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같은 글쓰기 - 프레데리크 이브 자네와의 대담
아니 에르노.프레데리크 이브 자네 지음, 최애영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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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처음 아니 에르노의 글쓰기를 접했을 때 당황했었던 경험이 있다. 오직 자신의 체험만을 쓴다는 소설가라니. 모든 글에는 작가의 자전적 경험이 녹아있게 마련이라고 생각했으면서도, 그리고 어떤 소설을 읽을 때 나도 모르게 작가의 자전적 경험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나도 모르게 품으면서도, 나는 그러한 글쓰기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어떤 당돌함을 느꼈던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나 자신에게는 가능하지 않은 일을 하는 작가에 대한 존경이었을 수도 있다. 자신의 말하기 힘든 부분까지 글로써 표현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나는 감히 상상하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칼 같은 글쓰기>는 아니 에르노의 글쓰기와 그러한 글쓰기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에 대한 대담집이다. 평론가이자 작가인 프레데리크 이브 자네는 이메일을 통해 점진적으로 아니 에르노의 글쓰기에 접근해 나간다.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두 개의 글쓰기 방식이 일기쓰기와 계획된 텍스트라 말한다. 계획된 텍스트는 우리가 그녀의 자전적 이야기로 알고 있는 글들이다. 그녀는 그것들이 자신이 실제로 경험한 것에 토대를 두고 있지만 자전적 이야기에 우리가 흔히 부여하는 이미지, ‘작가 자신의 이야기’라는 어떤 고정된 이미지에 우려를 표시한다. 그녀는 그러한 글들이 자신에 대한 발견이 아니라 보다 일반화되고 보편적인 것에 대한 분석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나는 그녀의 대답들을 읽어 내려가면서 내가 그동안 그녀의 글들에 대해 품은 오해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동안 그녀의 글들을 단순히 자신의 삶을 폭로하듯 써내려간 일기로 치부해 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세상 모든 사람들처럼 한 가지 독특한 방법으로 사물을 경험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보편적인 방법으로 그리고 싶다.” p.57


그녀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글쓰기는 자신의 경험과 생각들을 타인 속에 용해시키는 것이다. 거리두기를 통해 객관화시키거나 가장 정확한 단어와 문장을 찾아냄으로써 그녀는 그러한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열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듯이 보인다. 글쓰기의 가장 강렬한 기쁨을 자신이 쓴 글을 읽는 누군가가 바로 자신의 이야기를 읽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녀. 결국 그녀의 글쓰기는 (흔히 그녀에 관해 알고 있는 많은 독자들이 하는 오해처럼)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은밀한 '기록'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모습에 대한 치열한 '탐구'인 셈이다.


수치심을 불러 일으켰던 출신계층, 그리고 교직 생활을 통한 계층의 이동, 낙태라는 여성적 경험 같은 일련의 일들을 글 속에 담아내면서 그녀는 자신의 글들이 단순히 그녀 개인의 내밀한 것이 될 수 없음을 말한다. 글쓰기는 그녀가 겪었던 그러한 삶의 리얼리티를 드러내는 작업이 되었고 그것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성격을 자연스럽게 표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출신계급을 변절한 데서 오는 죄책감, 여자라는 조건에 주어지는 사회적 무게는 그녀에게 글을 쓰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그 무엇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녀의 글들이 언론과 비평가들을 아주 불편하게 한다는 사실을 얼핏 알고 있었지만 이번 대담집을 통해 그들(대부분 남성)이 그녀에게 들이댄 잣대가 얼마나 폭력적이고 이중적인지를 새삼 알게 되었다. 언론들과 비평가들은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소재와 글쓰기의 방식에 ‘여성’이라는 꼬리표를 들이댐으로써 그녀의 말대로 “아주 부당한 이중적 비방”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그녀가 토로하는 것처럼 이런 일들이 남성 작가라면 가능했을까? 문학의 장 내부에서 일어나는 성 투쟁에 대한 그녀의 언급을 그냥 공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이유다.   


