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 제14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은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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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통의 편지처럼 이 책을 받았다. 문학 잡지를 정기 구독하는 이유가 어느 날 우체통에 꽂혀 있는 책을 꺼내드는 기분을 즐기기 때문이라면, 너무 단순한 걸까? 그렇게 기분 좋게 이 책을 만났고, 책을 읽는 내내 누군가가 내게 보내 온 정성스러운 편지를 읽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 읽고 나서 무언가, 답장을 써야 할 것만 같은 느낌에 빠진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오랜만에 리뷰를 쓴다. 마치 편지를 쓰는 듯한 편안한 마음으로. 아주 오랜만에 소설 속에 제대로 빠질 수 있게 해 준 데 대한 고마움을 담은 편지라고 해도 될까.


제목에서 눈치 챌 수 있듯이, 소설을 이끌고 가는 것은 ‘편지’다. 눈 먼 개와 모텔을 전전하며 여행을 다니는 남자, 지훈은 매일 밤, 누군가에게 편지를 쓴다. 지훈이 매일, 부지런히 편지를 쓰는 대상은 그가 여행 중에 만났던 사람들이다. 저마다 다른 빛깔로 살아가는 사람들, 고독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편지’라는 위로를 건넨다. 그래서 지훈의 편지 여행은 단순한 여행이라기보다는 어떤 성스러운 의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지금도 어디에선가 어느 모텔의 방에서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려고 사각사각 연필을 깎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던 건 그만큼 소설의 매력에 빠져들었기 때문일까.


이 소설은 ‘편지’라는 따뜻한 장치로 오래된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아무도 편지하지 않았다’라는 문장이 반복되면서부터 오래된 그리움은 쓸쓸함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집으로 돌아와 비어 있는 우체통을 바라볼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이 서글펐던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는 내내 그런 서글픔을 느껴야 할지도 모른다. 제목에서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지훈에게 편지를 받은 사람들 중 아무도 지훈에게 편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훈의 여행은 길어진다. 여행은 누군가에게 답장이 오는 순간, 끝나므로.


성스러운 의식과도 같은 지훈의 여행에 한 여자 소설가가 끼어들면서 소설은 흥미로워진다. 지하철에서 자신의 소설을 직접 파는 소설가 751.(751은 지훈이 붙여준 숫자다. 지훈은 소설가를 만나기 전, 750명을 만났으므로) 일방통행처럼, 편지 쓰기를 계속하며 여행을 다니는 지훈에게 소설가 751의 존재는 실시간으로 답장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불편한 만남으로 시작되었지만, 이들은 점차 서로 익숙해진다. 여행을 하며 편지를 쓰는 남자와 자신의 소설을 팔러 다니며 소설을 쓰는 여자. 둘 다 자신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들려준다는 공통점이 있다.


편지 쓰는 남자, 지훈이 여행 중에 소설가와 함께 여행을 하게 되는 설정이 꽤나 흥미로웠던 것은 어쩌면 작가는 소설가를 편지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서다. 그러고 보면, 매일 매일 부지런히 연필을 깎아 자신의 이야기를 편지지에 담아내는 지훈의 이미지는 매일 원고지와 씨름하며 혹은 모니터를 눈물겹게 응시하며 글을 써내려가는 소설가의 이미지와 꽤나 비슷하다.


때때로 정말 이런 일이 가능할까, 하는 비현실적인 설정이 눈에 띄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설정을 눈감고 넘길 수밖에 없는 것 또한 이 소설이 가진 매력이다. 반복되는 설정에서 눈치 빠른 독자는 소설의 결말을 짐작할 수 있다. 여러 빛깔의 삶이 지훈의 연필 속에서 되살아나며 결국에는 지훈 자신의 깊숙한 삶까지 편지지 위에 새겨진다. 깊은 밤, 때로는 감상적인 기분에 잠겨 편지를 써 본 사람은 알 것이다. ‘편지’는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음으로써, 자신의 짐을 털어버릴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보냄으로써 자신은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매혹적인 수단이라는 것을. 지훈에게도 편지는 결국 자신만의 집에서 살아내기 위한 방법이고, 쓸쓸한 생을 버텨내기 위한 수단이다.


‘편지’에는 늘 위험이 따른다. 우편배달부였던 지훈이 직접 경험했던 배달 사고처럼, 편지에 는 수신자에게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는 가능성이 숨어 있다. 잘못 배달된 편지, 엉뚱한 이에게 도착하는 편지는 영화 속에서나 소설 속에서 늘 흥미로운 모티프가 되어 왔다. 이 소설도 그러한 모티프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이 소설이 어떤 방식으로 흘러가는지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 소설은 편지 그 자체가 주는 따뜻함에 많이 기대고 있다. 이 소설이 쓸쓸하면서도 정겹게 여겨졌던 이유는 소설을 읽는 중간 중간, 여러 감정과 기억이 얽혀 마음이 따뜻해졌기 때문이다. 어느 날 서랍을 정리하다가 문득 오래된 편지들을 발견할 때 느끼는 감정, 늘 비어있었던 우체통에 어느 날 문득 예쁜 편지가 꽂혀 있을 때 느끼는 감정, 언제였는지 가물가물하지만 누군가에게 정성스럽게 편지를 썼던 기억, 거리에서 빨간 우체통을 발견할 때마다 느끼는 반가움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이 얽히면서 책을 읽는 이의 마음을 따사롭게 만들어 준다.


소설을 읽고 나서, 이 소설을 쓴 작가는 아마도 편지를 많이 써보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정성들여 쓴 편지에 답장을 받았을 때의 기쁨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리뷰를 답장이라고 할 수 있다면, 꼭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당신의 편지 잘 받았다고. 편지를 읽는 동안, 마음이 쓸쓸하면서도 참 따뜻했다고. 앞으로 당신이 보내오는 편지, 열심히 기다리고 있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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