 라일라. 라일라의 삶의 배경은 처음에는 마리암의 그것과 확연히 달라보였다. 그녀는 여성의 교육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났다. 우등생이었던 라일라. 여성의 삶이 대수롭지 않게 짓밟히는 그 곳에서도 자신의 꿈을 차곡차곡 쌓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던 라일라. 그러나 전쟁은 라일라의 삶을 가만 놔두지 않는다. 그녀는 학교를 다닐 수 없는 처지가 되고 그녀의 가족들은 전쟁으로 인해 무너진다. 전쟁으로 오빠들이 죽으면서 어머니의 삶마저 무너져 내린 것이다. 그리고 또다시 전쟁은 너무나 잔인하게도 라일라에게서 남은 가족들마저 모두 앗아간다. 그녀의 집에 폭탄이 떨어져 가족들이 모두 죽고, 그녀 혼자 기적적으로 살아나게 된 것이다. 혼자 살아남은 삶. ‘여성’의 삶이 철저히 짓밟혀지는 그 곳에서 ‘여성’으로 혼자 살아남은 것이다.

그녀들은 그렇게 만난다. 가족들을 잃어버리고 여성으로 혼자 남겨진 채로. 그러나 그것이 그녀들을 이어줄 수는 없었다. 한 남자가 사이에 있었으니까. 가족을 잃은 어린 라일라를 돌봐주는 것이 그녀를 자신의 두 번째 부인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음흉한 목적임을 드러내는 라시드 사이에서 두 여자의 관계는 어긋난다.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엇갈릴 수밖에 없는 관계 속에서 그녀들은 처음에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애초에 불가능해져버린 상황 속에서 그녀들은 엇갈리고, 갈등하고, 불신한다.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기 시작한 것은 아이를 통해서였다. 라일라가 낳은 아이, 아지자. 한 사람은 아이를 낳기도 전에 아이를 잃어버렸지만, 그녀들은 똑같이 어머니였다. 어머니로서, 그리고 같은 여성으로서 그녀들은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남편의 잔인한 폭력 앞에서 두 여자는 서로에게 기댄다. 소통이 불가능할 것 같았던 그 상황 속에서 두 여자가 서로를 알아가는 그 과정들은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마치 누군가를 바라보고, 이해하려는 시도 속에 우리의 삶이 아름다워질 수 있음을 말하는 것처럼. 상대를 향한 차가운 몸짓에서 점차 자신의 깊은 속내까지 드러내게 될 정도로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들은 우리 인간이 차가운 고통 속에서도 얼마나 아름답게 빛날 수 있는 존재인지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어쩌면 그녀들이 서로를 향해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그녀들의 삶을 이루고 있는 것들이 비슷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녀들 모두 누군가에 대한 깊은 그리움이 어떻게 삶을 이루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들의 삶 자체가 똑같이 누군가에 대한 먹먹한 그리움들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마리암의 삶을 이루고 있었던 것은 자신을 버렸던 아버지와 자신이 죽게 만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었고, 라일라의 삶을 이루고 있었던 것은 전쟁으로 인해 잃어버린 가족들, 그리고 전쟁으로 떠나간 사랑하는 사람 타리크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그 그리움의 힘으로 전쟁과 폭력 앞에서 그저 연약하기만 했던 그녀들이 서로를 차가운 고통 속에서 구해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어쩌면 삶에 마침표를 찍게 만들고 싶도록 가혹하게 들이닥치는 고통 속에서도 우리 삶을 끈질기게 이어주는 것 또한 그 그리움의 힘이 아닐까.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리 삶에 남겨 놓은 사랑의 흔적들 속에서 우리는 고통을 이겨나가는 힘을 얻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희망에 관하여

이 책을 읽는 일이 힘들었던 것은 그렇게 우리 삶에 새겨진 그리움에 대해 생각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소설 속에서 그녀들이 존재하는 위치,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무거움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이보다 더 절절하게 말할 수 있을까. 이 책이 말하는 여성의 삶은 아프가니스탄이라는 특정한 지역에서의 여성의 삶을 말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 땅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이 소설은 아프게 전달한다. 아프게 느끼게 한다. 무너지는 꿈, 짓밟히는 삶. 그리고 어머니로서의 희생. 폭력과 전쟁으로 짓밟힌 그녀들의 삶은 여성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절실한 무거움을 폭로하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그 곳뿐만이 아니라 지구의 곳곳에서 아직도 수많은 여성들의 삶이 짓밟히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마리암의 엄마 나나가 말했던 것처럼 소리 없이 내리는 눈들은 여자들의 한숨이 쌓여 내려앉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도 어디에선가 고통스런 여성의 삶이 소리 없이 쌓여 차가운 눈으로 내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단지 훔쳐보기에서 나아가, 내가 소설 속 그녀들과 소통할 수 있었던 것은 같은 여성이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들의 이야기가 지금 나를 살아가게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리움이 어떻게 삶을 이어지게 할 수 있는지를, 삶을 부서지게 한 것들을 딛고 다시 일어서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다시 한 번 절실하게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통으로 인해 비참히 무너지지 않는 삶을 소설 속에서 만나는 일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 될 수 있는지를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통스런 삶 속에서 고통으로 인해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어줄 수 있기에, 비참하고 고통스런 삶 속에서도 누군가에게 따사로운 빛이 되어줄 수 있기에 삶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라일라에게 마리암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리고 역시 마리암에게 라일라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리고 그 순간, 삶은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이 되어 우리를 비추는 것인지도 모른다.