“다른 영역과 마찬가지로 문학의 장 내부에서도 성 투쟁이 일어나고 있으며, 나는 일명 ‘여성적 글쓰기’나 여성들의 글쓰기가 가지고 있는 대담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문학에 접근하는 현상에 대한 남성들의 무의식적 전략이자 그동안 있어온 수많은 전략의 연장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자신들이 ‘여성적’이라는 형용사의 수식을 받지 않는 그 자체로서의 ‘문학’을 장악함으로써 여성들을 배제시키려는 것이죠.” p.137


나는 그들의 대화가 깊어질수록(물론 한 사람은 전적으로 질문만을 하고 있지만) 내가 오해하고 있었던 아니 에르노의 글쓰기와 글쓰기의 방식에 대해 점점 더 깊이 빠져 들어갔다는 것을 말해야겠다. “삶과 글쓰기라는 두 차원을 동시에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그녀. “글쓰기 이전에는 현장에 없던 것을 발견하는 것, 바로 거기에 글쓰기의 희열이 있다.”고 말하는 그녀. 위험하지만 그만둘 수 없는 어떤 일종의 사명처럼 가능한 더 멀리 나아가야 하는 임무를 짊어진 것처럼 글쓰기를 생각한다는 그녀. 그녀는 ‘글을 쓰고’ 그렇게 쓰여진 ‘책들을 살고’ 있다. “오직 삶만이 있는 삶, 그 삶은 충분하지 않기”에.

 

칼 같은 글쓰기. 그녀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녀의 글들은 칼 같다. 자신의 삶에서 가차 없이 끄집어내는 그 무엇들에 나는 자꾸만 아프다고 느낀다. 나는 그 칼이 그녀에게로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로 향하고 있다는 생각에 아픈 것이다. 내 삶 속의 어떤 조건들을 그녀가 주저 없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그녀의 소설들이 닿아 있는 어떤 진실들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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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 생각의나무 우리소설 10
윤대녕 지음 / 생각의나무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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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소설을 읽는 내내 시큼한 바다 내음을 맡았던 것 같다.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과거의 시간과 마주치기도 했고 늘 내 안에 웅크리고 있던 그것과 마주치기도 했다. 결코 만만치 않았던 독서였다. 때로는 한 권의 책에서 너무나 많은 것들을, 너무나 무거운 것들을 얻게 되는 법이다.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과거야말로 얼마나 무거운가.

작가 윤대녕이 말하는 대로 “돌아보고 싶지 않은 것을 돌아보는 것이야말로 소설의 몫”이라면, 소설가의 글쓰기란 과거의 어두운 심연으로부터 들어올린 뜨거운 자기 성찰은 아닐지. 마치 뜨거운 물 위를 걷는 것 같았다는 그의 말을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다. 건너뛰고 싶었던 과거의 시간들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이 얼마나 힘겨운 일이었을지. 생뚱맞다고 생각했던 호랑이의 정체가 실은 내 삶의 어느 길목에도 버티고 있을 거란 사실이 나는 갑자기 두려워졌던 것도 같다. 영빈을 따라 제주도로 내려가 그의 낚시 경험담 속에 푹 빠져들었으면서도, 그리고 정작 호랑이가 나타났을 때 덤덤했으면서도 책장을 다 덮고 나서 나는 문득 내 삶이 불안하게 느껴져 왔던 것이다. 내 안에 웅크리고 있는 호랑이 한 마리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불안. 언제 어디서 닥칠지 알 수 없는, 삶 전체를 파멸시킬 수도 있을 호랑이 한 마리에 대한 두려움. 내 생을 기본적으로 이루고 있는 것이 사실은 불안의 덩어리들이었다. 어디엔가 숨어있을 호랑이 한 마리였다. 영빈이 우연히 만난 한국계 일본작가 사기사와 메구무가 소설 속에서 말하고 있듯이, “사람은 누구나 불안한 법이고 불안은 누구한테나 운명적으로 주어진 조건의 일부”이니까.


윤대녕은 내면의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영빈과 해연을 통해 지나온 시간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가 제주도에서 낚으려고 했던 것들은 지나갔지만 결코 지나가지 않은 것들, 그냥 덮어두고 싶지만 덮어둘 수 없는 것들이다. 영빈은 호랑이를 잡으러 내려간 제주도에서 지독하게 낚시에 몰두한다. 죽음을 넘나드는 경험을 하면서도 지독하게 낚시에 매달리는 그의 모습 속에서 치유되지 못한 상처의 흔적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끊임없이 낚아 올리는 물고기들의 세밀한 묘사는 지극히 현실적이지만 그가 있는 제주의 풍경은 낯설기만 하다. 그가 끊임없이 경험하는 죽음의 이미지나 비현실적으로 큰 몸체를 갖고 있는 물고기나 어느 순간 그를 위협하는 호랑이의 이미지는 그가 존재하는 제주의 공간을 비현실적인 곳으로 만든다. 바다의 근원성에 기대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대로, 영빈에게 제주도는 생의 근원을 경험하는 곳, 영원과 맞닿아 있는 어떤 근원성을 체험하는 공간이다. 죽음의 이미지는 그러한 영원을 상기시킨다. 그는 그렇게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지난 시간들의 상처를 치유해나간다. 수많은 물고기들을 낚으며, 그리고 마침내는 호랑이를 만나며.


