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 내 삶 속으로 스며들다

소설이 어떻게 우리의 삶 속으로 스며들 수 있을까, 나는 종종 궁금해지곤 한다. 이 두꺼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늘 멀찌감치 떨어져 구경하는 구경꾼처럼 소설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곤 했다. 이 책을 처음 펼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책의 첫 장을 펼치고 나서, 처음에는 그저 멀게만 느껴지는 그 삶의 이야기들을 관찰하듯 읽어 내려갔다. 마치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의 삶을 훔쳐본다는 심정으로. 그러나 책을 펼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이건 나의 이야기라고.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라고. 바로 우리 삶에 관한 이야기라고.

이 책을 읽었던 시간은 소설이 어떻게 타인의 삶 속으로 온전히 스며들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지를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타인의 삶을 관찰하듯 바라보다 어느덧 서서히 스며들면서, 그것이 바로 내 자신의 삶 속으로 들어오는 순간, ‘소설’이라는 형식이 얼마나 아름다워질 수 있는지를 느꼈다. 소설 속 그녀들의 삶이 내 자신의 이야기가 되는 순간 아릿한 슬픔에 마음이 아파온다. 내 자신의 이야기가 된 것처럼 느껴진 그 순간부터 한 글자, 한 글자가 마치 강렬한 통증을 몰고 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프게 읽어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책을 읽는 내내 고통스런 병을 앓고 있는 지독한 환자가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그만큼 아팠다.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고통스럽다고 느끼는 것조차 오히려 미안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도 그 곳에서 소설 속의 모습과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 그녀들을 떠올리면.

두 여자 이야기- 그리고 그리움에 관하여

두 여자가 있다. 마리암과 라일라. 두 여자는 각기 다른 환경 속에서 자라났다. 먼저 마리암. ‘사생아’라는, 마리암의 삶을 결정짓는 아픈 운명 속에서 그녀의 삶은 마치 불운한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 여행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여자의 삶에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문득 책장을 넘기는 일이 두려워졌다. 그녀의 삶에 드리울 어둠을 만나는 일이 겁이 났다. 아버지를 찾아가지만, 아버지를 만날 수 없었던 밤, 그녀의 운명은 이미 짙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아버린 느낌이 들었다. 남겨진 어머니가 자살하면서 그녀의 삶에 평생 지워지질 않을 상처가 새겨진다. 그녀의 삶은 그렇게 자신도 어찌할 수 없었던 상처를 평생 다독여 가야 할 수밖에 없는 삶이었다. 그래도 어찌할 수 없는 그리움과 회한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녀는 믿었던 아버지로부터 버려진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부인들에 의해 마치 팔려가듯, 결혼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마리암. 이제 늙은 구두장이 라시드라는 낯선 남자의 집에서 그의 부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녀는 자신 또한 아버지를 버리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한 여자의 삶에 깊은 상처가 드리워진다.

그리고 라일라. 라일라의 삶의 배경은 처음에는 마리암의 그것과 확연히 달라보였다. 그녀는 여성의 교육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났다. 우등생이었던 라일라. 여성의 삶이 대수롭지 않게 짓밟히는 그 곳에서도 자신의 꿈을 차곡차곡 쌓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던 라일라. 그러나 전쟁은 라일라의 삶을 가만 놔두지 않는다. 그녀는 학교를 다닐 수 없는 처지가 되고 그녀의 가족들은 전쟁으로 인해 무너진다. 전쟁으로 오빠들이 죽으면서 어머니의 삶마저 무너져 내린 것이다. 그리고 또다시 전쟁은 너무나 잔인하게도 라일라에게서 남은 가족들마저 모두 앗아간다. 그녀의 집에 폭탄이 떨어져 가족들이 모두 죽고, 그녀 혼자 기적적으로 살아나게 된 것이다. 혼자 살아남은 삶. ‘여성’의 삶이 철저히 짓밟혀지는 그 곳에서 ‘여성’으로 혼자 살아남은 것이다.

