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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 ㅣ 생각의나무 우리소설 10
윤대녕 지음 / 생각의나무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소설을 읽는 내내 시큼한 바다 내음을 맡았던 것 같다.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과거의 시간과 마주치기도 했고 늘 내 안에 웅크리고 있던 그것과 마주치기도 했다. 결코 만만치 않았던 독서였다. 때로는 한 권의 책에서 너무나 많은 것들을, 너무나 무거운 것들을 얻게 되는 법이다.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과거야말로 얼마나 무거운가.
작가 윤대녕이 말하는 대로 “돌아보고 싶지 않은 것을 돌아보는 것이야말로 소설의 몫”이라면, 소설가의 글쓰기란 과거의 어두운 심연으로부터 들어올린 뜨거운 자기 성찰은 아닐지. 마치 뜨거운 물 위를 걷는 것 같았다는 그의 말을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다. 건너뛰고 싶었던 과거의 시간들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이 얼마나 힘겨운 일이었을지. 생뚱맞다고 생각했던 호랑이의 정체가 실은 내 삶의 어느 길목에도 버티고 있을 거란 사실이 나는 갑자기 두려워졌던 것도 같다. 영빈을 따라 제주도로 내려가 그의 낚시 경험담 속에 푹 빠져들었으면서도, 그리고 정작 호랑이가 나타났을 때 덤덤했으면서도 책장을 다 덮고 나서 나는 문득 내 삶이 불안하게 느껴져 왔던 것이다. 내 안에 웅크리고 있는 호랑이 한 마리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불안. 언제 어디서 닥칠지 알 수 없는, 삶 전체를 파멸시킬 수도 있을 호랑이 한 마리에 대한 두려움. 내 생을 기본적으로 이루고 있는 것이 사실은 불안의 덩어리들이었다. 어디엔가 숨어있을 호랑이 한 마리였다. 영빈이 우연히 만난 한국계 일본작가 사기사와 메구무가 소설 속에서 말하고 있듯이, “사람은 누구나 불안한 법이고 불안은 누구한테나 운명적으로 주어진 조건의 일부”이니까.
윤대녕은 내면의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영빈과 해연을 통해 지나온 시간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가 제주도에서 낚으려고 했던 것들은 지나갔지만 결코 지나가지 않은 것들, 그냥 덮어두고 싶지만 덮어둘 수 없는 것들이다. 영빈은 호랑이를 잡으러 내려간 제주도에서 지독하게 낚시에 몰두한다. 죽음을 넘나드는 경험을 하면서도 지독하게 낚시에 매달리는 그의 모습 속에서 치유되지 못한 상처의 흔적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끊임없이 낚아 올리는 물고기들의 세밀한 묘사는 지극히 현실적이지만 그가 있는 제주의 풍경은 낯설기만 하다. 그가 끊임없이 경험하는 죽음의 이미지나 비현실적으로 큰 몸체를 갖고 있는 물고기나 어느 순간 그를 위협하는 호랑이의 이미지는 그가 존재하는 제주의 공간을 비현실적인 곳으로 만든다. 바다의 근원성에 기대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대로, 영빈에게 제주도는 생의 근원을 경험하는 곳, 영원과 맞닿아 있는 어떤 근원성을 체험하는 공간이다. 죽음의 이미지는 그러한 영원을 상기시킨다. 그는 그렇게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지난 시간들의 상처를 치유해나간다. 수많은 물고기들을 낚으며, 그리고 마침내는 호랑이를 만나며.
영빈에게 다양한 물고기들의 이름과 요리법에 대해 알려주는 해연 역시 내면의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인물이다. 집 안 가득한 물건들은 그녀 내면의 텅 빈 공간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듯 하다. 마음의 공허를 눈에 보이는 것들로나마 채워야 할 것 같은 어떤 급박한 불안이 그녀의 삶을 드리우고 있다. 그녀의 상처는 어머니의 외도로 붕괴된 가족이다. 어머니의 외도로 끊임없이 낚시를 하며 방황하던 아버지처럼 호랑이를 잡기 위해 제주도로 내려간 영빈의 모습 속에서 그녀는 화해하지 못한 채 흘러가버린 젊은 날의 그 혼란스러웠던 시간들과 만났을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잡았던 물고기들에 대해 영빈에게 설명해 주면서 영빈과 마찬가지로 지독하게 고독한 상처의 시간으로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영빈과 해연을 연결시켜 주는 것은 누구나 가슴 속에 담아두고 있을 상처들이다. 치료받지 못한 시간들이다. 영빈의 제주도행은 해연에게도 비슷한 의미의 고독을 제공한다. 그들은 전화선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니까. 그리고 어쩌면 그들이 처음으로 만났던 성수대교 붕괴 현장에서부터 그들은 연결되기 시작했으니까. 그 연결선은 아마도 상처의 시간들에 대한 공유일 것이다. 삶이 무너졌던 그 순간 그들은 함께 있었다.
영빈과 해연 사이에 등장하는 히데코(혹은 유미코)라는 여자 또한 상처의 시간을, 그 아픈 느낌을 전달해주는 인물이다. 그녀 삶의 방황은 자신에게 문신을 새겨준 남자친구의 자살에서부터 시작된다. 한국계 일본인이었던 작가 사기사와 메구무에 대한 묘한 경쟁의식과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방황하던 그녀는 한국과 일본 어느 곳에서도 정착하지 못한다. 그녀는 영빈과 해연의 삶 속에서 서성거리다 결국은 그 방황에 혼란스러운 마침표를 찍는다. 그녀를 죽인 것은 상처들이었다. 죽음은 상처의 치유되지 못한 흉터마냥 소설 곳곳에 드러나 있다. 해연의 아버지와 영빈의 형, 히데코의 남자친구, 히데코, 그리고 실존인물인 한국계 일본작가 사기사와 메구무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죽음은 시대적인 폭력과 인간 내면의 근원적인 불안에 내몰린 이들이 선택하는 극한이다. 그들의 죽음은 편안한 휴식의 이미지가 아니라 견뎌내지 못한, 아픈 상처들이 터져버린 듯한 느낌의 죽음들이다. 그 죽음의 이미지 속에서 자꾸만 마음이 아파져 오는 걸 어쩔 수 없다.
소설 곳곳에 흩어져 있던 죽음의 이미지들 속에서 나는 소설가의 글쓰기가 그것과 닮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지나간 시간들 속으로 되돌아가 거기에서 다시 화해와 용서의 시간으로 나아가기까지 얼마나 많은 죽음들을 경험해야 했을까. 화해와 용서로 나아가는 설정이 너무나 상징적이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것이 삶을 극한으로 내몰았던 폭력과 불안으로부터 삶을 지켜내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생의 의지임은 부정할 수가 없다. 한 개인에게 가해지는 시대적인 폭력이나 삶의 근원적 불안으로부터 생을 지켜내기 위한 최소한의 방패막 같은 것 말이다. 굳이 용서와 화해라는 거창한 이름을 갖다 붙이지 않더라도.
책장을 덮고 나서, 나는 문득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 바닷가, 어딘가 웅크리고 있을 호랑이 한 마리도.