영빈에게 다양한 물고기들의 이름과 요리법에 대해 알려주는 해연 역시 내면의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인물이다. 집 안 가득한 물건들은 그녀 내면의 텅 빈 공간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듯 하다. 마음의 공허를 눈에 보이는 것들로나마 채워야 할 것 같은 어떤 급박한 불안이 그녀의 삶을 드리우고 있다. 그녀의 상처는 어머니의 외도로 붕괴된 가족이다. 어머니의 외도로 끊임없이 낚시를 하며 방황하던 아버지처럼 호랑이를 잡기 위해 제주도로 내려간 영빈의 모습 속에서 그녀는 화해하지 못한 채 흘러가버린 젊은 날의 그 혼란스러웠던 시간들과 만났을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잡았던 물고기들에 대해 영빈에게 설명해 주면서 영빈과 마찬가지로 지독하게 고독한 상처의 시간으로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영빈과 해연을 연결시켜 주는 것은 누구나 가슴 속에 담아두고 있을 상처들이다. 치료받지 못한 시간들이다. 영빈의 제주도행은 해연에게도 비슷한 의미의 고독을 제공한다. 그들은 전화선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니까. 그리고 어쩌면 그들이 처음으로 만났던 성수대교 붕괴 현장에서부터 그들은 연결되기 시작했으니까. 그 연결선은 아마도 상처의 시간들에 대한 공유일 것이다. 삶이 무너졌던 그 순간 그들은 함께 있었다.


영빈과 해연 사이에 등장하는 히데코(혹은 유미코)라는 여자 또한 상처의 시간을, 그 아픈 느낌을 전달해주는 인물이다. 그녀 삶의 방황은 자신에게 문신을 새겨준 남자친구의 자살에서부터 시작된다. 한국계 일본인이었던 작가 사기사와 메구무에 대한 묘한 경쟁의식과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방황하던 그녀는 한국과 일본 어느 곳에서도 정착하지 못한다. 그녀는 영빈과 해연의 삶 속에서 서성거리다 결국은 그 방황에 혼란스러운 마침표를 찍는다. 그녀를 죽인 것은 상처들이었다. 죽음은 상처의 치유되지 못한 흉터마냥 소설 곳곳에 드러나 있다. 해연의 아버지와 영빈의 형, 히데코의 남자친구, 히데코, 그리고 실존인물인 한국계 일본작가 사기사와 메구무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죽음은 시대적인 폭력과 인간 내면의 근원적인 불안에 내몰린 이들이 선택하는 극한이다. 그들의 죽음은 편안한 휴식의 이미지가 아니라 견뎌내지 못한, 아픈 상처들이 터져버린 듯한 느낌의 죽음들이다. 그 죽음의 이미지 속에서 자꾸만 마음이 아파져 오는 걸 어쩔 수 없다.


소설 곳곳에 흩어져 있던 죽음의 이미지들 속에서 나는 소설가의 글쓰기가 그것과 닮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지나간 시간들 속으로 되돌아가 거기에서 다시 화해와 용서의 시간으로 나아가기까지 얼마나 많은 죽음들을 경험해야 했을까. 화해와 용서로 나아가는 설정이 너무나 상징적이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것이 삶을 극한으로 내몰았던 폭력과 불안으로부터 삶을 지켜내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생의 의지임은 부정할 수가 없다. 한 개인에게 가해지는 시대적인 폭력이나 삶의 근원적 불안으로부터 생을 지켜내기 위한 최소한의 방패막 같은 것 말이다. 굳이 용서와 화해라는 거창한 이름을 갖다 붙이지 않더라도.