‘희망’이라는 단어는 내게 늘 생경한 단어였다. 누군가가 억지로 만들어낸 말처럼 느껴지던 그 단어. 만약 소설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너무나 고통스럽고 끔찍한 상황에서도 삶이 자신을 철저하게 외면하지만은 않게 하는 그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가령 이 소설 속에서 두 여자에게 닥쳤던 상황들 속에서도 두 여자들을 살아내게 한 그 무엇처럼. 마리암은 슬픈 결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이 꼭 슬픈 결말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것은 가장 행복한 순간 자신의 삶을 끝낼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라일라에게 ‘삶’이라는 가슴 벅찬 선물을 주고, 자신도 삶이 주는 가장 따뜻한 선물을 받고 떠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통스런 상황에서도 삶의 끈을 놓을 수 없게 하는 그 무엇. 비루한 눈물들을 쏟아내는 삶이라 할지라도 우리 삶을 어느 한 순간 찬란하게 만들어주는 그 무엇. 누군가를 이해하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누군가를 용서할 때 느낄 수 있는 그 무엇. 그 무엇이 우리를 살아내게 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희망이라는 단어가 존재한다면, 바로 그러한 것들에 붙여줄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을 읽고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던 것도, 책을 읽는 순간, 순간이 아플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녀들의 삶에 대한 얄팍한 연민의 감정 때문이 아니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이 소설이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순간들을, 찬란한 빛으로 스며드는 그 순간을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 찬란한 빛이 내 삶 속으로 들어오는 순간, 나는 내게 그토록 생경하게만 느껴졌던 단어, ‘희망’이라는 말을 속으로 외치며 조용히 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뜨거워진 마음으로 책장을 덮고 나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 그것은 고통스런 우리의 삶을 살아내게 하는 눈부신 힘의 다른 말일지도 모르겠다고. 그리고 지금 나를 살아있게 하는 바로 그것일지도 모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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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페르 닐손 지음, 정지현 옮김 / 낭기열라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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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어쩌면, 헤어짐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니, 기억에 관한 이야기다.
머릿속에서 수십 번은, 아니 수백 번은 더 재생되는 기억들. 삭제 버튼을 눌러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들. 이젠 하도 많이 틀어서 너덜너덜해졌을 법도 한데, 오히려 더 생생히 다가오는 기억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어쩌면 ‘사랑’에 관한 이야기일지도.
우리를 살아가게 하고, 또 어느 한 순간 우리를 살지 못하게 만들어버리는.

소설 속 남자는 되감기 버튼을 통해 그 사랑의 기억 한가운데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제는 너덜너덜해져버렸을 그 필름들을 다시 돌이켜 보면서 마지막 영화를 감상한다. 영화의 내용은 사랑의 기쁨.


책을 펼쳐들면 영화가 시작된다.

영화의 주인공은 그, 그리고 그녀.(아니, 어쩌면 나와 당신)
작가는 영화적 구성을 통해 지나간 시간의 기억을 따라가도록 만든다. 서서히 화면이 밝아오면 조심스레 물건들을 하나씩 없애는 남자의 모습이 보일 것이다. 버스표, 그림엽서, 독일어 문법책, 레몬밤 화분 같은 것들을. 우리는 호기심 많은 관객처럼, 그 물건들 속에 숨겨진 사연들을 조용히 뒤따라간다.

이 소설은 영화적 구성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넘나든다. 이제는 아픈 추억이 되어버린 사랑과 한때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었던 충만한 사랑이 교대로 서술된다. ‘현재’라는 프리즘을 통과하기에 과거의 사랑은 낭만적이고, ‘기억’을 통과해야 하기에 과거의 사랑은 눈물겹다. 그렇다. 이건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이야기다. 소설은 때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가 되어버리기도 하니까. 특히나 사랑이 끝날 때마다 사랑의 흔적들을 없애기 분주했던 당신이라면, 소설을 읽기 전 조금은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평범한 소품들이 아주 중요한 의미를 띠는 것은 그 속에 숨어 있는 사랑의 사연 때문이다. 사진과 편지들, 선물들을 모두 없애지 않고서 사랑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 아까운 물건들을 없애지 않고서, 아무렇지 않게 그 사람과 ‘안녕’할 순 없는 걸까. 조심스레, 그리고 집요함마저 보이며 물건들을 처리하는 그의 모습들을 지켜보면서 나는 내 지나간 사랑의 흔적들을 추적해보고 싶어졌다. 사랑의 흔적들을 폐기시킴으로써 사랑의 시간마저도 지워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 때의 그 시간으로 되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자꾸만 그 남자의 모습 속에 내 모습이 겹쳐졌다.