그녀들은 그렇게 만난다. 가족들을 잃어버리고 여성으로 혼자 남겨진 채로. 그러나 그것이 그녀들을 이어줄 수는 없었다. 한 남자가 사이에 있었으니까. 가족을 잃은 어린 라일라를 돌봐주는 것이 그녀를 자신의 두 번째 부인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음흉한 목적임을 드러내는 라시드 사이에서 두 여자의 관계는 어긋난다.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엇갈릴 수밖에 없는 관계 속에서 그녀들은 처음에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애초에 불가능해져버린 상황 속에서 그녀들은 엇갈리고, 갈등하고, 불신한다.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기 시작한 것은 아이를 통해서였다. 라일라가 낳은 아이, 아지자. 한 사람은 아이를 낳기도 전에 아이를 잃어버렸지만, 그녀들은 똑같이 어머니였다. 어머니로서, 그리고 같은 여성으로서 그녀들은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남편의 잔인한 폭력 앞에서 두 여자는 서로에게 기댄다. 소통이 불가능할 것 같았던 그 상황 속에서 두 여자가 서로를 알아가는 그 과정들은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마치 누군가를 바라보고, 이해하려는 시도 속에 우리의 삶이 아름다워질 수 있음을 말하는 것처럼. 상대를 향한 차가운 몸짓에서 점차 자신의 깊은 속내까지 드러내게 될 정도로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들은 우리 인간이 차가운 고통 속에서도 얼마나 아름답게 빛날 수 있는 존재인지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어쩌면 그녀들이 서로를 향해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그녀들의 삶을 이루고 있는 것들이 비슷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녀들 모두 누군가에 대한 깊은 그리움이 어떻게 삶을 이루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들의 삶 자체가 똑같이 누군가에 대한 먹먹한 그리움들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마리암의 삶을 이루고 있었던 것은 자신을 버렸던 아버지와 자신이 죽게 만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었고, 라일라의 삶을 이루고 있었던 것은 전쟁으로 인해 잃어버린 가족들, 그리고 전쟁으로 떠나간 사랑하는 사람 타리크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그 그리움의 힘으로 전쟁과 폭력 앞에서 그저 연약하기만 했던 그녀들이 서로를 차가운 고통 속에서 구해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어쩌면 삶에 마침표를 찍게 만들고 싶도록 가혹하게 들이닥치는 고통 속에서도 우리 삶을 끈질기게 이어주는 것 또한 그 그리움의 힘이 아닐까.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리 삶에 남겨 놓은 사랑의 흔적들 속에서 우리는 고통을 이겨나가는 힘을 얻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희망에 관하여

이 책을 읽는 일이 힘들었던 것은 그렇게 우리 삶에 새겨진 그리움에 대해 생각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소설 속에서 그녀들이 존재하는 위치,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무거움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이보다 더 절절하게 말할 수 있을까. 이 책이 말하는 여성의 삶은 아프가니스탄이라는 특정한 지역에서의 여성의 삶을 말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 땅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이 소설은 아프게 전달한다. 아프게 느끼게 한다. 무너지는 꿈, 짓밟히는 삶. 그리고 어머니로서의 희생. 폭력과 전쟁으로 짓밟힌 그녀들의 삶은 여성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절실한 무거움을 폭로하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그 곳뿐만이 아니라 지구의 곳곳에서 아직도 수많은 여성들의 삶이 짓밟히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마리암의 엄마 나나가 말했던 것처럼 소리 없이 내리는 눈들은 여자들의 한숨이 쌓여 내려앉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도 어디에선가 고통스런 여성의 삶이 소리 없이 쌓여 차가운 눈으로 내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단지 훔쳐보기에서 나아가, 내가 소설 속 그녀들과 소통할 수 있었던 것은 같은 여성이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들의 이야기가 지금 나를 살아가게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리움이 어떻게 삶을 이어지게 할 수 있는지를, 삶을 부서지게 한 것들을 딛고 다시 일어서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다시 한 번 절실하게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통으로 인해 비참히 무너지지 않는 삶을 소설 속에서 만나는 일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 될 수 있는지를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통스런 삶 속에서 고통으로 인해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어줄 수 있기에, 비참하고 고통스런 삶 속에서도 누군가에게 따사로운 빛이 되어줄 수 있기에 삶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라일라에게 마리암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리고 역시 마리암에게 라일라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리고 그 순간, 삶은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이 되어 우리를 비추는 것인지도 모른다.


‘희망’이라는 단어는 내게 늘 생경한 단어였다. 누군가가 억지로 만들어낸 말처럼 느껴지던 그 단어. 만약 소설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너무나 고통스럽고 끔찍한 상황에서도 삶이 자신을 철저하게 외면하지만은 않게 하는 그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가령 이 소설 속에서 두 여자에게 닥쳤던 상황들 속에서도 두 여자들을 살아내게 한 그 무엇처럼. 마리암은 슬픈 결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이 꼭 슬픈 결말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것은 가장 행복한 순간 자신의 삶을 끝낼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라일라에게 ‘삶’이라는 가슴 벅찬 선물을 주고, 자신도 삶이 주는 가장 따뜻한 선물을 받고 떠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통스런 상황에서도 삶의 끈을 놓을 수 없게 하는 그 무엇. 비루한 눈물들을 쏟아내는 삶이라 할지라도 우리 삶을 어느 한 순간 찬란하게 만들어주는 그 무엇. 누군가를 이해하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누군가를 용서할 때 느낄 수 있는 그 무엇. 그 무엇이 우리를 살아내게 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희망이라는 단어가 존재한다면, 바로 그러한 것들에 붙여줄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을 읽고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던 것도, 책을 읽는 순간, 순간이 아플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녀들의 삶에 대한 얄팍한 연민의 감정 때문이 아니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이 소설이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순간들을, 찬란한 빛으로 스며드는 그 순간을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 찬란한 빛이 내 삶 속으로 들어오는 순간, 나는 내게 그토록 생경하게만 느껴졌던 단어, ‘희망’이라는 말을 속으로 외치며 조용히 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뜨거워진 마음으로 책장을 덮고 나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 그것은 고통스런 우리의 삶을 살아내게 하는 눈부신 힘의 다른 말일지도 모르겠다고. 그리고 지금 나를 살아있게 하는 바로 그것일지도 모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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