책장을 덮고 나서, 나는 문득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 바닷가, 어딘가 웅크리고 있을 호랑이 한 마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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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27 0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ALINE 2005-10-27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고마워요^^
윤대녕의 소설을 제대로 읽은 건 아마 이번이 처음일 거예요. 책을 들고는 손에서 놓지 못할 정도로 빠져들었어요. 읽고 나서 한동안은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구요.^^;;
님, 잘 지내셨죠?^^
 
자유의 감옥 올 에이지 클래식
미하엘 엔데 지음, 이병서 옮김 / 보물창고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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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지금 내가 있는 이 곳이 아니라 어느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서 또 다른 나의 현실이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잠깐의 꿈에서나 가끔씩 떠오르는 알 수 없는 이미지들과 기억의 파편들은 지금 내가 존재하고 있는 현실 외에 또 다른 현실이 존재할지도 생각을 부추기곤 한다.


기억의 문 어딘가를 열면 끝없이 펼쳐진, 여기와는 다른 무수한 현실의 공간과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상상. 그런 위험하면서도 은밀한 상상 속으로 끝없이 파고들게 만드는 책. 또 다른 현실을 꿈꾸게 만드는 그런 공간에서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기분으로 파고들어오는 책. 자유의 감옥을 읽으면서 나는 마치 내가 한번도 꾸지 못한 꿈의 어딘가를, 내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공간의 어딘가를 걷고 있는 것처럼 황홀했고, 또 황홀했다. 그리고 현실과 가상현실에 관한 끔찍한 경험을 맛보게 해준 영화 매트릭스를 만났을 때처럼 조금 충격적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8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이 소설집은 독일문학의 마지막 낭만주의자라고 불리는 작가, 미하일 엔데가 꿈꾸는 또 다른 현실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이 소설집은 현실에서는 존재하기 힘들법한 공간에 관한 이야기인 <보로메오 콜미의 통로>, <교외의 집>, <조금 작지만 괜찮아>같은 단편들과 끊임없이 또 다른 현실을 찾아가는 주인공을 다룬 <긴 여행의 목표>, <길잡이의 전설>, <여행가 막스 무토의 비망록>, 그리고 자유의지에 관한 철학적 성찰이 돋보이는 단편 <자유의 감옥>,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분간할 수 없는, 현실과 꿈이 뒤범벅되는 듯한 세계를 보여주는 <미스라임의 동굴> 이렇게 8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의 의식이 존재하는 현실과 다른 어느 시간과 공간 속에서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를 또 다른 현실을 보여주기 위해 미하일 엔데는 그만의 환상적인 공간을 창조한다. 그가 만드는 환상은 끝에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은, 원근의 법칙이 무시되는 통로(보로메오 콜미의 통로)이기도 했다가 들어서는 순간 나오는 마치 한 장의 종이 같은, 그 자체로 공허를 상징하는  집(교외의 집)이기도 하고, 겨우 몇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조그만 자동차 안에 담겨 있는 커다란 집(조금 작지만 괜찮아)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람을 흡수해서 사람과 한 몸이 되는 건물(여행가 막스 무토의 비망록)이기도 하다.


그러한 공간에 대한 환상이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에게 바친다고 되어 있는 <보로메오 콜미의 통로>다. 이 단편은 원근 법칙이 무시되는, 끝이 없을 것 같은 마법과도 같은 공간에 관한 이야기이다. 통로 안으로 들어갈수록 걷고 있는 사람도 점점 작아지는, 그래서 걸음의 속도도 그에 비례하여 줄어들 수밖에 없는, 그리하여 그 끝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한지조차 알 수 없는 미궁의 공간. 그 끝을 가늠하기 힘든 공간을 통해 미하일 엔데는 마치 끝없이 무한한 갈래로 이어지는 시간에 대해 이야기한 보르헤스와의 교차점을 찾은 듯이 보인다. 보르헤스의 시간과 미하일 엔데의 공간이 만나는 그 지점, 무한한 시간과 공간이 끝없이 갈라지고 만나는 그 순간, 바로 그 순간의 어느 지점에서 우리의 현실이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현실은 그렇게 시간과 공간의 무한한 갈라짐과 새로운 생성 속의 어느 한 지점에서 이루어지고 있을 것이다.