남자는 아주 처량하게(!) 사랑의 흔적들을 하나씩 폐기시켜나간다. 버스표를 찢어서 버리거나 엽서를 불에 태워 없앤다. 그리고 그 사이, 사이 그녀와의 운명적인 사랑의 시작이 묘사된다. 그리고 아름다웠던 사랑의 순간들. 사랑의 기쁨으로 마음이 가득 찼던 어떤 순간들이 그려진다. 그리고 또 다시 그녀와의 기억이 남아있는 물건들을 하나씩 없애가는 남자의 모습. 이렇게 소설은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고, 아픔과 행복이 교차된다.


아주 사소한 것조차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최대한의 무게로 다가옴을 보여주는 이 남자, 심지어 침대 시트 때문에 울기도 한다. 그냥 평범한 침대 시트였을 뿐인데, 침대 시트가 어떤 시간 때문에 아주 특별한, 그러면서도 아주 골칫거리의 물건이 되어버린다. 그녀와의 사랑의 기억이 스며 있는 침대 시트를 어떻게 처리할까 심각하게 고민하는 남자. 결국 세탁의 수준에서 원만한 결정을 내리는 이 남자의 모습을 보며, 나는 울음 섞인 웃음이 나오는 걸 간신히 참아야 했다. 이 소설의 영화적 장르(?)는 어쩌면 ‘사랑’이라는 비극적 코미디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침대 시트를 세탁기에 쑤셔 넣고 세제를 넉넉히 붓고는 ‘삶는 빨래’, ‘90도’에 다이얼을 맞추고 스위치를 켠다.

자.
기계가 물을 빨아들이고 윙윙거리며 작동하기 시작한다.
빨아라, 세탁기야, 빨아! 이 침대 시트 위에서 벌어졌던 일에 대한 기억을 모두 빨아버려.
침대 시트도 기억을 가질 수 있을까?
그렇다면 침대 시트의 기억을 빨아 없애버려, 라고 그는 생각한다. 아무것도 남지 않게 완전히 빨아버려.”

다소 비장함이 서려 있는 이 마지막 의식 속에서 미처 사랑이 이런 것인 줄 몰랐다는 사람처럼 눈물을 짓게 되는 것은 이 남자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사랑이 얼마나 눈부셨는지 알기 때문이다. 폐기되는 물건들 속에서 마지막 찬란한 빛을 띠며 사라져가는 사랑의 기억들. 그 눈부셨던 사랑의 기억들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레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난 안 울 거야, 이렇게 유치한 장면에서 우는 건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찬란했던 사랑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이러한 장면에선 꼭 눈물이 나오고야 만다. 그래서 이 작가는 똑똑하다.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 첫사랑이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 지 꿰뚫어보고 있는 이 사람. 그 사랑의 기억을 폐기시키는 작업 또한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를 알고 있는 이 사람. 시시하지만 눈물겹고, 유치하지만 가슴 아픈 영화처럼 ‘첫사랑’에 관한 애틋한 연서를 우리에게 건넨다.


“빛 속을 걷는 듯한 기분이야

매일 밤 사랑 위로 달빛이 비추어 내리길
때로는 이런 기분이 들어
오로지 우리의 존재, 우리의 느낌만이 진짜인 것 같다고”

소설 속에 인용되어 있는 ‘빨간 머리’라는 노래의 구절 같은, 그런 시간이었을 것이다. 빛 속

을 걷는 듯한 기분으로 살았던 시간. 환한 햇살이 언제든 비추고 있었던 그런 시간. 사랑의 기쁨으로 가득 찼던 시간들. 그러나 이제 그 시간들이 ‘과거’가 되어, 가슴 아픈 ‘기억’이 될 수밖에 없다. 소설은 그렇게 사랑이 과거가 되는 과정을, 가슴 아픈 기억으로 스며드는 과정을 천천히 비춘다. 작가는 그저 한 소년, 어린애에 불과했던 아이가 사랑으로 들뜨고 사랑으로 행복해하고, 그리고 사랑으로 무너지고 사랑으로 아파하는 시간들을 한 편의 영화처럼 애틋하게 그려냈다.

사랑에 관련된 기억은 한 편의 영화처럼 생생하고, 또 영화처럼 흐릿하다. 생생하지 말아야 할 부분에서 생생하고, 흐릿하지 말아야 할 부분에서 흐릿하다. 몇 번을 돌려보고, 또 돌려볼 수밖에 없는 영화. 사랑의 기억들은 그런 영화 같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영화적 구성은 효과적으로 여겨진다. 흐릿해져가는 사랑의 시간이 선명하게 재생되는 순간, 우리 삶은 한 편의 영화가 되고, 소설 속 이야기는 바로 나 자신의 이야기가 된다.


책을 펼쳐든 순간, 당신의 첫사랑은 더 이상 과거의 낡은 필름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영화가 시작되었으니까. 그리고 그 영화 속에서 당신은 이미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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