무한히 이어지며 나의 선택을 기다리는 시간과 공간들. 내가 그 시간과 공간을 선택함으로써 다른 시간과 공간은 버려지고 선택된 시간과 공간은 내가 예측하거나 혹은 예측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나를 데려가며 끊임없는 확장 속에 나의 현실을 구성한다. 그 무수한 현실들 중 단 하나의 시간과 공간이 나의 선택 속에 이루어지고 그 하나의 선택이 내 미래의 시간과 공간을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의 무한한 갈라짐 속 어딘가에 우리가 존재하는 현실이 있다면 그 시간과 공간이 조금만 변한다면 우리가 처한 현실도 달라지지 않을까. 시간과 공간의 좌표가 변경되는 바로 그 곳에 우리가 꿈꾸는 또 다른 현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의문으로 끊임없는 방랑을 멈추지 않는 <긴 여행의 목표>의 시릴이나 <길잡이의 전설>의 인디카비아는 지금 마주하고 있는 현실에 정착하지 못하고 또 다른 현실만을 그리워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의미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히어로니무스에서 인디카비아로 이어지는 수많은 이름들은 그가 꿈꾸었던 현실의 또 다른 이름일 것이다. 어쩌면 그들이 끊임없이 찾고자 한 현실은 자신이 선택하지 못한 것에 대한 끝없는 회한에 다름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한 선택의 문제는 <자유의 감옥>이라는 단편에서 잘 나타난다. 111개의 문이 있는 곳. 그러나 그 문 뒤에 숨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그 중 한 가지 문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의 묘사를 통해 인간이 선택이라는 자유 앞에 얼마나 절망적으로 놓여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자유의 감옥>은 이 소설집의 표제작이 될 만큼 가장 돋보이는 단편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선택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선택의 상황마저도 사실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의 일부라는 사실. 우리는 시간이 완전한 무로 수렴될 때까지 끊임없는 선택을 계속해야 하며 그 선택의 책임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있다, 라는 엄연한 사실을 인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자유의 감옥’은 무한한 선택의 상황에 절망적으로 놓인 우리의 삶에 다름 아니다. 우리 모두 자유라는 감옥에 갇힌 것이다.


자유라는 감옥에 놓인 우리의 삶은 오늘도 수많은 시간과 공간, 그렇게 무수한 선택의 가능성들 위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 무수한 선택의 한 지점에 우리의 현실이 존재한다. 그 수많은 가능성들로 인해 우리는 그 현실의 너머 존재할 것만 같은 또 다른 현실을 꿈꾸는 건지도 모른다. 미하일 엔데의 소설을 읽는 것은 현실의 너머 존재할 것 같은 또 다른 공간과 시간 속에서 우리의 삶이 자리 잡고 있는 그 헤아릴 수 없는, 무한한 경우의 수를 끊임없이 꿈꾸고 상상하고 느끼는 경험과도 같다. 


그래서 우리의 불분명한 감각과 기억이 인지하지 못하는 공간에 관한 은밀한 체험과도 같은 이야기들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우리가 판타지라고 부르는 그의 소설 속에서 마주치는 환상적인 공간들은 어쩌면 이제 더 이상 환상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현실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현실의 미로, 그 피할 수 없는 현실의 통로 속에 이제 또 다시 한 발을 내딛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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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출
김형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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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사랑으로 인한 상실감이 사랑으로 치유될 수 있을까. 사랑이라 믿었던 것들이 예리한 칼날로 다가와 생을 위협할 때, 그런 위기의 순간에도 사랑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사랑은 한 사람의 생을 처참히 무너뜨리는 칼날을 가지고 있지만 또다시 그 상처를 아물게 하는 보드라운 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는 소설 <외출>에서 다시금 확인한다.


<외출>은 상처입은 사랑이 치유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김형경은 사랑의 무너짐과 사랑의 치유력을 그녀만의 섬세한 언어로 표현해내고 있다. 그녀는 사랑이 부서지고 상처입고 또다시 아물고 뜨거워지는 그 과정들 속으로 천천히, 천천히 우리를 불러들인다. 그 섬세하고 미세한 삶의 감각들, 그 뜨거움과 차가움의 감각들 속으로.


배우자의 사고소식을 듣고 달려온 두 사람 인수와 서영은 수술실 앞에서 처음으로 만난다. 세상에서 가장 불안하고 초조한 얼굴로. 그러나 그러한 불안과 걱정도 잠시. 그들의 소지품을 통해 인수와 서영은 각자의 배우자가 불륜의 관계였음을 확인하게 되면서 처음 사고소식을 접했을 때 들었던 걱정과 충격은 치명적인 좌절과 상실감으로 변해간다. 인수는 상실감을 이기지 못해 혼수상태에 빠져있는 그의 아내 수진에게 분노를 터뜨린다. “너, 차라리 죽어버리지 그랬니?”


그 치명적인 상실감은 서영도 마찬가지다. 무난하게 결혼 생활을 유지해왔다고 생각해온 서영에게 남편의 외도는 언젠가 경험해보았던 암흑같은 정전과도 같다. 암전. 그 막막한 어둠같은 느낌. 견고하게 지어진 콘크리트가 한순간 먼지로 변해버리는 듯한 느낌. 기대어 왔던 그 든든한 믿음이 일순간 와르르 무너지는 듯한 그런 느낌. 더 이상의 삶도, 믿음도 무의미할 것만 같은 그러한 어둠 속으로 그녀는 서서히 내려앉는다. 그녀는 더 이상의 생활도, 더 이상의 사랑도 없을 것 같은 그런 곳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잠을 자고 싶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가 가장 고통스럽고 상처입은 순간 만난다. 결코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 남자, 혹은 여자의 배우자로서. 그들의 관계는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관계이지만 그들의 만남에는 피할 수 없는 사랑이 예정되어 있기에 더더욱 운명적인 만남이 될 수밖에 없다. 서로가 서로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누구보다 서로의 아픔을 더 잘 어루만져줄 수 있으니까.


그들은 그렇게 그저 주저앉고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시간을 서로에게 기대어 견뎌내게 된다. 쉽게 잠들 수도 없고 울음도 나오지 않았던 그 시간들 속에서 놓아버렸던 생활의 끈들을 다시 되찾기 시작한다. 같이 밥을 먹고, 같이 걷고, 같이 술을 마시면서. 그리고 그 위안과 위로는 같이 장을 보고, 같이 영화를 보고, 같이 잠드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것이 금기라는 것을 머릿속으로는 느끼면서도 마음의 타오르는 불같은 뜨거움을 어찌할 수가 없다.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따뜻하게 안아주고 같이 사진을 찍으면서 그들의 남편과 아내가 했던 대로 똑같이 그들은 서로에게 빠져든다. 내가 미쳤나봐, 라고 서영은 생각하지만 인수의 따뜻한 손길을 뿌리칠 수가 없다. 사랑으로 인한 상실감은 사랑으로밖에 치유될 수 없음을 그들 몸은, 그리고 마음은 그들의 머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밑으로, 밑으로 가라앉던 그 수직의 무너짐 속에서 서로의 손을 잡고 상승하는 부드러운 곡선 같은 것이라는 것을 그들의 몸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으로 인한 상실감이 사랑으로 점차 치유되어가는 과정을 묘사하는 김형경의 내밀한 문장들은 섬세한 내면과 천천히 번져오는 또다른 사랑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특히 빛을 발하고 있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의 감각적인 묘사는 더더욱 그렇다. 그들은 노란 빛으로 서로를 애무하고, 점점 붉은 색의 열정으로 향해가고, 이윽고 보랏빛의 정점에 다다른다. 그리고 휴식같은 초록색을 지나 현실감을 상기시켜주는 흰 빛의 침대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사랑은 무수한 빛들과 색깔들의 덩어리이고 또한 그것을 느끼는 그들의 감각이다.


김형경은 사랑의 언어는 바로 빛의 언어임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빛에 민감한 인수를 통해 서영이 새롭게 느끼는 미세한 빛의 가닥들처럼, 사랑도 그렇게 미세한 빛의 감각이라고, 서로의 지친 그림자를 거둬주는, 깊고 따뜻하고 미세한 감각들이라고 말이다. 어둠의 끝에서 맞이하는 환한 빛 한 줄기가 무너질 것 같은 삶을 지탱할 수 있게 해주는 것처럼 사랑도 바로 그러한 존재의 무너짐을 버티게 해주는 빛과도 같은 것임을, 소설은 말해준다. 그들의 사랑은 서로의 삶 끝자락을 붙잡는, 여리지만 따사로운 빛이다.


그 미세한 색깔과 빛 속에서 그들은 사랑을 나누고 서로를 바라본다. 그들이 서로를 쓰다듬고 그들 내면의 깊은 상처를 어루만지는 그 순간, 그들 삶은 무채색의 짙은 고통에서 벗어나 드디어 고유한 색깔을 되찾는다. 그렇게 사랑은 상처 입은 내면의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어 가장 내밀한 상처까지 어루만져주는 빛이 되어 짙은 고통의 어둠 속에서 그들 자신의 색깔을 다시 찾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저 무너질 것만 같았던 삶을 버틸 수 있는 것이다. 그들 삶을 무너뜨린 사랑을 이제는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들 곁에 온 그 사랑으로써. 그것은 어쩌면 사랑이라기보다 인간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편안한 위로이며 휴식이다. 서로가 서로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것을 위로할 때 삶은 가장 아름다운 색깔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색칠하는 건지도 모른다. 


또다시 봄이 오고 마치 모든 것이 꿈이었던 것 같은 그 시간들 위로 새하얀 눈이 조용히 내려앉는다. 그들 앞에 쌓이는 새하얀 눈은 이제 그들의 오래된 색깔들, 내면의 고통스런 어둠을 지우려는 듯 하얗게, 하얗게 쌓여간다. 흰 색은 이제 더 이상 현실의 참혹함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게 만들어주는 색깔이 아니라 어둠위에 부드럽게 내려앉아 현실의 고통을 보듬어주는, 눈부신 고요를 안겨다주는 색깔이다. 그 참혹했던 고통의 순간을 견뎌낸 이들에게 선사해 주는 가장 부드러운 색깔의 위로이며 안식인 것이다.


차가운 칼날같은 시간을 견뎌낸 이들에게 가장 눈부신 고요를 안겨다주는 봄눈. 그 봄눈의 편안하고 눈부신 위안이 아팠던 상처의 시간들을 조용히 어루만지고 더욱 따뜻하고 찬란한 봄을 싹틔워 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서영이 공원에서 만난 350년 된 나무와 5천년 된 암각화, 그리고 5억 3천만년 된 동굴을 보며 느꼈을 그 아련한 감정들 속에서 우주, 그 무한의 시간 속에서 한 순간의 빛으로 사라질 우리의 생 가운데서 사랑은 가장 눈부시고 아름다운 빛을 뿜어내는 단 한 순간의 빛이라는 것을 감히 믿어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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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져 2005-09-14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할 말 없습니다. 님의 감성과 소설의 감성이 조화를 이룬 리뷰에요.
이 책을 읽어야지 하면서 아직도 조금 미뤄두고 있습니다.
읽고 싶은 책을, 가장 맛난 사과를 조금 나중에 꺼내드는 것처럼요.
추천을 한 열번 쯤 하고 싶어요. 색을 따라 사랑에 빠지는 과정, 그것은 환영같기도 하네요. 그래서 아마, 사랑에 빠지나봐요. 그 색깔 때문에.

ALINE 2005-09-15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영화보다 더 감각적이고 섬세하단 생각을 했었어요. 화면으로 보여주지 못하는 그런 섬세한 느낌들과 표현하기 힘든 그런 아릿함...오히려 영화는 그런 면에서 조금 섭섭했구요.^^
님...추천 고마워요^^
 
오 자히르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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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 탐닉, 광기, 그리고 에너지라는 단어를 이 책의 소개글에서 보고 단숨에 책을 주문했다. 무언가 헛헛한 요즘의 내 일상에 이 책이 어떤 변화라도 가져다 주지 않을까 하는 일종의 기대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유난히 책이 읽히지 않았던 요즘의 상태에도 불구하고, 꽤 두꺼운 책을 한숨에 읽어내려 갔다. 어쩌면 ‘책’은 내 삶의 가장 강력한 자히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했던 것도 같다.


소설 속의 ‘나’는 잘나가는 작가다. 어느 정도의 부와 명성과 사랑하는 아내. 모자랄 것 없는 그의 삶이 어느 날 문득 아내의 실종으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가 아내의 실종에 관한 미스테리를 풀어가는 과정은 그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사랑과 문학,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자히르에 관한 새로운 발견의 과정이기도 하다. 


# 자히르

'자히르'는 광기 어린 편집증, 어떤 대상에 대한 집념, 집착, 미치도록 빠져드는 상태,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에너지원등을 가리키는 아랍어라고 한다. 이 소설에서 “나”의 자히르는 그의 아내 에스테르이다. 글이 써지지 않는 무의미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그가 소설을 쓸 수 있도록 만들었던 그녀. 그의 자히르는 그녀가 사라졌을 때 그 의미를 발하기 시작한다. 그는 그의 자히르를 다시 찾아야만 한다. 무의미한 시간 속에서 그를 구원해 주었던 그 힘이 그에게는 필요하니까. 무언가에 미치지 않고서 살아갈 수 없다면 자히르는 삶의 근원적 동력이다. 이 소설은 그리하여 삶의 근원적 에너지를 찾아 떠나는 남자의 이야기다. 그것은 자신의 가장 깊숙한 곳을 들여다 보는 여행이기도 할 것이고, 때로는 감히 들여다볼 수 없어서 그저 외면했던 부분들을 조용히 들여다보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자히르,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그 삶의 뜨거운 에너지에 대해 생각했다. 


# 사랑

이 소설은 사랑과 사랑의 에너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랑의 에너지는 인간의 삶에서 가장 강력한 자히르일 터. 사랑은 어느 날 삶의 강력한 에너지가 되었다가 또 어느 날 불현듯 시들시들해진다. 언제나 내 삶의 강력한 에너지원이 되어 줄 것 같던 그 사랑이 어느 순간 그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 책에서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 모험의 필요성에 대해, 꿈을 위해 투쟁하는 기쁨에 대해 이야기해. 그런데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누구지? 자기가 쓴 글을 읽지 않는 사람이야. 사랑을 편안하고 익숙한 것으로, 모험을 쓸데없이 위험한 짓을 저지르는 것으로, 즐거움을 강제적 의무로 착각하는 사람이지. 내가 하는 말에 귀기울이던, 내가 결혼한 남자는 어디 있는 거야?”


남자가 사라진 그의 아내를 찾아 떠나는 것은 삶의 열정적인 에너지원이었던 그 사랑이 찢어져버린 순간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그는 정확하게 그 시간들을 바라보려 애쓴다. 그리고 서로에게 차가워져 버린 순간, 무감각해져버린 순간을 기억해내는 순간 그는 열정적인 에너지로서의 사랑에 대해 다시금 인식하게 된다. 그는 이제 드디어 아내를 만날 준비가 된 것이다. 찢어진 시간에 대해 인식할 때 비로소 그 시간들을 꿰맬 수도 있을 테니까.  


# 글쓰기

그는 작가다. 그는 글을 쓰게 만드는 힘에 대해 이야기한다. 작가는 그저 받아쓰기를 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예전에 작가들의 전기에서 “책은 저절로 씌어진다. 작가는 받아쓰는 사람일 뿐이다”이라는 구절을 읽었을 때, 나는 그게 자신들의 작업을 그럴싸하게 보이기 위한 작가들의 수사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 말이 절대적으로 진실이라는 것을 안다. 파도가 왜 그를 그가 다다르고자 꿈꾸었던 저 섬이 아닌 이 섬으로 데려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글쓰기의 고독. 완전히 미치지 않고서는 쓸 수 없는 그 무엇. 어쩌면 글을 쓰게 만드는 것도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그 무엇과 비슷한 힘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그 강력한 힘. 그 강력한 힘에 빠져 한 권의 책이 탄생될 때 그 책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혼과 맞닿아 있는 또 다른 영혼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뭔가 되돌려주기를, 너의 노력이 인정받기를, 사람들이 네 재능을 발견하기를, 사람들이 네 사랑을 이해하기를 바라지 마라. 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하지만 그 이유가 자존심이나 무능이나 교만이어서는 안 된다. 네가 그 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하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이젠 네 삶과는 맞지 않기 때문이다. 문을 닫아라. 다른 음악을 틀어라. 집을 청소하고, 먼지를 떨어내라. 지금까지의 너이기를 그만두라. 그리고 너 자신이 돼라.” 


책은 공감 가는 구절들로 가득하다. 열정적인 그의 문장들에 빠져들었지만 책을 읽고 난 후 나는 아직까지 무언가 허전하다. 어떤 것의 도움을 받아서가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이 변화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 때문일까. 내 삶을 변화시킬 에너지. 뜨겁게, 좀 더 뜨겁게 삶에 빠져들 수 있는 그런 에너지. 그건 바로 내 자신이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것. 내 삶의 자히르를 찾는 건 순전히 나의 몫이어야 한다는 것. 그러한 공감만으로도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조금은 뜨거워져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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